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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26권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20.10.28|조회수24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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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26권

행장

 

국가의 일에 목숨을 바친 증 공조 참의(증공조참의) 송공(송공) 행장 을사년


공은 휘가 빈(빈)이고 자가 사신(사신)인데, 청주(청주) 사람이다. 5대조 사성(사성) 휘 승은(승은)이 처음으로 영남의 김해(금해)에 거주하였고, 고조는 참군(참군) 숙형(숙형)인데 훌륭한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탁영(탁영) 김일손(금일손)과 서로 친한 벗이었다. 증조는 생원 유선(유선)이고, 조부는 절제사(절제사) 경(경)이다. 선고(선고)는 절제사 창(창)인데, 진사 김태석(금태석)의 딸인 분성 김씨(분성금씨)에게 장가들어 가정(가정) 임인년(1542, 중종 37)에 김해부(금해부) 서쪽의 하계리(하계리)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기특하고 뛰어난 자질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세 때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문리(문리)가 갑자기 통하였고, 간혹 지은 시구(시구) 중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앞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적에 장사꾼 몇 사람이 사인(사인)의 차림을 한 채 강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공을 부르되 반말로 너라고 하였으므로 공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사꾼들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너도 와서 먹어라.” 하자 공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행동을 보니 장사꾼들이 분명한데 장사꾼으로서 감히 사인에게 너라고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리고 그물을 걷어 올리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하찮게 보는 것은 필시 이것 때문일 것이다.” 하고 그물을 태워버렸다. 이에 그들 중 연장자 한 사람이 나와 절하며 말하기를, “동자의 기상이 매우 비범하니 필시 귀인이 될 것입니다.” 하고, 사과하며 떠나갔다. 그리고 10여 세 때 우슬암(우슬암)에서 독서하였는데, 나무꾼 아이가 까마귀를 잡았기에 공이 그 아이에게 말하기를, “이 새는 어미에게 먹이를 먹여 은혜를 보답하는 새로서 옛 사람이 ‘새 중의 증삼(증참)이다.’라고 하였으니,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까마귀를 달라고 하여 놓아주었더니, 듣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효성과 우애의 마음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소학)》의 도리에 따라 온화한 모습으로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가 6명인데 공은 둘째로서 형에게 공경하고 아우들을 사랑하여 화락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장성해서는 효제(효제)를 행하는 여가에 과거 공부를 익혀 향시(향시)에 다섯 번 합격하였으나 예부(례부)의 복시(복시)에 연달아 낙방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문장의 명성이 알려졌다. 공은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도 끝내 쓰임을 받지 못하자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스스로 학문과 행실을 수양하였다. 성품이 강개(강개)하여 절의를 지녔고 일을 당했을 때 용단을 내려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가 와서 질문하였다. 공이 웅천(웅천)의 수령과 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갔었는데, 그 때 약탈을 일삼는 왜적(왜적)들이 그 고을에 쳐들어왔다. 본관 수령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허허실실(허허실실)은 병가(병가)의 실정인 것이다. 이들이 한때 약탈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함부로 인심을 소요스럽게 하지 않아야 될 것이니, 성문(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왜적들도 의심하고 물러갈 것이다.”고 하자, 수령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방어하는 데 있어서 계책이 없었기에 공의 말대로 하였더니, 적들이 과연 의심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일로 인하여 공이 또 지략이 훌륭하다고 알려졌다.
만력(만력) 임진년(1592)은 바로 우리 선조대왕(선조대왕)께서 재위한 지 25년이 되는 해인데, 이 해 5월에 왜적이 대대적으로 출동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13일에 상륙하여 부산(부산)을 함락시키자 첨사(첨사) 정발(정발)이 전사하였고, 15일에 동래(동래)를 함락시키자 부사(부사) 송상현(송상현)이 전사하였다. 김해(금해)는 동래와 가까운 곳인데, 본관 수령 서예원(서례원)은 본시 겁이 많아 큰 일을 할 수 없는 자여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그는 공이 온 고을의 명망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공은 집에서 변란의 소식을 들었는데, 장자 정백(정백)이 팔성사(팔성사)에 가서 독서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받지 못한 선비지만 평생의 뜻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지금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본관 수령과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네가 같이 따라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아버지는 충성에 목숨을 바치고 아들은 효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너는 급히 집에 돌아가 너의 어머니 및 아우와 함께 멀리 피란하여 선대(선대)의 혈맥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정백이 울면서 소매를 잡고 함께 따르려고 하자, 공이 끝내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과 효도는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기가 어려운 것이거늘 나는 충성하고 너는 효도하는 것이 어찌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소매를 자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떠나갔다. 서예원이 공을 만나 보고 매우 기뻐하여 중군(중군)의 직임을 맡기며 말하기를,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인데 문관(문관), 무관(무관)의 직임을 따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군(군)은 사류(사류)이지만 이 고을의 명망이 군보다 더한 사람이 없으니, 이 직임을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공이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직임을 받았다. 그리고 장졸들을 소집시키고 맹세하기를,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은 것은 신자(신자)의 분수이다. 지금 왜구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저들을 맞이하여 항복하겠는가? 아니면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겠는가? 더구나 이 김해부(금해부)는 바로 적의 침입로에 있어서 요충지이니, 그야말로 당(당) 나라 때 장순(장순)이 수양(휴양)을 사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김해부를 사수하지 못하면 영남이 적에게 함락되고 영남이 함락되면 국가가 망하게 된다. 죽기는 똑같은 것이니, 차라리 국가에 목숨바쳐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살아서는 수치를 받고 죽어서는 자손들에게 부끄러운 덕을 남겨주겠는가.”
하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같은 고을의 벗인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 등을 발탁하여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이인지(리린지)에게 군량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사수의 계책을 하였다. 며칠 후 적들이 와서 성을 포위하였는데, 공이 밤중에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의 수급(수급) 수백을 베자 적이 도망쳤으므로 죽도(죽도)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적선(적선)이 바다를 덮으며 왔으므로 공은 성에 들어와 성을 보수하고 지켰다. 이 때 밖으로 구원병이 끊겼고 안으로 군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적과 밤낮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서예원은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북문(북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항언(항언)하기를,

“성주(성주)께서 나라의 많은 은총을 받아 한 지방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나라의 은총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도리어 거취(거취)를 경솔히 함으로써 인심이 흩어지게 한다면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자, 서예원이 떠나가지 못했다. 19일 밤에 적들이 들녘의 보리를 베어다 성 아래에 쌓아 참호(참호)를 메우고 쳐들어왔으므로 그 세력을 당하지 못하여 성은 끝내 함락되고 서예원은 북문으로 도망쳐 진주성(진주성)으로 갔으며, 주장(주장)이 없어지자 사졸들은 흩어졌다. 이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홀로 싸웠는데, 적들의 칼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화살이 집중되었다. 적들이 투항하라고 소리치자 공이 분노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남은 군졸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싸움을 그만두지 않다가 적의 창에 맞아 죽었는데, 바로 이달 20일이었다. 이 일을 부하 양업손(량업손)이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전하였으니, 아, 장렬하여라. 공의 충렬(충렬)이 끝내 조정에 알려져 난이 끝난 뒤에 공에게 공조 참의(공조참의)를 추증하였다.
공의 배위는 안동(안동) 권윤(권륜)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정백(정백)은 진사이다. 고상한 품행을 지녀 광해군 때에 북당(북당)에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동계(동계) 정온(정온)이 지은 만사(만사)에 “북당의 거센 세력에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라, 남쪽 지방에 한 사람만이 있었네.[북풍심불변 남국일인존]”라고 한 구절이 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제현(제현), 제성(제성), 제문(제문), 제원(제원)이고 딸은 정희점(정희점)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정남(정남)은 2녀를 두었는데 곽홍전(곽홍전), 곽홍곤(곽홍곤)에게 출가하였고 형의 아들 제성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참봉 조원해(조원해), 참봉 안후개(안후개)에게 출가 하였다.
공은 전사(전사)하였기에 의관(의관)조차도 수습하여 장사 지내지 못했으므로 분묘가 없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해마다 선영(선영)의 곁에서 제사를 지낸다. 배위는 묘가 모지(모지)에 있다고 한다. 117년이 지난 무자년(1708, 숙종 34)에, 임진년에 순절(순절)한 충무공(충무공) 이순신(리순신)의 후손인 부사(부사) 이봉상(리봉상)이 주지(주지)를 열람하다가 공의 사적(사적)을 보고 개연(개연)히 감탄하여 사림(사림)들에게 권고하여 충렬사(충렬사)란 사당을 건립하고 공을 제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바로 초(초) 나라의 굴원(굴원)이 국상(국상)을 지은 뜻이다. 내가 국상을 읽어보건대 그 가사에,

방패를 잡고 무소가죽의 갑옷을 입었음이여 / 조오과혜피서갑
양쪽 수레가 마주치자 칼을 잡고 싸우네 / 차착곡혜단병접
라고 한 것은 양쪽이 서로 무기를 잡고 접전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수레의 두 바퀴를 묻고 네 마리 말을 메어둔 채 / 매량륜혜집사마
북채를 잡고서 북을 두드려 울리네 / 원옥포혜격명고
라고 한 것은 자신을 잊고서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고,

긴 칼을 차고 진에서 생산되는 활을 잡았음이여 / 대장검혜협진궁
머리와 몸이 둘로 나뉘어지더라도 마음은 떨리지 않네 / 수수리혜심불징
라고 한 것은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 것이고,

몸은 이미 죽었지만 신명은 영특하여라 / 신기사혜신이령
혼백이 강하여 귀신의 우두머리가 되었네 / 혼백의혜위귀웅
라고 한 것은 아름다운 혼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초 나라 사람은 국가의 수치를 중하게 여기고 국난(국난)에 달려가는 것이 이처럼 절실하였다. 그러므로 초 나라가 종말에 ‘세 집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진(진)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왜적이 한창 쳐들어 올 때의 상황은 지난날 삼포(삼포) 및 오도(오도)에 일시적으로 약탈한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고, 온 나라의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는 기세야말로 실로 천지를 뒤덮어 버릴 듯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태평 시대의 안일한 끝에 훈련시키지 않은 군졸들과 견고하지 못한 성(성)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때 주장(주장)이 도망쳐 인심이 이미 해이해졌고 고을의 문무관들이 모두 쥐처럼 숨어 버렸는데, 공은 백면 서생(백면서생)으로서 피범벅이 된 채 눈물을 삼키며 나라에 몸을 바쳐 죽으면서도 후회할 줄 몰랐으니, 그야말로 공의 충정은 일월처럼 빛난다고 이를 만하다. 이 때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도 공을 따라 죽었고, 이후 충의(충의)의 선비들이 잇따라 일어나 적들이 끝내 패망하여 돌아갔으니, 이것은 나라에 목숨을 바친 공의 영혼의 공렬인 것이다.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관직을 추증하여 표창하는 일이 있었고 후임 수령이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있었으니 아, 훌륭하도다. 그런데 영종조(영종조) 때 각도(각도)의 서원(서원) 가운데 함부로 설치된 것은 설치 연도를 따져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이 때 공의 사당도 철폐 대상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한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금상(금상) 계묘년(1783, 정조 7)에 본읍(본읍)의 사론(사론)이 다시 일어나 도백(도백) 및 어사(어사)에게 정장(정상)하여 끝내 다시 건립하였다. 공의 후손인 태증(태증)이 진주 목사(진주목사) 이규년(리규년)의 장문(상문)을 가지고 와서 다시 나에게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당시의 사실을 널리 찾아 내어 대략을 서술함으로써 김해(금해) 사림들에게 수정을 받아 사관(사관)이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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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랑 증 사헌부 지평 파록 황공 행장(선교랑증사헌부지평파록황공행상) 병오년

처사 불우헌 정공 행장(처사불우헌정공행상) 갑진년

공의 휘는 상점(상점)이고, 자는 중여(중여)이며, 본관은 수양(수양)인데, 고려 때 시중(시중) 휘 숙(숙)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역(역)이란 분은 태조(태조)와 태종(태종)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좌찬성)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도공(정도공)인데, 바로 공의 11대조이다. 4대를 지나 진사로서 이조 참판(리조참판)에 추증된 휘 희검(희검)이란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백씨(백씨)인 허암 선생(허암선생) 희량(희량)이란 분과 함께 수학하였다. 연산군(연산군)의 정치가 혼란한 때를 당하여 허암이 은둔하자, 참판공도 과거(과거)를 그만두고 시(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면서 호를 계양어은(계양어은)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이 그의 절의를 훌륭하게 여겼다. 또 3대를 지나 호가 농포(농포)이고 휘가 문부(문부)인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문무(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선조(선조)의 임진왜란 때 북평사(북평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토적)을 주벌하고 왜적을 몰아냈으니, 그 일이 국사(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관직은 병조 참판이었는데, 인조(인조) 갑자년(1624, 인조 2)에 시안(시안)에 연루되어 무함을 받아 화를 당했다. 뒤에 비록 신원(신원)되어 이상(이상 좌찬성(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충의)’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슬퍼하고 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고려 때부터 농포공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사이에 대대로 관직을 계승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이름난 성씨이다. 증조의 휘는 대륭(대륭)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으며, 가화(가화)를 당한 이후로 애통한 마음을 지닌 채 백씨(백씨) 진사공(진사공) 모(모)와 함께 남쪽으로 진양(진양)에 와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손들이 그 고장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 조부의 휘는 유인(유인)이다. 선고의 휘는 구(구)이고 호는 노정헌(로정헌)인데, 지조와 기개를 지녔고 문장을 숭상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남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증, 조, 부 3대가 모두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은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이다. 선비(선비) 청주한씨(청주한씨)는 통덕랑(통덕랑) 석운(석운)의 딸이자 현감(현감) 시중(시중)의 손녀로서 부덕(부덕)을 지닌 현숙한 분인데, 명릉(명릉 숙종의 능호) 계유년(1693, 숙종 19) 11월 17일에 고을의 동쪽에 있는 용암리(룡암리)의 사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외우기도 잘 하였는데, 7, 8세 때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구를 많이 지었다. 11세 때에 동지(동지)에 대해서 지은 시에,

북두 자루가 자방(자방)에 돌아오자 / 두병초회임계간
하늘의 양기가 땅 속에서 자라나네 / 천양일기지중생
하니, 노정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치를 연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씨(정씨)의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세 때에 경서(경서), 사서(사서)를 모두 통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기이한 병에 걸려 근 10년이 지나서야 병이 약간 회복되었다. 그런데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더해진다’는 경계에 유의하여 과거(과거)를 그만두었으며, 단지 독서하고 수양하는 데에만 힘쓰면서 번화한 세상의 명리(명리)와 부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데는 모두 예절대로 하였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노정공이 관찰사(관찰사)에게 미움을 받아 체포되어 달성(달성)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공은 애통한 심정이 너무도 깊어 종신토록 달성 땅을 밟지 않았다. 먼 곳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는데 차마 오래 떨어져 있지 못하여 자주 찾아가 보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며, 서제(서제)도 사랑하여 어루만지기를 친아우처럼 하였다.
예법으로 가정을 다스렸으므로 집안이 엄숙하여 내외의 분별과 장유(장유)의 질서가 엄격하였고, 여러 자손들을 옳은 도리로써 가르치고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기에 모두가 가르침을 따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을에서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집안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람을 접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화평하게 대하고 진심을 환히 내보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과 벗들이 걸핏하면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접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모두 샀다. 그리고 이 때 당론(당론)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각자 편견을 가졌지만 공은 모두 의리에 따라 절충하여 말하고 자신의 호오(호악)에 따라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편들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과오를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리고 곤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경우에는 인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였다. 취할 만한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은 데려다 기르기도 하고 지도하여 성취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전에 외가댁의 눈먼 종이 먼 길에 얻어먹으면서 찾아왔기에 공이 가엾게 여기고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어 그로 하여금 점을 쳐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어린 종이 실명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에게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을 구제하는 인자한 마음은 천시하는 사람도 버리지 않았으니, 그것이 바로 군자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공은 본성이 청렴 결백하여 손으로는 돈을 만지지 않고 입으로는 재물을 말하지 아니하면서 늘 《맹자(맹자)》의 “불의(불의)의 재물은 하찮은 물건도 갖지 않는다.”는 뜻을 지녔다. 함안(함안)에 있는 큰 사찰(사찰)은 바로 사자(사자)들이 학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그 절의 중들을 통영(통영)에 역부(역부)로 소속시키려 하자 중들이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공이 통제사(통제사)와 친밀하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한 번 말해주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그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에 중들이 공의 주선을 은혜롭게 여겨 1백 꿰미의 돈을 가져와 사례하였는데, 공은 웃으며 되돌려 보냈으며, 이후로 여러 아들에게 다시 그 절에 가서 공부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말을 사서 수년 동안 기르며 타다가 가족이 다시 본전을 받고 판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알고 가족에게 말하기를, “수년 동안 타고 다니다가 어떻게 본전을 받고 팔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말을 산 사람을 뒤쫓아가 다시 값을 깎아 차액을 돌려주자 그 사람은 놀라 감사해하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 일을 정도에 지나친 처사라고 하니, 공이 이르기를, “당신들은 비록 정도에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에 불안하다.” 하였다.
공이 평소에 좋아한 것은 단지 서적(서적)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서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서 간직하기도 하고 빌려서 베껴 놓기도 하였으므로 장서(장서)가 수천 권이 되었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서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빌려오지 않으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처가댁은 내가 혐의를 피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노정공이 본시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서 조송설(조송설 조맹부(조맹부)의 호)의 서첩(서첩)을 빌려와 미쳐 돌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서첩의 주인도 자손이 없이 죽었다. 이에 공은 그에게 촌수가 먼 일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서첩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가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한호(한호)의 서첩을 매제(매제)인 송군(송군)이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주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는데, 송군이 죽자 공이 제문에 그 뜻을 말하고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은 병을 요양하며 한가롭게 지낼 때에도 매우 아픈 때가 아니면 서책을 하루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과 담론할 적에는 고금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고 경서(경서), 사서(사서)의 내용을 논하였으며, 심지어 백가(백가), 패사(패사), 잡설(잡설)까지도 모두 알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경우에는 말이 진지하여 끊이지 않았으므로, 문학의 선비들 가운데 따르며 교유하는 사람이 많아 방문 밖에는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그리고 과거(과거)의 문장에는 종사하지 않았지만 박람하여 쌓은 학식이 많았으므로 시문(시문)을 지으면 문리가 정세하였으니, 학사(학사) 오원(오원)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오원은 바로 공의 외척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공은 또 인륜에 성실하여 처신이 엄정하였으니, 어렸을 때 정자(정자)가 주공숙(주공숙)에게 “짐승보다도 못하다.”라고 책망한 대목을 읽고는 그 말을 종신토록 마음에 지녔으며 아내 이외의 여색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마치 처자처럼 몸을 단속하였다. 그의 청백하고 고상한 지조와 화평하고 인자한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이었지만 모두 독서하여 실천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비록 학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실의 고상하기란 당대의 학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흡사하게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이 널리 대중을 사랑했고 교유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음에 서로 허여한 친구는 몇 사람에 불과하였는데, 우리 선군(선군)이 그러한 친구 중의 한 분이시다.
공의 병이 위독할 때 자손들이 곁에 둘러앉아 울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내가 계유년에 태어났는데, 오늘이 있을 것을 알았다. 사람의 생사는 일정한 이치이니 비통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며 전혀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 정침(정침)에서 고종(고종)하였는데 바로 정해년(1767, 영조 4) 4월 7일이었고, 향년은 75세였다. 부음(부음)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남주(남주)의 고사(고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고, 장사 지내는 날에는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왔으며, 그 해 7월 어느 갑일(갑일)에 영봉산(령봉산) 묘좌(묘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유고(유고) 2권이 있고, 또 시송(시송) 2편이 있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걱정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고금의 시율(시률)을 암기하면서 중간에 자신의 논평을 가하였고 만년에 또 추가하여 완성하였으니, 전후 각 1편이 모두 외우고 기억하여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아들들이 그 시송을 가져와 본문(본문)과 대조해 본 결과 한 자도 틀린 곳이 없었으니, 공의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다.
배위 안동권씨(안동권씨)는 통덕랑(통덕랑) 수창(수창)의 딸이자 문관 목사[문목사] 우형(우형)의 손녀인데, 현숙하고 화순하여 시가에 들어와 도덕에 위배되는 일이 없었다. 시부모를 섬기고 부군을 공경하며 자녀를 가르치고 비복을 거느리는 거조가 모두 법도에 맞았고, 인자한 은택이 이웃 사람들에게 미쳤으므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공의 가정은 본시 풍요(풍요)로웠는데 중년에 재산이 탕진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맡아 애써 모으고 빈틈없이 꾸렸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하였고 공도 생활의 경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훌륭한 인물이 된 데에는 부인의 내조가 한 몫을 했다.”고 하였다. 부인은 갑술년(1694, 숙종 20) 12월 28일에 태어나 병자년(1756, 영조 32) 1월 27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 영봉산(령봉산) 을좌(을좌)의 자리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는데 병신년(1776,영조52) 2월에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고을의 서쪽에 있는 마동(마동)의 경좌(경좌)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단(단)은 일찍 죽었고, 둘째 육(육)은 학문과 덕행이 있어 사우(사우)들의 추대를 받았는데 공이 죽고 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상하여 상복을 벗자마자 죽었다. 셋째는 훈(훈)이고, 넷째 근(근)은 숙부 상림(상림)의 양자로 갔고, 다섯째는 기(垍)이다. 장녀는 박인혁(박인혁)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아들은 전(전)이며, 차녀는 강간(강간)에게 출가하였고, 일곱째 아들은 식(식)이다.
단은 분성(분성) 허구(허구)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현의(현의)를 낳았다. 육은 한산(한산) 이맹화(리맹화)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의(진의), 탁의(탁의), 강의(강의), 찬의(찬의)이고 사위는 박지원(박지원)이다. 훈은 진양(진양) 하한장(하한장)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명의(명의), 굉의(구의), 황의(황의)이고 사위는 권무중(권무중)이며, 측실(측실)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박우상(박우상)이고 두 아들은 어리다. 근은 초취가 함양(함양) 여선함(려선함)의 딸인데 아들을 두지 못했고, 재취는 완산(완산) 최보천(최보천)의 딸로 1녀를 두었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탁의를 양자로 삼았는데 일찍 죽었고, 서자(서자), 서녀(서녀)가 두 명씩인데 아들은 약의(약의), 경의(경의)이고 사위는 이단중(리단중), 손은역(손은역)이다. 기는 함안(함안) 조희팽(조희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한 명은 감의(감의)이고 한 명은 어리며, 사위는 권경(권경), 하석규(하석규)이다. 박인혁은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천(형천)이고 사위는 이종운(리종운), 권태중(권태중)이며 나머지 아들과 딸은 아직 어리고 출가하지 못했다. 전은 진양(진양) 강필주(강필주)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의 아들 황의를 양자로 삼았다. 강간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현(사현)이고 사위는 윤석보(윤석보)이며, 두 딸은 어리다. 식은 진양 하덕원(하덕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의(련의)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친손, 외손, 증손, 현손이 80여 명이다.
나는 늘 기억나는데, 어렸을 때 보니 노정공(로정공)과 우리 조부님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고 공과 우리 선군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다. 서로 만났을 때 웃는 모습이 화기가 애애하였고 성의가 서로 미더워 어느 분이 주인이고 어느 분이 손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넷째 아들 근(근)이 가장(가상)을 지어서 그의 아우 기(垍)에게 주고는 천리의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이르게 하기를,

“우리 집의 일이 바로 공의 집의 일이니, 공께서 우리 양가의 교분을 생각하신다면 선친의 덕행을 기록하는 글은 공이 아니고 누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근, 기씨 형제와 나는 선대의 세의(세의)를 대대로 지키며 사귀어왔으므로 서로의 마음은 천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환히 통하는 사이이니, 당대에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기필코 나에게 행장의 글을 받으려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비록 몽매하고 고루하여 문장을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80세의 나이에 재주가 줄고 생각이 사라져서 실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리상으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기에 이상과 같이 삼가 서술하였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추곡 김공 행장(자헌대부지중추부사추곡금공행상) 갑진년


공은 휘가 정현(정현)이고 자가 중길(중길)이며 호가 추곡(추곡) 또는 송림(송림)인데, 경주인(경주인)으로서 신라의 국성(국성)이다. 시조는 인관(인관)인데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자 태사(태자태사)였으며, 몇 대를 지나 휘가 자수(자수)이고 호가 상촌(상촌)인 분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형조 판서였는데 충효의 절의가 있어서 혁명의 시기에 끝내 순절하였다. 이 분의 손자 휘 영유(영유)는 좌리 공신(좌리공신)에 참여하여 대사헌(대사헌)을 지냈고 시호는 공평(공평)이다. 공평공의 손자 휘 세필(세필)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문간)이다. 이 분이 바로 기묘 명현(기묘명현)의 한 분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십청헌 선생(십청헌선생)이라 부르는 분이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구()는 사직서 참봉(사직서참봉)을 지냈는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선경(선경)은 군자감 판관(군자감판관)을 지냈는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고(선고) 휘 순(순)은 생원(생원)인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선비) 청주한씨(청주한씨)는 부호군(부호군) 휘 광윤(광윤)의 따님인데, 만력(만력) 신묘년(1591, 선조 24) 7월 2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여 약관에도 이르기 전의 나이에 명성이 크게 퍼졌다. 계축년에 증광 생원시(증광생원시)에 합격했는데, 그 때는 광해군(광해군)의 정치가 혼란하여 이륜(이륜)이 두절된 시기였다. 공의 외숙인 한옥(한옥)이란 사람은 바로 북당(북당) 한찬남(한찬남)의 재종질로서 한찬남과는 마음과 힘을 같이하는 자였는데 공을 자기들의 당으로 끌어들이려고 마음먹고 편지를 보내어 공을 유혹하였다. 이에 공이 당시(당시)의 ‘석양이 매우 아름답지만 단지 황혼이 가까울 뿐이네.[석양무한호 지시근황혼]’란 구절을 인용하여 답하고 나서 모습을 감추고 문을 닫은 채 과장(과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반정(인조반정)이 있은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 과거에 응시하여 경오년(1630, 인조 8)의 별시 문과(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시속에 따르고 적당히 처신함으로써 청현직(청현직)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교서(교서)를 받들고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부모가 별세한 이후에는 더욱더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서 통례원 통례(통례원통례)로서 병을 핑계대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친지들과 기로계(기로계)를 맺었으니, 백향산(백향산)의 고사를 모방한 것이었다. 풍기 군수(풍기군수) 정증(정䎖)은 문장이 뛰어난 선비인데 그가 지은 서문에, “송림 김 선생(송림금선생)은 군자다운 사람이고 대부(대부) 중의 어진 분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세 조정[삼조]에 벼슬하였고 훌륭한 재능을 조금 발휘하자 다섯 고을에 구비(구비 대대로 칭송하는 말)가 전해졌네.”라고 하였으니, 공이 당시에 추중(추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그 후 우로(우로)의 은전(은전)으로 다시 중추부(중추부)에 들어가 첨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한성부 우윤(한성부우윤)을 지냈다. 숙종 을묘년(1675, 숙종 1)에 허미수 선생(허미수선생)이 전조(전조)의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도헌(도헌)에 의망(의망)하였으나 정사의 격식에 위배되어 시행되지 못했고, 지중추부사에 승진되었다.
이 해 8월 27일에 별세하였으니, 수는 85세였다. 부음(부음)을 아뢰자 조정에서 전례대로 예관(례관)을 보내어 치제(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제문)에,

경은 순수하고 성실한 성품에 / 유경순각지성
정직하고 결백한 자질을 지녔도다 / 정백기질
지난날 광해군의 혼조 때에 / 낭제혼조
시대가 혼탁한 것을 슬퍼하여 / 통시혼탁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고 / 념절환달
과장으로부터 종적을 끊었어라 / 적사과장
황혼이 가깝다는 한 구절은 / 황혼일어
외숙의 간담을 떨어지게 하였네 / 담파위양
천지가 다시 새로워지자 / 천지중신
금방에 이름을 드러냈어라 / 금방명천
겸손히 낭서의 지위에 있으면서 / 저수랑서
청현직을 바라지 않았네 / 불요화현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 오읍분죽
정치가 한결같이 청명하였어라 / 정청유일
돌아올 때에는 주머니가 텅 비었고 / 귀탁소연
집안에는 한두 섬의 양식도 없어라 / 가무담석
시골에서 지낼 계책을 지니고서 / 교비계존
만년에 홍로의 관직을 사직하였네 / 만사홍려
노년에 한가롭게 지내면서 / 우한모경
수양하며 스스로 즐겼어라 / 이양자오
나이가 많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 / 년고덕소
여러 차례 은수를 더하였도다 / 천가은수
잇따라 세 품계를 승진하여 / 련초삼급
추부의 높은 지위에 올랐네 / 위준추부
내가 즉위한 때에 이르러 / 체여사복
특별한 은전을 거듭 내렸어라 / 별전자신
경의 지위에는 아직 오르지 못했는데 / 경월미승
수성의 빛이 갑자기 사라졌어라 / 수성거륜
작위는 덕에 걸맞지 않았고 / 작불칭덕
우로의 은총도 내리지 못했네 / 은격우로
기로의 신하를 생각하니 / 면회기구
마음이 더욱더 슬프구려 / 심언증도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베푸니 / 견관설제
예전의 예법을 따르는 것일 뿐 / 식준고례
영령이 모르지 않는다면 / 령여불매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 / 흠차보궤
하였다. 모월일(모월일)에 광주(광주) 추령(추령)의 임좌(임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배위 정부인(정부인) 나주정씨(라주정씨)는 감찰(감찰) 언규(언규)의 딸로서 부덕(부덕)을 지녀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태어나 신유년(1681, 숙종 7) 2월 7일에 별세하였으니 수는 89세인데,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방(방)이고, 둘째는 만(만)이고, 셋째는 관(관)이며, 딸은 김영희(금영희)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측실)이 3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황(황)이고, 둘째는 온(온)인데 문과(문과)에 급제하여 음성 현감(음성현감)을 지냈고, 셋째는 영(영)인데 진사(진사)이며, 사위는 황덕창(황덕창), 김윤휘(금윤휘), 첨지(첨지) 이우창(리우창)이다. 방은 3남을 두었는데 재기(재기), 재후(재후), 재풍(재풍)이고, 만과 관은 모두 자손이 없었다. 증손, 현손이 매우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가정에 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을 가졌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 결백한 지조를 지키기에 힘썼으며, 혼란한 조정에 종적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성명(성명)의 시대에도 진출하려고 하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되 깨끗하여 누가 없었다. 집에는 사면의 벽만 있고 한두 섬의 곡식도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하게 여겼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는 기상이 청백하고 고결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분의 고절(고절)은 나약한 자를 서게 하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장(가상)이 유실되고 문헌(문헌)도 고증할 수 없어서 언행의 사실과 관직의 경력을 상고할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숙종께서 하사한 제문이 남아 있어 공의 평생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이 별세한 지 60년이 지나서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 충주(충주)의 말마촌(말마촌)에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그런데 뒤에 조정에서 별도의 사당을 금하는 금령을 내려 철거되었으니, 사림(사림)이 애석하게 여겼다.

소남 선생 윤공 행장(소남선생윤공행상) 을사년


선생은 성이 윤씨(윤씨)요, 휘가 동규(동규)이며, 자가 유장(유장)인데, 파평(파평) 사람으로서 고려 초기에 태사(태사) 신달(신달)의 후손이자 문숙공(문숙공) 관(관)의 24대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광묘(광묘 세조)의 국구(국구)인 파평부원군(파평부원군) 번(번)과 정릉(정릉 중종)의 국구인 파평부원군 지임(지임)이란 분이 더욱 현달한 분인데, 우리 나라의 대성(대성)을 말할 경우에는 파평윤씨를 으뜸으로 꼽는다. 증조는 충의위(충의위) 휘 명겸(명겸)이고, 조부는 통덕랑(통덕랑) 휘 성수(성수)이며, 선고는 생원(생원) 휘 취망(취망)이다. 생원공이 현감인 전주(전주) 이찬(리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후사를 두지 못했고, 통덕랑 덕수(덕수) 이성(리성)의 딸을 후취로 맞이하여 명릉(명릉) 을해년(1695, 숙종 21) 11월 25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릴 때 뛰어나게 총명하여 범상하지 않았다.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주흥사(주흥사)의 《천자문(천자문)》을 배웠는데, 세로나 가로로 외워도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9세 때에 선고를 여의었는데, 이 부인(리부인)이 올바른 도리로 가르치고 길러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문리(문리)가 갑자기 진취되었다. 일찍이 종조부의 집에서 《퇴계집(퇴계집)》을 보고 매우 좋아하여 여러 번 읽어보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자 종조부가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는 원질(원질)을 주었으니, 학문의 기초가 어렸을 때에 벌써 정해졌던 것이다. 성호(성호) 이 선생(리선생)은 우리 나라에 학문의 연원이 끊긴 끝에 태어나 경기 지방에서 도(도)를 강론하였는데, 선생이 제일 먼저 그분에게 학문을 배웠으니, 바로 선생의 나이가 17세 때인 신묘년(1711, 숙종 37)이었다. 이 선생이 선생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한결같이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성(경성)의 용산방(룡산방)에서 소성(소성)의 도남촌(도남촌)으로 이주해서 날마다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세간에 다시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선생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조모 한씨(한씨) 및 선비(선비)를 모시면서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의 아우 동진(동진)이 재주와 학식을 지녀 또한 성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슬퍼하였다. 한번은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우가 살아 있다면 이 도가 매우 외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아우의 인물도 또한 알 만한 것이다. 그리고 거상(거상)할 적에는 한결같이 예제(례제)를 준행하였으니, 선비의 상사와 조모 한 부인의 승중상(승중상) 때에 3개월 동안 죽을 먹었고 3년 동안 거친 밥에 수질(수질), 요질(요질)을 벗지 아니하였는데 시종 태만하지 않았으므로 군자들이 거상을 잘했다고 말하였다.
가정 형편은 본시 빈한하였는데 만년에는 더욱더 몰락하여 몇 칸의 초가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했고 10여 명의 식구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남에게 가난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말을 할 경우에는 이르기를,

“이러한 것이 천명(천명)인데, 모면하려고 한다면 천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했으며, 분수에 따라 고생스럽게 지내면서도 태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큰 아들의 상사 때 염(렴)을 하는 데는 묵은 솜을 사용하였고 멱악(멱악 시체의 얼굴을 덮는 천)으로는 검은 천을 썼으며, 대렴(대렴)에는 포교(포교)를 하지 않았고 상여는 말로 끌었으며, 명정(명정)을 요[인]로 깔았고 공포(공포)는 관(관)이 빈궁(빈궁)에서 나오자 사용하지 않았으며, 혼거(혼차)는 치워버렸고 삽(삽)은 식장(식장)에 세워 유황(유황)에다 매달았다. 이러한 것은 검소한 집에서 소략하게 치르는 예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 예의 본의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를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더욱더 신중하였다. 교하(교하)와 와동(와동)은 바로 두 분 부원군의 분묘가 있고 여러 대의 선영이 있는 곳인데, 선생이 여러 종족들과 시제(시제) 지내는 예를 강론해 정하고 해마다 자신이 직접 그 곳에 가서 제전(제전)을 올리고 이튿날에는 종친회를 가짐으로써 화목을 돈독히 하는 정의를 펼쳤고, 이러한 것으로써 영원히 일정한 규례로 삼았다.
만년에는 용산(룡산)의 옛 마을에 다시 살았는데, 마을 앞에 큰 강이 흘러 강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에 선생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여 ‘무우단(무우단)에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을 가졌고, 수레와 사람이 복잡한 시장거리에 살면서도 조금도 속세에 오염되지 않고 시원한 청풍(청풍)의 기상이 있었다. 아침저녁에 일어나 앉아 성현(성현)의 모훈(모훈)을 외우며 ‘즐거워 걱정을 잊은 채’ 일생을 마치려는 뜻을 가졌다. 계사년(1773, 영조 49) 6, 7월 사이에 복통과 설사의 증세가 있었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는 79세였다.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침상에서 지내면서도 《맹자(맹자)》 전질(전질)을 반복해 읽었는데, 이루편(리루편)의 ‘군자가 도에 깊이 나아간다’는 대문에 이르러 곁에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 문인(문인) 이제임(리제임)이 묻기를, “학문하는 공부 가운데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공경으로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경이직내] 의리로 행실을 방정하게 하며[의이방외] 학문을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히 하며[박학독지]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절문근사] 예로 행하고 겸손하게 드러내는것[례행손출]이니,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퇴계(퇴계)의 자명(자명)을 외우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글이 실로 내가 평소에 좋아한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자손이 유교(유교)를 청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입고 먹는 것을 가지고 남에게 구차스럽게 말한 적이 없으니, 스스로 귀신에게 물어 봐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너희들은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판서 채제공(채제공)이 선생의 병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약간의 인삼(인삼)을 보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 번도 이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의 생사가 어찌 이것을 먹고 안 먹고에 달려 있겠는가. 보내준 뜻은 감사하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하고 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예절은 임종할 때에도 이처럼 의리에 맞게 하였다. 끝내 8월 7일에 정침(정침)에서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도 정신이 또렷하여 조금도 혼란하지 않았으니 군자의 올바른 죽음이라 이를 만하다. 이해 10월 9일에 도남촌(도남촌) 술좌(술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명정(명정)에 ‘소남촌인(소남촌인)’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는데, 학자들이 ‘소남 선생(소남선생)’이라 불렀다.
배위 전주이씨(전주리씨)의 선고는 제인(제인)이고, 파곡(파곡) 성중(성중)의 6대손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부덕(부덕)을 지녔으며 선생보다 25년 먼저 죽었는데,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광로(광로)이고, 차남은 광연(광연)인데 광연은 숙부 동기(동기)에게 출계(출계)하였고, 청주(청주) 한형도(한형도), 은진(은진) 송광익(송광익)은 사위들이다. 광로는 신(신)과 위(愇) 2남을 두었고, 광연은 무후하였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도(도)를 지닌 스승에게 귀의할 수 있었다. 이 때 성호(성호)의 문하에 재주가 뛰어난 선비들이 있었지만,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 독실한 뜻을 가지고 힘써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갑자년(1744, 영조 20)에 이 선생께서 병이 위급할 때 선생을 불러 생전의 유언을 일러 주시되 도를 전하는 책임을 당부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사제(사제) 간의 전수함이 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병인년(1746, 영조 22)에 내가 이 선생을 뵈었더니 이 선생이 당대의 인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송(송) 나라 때 선비들이 ‘윤화정(윤화정)은 육경(륙경)의 말을 자기 말 외우듯이 한다.’고 칭찬하였는데, 오늘날 윤모(윤모)는 참으로 이 말에 부끄럽지 않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양웅(양웅)의 《태현경(태현경)》에 대해서 명(명) 나라 선비 몇몇 사람은, ‘《태현경》의 원본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고 하였는데 윤모는 한 번 보고서 환히 알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으니 지금 시대에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 때 순수(순수 이 맹휴(리맹휴)의 자)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윤장(윤장)은 주염계(주렴계), 정명도(정명도)의 기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유념하였다. 그 다음 해에 나는 도남(도남)의 혼인 석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처음으로 선생께 인사드렸는데, 뵈옵건데 선생은 풍모가 단정하고 언어가 자상하며 웃는 모습이 뚜렷하고 온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하였으니, 한 번 보고서도 성덕 군자(성덕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사칠이기설(사칠리기설)은 실로 《주자어류(주자어류)》에서 나온 것을 퇴계 선생(퇴계선생)이 《천명도설(천명도설)》의 서문에 기재한 것인데, 기고봉(기고봉)이 ‘사단(사단), 칠정(칠정)을 이(리)와 기(기)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에 의심하여 퇴계와 서신을 왕복하며 논변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논설이 그른 것을 깨닫고 퇴계와 일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율곡(리률곡)은 오히려 기고봉의 논설을 주장했고 그의 논설이 매우 많았다. 이로 인하여 퇴계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율곡의 논설에 이기일원(리기일원)의 병통이 있다고 하고, 율곡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퇴계의 논설에 이기호발(리기호발)의 병통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각자 문자를 지어 양쪽이 서로 배척하니 끝내 큰 의논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학자라 이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는 실제의 학문을 버리고 이 논설을 으뜸으로 여긴 결과 논쟁이 끝날 날이 없게 되었다. 이에 이 선생은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사칠신편(사칠신편)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단, 칠정의 명칭과 뜻은 인심(인심), 도심(도심)과 실상이 같고 명칭만 다른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합하여 하나로 만들 줄을 모르기 때문에 ‘사단, 칠정이 선(선) 한 쪽에 포함되었다.’는 말에 구애되어 논설에 각자 다른 폐단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 책을 받고서 말하기를, “이 책의 내용이 명확하고 상쾌하여 양쪽을 갈라 놓은 것과 같으니, 다시 논평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선생은 뒤에, 문인인 상사(상사) 신후담(신후담)이 “지각(지각)의 기(기)와 형기(형기)의 기, 이 두 ‘기(기)’ 자는 같지 않다.”고 하고, 또 “공리(공리)의 칠정과 인심은 또한 도심이다.”라고 하여 “공리의 희노(희노)는 이(리)의 발이다.”라는 설을 하였는데, 이 선생이 그 설을 따라 사칠신편의 발문(발문)을 다시 지었다. 이에 선생이 그 설에 대해서 변론하기를 “마음에는 본시 형기에 따라 발하는 것이 있다. 《중용(중용)》의 서문에서 이른바 형기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이 형기가 아니라면 이 지각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기란 용어를 활용성 있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성인)의 마음은 순전히 천리(천리)이기 때문에 희노가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인데, 그 모습을 찾아보면 끝내 형기에 돌아갈 뿐이다. 장남헌(장남헌)의 말에, ‘의리의 노여움은 이(리)의 발이라 하더라도 실로 불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나누어 말한다면 기(기)에서부터 발하는 것은 본시 그대로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 선생이 즉시 다시 지은 발문을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
선생이 이전에 말하기를, “사칠이기(사칠리기)의 변론에 대해서는 젊었을 때 대략 이해하고 있었으나 환히 알지는 못했는데, 깊이 생각하고 반복해서 나의 공심(공심)과 사심(사심) 사이에서 체험한 지가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조리가 분명하여 혼미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성인(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아래로 인사를 배우고 위로 천리를 깨닫게[하학상달] 하는 것에 불과한데, 인사를 배우는 공부를 미처 하지 않고 천리를 깨닫는 공부를 먼저 한다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단지 사단(사단)이 발할 때 확충시키고 칠정(칠정)이 발할 때 절도에 맞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정산(정산) 이경협(리경협)이 신후담의 논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고,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사칠이기설은 사칠신편과 서로 뜻을 발명하는 것으로서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주장을 이처럼 독실히 믿었다.
가정 안에서는 규범이 매우 엄숙하여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고, 사람들을 접대할 즈음에는 화기와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손님과 친지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고 함장(함장)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의견이 같더라도 그저 같은 것이 아니었고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힘써 의리가 올바른 경우를 따르려고 하였는데, 이 선생이 선생의 의견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며 가상하게 여긴 적이 많았다. 그리고 사문(사문)을 섬기는 데는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 가을에 이 선생의 병이 위독할 때 내가 가서 뵈었더니, 당시 선생이 시병(시병)하고 있었는데, 약제를 올리는 일을 직접 보살폈고 심지어 코나 가래와 대소변을 받아낼 무렵에도 자신이 직접 부축하며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고 밤새도록 의복을 벗지 않은 채 시병한 지가 여러 날이었는데도 조금도 태만한 뜻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나는 선생의 성의가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고 또한 스승과 어른을 섬기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소학(소학)》을 기본으로 삼아 순서에 따라 배우도록 하였으므로 7, 8세의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절하고 읍(읍)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알았으며, 재주가 높고 낮은 정도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달랐지만, 대체로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이리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은 학문을 한다 하면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하였는데, 선을 밝히고[명선] 자신을 성실히 하는[성신]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빠져도 학문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씩 쌓아가고 번민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세월이 갈수록 더욱더 독실해져야만 사물에 대응할 때 도리에 맞게 되어 쾌활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법은 《주자서(주자서)》에 다 들어있다. 문제자와 문답할 경우 사람에 따라 침(침)을 주듯이 교훈하였기에 후인들이 증세에 따라 치료하는 약이 모두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독자(독자)들은 자신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취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퇴계는 주자를 잘 배운 분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속에 천길의 절벽처럼 우뚝한 기개가 있으니, 퇴계는 바로 우리 나라의 주자이고 백세(백세)의 사범(사범)이다. 따라서 후학들은 퇴계를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의 학자들 가운데 비루한 자는 전주(전주)의 학문에 빠져들어 연구하는 것만을 일삼되 세속에 적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고상한 자는 신기한 논설을 좋아하여 별도로 문장을 만들되 남보다 우세하려는 뜻을 갖는다. 선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나쁘게 여겨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학문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라 하더라도 모두 남을 위하는 학문이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독서하는 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익숙히 읽고 세밀히 완미하여 본 뜻을 알려고 힘써야 한다. 이리저리 읽어 나갈 때 의심나는 데가 없을 수 없을 터이니, 의심나는 것은 수록하여 자신의 학문의 진도를 점쳐 보아야 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채취하고 여러 서적의 문구를 찾아내어 한 단락마다 자신의 말을 해야만 실학(실학)이라 하겠는가. 옛 사람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공력이 생략되는 법이니 자신의 의견으로 억측하여 이론(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면 마음이 벌써 다른 데에 가 있는 것이어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옛 사람의 서책도 오히려 다 읽을 수 없거늘 자신이 지은 서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저술한 문장 가운데 전할 만한 것이 없고 대략 지(지), 의(의) 몇 권만이 있다. 그리고 여러 경서(경서)에 대해서도 모두 설(설)을 지었다. 《서경(서경)》의 우공(우공)에 대해서는 별도로 산천연혁고(산천연혁고)가 있고, 《주역(주역)》에는 계사설(계사설)이 있고, 《춘추(춘추)》에는 불개월변(불개월변)·제희공설(제희공설)이 있고, 《주례(주례)》에는 종률합변의(종률합변의)·선궁구변동이변(선궁구변동이변)이 있다. 만년에는 《의례(의례)》에 대해서 더욱 공력을 다하였는데, 주(주)·소(소)가 너무도 많아 학자들이 다 읽어 볼 수 없는데다 주·소의 내용에 모순되는 데가 많으며, 《속통해(속통해)》의 취하고 버린 것도 허술하고 누락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례(가례)》에 대해서도 편차선후변(편차선후변)이 있는데, 이상의 변(변), 설(설)은 모두 변경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가례》의 변에 대해서는 나도 간여하여 논란한 것이 있었는데 일치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다.
선생은 여러 경서에 모두 통달하였지만, 매우 공력을 쏟은 것은 전적으로 사서(사서)에 있었다. 이리하여 늘 말하기를, “성현의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사서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일상 생활의 다반사(다반사)처럼 익히되 체험하는 공부를 한 순간도 중단이 있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공경과 의리를 같이 지녔고 마음과 행실을 함께 수양하였으므로, 위의(위의)와 거동의 법칙은 70년이 하루와 같았고 청렴한 지조와 고상한 절의는 진정 부귀와 빈천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기풍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당론(당론)이 유행하는 시대에 처해 있으면서도 실학을 말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추앙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러하였겠는가.
선생은 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을 개탄하고는 여러 사서(사서)를 참고하여 자수(자수)·열수(렬수)·패수(패수)·대수(대수)의 사수변(사수변)을 저술하였고, 상위(상위)·역법(력법)·지리(지리)·강역(강역)의 학문과 의방(의방)의 소문(소문)·운기(운기)와 산수(산수)의 개방(개방)·염우(렴우)의 법에 대해서도 모두 연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 여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하기를, “《태현경(태현경)》 및 《한서(한서)》의 오행지의(오행지의)와 하도낙서설(하도락서설)은 후대의 구양공(구양공)의 말에서 나온 것이니 이러한 것을 생각해 봐야 하고, 주염계(주렴계)의 《태극도설(태극도설)》도 《태현경》의 현리편(현리편)의 문장을 인습한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도·낙서의 본수(본수), 선천(선천)의 괘기(괘기), 경방(경방)의 벽괘(벽괘)와 감여술가(감여술가)의 분금(분금)·성도(성도)·납갑(납갑) 등이 모두 《태현경》에서 나온 것이니, 아마도 양웅(양웅)·엄장(엄장)·경방(경방)의 제자들이 각자 전수받았고, 또 오계(오계)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의 도사(마의도사)·진도남(진도남)의 무리들이 서로 부연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고 하였다. 우매한 내가 미처 회답을 올리지 못했으나, 그 말이 착착 맞았으니 이전 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다고 이를 만한 것이다. 아, 훌륭하여라.
유고(유고) 몇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선생이 별세하신 이후 사자(사자)의 학문이 날로 분열되었고 별세하신 지가 지금 또 13년이 지났는데, 대의(대의)가 어긋나고 미언(미언)이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천주학(천주학)이란 것은 실로 불씨(불씨)의 하승(하승)의 설만도 못한 것인데도 현시대의 재주와 학식이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속에 빠져들어 서양이 중국보다 더 높아지게 하고 마두(마두)가 중니(중니)보다 더 훌륭해지게 하면서 “진정한 학문이 천주학에 있다.”고 한다. 사자의 추향(추향)이 올바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나는 선생의 덕을 더욱더 사모하는 한편 또한 우리 사문(사문)이 전수한 공자(공자), 맹자(맹자), 정자(정자), 주자(주자)의 바른 교훈도 저버릴까 염려된다.
선생의 손자 윤신(윤신)은 선생의 언행(언행)이 오랜 세월이 지나 민멸되는 것을 애통해한 나머지 내가 선생에게 동문의 후배이고 선생에게 알아줌을 받은 지가 근 30년이었으므로 선생의 사적을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나에게 행장을 지어받아 다른 작자(작자)에게 묘지명(묘지명)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대략 권귀언(권구언)이 기술한 원장(원상)에 의거하고 아울러 평소 나의 문견을 서술하여 이 행장을 기록한다. 내가 비록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어떻게 지나친 말로써 선생의 덕을 손상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이상과 같이 갖추어 기록하여 작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통정대부 종성 도호부사 백화재 황공 행장(통정대부종성도호부사백화재황공행상) 을사년


백화재(백화재) 황공(황공)은 휘가 익재(익재)요 자가 재수(재수)인데, 신라 때 시중(시중) 휘 경(경)의 후손이다. 고려 명종(명종) 때 전중감(전중감) 휘 공유(공유)란 분이 이의방(리의방)의 난리를 피하여 장수현(장수현)에 와서 살았으므로 드디어 관향이 되었다. 국조(국조)에 들어와 익성공(익성공) 휘 희(희)는 장상(장상)의 덕업(덕업)을 겸비하여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분인데, 공에게 10대조이다. 익성공의 둘째 아들인 전첨(전첨) 휘 보신(보신)이 상주(상주)에 처음 와서 살았는데, 자손이 그대로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전첨의 증손인 이조 참판(리조참판) 휘 효헌(효헌)은 문장과 절의로 당시에 이름난 분인데, 공은 이 분의 6대손이다. 증조 휘 즙(집)은 의주 부윤(의주부윤)을 지냈고 6도(도) 절도사(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족제(족제) 생원(생원) 휘 면(면)의 아들인 통덕랑 휘 재윤(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통덕랑이 증 좌승지(증좌승지) 휘 진하(진하)를 낳았고, 휘 진하가 상산(상산) 김진익(금진익)의 딸에게 장가들어 명릉(명릉 숙종의 능호) 임술년(1682, 숙종 8) 1월 28일에 본 고을의 중모리(중모리) 예전 집에서 공을 낳았다. 분만하던 날 저녁에 모 부인의 꿈에 익성공(익성공)이 ‘아이가 태어났느냐’고 잇달아 묻기를 두 번 했기 때문에 아명(아명)을 익재(익재)라 하였는데 커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공은 2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7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몸이 수척하고 병이 많았으므로 입학할 시기를 놓쳤다. 11세가 되어서야 입학했는데 학업을 익히는 데 태만하지 아니하였기에 몇 년도 안 되어 문리가 갑자기 트여 《통감(통감)》, 《사략(사략)》 및 칠서(칠서)를 통달하였다. 임오년(1702, 숙종 28)에 식년시(식년시)에 급제하여 괴원(괴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권지부정자(권지부정자)에 보임되었고, 순서대로 승진하여 저작(저작)과 박사(박사)가 되었다. 을유년(1705,숙종31)에 봉상시 직장(봉상사직장)을 겸임하였는데 얼마 지나서 성균관 전적(성균관전적)에 승진되었고 예조 좌랑(례조좌랑)에 이임되었다. 이듬해인 병술년에 병조 좌랑에 전임되었고 9월에 평안도 도사(평안도도사)에 제수되었다. 서도(서도)는 본시 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이 많아 화류관(화류관)이라 불리는 곳이어서 관장(관장)들 중에는 그들과 어울려 놀이하며 근신하지 않는 자가 전후로 잇따랐다. 그러나 공은 젊은 나이인데도 “젊을 때에는 여색을 경계해야 한다.”는 공자(공자)의 훈계를 엄수하여 기생들을 일체 물리쳤다. 순강(순강)할 때 어느 고을의 수령이 이름난 미모의 기녀를 단장시켜 수청들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보지도 않았으므로 그 기녀는 공의 풍모를 사모하여 상사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여러 고을의 직임을 여러 번 맡았으나 시종 여색에 오염되지 않았으니, 고상한 품행 가운데는 이러한 점이 있었다.
정해년(1707, 숙종 33) 6월에 만기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고 7월에 충청도 도사(충청도도사)에 제수되었다. 고시(고시)를 관장할 때 친지들의 서신이 많이 쌓였으나 공은 늘 정직 공평하게 하려고 다짐했으므로 그것을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 이에 비방하는 말이 많이 일어났으나 막상 방(방)을 내자 선발한 것이 정당하였으므로 인사(인사)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가 무자년(1708, 숙종 34) 겨울에 다시 춘관(춘관 예조의 별칭)의 낭관(랑관)이 되었고, 이듬해 봄에 전라도 도사(전라도도사)로 나아가 전례에 따라 조선(조선)을 관장하였다. 조선이 경창(경창)에 들어왔을 경우 고용인들은 그 속에서 훔쳐내고 창고의 관리들은 두량을 공평하게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부족한 수량을 조졸(조졸)들에게 내도록 하였으므로 조졸들 중에는 이로 인하여 파산한 자들이 많았다. 공은 평소에 이러한 폐단을 알고 있었기에 창관(창관)들과 약속하고 이 폐단을 엄격히 금지하여 막은 결과 두 가지의 폐단이 모두 다 혁파되었으므로, 조졸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감영(감영)에 돌아와서는 조운(조운)의 이해(리해)를 조목별로 열거하여 상에게 아뢰고 그 조항을 포창(포창)에 게시(게시)하게 하되 범하는 자는 형벌로 금지하도록 하였으니, 해읍(해읍)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그 은혜를 입게되었다.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와 경인년(1701, 숙종 36)에 기성(기성 병조의 별칭)의 낭관에 다시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인 신묘년에 무안 현감(무안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여러 해 잇따른 흉년을 당했으므로 부임한 초기에 맨 먼저 고을의 어진 사대부들을 방문하여 구황책(구황책)을 강구하였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직접 위무(위무)하였다. 그리고 쌀을 나누어 주고 죽(죽)을 먹여주는 은혜를 빠짐없이 균일하게 베풀었으므로 온 고을의 수천 호 중에 한 사람도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고, 그리하여 성적이 여러 고을에서 제일이었다. 이에 암행 어사 홍석보(홍석보)가 표창하여 아뢰자 준직(준직 품계(품계)에 알맞는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나주(라주)의 조운 판관(조운판관)을 겸임하였다. 국법에 제때 짐을 실어 보냈으나 가는 도중에 파선된 경우에는 그 죄가 사공들에게 있고 그 밖의 경우에는 죄책이 모두 해관(해관)에게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미 배의 출발 기한이 지났는데다 배가 또 부안(부안)의 해상에서 파손되었고, 부안 수령은 본시 공과 친한 사이였기에 공이 죄를 받을까 염려하여 그 일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양심을 속이고 죄를 모면하는 것은 내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 즉시 사실대로 자수하여 스스로 논핵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사령(사령)을 내리는 일이 있게 되어 죄책을 받지 않았는데, 일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모면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우선이고, 교화는 반드시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고, 자신의 녹봉을 희사하여 서재(서재)를 설치하고 사자(사자)들을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였으되 전지(전지)를 두어 경비를 마련하도록 하고 일하는 하인들을 두었으며, 휴일에는 서재에 가서 종일토록 강론하였는데 사자들에게 실행을 우선으로 하도록 힘썼다. 그 후 승평(승평)에 부임했을 때에는 향림서숙(향림서숙)을 설립하였고 기성(기성)에 있을 때에는 양사재(양사재)를 건립하였으니, 부임하는 곳마다 사자의 기풍이 크게 변하였다. 이리하여 수령으로 있은 지 5년 동안에 온갖 폐단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을미년(1715, 숙종 41)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다음 해인 병신년에 순천 부사(순천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또 주자(주자)의 사창법(사창법)을 따라 시행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후임자가 혁파시켰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무술년(1718, 숙종 44) 겨울에 만기가 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721, 경종 1)에 다시 전적(전적)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임인년에 종부시 정(종부사정)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계묘년(1723, 경종 3)에 성균관 사예(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다가 군자감 정(군자감정)에 전직되었고, 6월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8월에 영광 군수(령광군수)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725, 영조 1)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공의 재주와 식견은 시행하여 잘못되는 것이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뛰어났다. 수령의 인장을 세 번 찬 것이 모두 호남(호남)에서의 일이었는데, 호남은 풍속이 교활하고 거세어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공은 성심으로 유도하되 너그럽게 다스리기도 하고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여 적당히 하였고, 모든 일을 주도(주도)하고 세밀히 처리하여 사소한 일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범처럼 날뛰는 아전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여우처럼 교활한 백성들이 길들여져 순종하였으며, 고을에서 떠나가자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구리 비석과 돌 비석에 새겨 추모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 4)에 통정대부(통정대부)에 승진되어 종성 부사(종성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버림받은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다시 기용되었으므로 은명(은명)에 감격하여 즉시 길을 떠나 충원(충원)에 도착했는데, 청주(청주)의 역적 이인좌(리린좌)가 변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돌아 관동(관동)을 지나 지평현(지평현)에 당도하였다. 이 때 오명항(오명항) 공이 도순무사(도순무사)에 임명되고 박사수(박사수) 공이 영남 안무사(령남안무사)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박공은 평소에 공의 재주와 기량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길에서 만나자 매우 기뻐하고 공을 추천하여 함께 가게 할 것을 아뢰었다. 안동(안동)에 도착했을 때 공에게 소모사(소모사)의 명을 내렸으므로, 공이 명을 받고 달려가 여러 고을에 격문(격문)을 보내어 충의(충의)로써 권유하니, 사인(사인)과 서민(서민)들이 바람에 쏠리듯 호응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역적이 소멸되었으므로 소모사의 일을 그만두었지만, 정찰하는 사람들을 널리 배치하고 적의 정세를 정탐해서 도순무사와 안무사에게 비밀로 보고함으로써 요해지를 지켜 막고 적의 세력을 군색하게 만든 데에는 공의 계획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오공(오공), 이공(리공)이 공을 더욱더 훌륭한 인재로 여겼다. 역적이 토평되자 복명(부명)하고 이어서 가자(가자)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이 때에 역적이 영남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남 사람 중에 무함을 받은 사람이 많았고, 공의 이름도 역적의 공초(공초)에 나왔으나 공은 본시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을 상이 살펴 알고 불문에 부쳤지만 공으로서는 정세가 황공하고 불안하여 거적을 깔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 때 오공 및 영남 어사 이종성(리종성) 공이 입시(입시)하여 공에게는 공로만 있고 죄가 없다는 정상을 강력히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황모(황모)의 일에 대해서는 역적이 이미 무함한 것임을 자복하였다. 이미 죄를 깨끗이 벗은 상태이니, 처분을 기다리지 말도록 하라.” 하면서 해조(해조)로 하여금 이전대로 조용(조용)하도록 하였고, 이어 원종 공신(원종공신) 1등에 기록하였다.
공은 군함(군함)을 지니고 서울에서 몇 달 동안 머물다가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부터 문을 닫은 채 빈객을 사절하고 고향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계책을 가졌다. 그런데 이듬해 겨울에 조정에서 군함을 지닌 사람이 시골에 가 있는 일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으므로, 목사(목사) 이정숙(리정소)이 공의 가동(가동)을 가두고 길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다그쳤다. 경술년(1730, 영조 6) 3월 20일에 공이 길을 떠나면서 본관(본관)에게 정장(정상)하여 가동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고 길에 올라 서울에 들어왔다. 이 때 무고(무고)의 옥사(옥사)가 일어났다. 흉적(흉적) 박도창(박도창)의 종 만익(만익)이 남의 사주를 받아 입을 막으려고 도창을 독살(독살)하였는데, 거짓으로 끌어대어 연루된 사람이 많았다. 그가 말하기를, “3월 20일에 저들이 도창을 독살할 것을 모의할 때 광주(광주) 세교(세교)에 거주하는 황 순천(황순천)도 좌석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순천은 바로 공의 13년 전의 관직이다. 공은 그 후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또한 광주에는 잠시도 거주한 적이 없었으니 그 말이 거짓임은 숨기기 어려운 것이며, 그가 말한 3월 20일은 공이 시골에서 길을 떠난 날이었다. 그런데도 위관(위관)은 이러한 점을 살피지 못하고 공을 잡아다 금부(금부)에서 신문할 것을 청했고, 금부가 조사하였으나 거짓인 사실이 밝혀지자 상이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공은 혈혈단신(혈혈단신)으로 재주가 뛰어나 선발되었지만, 취향이 다른 무리들이 죄를 들추어 내려는 일이 많았다. 전후로 수령으로 있을 때는 상관(상관)이 트집을 잡아내려고 하여 온갖 짓을 다하였으나 끝내 그러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표창하여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공의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문사랑(문사랑) 조명익(조명익)이 묵은 원한을 품고 기어이 공을 해치려 하여 죄목을 꾸며대며 캐물었는데, 공의 변론이 분명하고 증거대는 말이 틀리지 아니하여 그의 계책이 시행되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난 뒤에 그가 대신(대신) 박필균(박필균), 이수항(리수항)을 사주하여 공을 유배시킬 것을 청하도록 한 결과 모두 “갑자기 석방시킬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익이 언관(언관)이 되어서는 또 국문(국문)할 것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헌납 서명행(서명형)이 사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계(정계)하여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상이 대간(대간)의 말을 어기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끝내 공을 구성(구성)에 유배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상의 뜻이 아니었다. 공은 흡족한 모습으로 길을 떠났으며, 배소(배소)에 있은 지 7년 동안 문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날마다 성리서(성리서)를 앞에 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연구하고 의리와 천명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자신이 천리 밖의 변방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태연히 지냈다.
병진년(1736, 영조 12)에 동궁(동궁)의 책례(책례)로 인하여 사면되어 돌아왔다. 무오년(1738, 영조 14)에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방면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저지하는 자가 있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후로 세속에 대한 생각을 감추어 버리고 단지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익히는 일로써 한가롭게 지냈다. 성품이 산수(산수)를 좋아하였기에 주계(주계)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면성(면성)에서 그 곳에 가서 집을 짓고 살면서 귀거래사(귀거래사)를 차운(차운)해 지어 벽에 붙여놓고 스스로 즐겼다. 다시 숭선(숭선)에 이사했다가 만년에는 선산(선산) 아래에 작은 서재를 짓고 서재의 현판을 ‘백화(백화)’라 하였으니, 산의 이름과 《시경(시경)》의 생시(생시)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화초와 대나무를 심고 수천 권의 서책을 간직하였는데, 벼슬에 나갔을 때 이외에는 발걸음이 한 번도 산재(산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울 때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수석(수석)이 좋은 곳에 노닐면서 술잔을 나누고 시를 짓기도 하였으되, 시사(시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있으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부모와 자제들이 일찍 죽은 데 대해서 명운으로 여겨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지냈으나 묵은 병이 오래 지속되었는데, 임종하기 전날 밤까지도 빈객들을 접대하고 편지의 답서 쓰기를 평상시와 같이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 수봉(수봉)의 새로 지은 집에서 고종(고종)하였으니, 바로 정묘년(1747, 영조 23) 12월 3일이었다. 부음(부음)을 들은 사대부들은 모두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와서 조문하는 빈객들이 매우 애절히 통곡하였다. 이듬해 3월에 옥천(옥천) 환산(환산)의 유좌 묘향(유좌묘향)에 장사 지냈는데, 공이 자리를 잡아 아들을 장사 지낸 곳이다.
배위 숙부인(숙부인) 청송심씨(청송침씨)는 동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휘 종(종)의 딸인데, 성품이 온순하여 부덕(부덕)을 지녔고 일동 일정(일동일정)이 부군의 뜻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공보다 몇 년 먼저 태어나서 공보다 9년 후인 을해년(1755, 영조 31) 모월 모일에 별세하였으며,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다가 그 후 산소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중모현(중모현) 풍우정(풍우정)의 건좌(건좌)에 모두 이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종간(종간)은 문장과 행실이 훌륭하였고 현감 광산(광산) 김동준(금동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무후하였고, 그의 양자 욱중(욱중)도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재주가 있었고 군수 고령(고령) 신박(신)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그도 무후하였다. 두 대가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기에 공의 상사 때는 신씨(신씨)가 그의 남편의 재종(재종)의 아들 태희(태희)를 양자로 하여 승중(승중)의 복을 대신 입게 하였다. 공의 딸은 풍산(풍산) 홍중희(홍중희)에게 출가하여 1남 수보(수보)를 두었으니, 그는 진사로서 문장의 명성이 있었으나 역시 일찍 죽었다. 아, 화락한 군자에게는 하늘이 복록을 내리는 법이거늘, 공은 훌륭한 재주와 덕행을 지녔는데도 하늘이 복을 내린 것이 이러하여 자손이 번창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그것은 운명인 듯하다. 태희는 진사 안동(안동) 권순(권순)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석로(석로)는 진양(진양) 정종로(정종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정종로는 바로 우복(우복) 정경세(정경세) 선생의 봉사손(봉사손)이다. 딸은 풍양(풍양) 조계연(조계연)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는 현재 헌납(헌납)인 석목(석목)의 아들이다.
공은 풍모가 단정하고 결백하며 본성이 정결하고 강직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애모하고 존경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화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평생에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애통한 일로 여긴 나머지 기일(기일)을 당했을 때에는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밤을 새우면서 자신이 직접 제물을 올리고 슬퍼하기를 처음 상(상)을 당했을 때처럼 하였으며, 매양 생신을 맞아서는 자제들이 마련한 주안상을 물리쳐 들지 않은 채 종일토록 슬픈 기색을 지녔다. 그리고 둘째 숙부, 막내 숙부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정성과 효도가 모두 지극하였다. 둘째 숙부의 상사가 났을 때 공은 승평(승평)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부음(부음)을 들은 그날로 달려와 곡하였고, 적소(적소)에 있을 때에도 막내 숙부의 춘추복을 마련해 보내기를 집에 있을 때처럼 하였으며, 진귀한 음식을 얻었을 경우 기어이 인편을 찾아 내어 보내되 거리가 멀고 계책이 어렵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았으니, 그의 그지없는 효성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종매(종매)가 일찍 홀몸이 되어 살림이 가난하였으므로 공이 그들 식구를 데려다 양육하였는데, 그 자녀들을 자기의 소생처럼 길렀으며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 그리고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하찮게 여겨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기를 미처 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므로, 종족 친지들이 모두 공에게 의탁하였다. 일가 한 사람이 세력을 지닌 자에게 빌붙어 공을 해치려고 하였으나 공은 모른 체하면서 정의(정의)의 친분을 변하지 않았고, 그가 죽어서는 자신이 직접 염습(렴습) 등의 일을 치르기도 하여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는 뜻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사당의 신주가 체천되자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소원해지고 복(복)이 다해지자 친족을 두터이 하는 정의가 끊어진다.”고 하고, ‘봉선(봉선)과’ ‘돈서(돈서)’ 두 계(계)를 설치하여 제전(제전)을 마련하고 재실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0월 상순(상순)에 9대조 이하의 선조들에게 세향(세향)을 올리는 규례를 정하였고, 또한 여가가 있는 날에는 종족들을 모으고 환담을 나누게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 예법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처신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을 단속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니, 평소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은 다음 의대(의대)를 단정히 하고 의자와 책상도 정돈하였으며, 한가롭게 혼자 있을 때라 하더라도 게으른 태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집안의 형편을 헤아려 길사(길사)나 흉사(흉사)의 비용을 일에 앞서 미리 마련했고 손님 접대와 제사 비용도 모두 별도로 마련함으로써 임박해서 군색한 걱정이 없게 했다. 그리고 가정안에 위엄과 애정을 함께 지극히 하였으므로 노복들은 힘써 일했고 엄숙하고 화목하여 싸우는 소리를 내지않았다. 그리고 사들인 쌀과 지세(지세)로 받아들인 양곡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으니, 만년에는 살림이 가난하였는데도 단지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는 일만 생각하였다. 공이 죽었을 때 옛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단지 심의(심의)와 낡은 조복(조복)만이 한 벌씩 남아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에 더욱더 공이 여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의 시문(시문)은 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조리가 있는데 붓을 잡은 즉시 지어도 문맥이 순조롭고 사정에 절실하였으므로 문장을 잘한다고 이름난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난고(란고)로 남아 있어 출간되지 못했다. 적소(적소)에 있을 때 지은 운결록(운결록), 자명록(자명록), 서행일록(서행일록)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퇴계집(퇴계집)》에 대해서 붉은 색, 검은 색으로 표시해 두고 절요(절요)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으므로, 학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9촌 조카인 전적(전적) 침(침)이 공의 유사(유사)를 지었는데 그 내용에,

“전에 공의 소모사(소모사) 휘하에 따라다닐 적에 보니 빈틈없이 처리하는 재주와 기량은 장수도 될 수 있고 재상도 될 수 있었지만 만년에 시골에 물러나와 지냈다. 산림(산림)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경술(경술)에서 나온 것이고 인륜(인륜)에 독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공이 묘당(묘당)의 자리에 앉아 재상(재상)의 직책을 수행했더라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정도가 필시 옛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와 함께 말살당하여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으니, 후인들이 유한(유한)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실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공의 부인은 나의 선비(선비)와 내종(내종)간이므로 내가 어릴 때부터 공의 언행을 익숙히 들었고, 또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은총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황태희(황태희) 유생이 공의 유사(유사)를 가지고 와서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문장이 졸렬한데다 늙고 병들었으므로 공의 성대한 덕을 모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옛일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들었기에 유사의 내용을 간추려 문장을 만들었으되 내가 듣고 본 일들을 보충해 두었으니, 이로써 기록하는 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성균관 진사 부사 선생 성공 행장(성균관진사부사선생성공행상) 을사년


공은 성이 성씨(성씨)이고 휘가 여신(여신)이며 자가 공실(공실)인데, 창녕(창녕) 사람이다. 선조 휘 송국(송국)이 고려에 벼슬하여 문하시중(문하시중)을 지냈고, 7대를 거치면서 높은 관직을 지냈다. 휘 경(경)에 이르러 조선조에 들어와 현감(현감)을 지냈고, 현감이 휘 자량(자량)을 낳았는데 이분이 좌사간(좌사간)을 지냈고, 사간이 휘 우(우)를 낳았는데 이분이 장흥고 부사(장흥고부사)를 지냈으며 처음 진주(진주)에 거주 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안중(안중)인데 승문원 교리(승문원교리)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일휴(일휴)이고 호는 무심옹(무심옹)인데 호조 참판(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선고의 휘는 두년(두년)인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였다. 추천으로 경기전 참봉(경기전참봉)에 제수되었는데 나가지 않았고, 한성부 우윤(한성부우윤)에 증직되었다. 초계변씨(초계변씨) 충순위(충순위) 원종(원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3명을 두었는데, 큰 아들 여충(여충)은 원종 공신(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니, 두 대의 증직이 이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 여효(여효)는 임진왜란 때 향교(향교)의 오성(오성 향교에 모신 다섯 분의 성인)의 위판(위판)을 모시고 진양성(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위판을 안은 채 죽었다. 공은 막내 아들인데, 가정(가정) 병오년(1546, 명종 1) 1월 1일 자시(자시)에 진주 대여면(대여면) 귀동촌(구동촌)에서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뇌가 총명하고 눈의 광채가 사람에게 비쳤으므로 무심공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훗날에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금 자라서는 어른처럼 정중하였다. 8세 때에 조계(조계) 신점(신점)에게 가서 수학하였으니, 신공은 바로 문충공(문충공) 숙주(숙주)의 증손으로서 공에게 이모부가 되는데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이 쫓아가 스승으로 섬겼던 것이다. 13,14세 때에 경전(경전)을 모두 읽었고 각체(각체)의 과거문(과거문)도 모두 잘하였으므로 신공이 늘 칭찬하여 말하기를, “앞으로 크게 성취하여 내가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 15)에 약포(약포) 정탁(정탁) 공이 본주(본주)의 교수가 되어 왔으므로 공이 가서 《서경(서경)》을 배웠는데, 정공이 매우 칭찬하며 훌륭한 스승에게 찾아가 학문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계해년(1563, 명종 18) 봄에 귀암(구암) 이정(리정) 공에게 예물을 가지고 가 뵈었더니, 이공이 국가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 허여하고 《근사록(근사록)》을 가르쳐 주며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하도록 권하였다. 가을에 방백(방백 관찰사의 별칭)이 고을에 순행와서 과거를 보일 때 ‘운학부(운학부)’를 지어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그 부에,

도 팽택이 심양으로 돌아갈 때 구름이 무심히 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 도팽택귀거심양무심출수
이 적선이 동정호를 바라볼 때 학이 호수가 끝나는 곳에서 보이지 않네 / 리적선서망동정수진불견
라는 한 구절이 나오자 방백이 장단을 치며 경탄하기를, “세상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향시(향시)의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명성이 온 도내에 떨쳐졌다.
무진년(1568, 선조 1)에 감사(감사)인 임당(림당) 정유길(정유길)과 진주 목사(진주목사)인 송정(송정) 최응룡(최응룡)이 인근 고을의 유생(유생) 10명을 선발하여 단속사(단속사)에 회접(회접)시켰는데, 공이 그 접장(접장)이었다. 이에 앞서 휴정(휴정)이 《삼가귀감(삼가구감)》이란 책을 지었는데 유가(유가)의 설을 끝에 기재하였고, 또한 사천왕(사천왕)이란 불상(불상)을 건조하였는데 그 형상이 매우 괴이하고 우람스러웠다. 공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이 중이 너무도 유가의 도를 무시하였다.” 하고, 동아리[접중]가 그 책에 서명한 것을 가져다 찢어버리고, 중들을 시켜 불상을 헐고 책의 원판을 태우게 하였다. 조남명(조남명)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말세의 인물들은 간혹 젊었을 때에는 기개가 드높다가도 점차 연약해지고, 후생(후생)들은 온갖 일에 대해 적당히 넘기려고만 하니, 어떻게 진취할 수 있겠는가. 공자(공자)께서 광간(광간 뜻이 크고 언행이 대범한 사람)을 취택하신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하였다. 이튿날 공이 선생에게 배알(배알)하자 선생이 맞아 들여 매우 친절하게 이야기하였다. 조금 지나서 수우당(수우당) 최영경(최영경)이 왔는데 선생이 공을 가리키며 불상을 헐어버린 일을 말하자 최공이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경의를 표하였다. 공이 그대로 머물면서 《서경(서경)》의 의심나는 뜻을 질문하였더니, 선생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미 독실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우윤공이 병석에 누워 계셨기에 공이 정성을 다하여 구호하고 치료하였는데, 몹시 애태우고 걱정한 나머지 음식을 목에 넘기지 못했고 옷의 띠를 풀 겨를이 없었다. 운명하자 시체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던 끝에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고, 밤낮으로 곡하여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제사 지내는 술잔과 그릇들은 자신이 직접 살펴 씻었고 주방의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여막(려막)에서의 시묘살이에 대해 백씨(백씨), 중씨(중씨)와 약속을 정하기를, 중씨는 집에 돌아가 모친을 모시고 제사를 대신해 지내도록 하고 공과 백씨는 시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친에게 문안드릴 때와 삭망(삭망) 및 명절에 제전 올리는 때 이외에는 여막에서 나오지 않았고, 최질(쇠질)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에 보리죽만 먹었다. 그리고 상례(상례), 제례(제례)를 한결같이 주자(주자)의 《가례(가례)》에 따르면서 귀암(구암)이 여묘살이할 때의 절문(절문)을 참작하여 행하였다. 신미년(1571, 선조 4) 봄에 복제가 끝났는데, 7월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기를 부친상 때와 똑같이 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여묘살이할 적에 공이 백씨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의 체백(체백)이 공산(공산)에 계셔서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지만, 반혼(반혼)하지 않은 채 수묘(수묘)만 할 경우 이것은 체백만을 중시하고 신혼(신혼)을 경시하는 것이니, 예가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장자이시니 의당 신주를 모시고 반혼하시어 제사를 주관하셔야 합니다.” 하고 공이 중씨와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에 가족들을 데리고 진주 경내에 피란하였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진양성(진양성)이 함락될 때 중씨가 죽었는데, 공이 유해(유해)를 찾아 장사 지내고 갑오년에 집에 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금릉(금릉)에 피란했다가 기해년(1599, 선조 32) 고향에 돌아왔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이종영 희인(리종영희인), 이대약 선수(리대약선수)와 계서계(계서계)를 맺고 매년 3월 보름과 9월 보름에 윤번으로 돌아가면서 서로 방문하기로 하였는데, 동계(동계) 정온(정온)도 와서 참여하였다. 공이 이 계를 위해 서문을 지었으니, 바로 옛 사람이 진솔회(진솔회)의 연회를 베풀던 뜻이다.
공이 평소에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교제할 때에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부당하게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여기고 기어이 나서서 구제해 냈다. 늘 수우당(수우당)의 억울함을 애통하게 여겨 동계(동계) 제공과 함께 대궐에 상언(상언)하여 신원(신원)시켰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 의병장(의병장) 김덕령(금덕령)의 충용(충용)을 허여했었는데, 그가 도망한 군졸을 죽인 일로 인하여 수금되었을 때에는 공은 그를 대신해 글을 지어 체찰사(체찰사) 이원익(리원익)에게 그의 억울함을 변론하는 한편 진양(진양)의 유생(유생)들에게도 상소하여 신구(신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역적 이몽양(리몽양)의 공초(공초)에 나와 체포되었을 때에는 공이 진사 문홍운(문홍운)과 함께 소장(소장)을 올려 억울한 것을 변론하였으나 구제하지 못했는데, 공이 이 일을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나중에 동계가 국사(국사)를 의론한 것으로 인하여 예측할 수 없는 화단을 받게 되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강상(강상)의 책임을 질 사람은 이 사람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사호(사호) 오장(오장), 설학(설학) 이대기(리대기)와 함께 소장을 올려 신구하였는데, 관철되지 못하자 돌아왔다. 공이 의리를 행하는 데 용감한 것이 이러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생원시(생원시)·진사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전에 우윤공이 임종할 때 공에게 이르기를, “나는 독신으로 부모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과거보는 일을 그만둠으로써 입신 양명(립신양명)하여 부모의 명성을 드러내는 도리를 하지 못했다. 따라서 너는 노력하도록 하되 내가 죽었다고 게을리 하지 말라.” 하자, 공이 울면서 그 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경학(경학)을 강습하는 여가에 과거 공부에도 부지런히 힘써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전후로 초시(초시)에 합격한 것이 24번이었는데, 이 때에 와서야 약간 성취했던 것이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동당시(동당시)에 장원하여 서울에 갔으나 세도(세도)가 혼란한 것을 보고는 끝내 과장에 들어가지 않고 돌아왔는데, 이 때부터 영원히 은거하려는 계책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 사자(사자)들이 학문할 줄을 몰랐으므로 공이 사문(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봄에 자신이 거주하는 금산리(금산리)에, 여씨(려씨)의 향약(향약) 및 퇴계(퇴계)의 동약(동약)을 모방하고 거기에 약간의 조항을 증감하여 약속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또 옛날 소학(소학)·대학(대학)의 규칙에 의거하여 양몽재(양몽재)·지학재(지학재)를 설립하고 고을의 후생들로 하여금 나이에 따라 나누어 거처하며 학업을 익히게 하였는데, 하진(하진)과 조겸(조겸), 한몽일(한몽일) 공 등 몇몇 사람이 믿고 따르면서 협찬하였다. 이에 10년도 채 못 되어 문풍(문풍)이 크게 진작했고 과거에 오른 사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비난하는 말이 떠들썩하였으나 나중에는 먼 데 가까운 데 사람이 모두 따랐다고 한다.
남명 선생이 고금의 예를 참작하여 혼례·상례를 정했는데, 난리를 겪고 나서 그 예가 폐지되고 다시 불가(불가)의 법을 따랐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혼례·상례에 세속의 고배상(고배상) 차림을 좇지 않자 당시 사대부들 중에 이것을 따른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또 그렇지 아니하여 이전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혼례 때에 고배상을 차리는 것은 그래도 혹 세속을 따를 수 있는 일이지만, 초상이나 장례 또는 소상(소상)·대상(대상)·담제(담제) 때에도 모두 고배상을 차리고 때로는 빈객들이 술을 청하며 즐기기까지 하는 것은 매우 형편없는 짓이다.” 하고, 동지들과 함께 남명의 예를 복구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풍습이 약간 변경되었다.
공은 선고(선고)의 뜻을 따라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으나, 자신을 단속하는 일에 엄격하여 잠시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거주지에 부사정(부사정)을 짓고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았고, 또 양직당(양직당)을 건립하고 명(명)을 지었는데 그 명에,

양직당 북쪽에 자라는 천 그루의 대나무는 / 당지북천간죽
그 속이 비었고 그 마디가 곧으며 / 기심공기절직
더위를 없애고 눈 서리도 제거하는데 / 각염서배상설
군자가 그러한 형상을 법으로 삼아라 / 군자이취위칙
나의 도리를 실천하고 본성을 회복하는데 / 천오형부오성
정직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잘 기르는 것이라네 / 선기양직이경
언제나 이 명을 보며 스스로 경계하도록 한다 / 상고시용자경
하였다. 그리고 창가의 벽에다 ‘직방대(직방대)’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놓고 해석하기를, “무엇을 직(직)이라 하는가?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방(방)이라 하는가? 일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대(대)라 하는가? 기량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일이 방정하지 못하면 부정하게 되며, 기량이 위대하지 못하면 협소하게 된다. 그런데 간사한 것, 부정한 것, 협소한 것은 군자(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정직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경(경)’에 있고 방정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의(의)’에 있고 위대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성(성)’에 있다. 한 곳에 집중하여 딴 생각이 없는 것이 ‘경’이니 이것은 마음의 주장이 되고, 헤아려 적당하게 하는 것이 ‘의’이니 이것은 일의 주장이 되며, 진실되어 거짓이 없는 것이 ‘성’이니 이것은 몸의 주장이 된다. 마음과 일과 몸에 주장이 있을 경우에는 군색한 행동이나 부정한 길로 빠지는 데 대한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스스로 경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을 위하여 부사정(부사정) 동쪽에 네칸의 집을 짓고 지은사(지은사)라 명명하였는데, 이것은 옛 사람의 “자식을 교육시켜 보고서야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는 말을 취한 것이다. 동쪽 방의 현판을 이고재(이고재)라 하였으니 이는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언고행]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행고언]’고 한 뜻을 취한 것이고, 서쪽 방의 현판을 사유재(사유재)라 하였으니 이는 ‘낮에는 행하는 것이 있고[주유위] 밤에는 터득하는 것이 있고[소유득]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에도 기르는 것이 있고[순유양]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보존하는 것이 있다.[식유존]’고 한 뜻을 취한 것이며, 중간의 두 칸을 삼어당(삼어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부모에게 효도하고[효어친] 어른에게 공순하고[제어장] 벗에게 미덥게 한다.[신어붕우]’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시(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부사정 북쪽에 지은사가 있고 / 부사정북지은사
이고재 서쪽에 사유재가 있네 / 이고재서사유재
날마다 삼어당에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 일향삼어근착력
심오한 경지에 이르는 계제가 되리라 / 승당입실가성계
하였다. 그리고 또 만오잠(만오잠)을 지어 벽에다 써 붙였고 성성잠(성성잠)을 지어 자손들에게 남겨 주었으며, 또 동현찬(동현찬)을 지어 앙모하는 뜻을 부쳤고 사우록(사우록)을 지어 강마(강마)의 즐거움을 드러냈으니, 학문하는 데에 독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되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고 한 말은 공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이다.
공은 벼슬길에 나가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20년 동안 한가롭게 수양하였는데, 만년에 수직(수직)으로 통정대부의 자계(자계)를 제수받았다. 숭정(숭정) 임신년(1632, 인조 10) 11월 1일에 부사정에서 고종(고종)하였으니, 향년이 87세였다. 고종하기 하루 전에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남명 선생(남명선생)이 임종할 때 안팎이 안정하도록 경계하였는데, 군자가 임종하는 것은 이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종하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이 목욕하고 가묘(가묘)에 배알한 다음 집안의 안팎을 불러 일일이 다 묻고 천천히 말하기를, “각자 너희들의 처소에 돌아가라.” 하였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하고 나서 잠이 들어 편안히 운명하였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이듬해 1월에 본 고을의 북쪽에 있는 감암산(감암산)의 자좌 오향(자좌오향)의 자리에 장사 지냈으니,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공은 풍모가 뛰어나고 기량이 심후하여 급한 말을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갖지 않았으며 다급하고 놀라운 상황을 당했을 때에도 법도를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없이 조용하였다. 젊은 나이에 귀암(구암)의 강석(강석)에 있을 때 귀암이 공의 강론이 정세하고 분명하다고 칭찬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므로, 귀암이 말하기를, “성군(성군)은 남이 알지 못하는 덕행을 지닌 군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운 아이란 칭호를 받았으니, 평소에 부모의 뜻을 잘 받들고 순종하여 충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양친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묘살이를 6년 동안 하였다. 그리고 선친의 기일(기일)을 당할 때마다 제삿날 7일 이전에 대청과 뜰을 청소하였고, 제삿날에는 자신이 직접 그릇을 씻고 제물들을 점검하여 정결하게 하기에 주력하였으며, 제사 지낼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애모하여 주위 사람들까지도 슬퍼하게 하였고, 3일이 지나서야 평소의 침소로 돌아왔는데,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백씨(백씨), 중씨(중씨)와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낮에는 밥상을 함께하고 밤에는 이불을 같이하면서 매우 즐거워하고 화목하여 화기가 애애하였다. 두 분 형님이 먼저 별세하였는데, 둘째 형님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기에 공이 그 제사를 받들었다. 두 분 형님의 기일(기일)을 당할 때에도 매양 선친의 제사 때처럼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였으며, 종일 슬퍼하여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늘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데는 정성과 공경을 우선으로 삼는다.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명(신명)과 교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7일 동안 산재(산재)하고 3일 동안 치재(치재)하는 법을 설치한 이유이다. 그리고 제물(제물)은 풍족하게 차리든가 약소하게 차리는 데에 달려 있지 않는 것이니, 정성스럽고 정결하게 차리지 않는다면 비록 풍족하게 차린다 하더라도 신명이 어찌 흠향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집의 형편에 맞게 해야 한다는 훈계를 말한 까닭이다.” 하였다.
평소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가묘(가묘)에 배알한 뒤에 서실(서실)에 물러나와서 책상을 마주하여 꿇어앉아 옛 서책을 열람하였는데, 그 경우에도 마치 손님을 대하는 듯이 엄숙하였다. 혼자 있을 때에는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 태만한 모습을 갖지 않았으나 손님이 왔을 때에는 편하게 앉기도 하며 품행을 단속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대개 공이 자신의 학덕을 감추어 학자의 명칭에 자처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람들에게 화내고 꾸짖는 말을 하지 않았고 매질을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이 저절로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잘못이 있을 경우 간곡히 타일러 스스로 고치도록 하였으므로 집안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숙연하고 화목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 집안 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어느 집이든 간에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은 국가의 조세(조세)와 집안의 제수(제수)를 마련하는 데에 있으니, 자신이 먹고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조세는 가난한 백성들보다 먼저 바쳐야 하고, 양식이 떨어졌더라도 제수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남명(남명)과 귀암(구암)의 문하에 노닐며 경(경)·의(의)와 효제 충신(효제충신)의 교훈을 듣고 말하기를, “두 분 선생의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효제 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해질 수 없고 경·의는 효제 충신이 아니면 설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나의 마음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을 다할 뿐이다.”라고 하고, 종신토록 복습(복습)하였는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가르칠 경우에 모두 이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공은 경전(경전)을 널리 연구하고 백가(백가)의 서적에도 모두 통달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게 여긴 나머지 30세 이후에 또 쌍계사(쌍계사)에 들어가서 경서(경서)와 《심경(심경)》 및 《근사록(근사록)》 등의 성리서(성리서)를 반복해 읽었는데, 당시 독서에 분발하여 음식먹는 것도 잊어버렸으며 전심으로 연구하고 3년 만에 돌아왔다. 이후로 지난날 의심스럽고 알 수 없던 것들이 얼음이 풀리듯 풀리어 환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않았으며,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매우 진지하게 토론하여 천리(천리)와 인사(인사), 성(성)과 명(명)의 뜻과 의리[의]와 이욕[리], 공(공)과 사(사)의 구분을 환히 분석하여 말하였으므로 듣는 이들이 싫증을 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리설(성리설)에 대해서 물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하니, 익혀 행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위로 천리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아래로 인사를 배우지도 않고 갑자기 위로 천리를 알려고 한다면 뜻이 고원(고원)한 데에만 달려가게 되어 아래로 인사를 배운 것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성인(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순서대로 차근히 진보하도록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작위(작위)를 도둑질하는 것 같은 행위는 바로 양심을 훔치는 행위로서, 나중에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많은 서책을 박람한 뒤에야 번다한 내용을 수습하여 간략한 데에 나아가게 되고 자신에 돌이켜 요약한 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맹자(맹자)의 이른바 ‘널리 배우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자신에 돌이켜 요약을 말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절은 중대한 것이다. 사람이 금수(금수)와 다른 것은 예로써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는 자신의 마음을 다할 뿐이다. 문왕(문왕)이 반찬을 살펴본 일과 자로(자로)가 먼 곳에서 쌀을 지고 온 일은 모두 자식의 직분에 당연한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얼음 구멍에서 고기가 뛰어나온 왕상(왕상)의 일이라든지 겨울에 죽순이 돋아난 맹종(맹종)의 일 같은 것은 이들이 마음을 다한 데 대해 하늘이 감동하여 그러한 일이 있게 된 경우이니, 무엇 때문에 기이한 일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는 그 방도가 무궁한 것이다. 이리하여 부모를 섬기는데 증자(증자)처럼 하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도 맹자께서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신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학문을 하면서 부귀와 영달을 그리워하고 험한 옷과 나쁜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뜻이 확립되지 못하여 끝내 성취하지 못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목숨을 해치는 것으로는 주색(주색)만한 것이 없는데, 술에 대한 욕심은 그래도 절제할 수 있지만 색욕은 더욱 심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색을 삼가기를 마치 원수를 피하는 것처럼 해야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색을 경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타의 일은 볼 것도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말하기를,

“사자(사자)의 포부는 매우 커야 하는 것으로 우주의 허다한 일에 대해서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니 산수(산수), 군진(군진), 의약(의약), 천문(천문), 지리(지리)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모두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력(학력)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이러한 것에 유념하려고 할 경우에는 뜻이 산만하여 학업이 전일하지 못하게 된다. 재능만 있고 학덕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소강절(소강절)이 말하기를, ‘단지 간웅(간웅)의 심술만을 키울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의리를 알지 못하고 실속없는 문장에만 전심할 경우에도 그 폐단이 또한 이러한 것이다.”
하였다.
공이 사람들과 교제할 경우에는 성의를 쏟고 규각(규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반드시 현명하고 우매한 사람과 간사하고 정직한 사람을 구별하여 교제하였다. 정능(정릉)이란 자는 정인홍(정인홍)의 손자인데, 이위경(리위경)과 함께 임강정(림강정)에서 놀이하면서 여러 차례 공의 아들들에게 같이 뱃놀이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집안은 위세와 권력이 매우 대단한데, 선비인 사람은 권문(권문)의 자제들과 교유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나는 정능의 사람됨을 보건대 겉모습은 공순한 것 같지만 속마음은 실제로 흉악한 자이니, 함께 교유해서는 안 된다.”
고 하였으므로 아들들이 모두 가지 못했다. 그 후 듣건대 폐비(폐비)의 흉소(흉소)를 올리는 계책을 그 놀이에서 결정했다고 하니, 공의 사람을 알아보는 현명함이 또한 이러하였다.
이 때에 광해군이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정인홍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한 번 도계(도혜)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공은 정인홍과 함께 남명(남명)을 사사(사사)하였고 진주(진주)와 합천(합천)이 모두 강의 오른쪽에 있는데다가 공의 부자의 명성이 당시에 알려졌는데도 끝내 낮은 벼슬 한 자리도 받지 않았으니, 공의 청백한 지조와 절의를 이에 더욱 알 수 있다. 공은 젊었을 때 경국 제세[경제]의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펼칠 수 없었으므로 옛날에 성주(성주), 현신(현신)이 서로 만난 경우를 볼 때마다 잇따라 감개하였다. 그리고 모문룡(모문룡)이 가도(가도)에 와서 주둔했을 때 공은 이미 걱정하여 시(시)를 지어 탄식하였으니 강호(강호)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늘 잊지 못했던 것이다. 몸을 결백하게 하고 멀리 은둔하여 있으면서 자신을 굽혀 벼슬을 얻으려는 뜻을 갖지 않았으니, 공과 같은 분은 《주역(주역)》 둔괘(둔괘)의 ‘비둔(비둔)’의 뜻을 터득한 분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향(향)에서 천거하고 리(리)에서 선발하는 법이 폐지되어 후대에는 오로지 과목(과목)만으로 인재를 뽑기 때문에, 명경과(명경과)에 응시하는 자들은 단지 입으로 외우는 것만을 주력하여 체험과 실천을 하지 못하고 제술과(제술과)에 응시하는 자들은 전적으로 화려한 문장만을 일삼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며,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무리가 날로 조정에 진출하여 임금의 덕이 성취되지 못하고 조정이 바르지 못하며 백성들이 불안한 원인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식자(식자)들이 근본을 아는 논설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아유가(아유가) 5장(장)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고, 또 섭빈사(섭빈사)를 지었는데 그 서문(서문)에 이르기를, “옹(옹)은 일찍이 직(직)과 설(계)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으나 직과 설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였고 만년에는 소선(소선)이라 자칭하였으나 진짜 신선이 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저 흰 머리털이나 뽑으면서 단지 아이들의 비웃음만 초래하고 있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공자(공자)께서는 ‘70세에 마음의 하고 싶은 바를 따라 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옹은 용렬한 사람이니 어떻게 성인처럼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법도에 벗어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경치가 좋은 산수(산수)에 몸을 맡기고 멋대로 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노니는 것은 그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 산수에 유람하는 취미를 지녔으므로 젊었을 때는 서울에 노닐면서 삼각산(삼각산)의 백운대(백운대)에 올라갔고, 중년에는 충원(충원)에 노닐면서 계족산(계족산)에 올랐으며, 노년에는 동해(동해)에 가서 여러 고을을 두루 관람하였다. 동도(동도)에 가서는 봉황대(봉황대)에 오르고 포석정(포석정), 월성(월성), 계림(계림) 등의 고적을 구경하였고, 세 번이나 방장산(방장산 지리산의 이칭)에 노닐며 천왕봉(천왕봉)에 올랐다. 그리고 계해년(1623, 인조 1) 가을, 공의 나이가 78세일 때 또 방장산에 유람하여 상봉(상봉)에 올랐고 유산시(유산시) 1백 86구(구)를 지었는데, 그 시는 구양수(구양수)의 여산고(려산고)와 한창려(한창려)의 남산시(남산시)의 체를 본뜻 것으로서 시구(시구) 내용이 청신(청신)하고 장려(장려)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외워 회자(회자)되었다고 한다.
공의 외손서(외손서)인 안창한(안창한) 공의 아들 시진(시진)이 공에게 수업하였는데, 임신년에 공이 임종할 때 학문하는 데에 긴요한 조항을 물었더니 공이 18개 조항을 구두로 불러 주었다. 그것은 침상단편(침상단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기(리기)의 근원과 심성(심성)의 분계로부터 학문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분석하고 조목별로 논열한 것으로서 모두가 후학들에게 절실한 내용이었다. 8, 9십의 나이에 정력이 이러하였으니, 만약 평소에 진정으로 학문을 쌓고 실제로 마음을 다잡지 않았더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젊었을 때부터 문장에 주력하였는데, 재기(재기)가 남보다 뛰어난데다가 때로는 산사(산사)에서 때로는 학사(학사)에서 문을 닫고 서적들을 섭렵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여러 서적 중에서도 좌구명(좌구명), 유종원(류종원), 한퇴지(한퇴지), 구양수(구양수)의 저서에 대해 더욱 힘을 쏟았다. 이리하여 문장을 지을 적에는 아예 생각하지 않고 지어도 미리 지어 놓은 것을 써내는 듯하였으며 기이하고 고상한 것을 숭상하지 않고 단지 이치의 우수함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필법(필법)은 기세가 강건하고 기이하여 당대에 으뜸이었는데, 공이 소시에 쌍계사(쌍계사)에 있으면서 갈필(갈필)로 반석에다 서법을 익혔기 때문에 글씨의 획이 철사와 같이 힘이 있었으므로 당시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공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만년에 초서(초서)와 예서(례서)의 두 가지 체로 《천자문(천자문)》을 써서 집에 간직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가 귀중한 보물로 여기며 감상하였다. 공의 언행(언행)과 시문(시문)을 정시남(정시남) 사문(사문)이 수집하여 책을 만들었으나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모두 재가 되었고, 단지 유고(유고) 3권만 남아 있고, 또 편찬한 진양지(진양지)가 있다.
배위 밀양박씨(밀양박씨)는 만호(만호) 사신(사신)의 딸이자 병조 판서 증 좌의정 익(익)의 6대손이다. 성품이 엄숙하여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6년 먼저 별세하여 본주(본주) 송곡(송곡)에 장사 지냈다.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박은 진사이고 세마(세마) 이흘(리흘)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한영(한영)·해영(해영)·낙영(락영)·제영(제영)이고 사위는 안몽진(안몽진)이다. 둘째 용(용)은 조광현(조광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우후(우후) 수영(수영), 통사랑(통사랑) 사영(사영), 문영(문영)이다. 셋째 횡(횡)은 유제(류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창영(창영)과 무공랑(무공랑) 호영(호영)이다. 넷째 순(순)은 진사 박민(박민)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원영(원영)과 진사 치영(치영)이다. 다섯째 황(황)은 직장(직장) 하경(하경)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기영(기영)·운영(운영)·만영(만영)이다. 장녀는 이윤(리윤)에게 출가하여 딸을 낳았는데, 사위는 안창한(안창한)이다. 둘째 딸은 동지(동지) 최설(최설)에게 출가하였다. 지금 6대, 7대가 되었는데, 내외 자손이 몇 명인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 공은 훌륭한 재덕(재덕)을 지닌 분으로서 끝내 시골에서 늙었고, 몸이 죽어 지하에 들어가자 유적(유적)이 없어진 지가 1백 50여 년이 되었다. 하늘이 이러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서 보답하는 이치를 끝내 증험할 수 없게 하였으니 선행을 하는 자들을 무엇으로써 격려할 수 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80여 년이 되어서 사림(사림)이 추모하던 끝에 향선생(향선생)을 사(사)에 제사하는 의식을 거행하여 공을 임천사(림천사)에 배향하였다. 공의 6대손 동망(동망)이 가장(가상), 연보(년보) 및 유집(유집)을 소매 속에 넣고 그의 사형(사형) 동익(동익) 및 족질(족질) 사렴(사렴)의 뜻으로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떻게 선배들의 덕행을 표현하는 글에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이가 많아 죽음이 다가온 처지인데 무슨 정력으로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동망씨가 간절히 청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천리 길을 찾아온 것은 실로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바라건대 유념해 주소서.” 하였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이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니 문장을 잘하고 못하는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가장 및 연보와 본집(본집)을 가져다 한결같이 그 내용에 따라 간추리고 증감하였으되 나도 모르게 문장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공의 언행 가운데 빠진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상세히 기재하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의 일에 목숨을 바친 증 공조 참의(증공조참의) 송공(송공) 행장 을사년


공은 휘가 빈(빈)이고 자가 사신(사신)인데, 청주(청주) 사람이다. 5대조 사성(사성) 휘 승은(승은)이 처음으로 영남의 김해(금해)에 거주하였고, 고조는 참군(참군) 숙형(숙형)인데 훌륭한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탁영(탁영) 김일손(금일손)과 서로 친한 벗이었다. 증조는 생원 유선(유선)이고, 조부는 절제사(절제사) 경(경)이다. 선고(선고)는 절제사 창(창)인데, 진사 김태석(금태석)의 딸인 분성 김씨(분성금씨)에게 장가들어 가정(가정) 임인년(1542, 중종 37)에 김해부(금해부) 서쪽의 하계리(하계리)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기특하고 뛰어난 자질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세 때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문리(문리)가 갑자기 통하였고, 간혹 지은 시구(시구) 중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앞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적에 장사꾼 몇 사람이 사인(사인)의 차림을 한 채 강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공을 부르되 반말로 너라고 하였으므로 공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사꾼들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너도 와서 먹어라.” 하자 공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행동을 보니 장사꾼들이 분명한데 장사꾼으로서 감히 사인에게 너라고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리고 그물을 걷어 올리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하찮게 보는 것은 필시 이것 때문일 것이다.” 하고 그물을 태워버렸다. 이에 그들 중 연장자 한 사람이 나와 절하며 말하기를, “동자의 기상이 매우 비범하니 필시 귀인이 될 것입니다.” 하고, 사과하며 떠나갔다. 그리고 10여 세 때 우슬암(우슬암)에서 독서하였는데, 나무꾼 아이가 까마귀를 잡았기에 공이 그 아이에게 말하기를, “이 새는 어미에게 먹이를 먹여 은혜를 보답하는 새로서 옛 사람이 ‘새 중의 증삼(증참)이다.’라고 하였으니,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까마귀를 달라고 하여 놓아주었더니, 듣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효성과 우애의 마음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소학)》의 도리에 따라 온화한 모습으로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가 6명인데 공은 둘째로서 형에게 공경하고 아우들을 사랑하여 화락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장성해서는 효제(효제)를 행하는 여가에 과거 공부를 익혀 향시(향시)에 다섯 번 합격하였으나 예부(례부)의 복시(복시)에 연달아 낙방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문장의 명성이 알려졌다. 공은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도 끝내 쓰임을 받지 못하자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스스로 학문과 행실을 수양하였다. 성품이 강개(강개)하여 절의를 지녔고 일을 당했을 때 용단을 내려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가 와서 질문하였다. 공이 웅천(웅천)의 수령과 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갔었는데, 그 때 약탈을 일삼는 왜적(왜적)들이 그 고을에 쳐들어왔다. 본관 수령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허허실실(허허실실)은 병가(병가)의 실정인 것이다. 이들이 한때 약탈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함부로 인심을 소요스럽게 하지 않아야 될 것이니, 성문(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왜적들도 의심하고 물러갈 것이다.”고 하자, 수령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방어하는 데 있어서 계책이 없었기에 공의 말대로 하였더니, 적들이 과연 의심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일로 인하여 공이 또 지략이 훌륭하다고 알려졌다.
만력(만력) 임진년(1592)은 바로 우리 선조대왕(선조대왕)께서 재위한 지 25년이 되는 해인데, 이 해 5월에 왜적이 대대적으로 출동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13일에 상륙하여 부산(부산)을 함락시키자 첨사(첨사) 정발(정발)이 전사하였고, 15일에 동래(동래)를 함락시키자 부사(부사) 송상현(송상현)이 전사하였다. 김해(금해)는 동래와 가까운 곳인데, 본관 수령 서예원(서례원)은 본시 겁이 많아 큰 일을 할 수 없는 자여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그는 공이 온 고을의 명망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공은 집에서 변란의 소식을 들었는데, 장자 정백(정백)이 팔성사(팔성사)에 가서 독서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받지 못한 선비지만 평생의 뜻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지금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본관 수령과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네가 같이 따라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아버지는 충성에 목숨을 바치고 아들은 효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너는 급히 집에 돌아가 너의 어머니 및 아우와 함께 멀리 피란하여 선대(선대)의 혈맥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정백이 울면서 소매를 잡고 함께 따르려고 하자, 공이 끝내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과 효도는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기가 어려운 것이거늘 나는 충성하고 너는 효도하는 것이 어찌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소매를 자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떠나갔다. 서예원이 공을 만나 보고 매우 기뻐하여 중군(중군)의 직임을 맡기며 말하기를,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인데 문관(문관), 무관(무관)의 직임을 따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군(군)은 사류(사류)이지만 이 고을의 명망이 군보다 더한 사람이 없으니, 이 직임을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공이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직임을 받았다. 그리고 장졸들을 소집시키고 맹세하기를,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은 것은 신자(신자)의 분수이다. 지금 왜구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저들을 맞이하여 항복하겠는가? 아니면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겠는가? 더구나 이 김해부(금해부)는 바로 적의 침입로에 있어서 요충지이니, 그야말로 당(당) 나라 때 장순(장순)이 수양(휴양)을 사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김해부를 사수하지 못하면 영남이 적에게 함락되고 영남이 함락되면 국가가 망하게 된다. 죽기는 똑같은 것이니, 차라리 국가에 목숨바쳐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살아서는 수치를 받고 죽어서는 자손들에게 부끄러운 덕을 남겨주겠는가.”
하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같은 고을의 벗인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 등을 발탁하여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이인지(리린지)에게 군량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사수의 계책을 하였다. 며칠 후 적들이 와서 성을 포위하였는데, 공이 밤중에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의 수급(수급) 수백을 베자 적이 도망쳤으므로 죽도(죽도)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적선(적선)이 바다를 덮으며 왔으므로 공은 성에 들어와 성을 보수하고 지켰다. 이 때 밖으로 구원병이 끊겼고 안으로 군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적과 밤낮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서예원은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북문(북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항언(항언)하기를,

“성주(성주)께서 나라의 많은 은총을 받아 한 지방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나라의 은총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도리어 거취(거취)를 경솔히 함으로써 인심이 흩어지게 한다면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자, 서예원이 떠나가지 못했다. 19일 밤에 적들이 들녘의 보리를 베어다 성 아래에 쌓아 참호(참호)를 메우고 쳐들어왔으므로 그 세력을 당하지 못하여 성은 끝내 함락되고 서예원은 북문으로 도망쳐 진주성(진주성)으로 갔으며, 주장(주장)이 없어지자 사졸들은 흩어졌다. 이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홀로 싸웠는데, 적들의 칼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화살이 집중되었다. 적들이 투항하라고 소리치자 공이 분노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남은 군졸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싸움을 그만두지 않다가 적의 창에 맞아 죽었는데, 바로 이달 20일이었다. 이 일을 부하 양업손(량업손)이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전하였으니, 아, 장렬하여라. 공의 충렬(충렬)이 끝내 조정에 알려져 난이 끝난 뒤에 공에게 공조 참의(공조참의)를 추증하였다.
공의 배위는 안동(안동) 권윤(권륜)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정백(정백)은 진사이다. 고상한 품행을 지녀 광해군 때에 북당(북당)에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동계(동계) 정온(정온)이 지은 만사(만사)에 “북당의 거센 세력에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라, 남쪽 지방에 한 사람만이 있었네.[북풍심불변 남국일인존]”라고 한 구절이 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제현(제현), 제성(제성), 제문(제문), 제원(제원)이고 딸은 정희점(정희점)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정남(정남)은 2녀를 두었는데 곽홍전(곽홍전), 곽홍곤(곽홍곤)에게 출가하였고 형의 아들 제성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참봉 조원해(조원해), 참봉 안후개(안후개)에게 출가 하였다.
공은 전사(전사)하였기에 의관(의관)조차도 수습하여 장사 지내지 못했으므로 분묘가 없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해마다 선영(선영)의 곁에서 제사를 지낸다. 배위는 묘가 모지(모지)에 있다고 한다. 117년이 지난 무자년(1708, 숙종 34)에, 임진년에 순절(순절)한 충무공(충무공) 이순신(리순신)의 후손인 부사(부사) 이봉상(리봉상)이 주지(주지)를 열람하다가 공의 사적(사적)을 보고 개연(개연)히 감탄하여 사림(사림)들에게 권고하여 충렬사(충렬사)란 사당을 건립하고 공을 제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바로 초(초) 나라의 굴원(굴원)이 국상(국상)을 지은 뜻이다. 내가 국상을 읽어보건대 그 가사에,

방패를 잡고 무소가죽의 갑옷을 입었음이여 / 조오과혜피서갑
양쪽 수레가 마주치자 칼을 잡고 싸우네 / 차착곡혜단병접
라고 한 것은 양쪽이 서로 무기를 잡고 접전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수레의 두 바퀴를 묻고 네 마리 말을 메어둔 채 / 매량륜혜집사마
북채를 잡고서 북을 두드려 울리네 / 원옥포혜격명고
라고 한 것은 자신을 잊고서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고,

긴 칼을 차고 진에서 생산되는 활을 잡았음이여 / 대장검혜협진궁
머리와 몸이 둘로 나뉘어지더라도 마음은 떨리지 않네 / 수수리혜심불징
라고 한 것은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 것이고,

몸은 이미 죽었지만 신명은 영특하여라 / 신기사혜신이령
혼백이 강하여 귀신의 우두머리가 되었네 / 혼백의혜위귀웅
라고 한 것은 아름다운 혼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초 나라 사람은 국가의 수치를 중하게 여기고 국난(국난)에 달려가는 것이 이처럼 절실하였다. 그러므로 초 나라가 종말에 ‘세 집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진(진)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왜적이 한창 쳐들어 올 때의 상황은 지난날 삼포(삼포) 및 오도(오도)에 일시적으로 약탈한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고, 온 나라의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는 기세야말로 실로 천지를 뒤덮어 버릴 듯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태평 시대의 안일한 끝에 훈련시키지 않은 군졸들과 견고하지 못한 성(성)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때 주장(주장)이 도망쳐 인심이 이미 해이해졌고 고을의 문무관들이 모두 쥐처럼 숨어 버렸는데, 공은 백면 서생(백면서생)으로서 피범벅이 된 채 눈물을 삼키며 나라에 몸을 바쳐 죽으면서도 후회할 줄 몰랐으니, 그야말로 공의 충정은 일월처럼 빛난다고 이를 만하다. 이 때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도 공을 따라 죽었고, 이후 충의(충의)의 선비들이 잇따라 일어나 적들이 끝내 패망하여 돌아갔으니, 이것은 나라에 목숨을 바친 공의 영혼의 공렬인 것이다.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관직을 추증하여 표창하는 일이 있었고 후임 수령이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있었으니 아, 훌륭하도다. 그런데 영종조(영종조) 때 각도(각도)의 서원(서원) 가운데 함부로 설치된 것은 설치 연도를 따져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이 때 공의 사당도 철폐 대상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한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금상(금상) 계묘년(1783, 정조 7)에 본읍(본읍)의 사론(사론)이 다시 일어나 도백(도백) 및 어사(어사)에게 정장(정상)하여 끝내 다시 건립하였다. 공의 후손인 태증(태증)이 진주 목사(진주목사) 이규년(리규년)의 장문(상문)을 가지고 와서 다시 나에게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당시의 사실을 널리 찾아 내어 대략을 서술함으로써 김해(금해) 사림들에게 수정을 받아 사관(사관)이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선교랑 증 사헌부 지평 파록 황공 행장(선교랑증사헌부지평파록황공행상) 병오년


공의 휘는 여구(여구)이고 자는 인로(인로)인데, 선조는 창원(창원) 사람이다. 원조(원조) 충준(충준)이 고려에 벼슬하여 시중(시중)을 지냈고, 3대를 지나 거정(거정)이 조선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개국공신)에 참여하여 형조 판서를 지냈는데 공에게 9대조가 된다. 증조 휘 도(숙)는 돈녕부 도정(돈녕부도정)인데, 선묘(선묘) 계사년(1593, 선조 26)에 대가(대가)가 영유현(영유현)에 머물 때 공이 현령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물품을 바쳤으므로 상이 가상하게 여겨 유소보결(류소보결)과 화각채필(화각채필)을 하사하였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집에 전해지고 있다. 조부 휘 재중(재중)은 김포 현령(금포현령)이고, 선고(선고) 휘 집(집)은 홍천 현감(홍천현감)이다. 선비(선비) 청송심씨(청송침씨)는 판관(판관) 제겸(제겸)의 딸이고 부원군(부원군) 강(강)의 손녀인데, 인조(인조) 기묘년(1639, 인조 17)에 정려문(정려문)을 하사하였다. 심씨는 씨족이 성대하고 관직이 고귀하였는데, 판관의 형인 의겸(의겸)이 국정을 담당하여 세도를 부리면서 현감공이 사림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어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감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청론(청론)이 중시하였다.
공은 만력(만력) 무신년(1608, 선조 41) 5월 2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준수하고 특이하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좌우에서 힘든 일을 수행하고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현감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며 말할 때마다 효자라 하였다. 장성해서는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에 노력하였으며, 책을 읽다가 옛 사람이 효도와 의리를 행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책을 덮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기를, “선비는 기개와 절의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고무되어 분발하였다. 약관(약관)의 나이가 지났을 때 올바른 행실로 명성이 알려져 여러 차례 천발(천발)에 올랐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현감공이 홍산(홍산)의 농장에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이 훼손되어 상(상)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는데, 공이 상구(상구)를 잡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픔으로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고 상제 노릇 하기를 예도에 지나치게 했으므로 모친이 걱정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너의 집이 본시 효성으로 알려졌지만, 부자 모두가 상중에 죽을 경우 이것은 예도에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노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감격하여 울면서 모친의 명을 받들고 양천(양천)의 선산에 상구를 모시고 와서 장사 지냈으며, 이어 모친을 모시고 묘소 아래에서 여묘(려묘)살이를 하였다. 이 때에 오랑캐가 쳐들어 온다는 경보(경보)가 있어서 인심이 술렁이며 두려워하였으므로, 공이 모친을 모시고 다시 홍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차마 묘소의 곁을 멀리 떠날 수 없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 해 12월에 오랑캐가 군대를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여러 고을이 붕괴되자 상이 황급히 남한산성(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대신들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강도(강도)에 피란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하급 관직의 반열에조차 들지 못했지만 임금께서 외로운 성 안에 가 계시고 부친의 상을 마치지 못한데다 분묘가 이곳에 있으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종묘·사직이 있는 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온 가족을 데리고 강화(강화)에 들어가 마니산(마니산) 서쪽 기슭에 우거하였다. 공이 친구들과 약속하기를,

“이와 같이 지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죽음을 도피한 사람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것 또한 기필할 수 있겠는가. 이곳에는 피란 온 사람들이 많다. 나는 상복을 입은 사람이어서 전쟁의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바이다. 하지만 서로 단결하는 것은 국가와 사가(사가)를 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니, 제군(제군)들은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는가.”
하자, 여러 사람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피란 온 사우(사우) 및 서민(서민), 노복(노복)들을 소집하여 얼마쯤 되는 인원을 얻고 군대를 편성하여 나루를 지키고 요해지(요해지)를 점거함으로써 적의 목을 베거나 생포한 것이 많았다. 이에 피란 온 사람들이 많이 와서 1개 부대를 이루어 ‘황모(황모)의 군대’라고 칭하였는데, 그것은 그 계획이 공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때 검찰사(검찰사) 김경징(금경징)은 바로 원훈(원훈) 김류(금류)의 아들로서 교만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였고, 부사(부사) 이민구(리민구)는 일개 문인(문인)이었는데, 이들은 말하기를, “강화는 대강(대강)이 있는 천연의 요해지이므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하며 밤낮으로 연회를 즐기면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분개하여 상복차림으로 그의 막하(막하)에 가서 높은 음성으로 말하기를,

“이 때가 어떠한 시기인데 공 등은 날마다 술을 실컷 마시고 연회를 크게 벌이며 군무(군무)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급하게 되고도 신자(신자)들이 목숨을 보전한 경우란 없었다.”
하고, 이어 의병(의병)들에게 무기와 화약을 지급할 것을 청했는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경징 등이 좋지 않게 여기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집에 돌아와 모친께 아뢰자, 모친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는 각자 스스로 조치해야 할 뿐이다.”
하고, 이후로 상복을 벗지 아니하며 몸을 단속하고 집에 전해 온 문서들을 수습하여 별도로 보관하였는데, 공이 그 뜻을 알고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오랑캐가 강을 건너와 강화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의병이 진영을 마니산 아래에 옮겼는데, 오랑캐의 기병(기병)이 수없이 몰려와 그들의 칼날이 닿는 데마다 피가 흘러 길바닥을 덮었다. 공은 의병들과 힘을 다하여 방어하였지만 강대한 적에게 약소한 군사로써 대적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이 눈물을 흘리며 의병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국가를 위하여 이 일을 수행해 왔으니 끝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이 죽는 것은 국가에 아무런 이익이 없을 터이니, 수영(수영)에 가 있으면서 3도(도)에 격문(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소집한 다음 동쪽으로 가서 근왕병(근왕병)이 되는 것만 못하다.”
하자, 의병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모친 및 가족들을 데리고 의병들을 이동시켰는데, 미처 배를 출발시키지 못했을 때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몰려왔다. 모친이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갑자기 물 속에 뛰어들자 공이 다급한 소리로 크게 울부짖으며 바다에 따라 들어가 죽었으니, 바로 정축년(1637, 인조 15) 1월 25일이었고 이 때 공의 나이가 30세였다.
함께 따라 죽은 사람은 별좌(별좌) 유춘(유櫄)의 아내와 금구 현령(금구현령) 조견소(조견소)의 아내 및 딸이었고, 공의 어린 아우 흥호(흥호)와 출가하지 않은 누이도 물에 빠져 함께 죽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뒤에 득운(득운)이란 종이 얼음덩이 속에서 누이의 시체를 찾아냈는데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 뒤에 충현공(충현공) 이돈오(리돈오)의 아들 후성(후성)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한 가문에 순절(순절)한 사람이 이처럼 많은 까닭은 어쩌면 천지의 정직한 기운이 공의 일가에만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장렬하여라. 숙종(숙종) 을묘년(1675, 숙종 1)에 정려문(정려문)을 하사하고 영조(영조) 기사년(1749, 영조 25)에 지평(지평)을 증직하였다.
공의 전배(전배) 증 숙인(증숙인) 청송심씨(청송침씨)는 심지하(침지하)의 딸로 일찍 죽어 무후하였는데, 역촌(역촌)의 술좌(술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후배(후배) 증 숙인 양천허씨(양천허씨)는 증 이조 판서 요(요)의 딸이자 악록(악록) 성(성)의 손녀이며 초당(초당) 엽(엽)의 증손녀인데, 시례(시례)의 가문에 태어나 부덕(부덕)을 모두 지녔다. 공이 순절하던 날 아침에 첫돌이 지난 아이를 업고 의창군(의창군 선조(선조)의 서자(서자) 이광(리광))이 거처하는 집에 갔었는데, 군부인(군부인)은 바로 숙인의 고모이고 숙인의 어머니 이씨(리씨)가 그 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노(궁노)가 배를 대어 기다리고 있을 때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다가왔으므로, 이씨가 숙인을 데리고 같이 타고 교동(교동)으로 가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숙인이 직접 공이 죽은 전쟁터에 가 보았는데, 늙은 여종 몇 사람과 마을 사람 가운데 얼음 속에 숨어 죽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자세히 전하였다. 숙인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며 갯벌을 걷고 물 속을 헤매면서 하늘과 신명에게 기도하였고, 사람들을 모집하여 표류하는 시체들 속에서 공과 가족들을 찾아 내게 하되 자신이 바느질한 옷의 혼솔과 차고 있었던 물건들을 가지고 식별하였다. 7일이 지나서야 심 부인(침부인) 및 공의 시체를 끌어 냈는데, 얼굴 모습이 산 모습과 같았고 상복을 묶은 것이 이전 그대로였다. 숙인이 직접 염(감)하고 관(관)에 넣어 양천(양천) 남산역(남산역)의 해좌(해좌)의 자리에 장시 지냈다. 숙인이 공의 시체를 찾을 때 피란 온 사람들 중 자기 부모의 시체를 찾은 사람이 많았고, 자손이 없는 시체에 대해서는 숙인이 집을 팔고 재물을 모아 묻어주었으니, 아, 훌륭하여라. 이것이 어찌 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숙인은 공보다 2살 아래이고 공보다 28년 뒤에 죽었으니 바로 현종(현종) 갑진년(1664, 현종 5) 3월 27일이다.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고, 숙종(숙종) 을묘년(1675, 숙종 1) 정려문(정려문)을 내렸다.
1남 의를 두었는데, 의는 화변을 겪은 이후로 매우 애통한 마음을 지녀 종신토록 서쪽으로 중국을 향하여 앉지 않았고 갑신년(명(명) 나라가 청(청) 나라에 망한 해임) 이후의 달력을 보지 않았으며, 아들들에게 과거(과거)를 보지 말도록 하다가 손자 대에 이르러 응시하도록 하였다. 아들이 5명인데 우일(우일)·우청(우청)·우성(우성)·우천(우천)·우서(우서)이고, 딸이 6명인데 윤협(윤협)·이명설(리명설)·이세익(리세익)·윤봉기(윤봉기)·이기령(리기령)·조형망(조형망)에게 출가하였다. 우일은 3남을 두었는데 섬(섬)·정(정)·민(민)이고, 2녀는 권세연(권세연)·허식(허식)에게 출가하였다. 우청은 2남을 두었는데 호(호)·정(정)이고, 딸은 이진백(리진백)에게 출가하였다. 우성은 3남을 두었는데 진사(진사) 최(최), 담(담), 무과(무과) 만(만)이고, 4녀는 이지영(리지영)·권돈(권돈)·박사원(박사원)·유형기(류형기)에게 출가하였다. 우천은 2남을 두었는데 욱(욱)과 진사 흡이고, 딸은 이규(리규)에게 출가하였다. 우서는 5남을 두었는데 문과 현감(문과현감) 빈(), 문과 면(면), 인(▼), 윤(▼), 성(성)이다. 외손 및 증손, 현손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주역(주역)》에 “사람의 도리는 인(인)과 의(의)다.”라고 하였는데, 인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는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지금 공이 충효를 실천한 것을 보건대, 죽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인의의 도리를 다한 경우라 이를 만하다. 세교(세교)가 쇠퇴한 이후로 인의의 도리가 밝지 못하고 충효의 행실을 들을 수 없을 뿐더러, 부모를 망각하고 임금을 배반하는 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아, 누구인들 남의 자식된 사람이 아니며 누구인들 남의 신하된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의 유풍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 뜻을 세우게 될 것이다. 어찌 백이(백이)의 유풍을 들어야만 뜻을 세우겠는가. 또한 붓을 잡은 군자(군자)가 기록하기를 바라는 바이기에 가장(가상)에서 뽑아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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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처사 불우헌 정공 행장(처사불우헌정공행상) 갑진년

공의 휘는 상점(상점)이고, 자는 중여(중여)이며, 본관은 수양(수양)인데, 고려 때 시중(시중) 휘 숙(숙)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역(역)이란 분은 태조(태조)와 태종(태종)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좌찬성)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도공(정도공)인데, 바로 공의 11대조이다. 4대를 지나 진사로서 이조 참판(리조참판)에 추증된 휘 희검(희검)이란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백씨(백씨)인 허암 선생(허암선생) 희량(희량)이란 분과 함께 수학하였다. 연산군(연산군)의 정치가 혼란한 때를 당하여 허암이 은둔하자, 참판공도 과거(과거)를 그만두고 시(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면서 호를 계양어은(계양어은)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이 그의 절의를 훌륭하게 여겼다. 또 3대를 지나 호가 농포(농포)이고 휘가 문부(문부)인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문무(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선조(선조)의 임진왜란 때 북평사(북평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토적)을 주벌하고 왜적을 몰아냈으니, 그 일이 국사(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관직은 병조 참판이었는데, 인조(인조) 갑자년(1624, 인조 2)에 시안(시안)에 연루되어 무함을 받아 화를 당했다. 뒤에 비록 신원(신원)되어 이상(이상 좌찬성(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충의)’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슬퍼하고 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고려 때부터 농포공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사이에 대대로 관직을 계승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이름난 성씨이다. 증조의 휘는 대륭(대륭)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으며, 가화(가화)를 당한 이후로 애통한 마음을 지닌 채 백씨(백씨) 진사공(진사공) 모(모)와 함께 남쪽으로 진양(진양)에 와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손들이 그 고장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 조부의 휘는 유인(유인)이다. 선고의 휘는 구(구)이고 호는 노정헌(로정헌)인데, 지조와 기개를 지녔고 문장을 숭상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남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증, 조, 부 3대가 모두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은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이다. 선비(선비) 청주한씨(청주한씨)는 통덕랑(통덕랑) 석운(석운)의 딸이자 현감(현감) 시중(시중)의 손녀로서 부덕(부덕)을 지닌 현숙한 분인데, 명릉(명릉 숙종의 능호) 계유년(1693, 숙종 19) 11월 17일에 고을의 동쪽에 있는 용암리(룡암리)의 사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외우기도 잘 하였는데, 7, 8세 때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구를 많이 지었다. 11세 때에 동지(동지)에 대해서 지은 시에,

북두 자루가 자방(자방)에 돌아오자 / 두병초회임계간
하늘의 양기가 땅 속에서 자라나네 / 천양일기지중생
하니, 노정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치를 연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씨(정씨)의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세 때에 경서(경서), 사서(사서)를 모두 통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기이한 병에 걸려 근 10년이 지나서야 병이 약간 회복되었다. 그런데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더해진다’는 경계에 유의하여 과거(과거)를 그만두었으며, 단지 독서하고 수양하는 데에만 힘쓰면서 번화한 세상의 명리(명리)와 부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데는 모두 예절대로 하였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노정공이 관찰사(관찰사)에게 미움을 받아 체포되어 달성(달성)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공은 애통한 심정이 너무도 깊어 종신토록 달성 땅을 밟지 않았다. 먼 곳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는데 차마 오래 떨어져 있지 못하여 자주 찾아가 보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며, 서제(서제)도 사랑하여 어루만지기를 친아우처럼 하였다.
예법으로 가정을 다스렸으므로 집안이 엄숙하여 내외의 분별과 장유(장유)의 질서가 엄격하였고, 여러 자손들을 옳은 도리로써 가르치고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기에 모두가 가르침을 따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을에서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집안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람을 접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화평하게 대하고 진심을 환히 내보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과 벗들이 걸핏하면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접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모두 샀다. 그리고 이 때 당론(당론)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각자 편견을 가졌지만 공은 모두 의리에 따라 절충하여 말하고 자신의 호오(호악)에 따라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편들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과오를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리고 곤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경우에는 인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였다. 취할 만한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은 데려다 기르기도 하고 지도하여 성취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전에 외가댁의 눈먼 종이 먼 길에 얻어먹으면서 찾아왔기에 공이 가엾게 여기고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어 그로 하여금 점을 쳐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어린 종이 실명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에게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을 구제하는 인자한 마음은 천시하는 사람도 버리지 않았으니, 그것이 바로 군자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공은 본성이 청렴 결백하여 손으로는 돈을 만지지 않고 입으로는 재물을 말하지 아니하면서 늘 《맹자(맹자)》의 “불의(불의)의 재물은 하찮은 물건도 갖지 않는다.”는 뜻을 지녔다. 함안(함안)에 있는 큰 사찰(사찰)은 바로 사자(사자)들이 학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그 절의 중들을 통영(통영)에 역부(역부)로 소속시키려 하자 중들이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공이 통제사(통제사)와 친밀하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한 번 말해주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그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에 중들이 공의 주선을 은혜롭게 여겨 1백 꿰미의 돈을 가져와 사례하였는데, 공은 웃으며 되돌려 보냈으며, 이후로 여러 아들에게 다시 그 절에 가서 공부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말을 사서 수년 동안 기르며 타다가 가족이 다시 본전을 받고 판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알고 가족에게 말하기를, “수년 동안 타고 다니다가 어떻게 본전을 받고 팔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말을 산 사람을 뒤쫓아가 다시 값을 깎아 차액을 돌려주자 그 사람은 놀라 감사해하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 일을 정도에 지나친 처사라고 하니, 공이 이르기를, “당신들은 비록 정도에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에 불안하다.” 하였다.
공이 평소에 좋아한 것은 단지 서적(서적)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서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서 간직하기도 하고 빌려서 베껴 놓기도 하였으므로 장서(장서)가 수천 권이 되었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서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빌려오지 않으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처가댁은 내가 혐의를 피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노정공이 본시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서 조송설(조송설 조맹부(조맹부)의 호)의 서첩(서첩)을 빌려와 미쳐 돌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서첩의 주인도 자손이 없이 죽었다. 이에 공은 그에게 촌수가 먼 일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서첩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가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한호(한호)의 서첩을 매제(매제)인 송군(송군)이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주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는데, 송군이 죽자 공이 제문에 그 뜻을 말하고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은 병을 요양하며 한가롭게 지낼 때에도 매우 아픈 때가 아니면 서책을 하루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과 담론할 적에는 고금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고 경서(경서), 사서(사서)의 내용을 논하였으며, 심지어 백가(백가), 패사(패사), 잡설(잡설)까지도 모두 알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경우에는 말이 진지하여 끊이지 않았으므로, 문학의 선비들 가운데 따르며 교유하는 사람이 많아 방문 밖에는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그리고 과거(과거)의 문장에는 종사하지 않았지만 박람하여 쌓은 학식이 많았으므로 시문(시문)을 지으면 문리가 정세하였으니, 학사(학사) 오원(오원)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오원은 바로 공의 외척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공은 또 인륜에 성실하여 처신이 엄정하였으니, 어렸을 때 정자(정자)가 주공숙(주공숙)에게 “짐승보다도 못하다.”라고 책망한 대목을 읽고는 그 말을 종신토록 마음에 지녔으며 아내 이외의 여색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마치 처자처럼 몸을 단속하였다. 그의 청백하고 고상한 지조와 화평하고 인자한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이었지만 모두 독서하여 실천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비록 학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실의 고상하기란 당대의 학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흡사하게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이 널리 대중을 사랑했고 교유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음에 서로 허여한 친구는 몇 사람에 불과하였는데, 우리 선군(선군)이 그러한 친구 중의 한 분이시다.
공의 병이 위독할 때 자손들이 곁에 둘러앉아 울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내가 계유년에 태어났는데, 오늘이 있을 것을 알았다. 사람의 생사는 일정한 이치이니 비통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며 전혀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 정침(정침)에서 고종(고종)하였는데 바로 정해년(1767, 영조 4) 4월 7일이었고, 향년은 75세였다. 부음(부음)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남주(남주)의 고사(고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고, 장사 지내는 날에는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왔으며, 그 해 7월 어느 갑일(갑일)에 영봉산(령봉산) 묘좌(묘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유고(유고) 2권이 있고, 또 시송(시송) 2편이 있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걱정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고금의 시율(시률)을 암기하면서 중간에 자신의 논평을 가하였고 만년에 또 추가하여 완성하였으니, 전후 각 1편이 모두 외우고 기억하여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아들들이 그 시송을 가져와 본문(본문)과 대조해 본 결과 한 자도 틀린 곳이 없었으니, 공의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다.
배위 안동권씨(안동권씨)는 통덕랑(통덕랑) 수창(수창)의 딸이자 문관 목사[문목사] 우형(우형)의 손녀인데, 현숙하고 화순하여 시가에 들어와 도덕에 위배되는 일이 없었다. 시부모를 섬기고 부군을 공경하며 자녀를 가르치고 비복을 거느리는 거조가 모두 법도에 맞았고, 인자한 은택이 이웃 사람들에게 미쳤으므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공의 가정은 본시 풍요(풍요)로웠는데 중년에 재산이 탕진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맡아 애써 모으고 빈틈없이 꾸렸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하였고 공도 생활의 경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훌륭한 인물이 된 데에는 부인의 내조가 한 몫을 했다.”고 하였다. 부인은 갑술년(1694, 숙종 20) 12월 28일에 태어나 병자년(1756, 영조 32) 1월 27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 영봉산(령봉산) 을좌(을좌)의 자리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는데 병신년(1776,영조52) 2월에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고을의 서쪽에 있는 마동(마동)의 경좌(경좌)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단(단)은 일찍 죽었고, 둘째 육(육)은 학문과 덕행이 있어 사우(사우)들의 추대를 받았는데 공이 죽고 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상하여 상복을 벗자마자 죽었다. 셋째는 훈(훈)이고, 넷째 근(근)은 숙부 상림(상림)의 양자로 갔고, 다섯째는 기(垍)이다. 장녀는 박인혁(박인혁)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아들은 전(전)이며, 차녀는 강간(강간)에게 출가하였고, 일곱째 아들은 식(식)이다.
단은 분성(분성) 허구(허구)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현의(현의)를 낳았다. 육은 한산(한산) 이맹화(리맹화)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의(진의), 탁의(탁의), 강의(강의), 찬의(찬의)이고 사위는 박지원(박지원)이다. 훈은 진양(진양) 하한장(하한장)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명의(명의), 굉의(구의), 황의(황의)이고 사위는 권무중(권무중)이며, 측실(측실)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박우상(박우상)이고 두 아들은 어리다. 근은 초취가 함양(함양) 여선함(려선함)의 딸인데 아들을 두지 못했고, 재취는 완산(완산) 최보천(최보천)의 딸로 1녀를 두었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탁의를 양자로 삼았는데 일찍 죽었고, 서자(서자), 서녀(서녀)가 두 명씩인데 아들은 약의(약의), 경의(경의)이고 사위는 이단중(리단중), 손은역(손은역)이다. 기는 함안(함안) 조희팽(조희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한 명은 감의(감의)이고 한 명은 어리며, 사위는 권경(권경), 하석규(하석규)이다. 박인혁은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천(형천)이고 사위는 이종운(리종운), 권태중(권태중)이며 나머지 아들과 딸은 아직 어리고 출가하지 못했다. 전은 진양(진양) 강필주(강필주)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의 아들 황의를 양자로 삼았다. 강간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현(사현)이고 사위는 윤석보(윤석보)이며, 두 딸은 어리다. 식은 진양 하덕원(하덕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의(련의)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친손, 외손, 증손, 현손이 80여 명이다.
나는 늘 기억나는데, 어렸을 때 보니 노정공(로정공)과 우리 조부님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고 공과 우리 선군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다. 서로 만났을 때 웃는 모습이 화기가 애애하였고 성의가 서로 미더워 어느 분이 주인이고 어느 분이 손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넷째 아들 근(근)이 가장(가상)을 지어서 그의 아우 기(垍)에게 주고는 천리의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이르게 하기를,

“우리 집의 일이 바로 공의 집의 일이니, 공께서 우리 양가의 교분을 생각하신다면 선친의 덕행을 기록하는 글은 공이 아니고 누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근, 기씨 형제와 나는 선대의 세의(세의)를 대대로 지키며 사귀어왔으므로 서로의 마음은 천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환히 통하는 사이이니, 당대에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기필코 나에게 행장의 글을 받으려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비록 몽매하고 고루하여 문장을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80세의 나이에 재주가 줄고 생각이 사라져서 실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리상으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기에 이상과 같이 삼가 서술하였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추곡 김공 행장(자헌대부지중추부사추곡금공행상) 갑진년


공은 휘가 정현(정현)이고 자가 중길(중길)이며 호가 추곡(추곡) 또는 송림(송림)인데, 경주인(경주인)으로서 신라의 국성(국성)이다. 시조는 인관(인관)인데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자 태사(태자태사)였으며, 몇 대를 지나 휘가 자수(자수)이고 호가 상촌(상촌)인 분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형조 판서였는데 충효의 절의가 있어서 혁명의 시기에 끝내 순절하였다. 이 분의 손자 휘 영유(영유)는 좌리 공신(좌리공신)에 참여하여 대사헌(대사헌)을 지냈고 시호는 공평(공평)이다. 공평공의 손자 휘 세필(세필)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문간)이다. 이 분이 바로 기묘 명현(기묘명현)의 한 분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십청헌 선생(십청헌선생)이라 부르는 분이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구()는 사직서 참봉(사직서참봉)을 지냈는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선경(선경)은 군자감 판관(군자감판관)을 지냈는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고(선고) 휘 순(순)은 생원(생원)인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선비) 청주한씨(청주한씨)는 부호군(부호군) 휘 광윤(광윤)의 따님인데, 만력(만력) 신묘년(1591, 선조 24) 7월 2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여 약관에도 이르기 전의 나이에 명성이 크게 퍼졌다. 계축년에 증광 생원시(증광생원시)에 합격했는데, 그 때는 광해군(광해군)의 정치가 혼란하여 이륜(이륜)이 두절된 시기였다. 공의 외숙인 한옥(한옥)이란 사람은 바로 북당(북당) 한찬남(한찬남)의 재종질로서 한찬남과는 마음과 힘을 같이하는 자였는데 공을 자기들의 당으로 끌어들이려고 마음먹고 편지를 보내어 공을 유혹하였다. 이에 공이 당시(당시)의 ‘석양이 매우 아름답지만 단지 황혼이 가까울 뿐이네.[석양무한호 지시근황혼]’란 구절을 인용하여 답하고 나서 모습을 감추고 문을 닫은 채 과장(과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반정(인조반정)이 있은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 과거에 응시하여 경오년(1630, 인조 8)의 별시 문과(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시속에 따르고 적당히 처신함으로써 청현직(청현직)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교서(교서)를 받들고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부모가 별세한 이후에는 더욱더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서 통례원 통례(통례원통례)로서 병을 핑계대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친지들과 기로계(기로계)를 맺었으니, 백향산(백향산)의 고사를 모방한 것이었다. 풍기 군수(풍기군수) 정증(정䎖)은 문장이 뛰어난 선비인데 그가 지은 서문에, “송림 김 선생(송림금선생)은 군자다운 사람이고 대부(대부) 중의 어진 분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세 조정[삼조]에 벼슬하였고 훌륭한 재능을 조금 발휘하자 다섯 고을에 구비(구비 대대로 칭송하는 말)가 전해졌네.”라고 하였으니, 공이 당시에 추중(추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그 후 우로(우로)의 은전(은전)으로 다시 중추부(중추부)에 들어가 첨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한성부 우윤(한성부우윤)을 지냈다. 숙종 을묘년(1675, 숙종 1)에 허미수 선생(허미수선생)이 전조(전조)의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도헌(도헌)에 의망(의망)하였으나 정사의 격식에 위배되어 시행되지 못했고, 지중추부사에 승진되었다.
이 해 8월 27일에 별세하였으니, 수는 85세였다. 부음(부음)을 아뢰자 조정에서 전례대로 예관(례관)을 보내어 치제(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제문)에,

경은 순수하고 성실한 성품에 / 유경순각지성
정직하고 결백한 자질을 지녔도다 / 정백기질
지난날 광해군의 혼조 때에 / 낭제혼조
시대가 혼탁한 것을 슬퍼하여 / 통시혼탁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고 / 념절환달
과장으로부터 종적을 끊었어라 / 적사과장
황혼이 가깝다는 한 구절은 / 황혼일어
외숙의 간담을 떨어지게 하였네 / 담파위양
천지가 다시 새로워지자 / 천지중신
금방에 이름을 드러냈어라 / 금방명천
겸손히 낭서의 지위에 있으면서 / 저수랑서
청현직을 바라지 않았네 / 불요화현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 오읍분죽
정치가 한결같이 청명하였어라 / 정청유일
돌아올 때에는 주머니가 텅 비었고 / 귀탁소연
집안에는 한두 섬의 양식도 없어라 / 가무담석
시골에서 지낼 계책을 지니고서 / 교비계존
만년에 홍로의 관직을 사직하였네 / 만사홍려
노년에 한가롭게 지내면서 / 우한모경
수양하며 스스로 즐겼어라 / 이양자오
나이가 많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 / 년고덕소
여러 차례 은수를 더하였도다 / 천가은수
잇따라 세 품계를 승진하여 / 련초삼급
추부의 높은 지위에 올랐네 / 위준추부
내가 즉위한 때에 이르러 / 체여사복
특별한 은전을 거듭 내렸어라 / 별전자신
경의 지위에는 아직 오르지 못했는데 / 경월미승
수성의 빛이 갑자기 사라졌어라 / 수성거륜
작위는 덕에 걸맞지 않았고 / 작불칭덕
우로의 은총도 내리지 못했네 / 은격우로
기로의 신하를 생각하니 / 면회기구
마음이 더욱더 슬프구려 / 심언증도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베푸니 / 견관설제
예전의 예법을 따르는 것일 뿐 / 식준고례
영령이 모르지 않는다면 / 령여불매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 / 흠차보궤
하였다. 모월일(모월일)에 광주(광주) 추령(추령)의 임좌(임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배위 정부인(정부인) 나주정씨(라주정씨)는 감찰(감찰) 언규(언규)의 딸로서 부덕(부덕)을 지녀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태어나 신유년(1681, 숙종 7) 2월 7일에 별세하였으니 수는 89세인데,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방(방)이고, 둘째는 만(만)이고, 셋째는 관(관)이며, 딸은 김영희(금영희)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측실)이 3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황(황)이고, 둘째는 온(온)인데 문과(문과)에 급제하여 음성 현감(음성현감)을 지냈고, 셋째는 영(영)인데 진사(진사)이며, 사위는 황덕창(황덕창), 김윤휘(금윤휘), 첨지(첨지) 이우창(리우창)이다. 방은 3남을 두었는데 재기(재기), 재후(재후), 재풍(재풍)이고, 만과 관은 모두 자손이 없었다. 증손, 현손이 매우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가정에 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을 가졌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 결백한 지조를 지키기에 힘썼으며, 혼란한 조정에 종적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성명(성명)의 시대에도 진출하려고 하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되 깨끗하여 누가 없었다. 집에는 사면의 벽만 있고 한두 섬의 곡식도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하게 여겼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는 기상이 청백하고 고결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분의 고절(고절)은 나약한 자를 서게 하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장(가상)이 유실되고 문헌(문헌)도 고증할 수 없어서 언행의 사실과 관직의 경력을 상고할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숙종께서 하사한 제문이 남아 있어 공의 평생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이 별세한 지 60년이 지나서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 충주(충주)의 말마촌(말마촌)에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그런데 뒤에 조정에서 별도의 사당을 금하는 금령을 내려 철거되었으니, 사림(사림)이 애석하게 여겼다.

소남 선생 윤공 행장(소남선생윤공행상) 을사년


선생은 성이 윤씨(윤씨)요, 휘가 동규(동규)이며, 자가 유장(유장)인데, 파평(파평) 사람으로서 고려 초기에 태사(태사) 신달(신달)의 후손이자 문숙공(문숙공) 관(관)의 24대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광묘(광묘 세조)의 국구(국구)인 파평부원군(파평부원군) 번(번)과 정릉(정릉 중종)의 국구인 파평부원군 지임(지임)이란 분이 더욱 현달한 분인데, 우리 나라의 대성(대성)을 말할 경우에는 파평윤씨를 으뜸으로 꼽는다. 증조는 충의위(충의위) 휘 명겸(명겸)이고, 조부는 통덕랑(통덕랑) 휘 성수(성수)이며, 선고는 생원(생원) 휘 취망(취망)이다. 생원공이 현감인 전주(전주) 이찬(리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후사를 두지 못했고, 통덕랑 덕수(덕수) 이성(리성)의 딸을 후취로 맞이하여 명릉(명릉) 을해년(1695, 숙종 21) 11월 25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릴 때 뛰어나게 총명하여 범상하지 않았다.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주흥사(주흥사)의 《천자문(천자문)》을 배웠는데, 세로나 가로로 외워도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9세 때에 선고를 여의었는데, 이 부인(리부인)이 올바른 도리로 가르치고 길러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문리(문리)가 갑자기 진취되었다. 일찍이 종조부의 집에서 《퇴계집(퇴계집)》을 보고 매우 좋아하여 여러 번 읽어보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자 종조부가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는 원질(원질)을 주었으니, 학문의 기초가 어렸을 때에 벌써 정해졌던 것이다. 성호(성호) 이 선생(리선생)은 우리 나라에 학문의 연원이 끊긴 끝에 태어나 경기 지방에서 도(도)를 강론하였는데, 선생이 제일 먼저 그분에게 학문을 배웠으니, 바로 선생의 나이가 17세 때인 신묘년(1711, 숙종 37)이었다. 이 선생이 선생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한결같이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성(경성)의 용산방(룡산방)에서 소성(소성)의 도남촌(도남촌)으로 이주해서 날마다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세간에 다시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선생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조모 한씨(한씨) 및 선비(선비)를 모시면서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의 아우 동진(동진)이 재주와 학식을 지녀 또한 성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슬퍼하였다. 한번은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우가 살아 있다면 이 도가 매우 외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아우의 인물도 또한 알 만한 것이다. 그리고 거상(거상)할 적에는 한결같이 예제(례제)를 준행하였으니, 선비의 상사와 조모 한 부인의 승중상(승중상) 때에 3개월 동안 죽을 먹었고 3년 동안 거친 밥에 수질(수질), 요질(요질)을 벗지 아니하였는데 시종 태만하지 않았으므로 군자들이 거상을 잘했다고 말하였다.
가정 형편은 본시 빈한하였는데 만년에는 더욱더 몰락하여 몇 칸의 초가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했고 10여 명의 식구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남에게 가난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말을 할 경우에는 이르기를,

“이러한 것이 천명(천명)인데, 모면하려고 한다면 천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했으며, 분수에 따라 고생스럽게 지내면서도 태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큰 아들의 상사 때 염(렴)을 하는 데는 묵은 솜을 사용하였고 멱악(멱악 시체의 얼굴을 덮는 천)으로는 검은 천을 썼으며, 대렴(대렴)에는 포교(포교)를 하지 않았고 상여는 말로 끌었으며, 명정(명정)을 요[인]로 깔았고 공포(공포)는 관(관)이 빈궁(빈궁)에서 나오자 사용하지 않았으며, 혼거(혼차)는 치워버렸고 삽(삽)은 식장(식장)에 세워 유황(유황)에다 매달았다. 이러한 것은 검소한 집에서 소략하게 치르는 예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 예의 본의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를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더욱더 신중하였다. 교하(교하)와 와동(와동)은 바로 두 분 부원군의 분묘가 있고 여러 대의 선영이 있는 곳인데, 선생이 여러 종족들과 시제(시제) 지내는 예를 강론해 정하고 해마다 자신이 직접 그 곳에 가서 제전(제전)을 올리고 이튿날에는 종친회를 가짐으로써 화목을 돈독히 하는 정의를 펼쳤고, 이러한 것으로써 영원히 일정한 규례로 삼았다.
만년에는 용산(룡산)의 옛 마을에 다시 살았는데, 마을 앞에 큰 강이 흘러 강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에 선생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여 ‘무우단(무우단)에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을 가졌고, 수레와 사람이 복잡한 시장거리에 살면서도 조금도 속세에 오염되지 않고 시원한 청풍(청풍)의 기상이 있었다. 아침저녁에 일어나 앉아 성현(성현)의 모훈(모훈)을 외우며 ‘즐거워 걱정을 잊은 채’ 일생을 마치려는 뜻을 가졌다. 계사년(1773, 영조 49) 6, 7월 사이에 복통과 설사의 증세가 있었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는 79세였다.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침상에서 지내면서도 《맹자(맹자)》 전질(전질)을 반복해 읽었는데, 이루편(리루편)의 ‘군자가 도에 깊이 나아간다’는 대문에 이르러 곁에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 문인(문인) 이제임(리제임)이 묻기를, “학문하는 공부 가운데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공경으로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경이직내] 의리로 행실을 방정하게 하며[의이방외] 학문을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히 하며[박학독지]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절문근사] 예로 행하고 겸손하게 드러내는것[례행손출]이니,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퇴계(퇴계)의 자명(자명)을 외우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글이 실로 내가 평소에 좋아한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자손이 유교(유교)를 청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입고 먹는 것을 가지고 남에게 구차스럽게 말한 적이 없으니, 스스로 귀신에게 물어 봐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너희들은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판서 채제공(채제공)이 선생의 병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약간의 인삼(인삼)을 보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 번도 이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의 생사가 어찌 이것을 먹고 안 먹고에 달려 있겠는가. 보내준 뜻은 감사하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하고 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예절은 임종할 때에도 이처럼 의리에 맞게 하였다. 끝내 8월 7일에 정침(정침)에서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도 정신이 또렷하여 조금도 혼란하지 않았으니 군자의 올바른 죽음이라 이를 만하다. 이해 10월 9일에 도남촌(도남촌) 술좌(술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명정(명정)에 ‘소남촌인(소남촌인)’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는데, 학자들이 ‘소남 선생(소남선생)’이라 불렀다.
배위 전주이씨(전주리씨)의 선고는 제인(제인)이고, 파곡(파곡) 성중(성중)의 6대손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부덕(부덕)을 지녔으며 선생보다 25년 먼저 죽었는데,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광로(광로)이고, 차남은 광연(광연)인데 광연은 숙부 동기(동기)에게 출계(출계)하였고, 청주(청주) 한형도(한형도), 은진(은진) 송광익(송광익)은 사위들이다. 광로는 신(신)과 위(愇) 2남을 두었고, 광연은 무후하였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도(도)를 지닌 스승에게 귀의할 수 있었다. 이 때 성호(성호)의 문하에 재주가 뛰어난 선비들이 있었지만,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 독실한 뜻을 가지고 힘써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갑자년(1744, 영조 20)에 이 선생께서 병이 위급할 때 선생을 불러 생전의 유언을 일러 주시되 도를 전하는 책임을 당부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사제(사제) 간의 전수함이 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병인년(1746, 영조 22)에 내가 이 선생을 뵈었더니 이 선생이 당대의 인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송(송) 나라 때 선비들이 ‘윤화정(윤화정)은 육경(륙경)의 말을 자기 말 외우듯이 한다.’고 칭찬하였는데, 오늘날 윤모(윤모)는 참으로 이 말에 부끄럽지 않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양웅(양웅)의 《태현경(태현경)》에 대해서 명(명) 나라 선비 몇몇 사람은, ‘《태현경》의 원본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고 하였는데 윤모는 한 번 보고서 환히 알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으니 지금 시대에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 때 순수(순수 이 맹휴(리맹휴)의 자)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윤장(윤장)은 주염계(주렴계), 정명도(정명도)의 기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유념하였다. 그 다음 해에 나는 도남(도남)의 혼인 석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처음으로 선생께 인사드렸는데, 뵈옵건데 선생은 풍모가 단정하고 언어가 자상하며 웃는 모습이 뚜렷하고 온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하였으니, 한 번 보고서도 성덕 군자(성덕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사칠이기설(사칠리기설)은 실로 《주자어류(주자어류)》에서 나온 것을 퇴계 선생(퇴계선생)이 《천명도설(천명도설)》의 서문에 기재한 것인데, 기고봉(기고봉)이 ‘사단(사단), 칠정(칠정)을 이(리)와 기(기)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에 의심하여 퇴계와 서신을 왕복하며 논변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논설이 그른 것을 깨닫고 퇴계와 일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율곡(리률곡)은 오히려 기고봉의 논설을 주장했고 그의 논설이 매우 많았다. 이로 인하여 퇴계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율곡의 논설에 이기일원(리기일원)의 병통이 있다고 하고, 율곡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퇴계의 논설에 이기호발(리기호발)의 병통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각자 문자를 지어 양쪽이 서로 배척하니 끝내 큰 의논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학자라 이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는 실제의 학문을 버리고 이 논설을 으뜸으로 여긴 결과 논쟁이 끝날 날이 없게 되었다. 이에 이 선생은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사칠신편(사칠신편)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단, 칠정의 명칭과 뜻은 인심(인심), 도심(도심)과 실상이 같고 명칭만 다른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합하여 하나로 만들 줄을 모르기 때문에 ‘사단, 칠정이 선(선) 한 쪽에 포함되었다.’는 말에 구애되어 논설에 각자 다른 폐단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 책을 받고서 말하기를, “이 책의 내용이 명확하고 상쾌하여 양쪽을 갈라 놓은 것과 같으니, 다시 논평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선생은 뒤에, 문인인 상사(상사) 신후담(신후담)이 “지각(지각)의 기(기)와 형기(형기)의 기, 이 두 ‘기(기)’ 자는 같지 않다.”고 하고, 또 “공리(공리)의 칠정과 인심은 또한 도심이다.”라고 하여 “공리의 희노(희노)는 이(리)의 발이다.”라는 설을 하였는데, 이 선생이 그 설을 따라 사칠신편의 발문(발문)을 다시 지었다. 이에 선생이 그 설에 대해서 변론하기를 “마음에는 본시 형기에 따라 발하는 것이 있다. 《중용(중용)》의 서문에서 이른바 형기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이 형기가 아니라면 이 지각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기란 용어를 활용성 있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성인)의 마음은 순전히 천리(천리)이기 때문에 희노가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인데, 그 모습을 찾아보면 끝내 형기에 돌아갈 뿐이다. 장남헌(장남헌)의 말에, ‘의리의 노여움은 이(리)의 발이라 하더라도 실로 불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나누어 말한다면 기(기)에서부터 발하는 것은 본시 그대로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 선생이 즉시 다시 지은 발문을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
선생이 이전에 말하기를, “사칠이기(사칠리기)의 변론에 대해서는 젊었을 때 대략 이해하고 있었으나 환히 알지는 못했는데, 깊이 생각하고 반복해서 나의 공심(공심)과 사심(사심) 사이에서 체험한 지가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조리가 분명하여 혼미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성인(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아래로 인사를 배우고 위로 천리를 깨닫게[하학상달] 하는 것에 불과한데, 인사를 배우는 공부를 미처 하지 않고 천리를 깨닫는 공부를 먼저 한다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단지 사단(사단)이 발할 때 확충시키고 칠정(칠정)이 발할 때 절도에 맞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정산(정산) 이경협(리경협)이 신후담의 논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고,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사칠이기설은 사칠신편과 서로 뜻을 발명하는 것으로서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주장을 이처럼 독실히 믿었다.
가정 안에서는 규범이 매우 엄숙하여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고, 사람들을 접대할 즈음에는 화기와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손님과 친지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고 함장(함장)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의견이 같더라도 그저 같은 것이 아니었고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힘써 의리가 올바른 경우를 따르려고 하였는데, 이 선생이 선생의 의견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며 가상하게 여긴 적이 많았다. 그리고 사문(사문)을 섬기는 데는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 가을에 이 선생의 병이 위독할 때 내가 가서 뵈었더니, 당시 선생이 시병(시병)하고 있었는데, 약제를 올리는 일을 직접 보살폈고 심지어 코나 가래와 대소변을 받아낼 무렵에도 자신이 직접 부축하며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고 밤새도록 의복을 벗지 않은 채 시병한 지가 여러 날이었는데도 조금도 태만한 뜻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나는 선생의 성의가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고 또한 스승과 어른을 섬기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소학(소학)》을 기본으로 삼아 순서에 따라 배우도록 하였으므로 7, 8세의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절하고 읍(읍)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알았으며, 재주가 높고 낮은 정도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달랐지만, 대체로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이리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은 학문을 한다 하면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하였는데, 선을 밝히고[명선] 자신을 성실히 하는[성신]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빠져도 학문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씩 쌓아가고 번민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세월이 갈수록 더욱더 독실해져야만 사물에 대응할 때 도리에 맞게 되어 쾌활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법은 《주자서(주자서)》에 다 들어있다. 문제자와 문답할 경우 사람에 따라 침(침)을 주듯이 교훈하였기에 후인들이 증세에 따라 치료하는 약이 모두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독자(독자)들은 자신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취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퇴계는 주자를 잘 배운 분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속에 천길의 절벽처럼 우뚝한 기개가 있으니, 퇴계는 바로 우리 나라의 주자이고 백세(백세)의 사범(사범)이다. 따라서 후학들은 퇴계를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의 학자들 가운데 비루한 자는 전주(전주)의 학문에 빠져들어 연구하는 것만을 일삼되 세속에 적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고상한 자는 신기한 논설을 좋아하여 별도로 문장을 만들되 남보다 우세하려는 뜻을 갖는다. 선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나쁘게 여겨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학문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라 하더라도 모두 남을 위하는 학문이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독서하는 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익숙히 읽고 세밀히 완미하여 본 뜻을 알려고 힘써야 한다. 이리저리 읽어 나갈 때 의심나는 데가 없을 수 없을 터이니, 의심나는 것은 수록하여 자신의 학문의 진도를 점쳐 보아야 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채취하고 여러 서적의 문구를 찾아내어 한 단락마다 자신의 말을 해야만 실학(실학)이라 하겠는가. 옛 사람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공력이 생략되는 법이니 자신의 의견으로 억측하여 이론(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면 마음이 벌써 다른 데에 가 있는 것이어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옛 사람의 서책도 오히려 다 읽을 수 없거늘 자신이 지은 서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저술한 문장 가운데 전할 만한 것이 없고 대략 지(지), 의(의) 몇 권만이 있다. 그리고 여러 경서(경서)에 대해서도 모두 설(설)을 지었다. 《서경(서경)》의 우공(우공)에 대해서는 별도로 산천연혁고(산천연혁고)가 있고, 《주역(주역)》에는 계사설(계사설)이 있고, 《춘추(춘추)》에는 불개월변(불개월변)·제희공설(제희공설)이 있고, 《주례(주례)》에는 종률합변의(종률합변의)·선궁구변동이변(선궁구변동이변)이 있다. 만년에는 《의례(의례)》에 대해서 더욱 공력을 다하였는데, 주(주)·소(소)가 너무도 많아 학자들이 다 읽어 볼 수 없는데다 주·소의 내용에 모순되는 데가 많으며, 《속통해(속통해)》의 취하고 버린 것도 허술하고 누락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례(가례)》에 대해서도 편차선후변(편차선후변)이 있는데, 이상의 변(변), 설(설)은 모두 변경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가례》의 변에 대해서는 나도 간여하여 논란한 것이 있었는데 일치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다.
선생은 여러 경서에 모두 통달하였지만, 매우 공력을 쏟은 것은 전적으로 사서(사서)에 있었다. 이리하여 늘 말하기를, “성현의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사서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일상 생활의 다반사(다반사)처럼 익히되 체험하는 공부를 한 순간도 중단이 있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공경과 의리를 같이 지녔고 마음과 행실을 함께 수양하였으므로, 위의(위의)와 거동의 법칙은 70년이 하루와 같았고 청렴한 지조와 고상한 절의는 진정 부귀와 빈천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기풍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당론(당론)이 유행하는 시대에 처해 있으면서도 실학을 말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추앙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러하였겠는가.
선생은 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을 개탄하고는 여러 사서(사서)를 참고하여 자수(자수)·열수(렬수)·패수(패수)·대수(대수)의 사수변(사수변)을 저술하였고, 상위(상위)·역법(력법)·지리(지리)·강역(강역)의 학문과 의방(의방)의 소문(소문)·운기(운기)와 산수(산수)의 개방(개방)·염우(렴우)의 법에 대해서도 모두 연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 여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하기를, “《태현경(태현경)》 및 《한서(한서)》의 오행지의(오행지의)와 하도낙서설(하도락서설)은 후대의 구양공(구양공)의 말에서 나온 것이니 이러한 것을 생각해 봐야 하고, 주염계(주렴계)의 《태극도설(태극도설)》도 《태현경》의 현리편(현리편)의 문장을 인습한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도·낙서의 본수(본수), 선천(선천)의 괘기(괘기), 경방(경방)의 벽괘(벽괘)와 감여술가(감여술가)의 분금(분금)·성도(성도)·납갑(납갑) 등이 모두 《태현경》에서 나온 것이니, 아마도 양웅(양웅)·엄장(엄장)·경방(경방)의 제자들이 각자 전수받았고, 또 오계(오계)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의 도사(마의도사)·진도남(진도남)의 무리들이 서로 부연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고 하였다. 우매한 내가 미처 회답을 올리지 못했으나, 그 말이 착착 맞았으니 이전 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다고 이를 만한 것이다. 아, 훌륭하여라.
유고(유고) 몇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선생이 별세하신 이후 사자(사자)의 학문이 날로 분열되었고 별세하신 지가 지금 또 13년이 지났는데, 대의(대의)가 어긋나고 미언(미언)이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천주학(천주학)이란 것은 실로 불씨(불씨)의 하승(하승)의 설만도 못한 것인데도 현시대의 재주와 학식이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속에 빠져들어 서양이 중국보다 더 높아지게 하고 마두(마두)가 중니(중니)보다 더 훌륭해지게 하면서 “진정한 학문이 천주학에 있다.”고 한다. 사자의 추향(추향)이 올바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나는 선생의 덕을 더욱더 사모하는 한편 또한 우리 사문(사문)이 전수한 공자(공자), 맹자(맹자), 정자(정자), 주자(주자)의 바른 교훈도 저버릴까 염려된다.
선생의 손자 윤신(윤신)은 선생의 언행(언행)이 오랜 세월이 지나 민멸되는 것을 애통해한 나머지 내가 선생에게 동문의 후배이고 선생에게 알아줌을 받은 지가 근 30년이었으므로 선생의 사적을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나에게 행장을 지어받아 다른 작자(작자)에게 묘지명(묘지명)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대략 권귀언(권구언)이 기술한 원장(원상)에 의거하고 아울러 평소 나의 문견을 서술하여 이 행장을 기록한다. 내가 비록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어떻게 지나친 말로써 선생의 덕을 손상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이상과 같이 갖추어 기록하여 작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통정대부 종성 도호부사 백화재 황공 행장(통정대부종성도호부사백화재황공행상) 을사년


백화재(백화재) 황공(황공)은 휘가 익재(익재)요 자가 재수(재수)인데, 신라 때 시중(시중) 휘 경(경)의 후손이다. 고려 명종(명종) 때 전중감(전중감) 휘 공유(공유)란 분이 이의방(리의방)의 난리를 피하여 장수현(장수현)에 와서 살았으므로 드디어 관향이 되었다. 국조(국조)에 들어와 익성공(익성공) 휘 희(희)는 장상(장상)의 덕업(덕업)을 겸비하여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분인데, 공에게 10대조이다. 익성공의 둘째 아들인 전첨(전첨) 휘 보신(보신)이 상주(상주)에 처음 와서 살았는데, 자손이 그대로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전첨의 증손인 이조 참판(리조참판) 휘 효헌(효헌)은 문장과 절의로 당시에 이름난 분인데, 공은 이 분의 6대손이다. 증조 휘 즙(집)은 의주 부윤(의주부윤)을 지냈고 6도(도) 절도사(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족제(족제) 생원(생원) 휘 면(면)의 아들인 통덕랑 휘 재윤(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통덕랑이 증 좌승지(증좌승지) 휘 진하(진하)를 낳았고, 휘 진하가 상산(상산) 김진익(금진익)의 딸에게 장가들어 명릉(명릉 숙종의 능호) 임술년(1682, 숙종 8) 1월 28일에 본 고을의 중모리(중모리) 예전 집에서 공을 낳았다. 분만하던 날 저녁에 모 부인의 꿈에 익성공(익성공)이 ‘아이가 태어났느냐’고 잇달아 묻기를 두 번 했기 때문에 아명(아명)을 익재(익재)라 하였는데 커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공은 2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7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몸이 수척하고 병이 많았으므로 입학할 시기를 놓쳤다. 11세가 되어서야 입학했는데 학업을 익히는 데 태만하지 아니하였기에 몇 년도 안 되어 문리가 갑자기 트여 《통감(통감)》, 《사략(사략)》 및 칠서(칠서)를 통달하였다. 임오년(1702, 숙종 28)에 식년시(식년시)에 급제하여 괴원(괴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권지부정자(권지부정자)에 보임되었고, 순서대로 승진하여 저작(저작)과 박사(박사)가 되었다. 을유년(1705,숙종31)에 봉상시 직장(봉상사직장)을 겸임하였는데 얼마 지나서 성균관 전적(성균관전적)에 승진되었고 예조 좌랑(례조좌랑)에 이임되었다. 이듬해인 병술년에 병조 좌랑에 전임되었고 9월에 평안도 도사(평안도도사)에 제수되었다. 서도(서도)는 본시 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이 많아 화류관(화류관)이라 불리는 곳이어서 관장(관장)들 중에는 그들과 어울려 놀이하며 근신하지 않는 자가 전후로 잇따랐다. 그러나 공은 젊은 나이인데도 “젊을 때에는 여색을 경계해야 한다.”는 공자(공자)의 훈계를 엄수하여 기생들을 일체 물리쳤다. 순강(순강)할 때 어느 고을의 수령이 이름난 미모의 기녀를 단장시켜 수청들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보지도 않았으므로 그 기녀는 공의 풍모를 사모하여 상사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여러 고을의 직임을 여러 번 맡았으나 시종 여색에 오염되지 않았으니, 고상한 품행 가운데는 이러한 점이 있었다.
정해년(1707, 숙종 33) 6월에 만기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고 7월에 충청도 도사(충청도도사)에 제수되었다. 고시(고시)를 관장할 때 친지들의 서신이 많이 쌓였으나 공은 늘 정직 공평하게 하려고 다짐했으므로 그것을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 이에 비방하는 말이 많이 일어났으나 막상 방(방)을 내자 선발한 것이 정당하였으므로 인사(인사)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가 무자년(1708, 숙종 34) 겨울에 다시 춘관(춘관 예조의 별칭)의 낭관(랑관)이 되었고, 이듬해 봄에 전라도 도사(전라도도사)로 나아가 전례에 따라 조선(조선)을 관장하였다. 조선이 경창(경창)에 들어왔을 경우 고용인들은 그 속에서 훔쳐내고 창고의 관리들은 두량을 공평하게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부족한 수량을 조졸(조졸)들에게 내도록 하였으므로 조졸들 중에는 이로 인하여 파산한 자들이 많았다. 공은 평소에 이러한 폐단을 알고 있었기에 창관(창관)들과 약속하고 이 폐단을 엄격히 금지하여 막은 결과 두 가지의 폐단이 모두 다 혁파되었으므로, 조졸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감영(감영)에 돌아와서는 조운(조운)의 이해(리해)를 조목별로 열거하여 상에게 아뢰고 그 조항을 포창(포창)에 게시(게시)하게 하되 범하는 자는 형벌로 금지하도록 하였으니, 해읍(해읍)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그 은혜를 입게되었다.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와 경인년(1701, 숙종 36)에 기성(기성 병조의 별칭)의 낭관에 다시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인 신묘년에 무안 현감(무안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여러 해 잇따른 흉년을 당했으므로 부임한 초기에 맨 먼저 고을의 어진 사대부들을 방문하여 구황책(구황책)을 강구하였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직접 위무(위무)하였다. 그리고 쌀을 나누어 주고 죽(죽)을 먹여주는 은혜를 빠짐없이 균일하게 베풀었으므로 온 고을의 수천 호 중에 한 사람도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고, 그리하여 성적이 여러 고을에서 제일이었다. 이에 암행 어사 홍석보(홍석보)가 표창하여 아뢰자 준직(준직 품계(품계)에 알맞는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나주(라주)의 조운 판관(조운판관)을 겸임하였다. 국법에 제때 짐을 실어 보냈으나 가는 도중에 파선된 경우에는 그 죄가 사공들에게 있고 그 밖의 경우에는 죄책이 모두 해관(해관)에게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미 배의 출발 기한이 지났는데다 배가 또 부안(부안)의 해상에서 파손되었고, 부안 수령은 본시 공과 친한 사이였기에 공이 죄를 받을까 염려하여 그 일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양심을 속이고 죄를 모면하는 것은 내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 즉시 사실대로 자수하여 스스로 논핵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사령(사령)을 내리는 일이 있게 되어 죄책을 받지 않았는데, 일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모면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우선이고, 교화는 반드시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고, 자신의 녹봉을 희사하여 서재(서재)를 설치하고 사자(사자)들을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였으되 전지(전지)를 두어 경비를 마련하도록 하고 일하는 하인들을 두었으며, 휴일에는 서재에 가서 종일토록 강론하였는데 사자들에게 실행을 우선으로 하도록 힘썼다. 그 후 승평(승평)에 부임했을 때에는 향림서숙(향림서숙)을 설립하였고 기성(기성)에 있을 때에는 양사재(양사재)를 건립하였으니, 부임하는 곳마다 사자의 기풍이 크게 변하였다. 이리하여 수령으로 있은 지 5년 동안에 온갖 폐단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을미년(1715, 숙종 41)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다음 해인 병신년에 순천 부사(순천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또 주자(주자)의 사창법(사창법)을 따라 시행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후임자가 혁파시켰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무술년(1718, 숙종 44) 겨울에 만기가 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721, 경종 1)에 다시 전적(전적)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임인년에 종부시 정(종부사정)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계묘년(1723, 경종 3)에 성균관 사예(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다가 군자감 정(군자감정)에 전직되었고, 6월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8월에 영광 군수(령광군수)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725, 영조 1)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공의 재주와 식견은 시행하여 잘못되는 것이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뛰어났다. 수령의 인장을 세 번 찬 것이 모두 호남(호남)에서의 일이었는데, 호남은 풍속이 교활하고 거세어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공은 성심으로 유도하되 너그럽게 다스리기도 하고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여 적당히 하였고, 모든 일을 주도(주도)하고 세밀히 처리하여 사소한 일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범처럼 날뛰는 아전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여우처럼 교활한 백성들이 길들여져 순종하였으며, 고을에서 떠나가자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구리 비석과 돌 비석에 새겨 추모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 4)에 통정대부(통정대부)에 승진되어 종성 부사(종성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버림받은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다시 기용되었으므로 은명(은명)에 감격하여 즉시 길을 떠나 충원(충원)에 도착했는데, 청주(청주)의 역적 이인좌(리린좌)가 변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돌아 관동(관동)을 지나 지평현(지평현)에 당도하였다. 이 때 오명항(오명항) 공이 도순무사(도순무사)에 임명되고 박사수(박사수) 공이 영남 안무사(령남안무사)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박공은 평소에 공의 재주와 기량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길에서 만나자 매우 기뻐하고 공을 추천하여 함께 가게 할 것을 아뢰었다. 안동(안동)에 도착했을 때 공에게 소모사(소모사)의 명을 내렸으므로, 공이 명을 받고 달려가 여러 고을에 격문(격문)을 보내어 충의(충의)로써 권유하니, 사인(사인)과 서민(서민)들이 바람에 쏠리듯 호응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역적이 소멸되었으므로 소모사의 일을 그만두었지만, 정찰하는 사람들을 널리 배치하고 적의 정세를 정탐해서 도순무사와 안무사에게 비밀로 보고함으로써 요해지를 지켜 막고 적의 세력을 군색하게 만든 데에는 공의 계획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오공(오공), 이공(리공)이 공을 더욱더 훌륭한 인재로 여겼다. 역적이 토평되자 복명(부명)하고 이어서 가자(가자)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이 때에 역적이 영남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남 사람 중에 무함을 받은 사람이 많았고, 공의 이름도 역적의 공초(공초)에 나왔으나 공은 본시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을 상이 살펴 알고 불문에 부쳤지만 공으로서는 정세가 황공하고 불안하여 거적을 깔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 때 오공 및 영남 어사 이종성(리종성) 공이 입시(입시)하여 공에게는 공로만 있고 죄가 없다는 정상을 강력히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황모(황모)의 일에 대해서는 역적이 이미 무함한 것임을 자복하였다. 이미 죄를 깨끗이 벗은 상태이니, 처분을 기다리지 말도록 하라.” 하면서 해조(해조)로 하여금 이전대로 조용(조용)하도록 하였고, 이어 원종 공신(원종공신) 1등에 기록하였다.
공은 군함(군함)을 지니고 서울에서 몇 달 동안 머물다가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부터 문을 닫은 채 빈객을 사절하고 고향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계책을 가졌다. 그런데 이듬해 겨울에 조정에서 군함을 지닌 사람이 시골에 가 있는 일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으므로, 목사(목사) 이정숙(리정소)이 공의 가동(가동)을 가두고 길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다그쳤다. 경술년(1730, 영조 6) 3월 20일에 공이 길을 떠나면서 본관(본관)에게 정장(정상)하여 가동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고 길에 올라 서울에 들어왔다. 이 때 무고(무고)의 옥사(옥사)가 일어났다. 흉적(흉적) 박도창(박도창)의 종 만익(만익)이 남의 사주를 받아 입을 막으려고 도창을 독살(독살)하였는데, 거짓으로 끌어대어 연루된 사람이 많았다. 그가 말하기를, “3월 20일에 저들이 도창을 독살할 것을 모의할 때 광주(광주) 세교(세교)에 거주하는 황 순천(황순천)도 좌석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순천은 바로 공의 13년 전의 관직이다. 공은 그 후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또한 광주에는 잠시도 거주한 적이 없었으니 그 말이 거짓임은 숨기기 어려운 것이며, 그가 말한 3월 20일은 공이 시골에서 길을 떠난 날이었다. 그런데도 위관(위관)은 이러한 점을 살피지 못하고 공을 잡아다 금부(금부)에서 신문할 것을 청했고, 금부가 조사하였으나 거짓인 사실이 밝혀지자 상이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공은 혈혈단신(혈혈단신)으로 재주가 뛰어나 선발되었지만, 취향이 다른 무리들이 죄를 들추어 내려는 일이 많았다. 전후로 수령으로 있을 때는 상관(상관)이 트집을 잡아내려고 하여 온갖 짓을 다하였으나 끝내 그러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표창하여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공의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문사랑(문사랑) 조명익(조명익)이 묵은 원한을 품고 기어이 공을 해치려 하여 죄목을 꾸며대며 캐물었는데, 공의 변론이 분명하고 증거대는 말이 틀리지 아니하여 그의 계책이 시행되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난 뒤에 그가 대신(대신) 박필균(박필균), 이수항(리수항)을 사주하여 공을 유배시킬 것을 청하도록 한 결과 모두 “갑자기 석방시킬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익이 언관(언관)이 되어서는 또 국문(국문)할 것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헌납 서명행(서명형)이 사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계(정계)하여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상이 대간(대간)의 말을 어기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끝내 공을 구성(구성)에 유배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상의 뜻이 아니었다. 공은 흡족한 모습으로 길을 떠났으며, 배소(배소)에 있은 지 7년 동안 문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날마다 성리서(성리서)를 앞에 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연구하고 의리와 천명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자신이 천리 밖의 변방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태연히 지냈다.
병진년(1736, 영조 12)에 동궁(동궁)의 책례(책례)로 인하여 사면되어 돌아왔다. 무오년(1738, 영조 14)에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방면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저지하는 자가 있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후로 세속에 대한 생각을 감추어 버리고 단지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익히는 일로써 한가롭게 지냈다. 성품이 산수(산수)를 좋아하였기에 주계(주계)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면성(면성)에서 그 곳에 가서 집을 짓고 살면서 귀거래사(귀거래사)를 차운(차운)해 지어 벽에 붙여놓고 스스로 즐겼다. 다시 숭선(숭선)에 이사했다가 만년에는 선산(선산) 아래에 작은 서재를 짓고 서재의 현판을 ‘백화(백화)’라 하였으니, 산의 이름과 《시경(시경)》의 생시(생시)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화초와 대나무를 심고 수천 권의 서책을 간직하였는데, 벼슬에 나갔을 때 이외에는 발걸음이 한 번도 산재(산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울 때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수석(수석)이 좋은 곳에 노닐면서 술잔을 나누고 시를 짓기도 하였으되, 시사(시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있으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부모와 자제들이 일찍 죽은 데 대해서 명운으로 여겨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지냈으나 묵은 병이 오래 지속되었는데, 임종하기 전날 밤까지도 빈객들을 접대하고 편지의 답서 쓰기를 평상시와 같이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 수봉(수봉)의 새로 지은 집에서 고종(고종)하였으니, 바로 정묘년(1747, 영조 23) 12월 3일이었다. 부음(부음)을 들은 사대부들은 모두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와서 조문하는 빈객들이 매우 애절히 통곡하였다. 이듬해 3월에 옥천(옥천) 환산(환산)의 유좌 묘향(유좌묘향)에 장사 지냈는데, 공이 자리를 잡아 아들을 장사 지낸 곳이다.
배위 숙부인(숙부인) 청송심씨(청송침씨)는 동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휘 종(종)의 딸인데, 성품이 온순하여 부덕(부덕)을 지녔고 일동 일정(일동일정)이 부군의 뜻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공보다 몇 년 먼저 태어나서 공보다 9년 후인 을해년(1755, 영조 31) 모월 모일에 별세하였으며,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다가 그 후 산소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중모현(중모현) 풍우정(풍우정)의 건좌(건좌)에 모두 이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종간(종간)은 문장과 행실이 훌륭하였고 현감 광산(광산) 김동준(금동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무후하였고, 그의 양자 욱중(욱중)도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재주가 있었고 군수 고령(고령) 신박(신)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그도 무후하였다. 두 대가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기에 공의 상사 때는 신씨(신씨)가 그의 남편의 재종(재종)의 아들 태희(태희)를 양자로 하여 승중(승중)의 복을 대신 입게 하였다. 공의 딸은 풍산(풍산) 홍중희(홍중희)에게 출가하여 1남 수보(수보)를 두었으니, 그는 진사로서 문장의 명성이 있었으나 역시 일찍 죽었다. 아, 화락한 군자에게는 하늘이 복록을 내리는 법이거늘, 공은 훌륭한 재주와 덕행을 지녔는데도 하늘이 복을 내린 것이 이러하여 자손이 번창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그것은 운명인 듯하다. 태희는 진사 안동(안동) 권순(권순)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석로(석로)는 진양(진양) 정종로(정종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정종로는 바로 우복(우복) 정경세(정경세) 선생의 봉사손(봉사손)이다. 딸은 풍양(풍양) 조계연(조계연)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는 현재 헌납(헌납)인 석목(석목)의 아들이다.
공은 풍모가 단정하고 결백하며 본성이 정결하고 강직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애모하고 존경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화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평생에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애통한 일로 여긴 나머지 기일(기일)을 당했을 때에는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밤을 새우면서 자신이 직접 제물을 올리고 슬퍼하기를 처음 상(상)을 당했을 때처럼 하였으며, 매양 생신을 맞아서는 자제들이 마련한 주안상을 물리쳐 들지 않은 채 종일토록 슬픈 기색을 지녔다. 그리고 둘째 숙부, 막내 숙부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정성과 효도가 모두 지극하였다. 둘째 숙부의 상사가 났을 때 공은 승평(승평)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부음(부음)을 들은 그날로 달려와 곡하였고, 적소(적소)에 있을 때에도 막내 숙부의 춘추복을 마련해 보내기를 집에 있을 때처럼 하였으며, 진귀한 음식을 얻었을 경우 기어이 인편을 찾아 내어 보내되 거리가 멀고 계책이 어렵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았으니, 그의 그지없는 효성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종매(종매)가 일찍 홀몸이 되어 살림이 가난하였으므로 공이 그들 식구를 데려다 양육하였는데, 그 자녀들을 자기의 소생처럼 길렀으며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 그리고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하찮게 여겨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기를 미처 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므로, 종족 친지들이 모두 공에게 의탁하였다. 일가 한 사람이 세력을 지닌 자에게 빌붙어 공을 해치려고 하였으나 공은 모른 체하면서 정의(정의)의 친분을 변하지 않았고, 그가 죽어서는 자신이 직접 염습(렴습) 등의 일을 치르기도 하여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는 뜻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사당의 신주가 체천되자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소원해지고 복(복)이 다해지자 친족을 두터이 하는 정의가 끊어진다.”고 하고, ‘봉선(봉선)과’ ‘돈서(돈서)’ 두 계(계)를 설치하여 제전(제전)을 마련하고 재실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0월 상순(상순)에 9대조 이하의 선조들에게 세향(세향)을 올리는 규례를 정하였고, 또한 여가가 있는 날에는 종족들을 모으고 환담을 나누게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 예법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처신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을 단속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니, 평소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은 다음 의대(의대)를 단정히 하고 의자와 책상도 정돈하였으며, 한가롭게 혼자 있을 때라 하더라도 게으른 태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집안의 형편을 헤아려 길사(길사)나 흉사(흉사)의 비용을 일에 앞서 미리 마련했고 손님 접대와 제사 비용도 모두 별도로 마련함으로써 임박해서 군색한 걱정이 없게 했다. 그리고 가정안에 위엄과 애정을 함께 지극히 하였으므로 노복들은 힘써 일했고 엄숙하고 화목하여 싸우는 소리를 내지않았다. 그리고 사들인 쌀과 지세(지세)로 받아들인 양곡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으니, 만년에는 살림이 가난하였는데도 단지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는 일만 생각하였다. 공이 죽었을 때 옛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단지 심의(심의)와 낡은 조복(조복)만이 한 벌씩 남아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에 더욱더 공이 여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의 시문(시문)은 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조리가 있는데 붓을 잡은 즉시 지어도 문맥이 순조롭고 사정에 절실하였으므로 문장을 잘한다고 이름난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난고(란고)로 남아 있어 출간되지 못했다. 적소(적소)에 있을 때 지은 운결록(운결록), 자명록(자명록), 서행일록(서행일록)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퇴계집(퇴계집)》에 대해서 붉은 색, 검은 색으로 표시해 두고 절요(절요)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으므로, 학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9촌 조카인 전적(전적) 침(침)이 공의 유사(유사)를 지었는데 그 내용에,

“전에 공의 소모사(소모사) 휘하에 따라다닐 적에 보니 빈틈없이 처리하는 재주와 기량은 장수도 될 수 있고 재상도 될 수 있었지만 만년에 시골에 물러나와 지냈다. 산림(산림)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경술(경술)에서 나온 것이고 인륜(인륜)에 독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공이 묘당(묘당)의 자리에 앉아 재상(재상)의 직책을 수행했더라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정도가 필시 옛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와 함께 말살당하여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으니, 후인들이 유한(유한)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실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공의 부인은 나의 선비(선비)와 내종(내종)간이므로 내가 어릴 때부터 공의 언행을 익숙히 들었고, 또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은총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황태희(황태희) 유생이 공의 유사(유사)를 가지고 와서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문장이 졸렬한데다 늙고 병들었으므로 공의 성대한 덕을 모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옛일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들었기에 유사의 내용을 간추려 문장을 만들었으되 내가 듣고 본 일들을 보충해 두었으니, 이로써 기록하는 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성균관 진사 부사 선생 성공 행장(성균관진사부사선생성공행상) 을사년


공은 성이 성씨(성씨)이고 휘가 여신(여신)이며 자가 공실(공실)인데, 창녕(창녕) 사람이다. 선조 휘 송국(송국)이 고려에 벼슬하여 문하시중(문하시중)을 지냈고, 7대를 거치면서 높은 관직을 지냈다. 휘 경(경)에 이르러 조선조에 들어와 현감(현감)을 지냈고, 현감이 휘 자량(자량)을 낳았는데 이분이 좌사간(좌사간)을 지냈고, 사간이 휘 우(우)를 낳았는데 이분이 장흥고 부사(장흥고부사)를 지냈으며 처음 진주(진주)에 거주 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안중(안중)인데 승문원 교리(승문원교리)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일휴(일휴)이고 호는 무심옹(무심옹)인데 호조 참판(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선고의 휘는 두년(두년)인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였다. 추천으로 경기전 참봉(경기전참봉)에 제수되었는데 나가지 않았고, 한성부 우윤(한성부우윤)에 증직되었다. 초계변씨(초계변씨) 충순위(충순위) 원종(원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3명을 두었는데, 큰 아들 여충(여충)은 원종 공신(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니, 두 대의 증직이 이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 여효(여효)는 임진왜란 때 향교(향교)의 오성(오성 향교에 모신 다섯 분의 성인)의 위판(위판)을 모시고 진양성(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위판을 안은 채 죽었다. 공은 막내 아들인데, 가정(가정) 병오년(1546, 명종 1) 1월 1일 자시(자시)에 진주 대여면(대여면) 귀동촌(구동촌)에서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뇌가 총명하고 눈의 광채가 사람에게 비쳤으므로 무심공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훗날에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금 자라서는 어른처럼 정중하였다. 8세 때에 조계(조계) 신점(신점)에게 가서 수학하였으니, 신공은 바로 문충공(문충공) 숙주(숙주)의 증손으로서 공에게 이모부가 되는데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이 쫓아가 스승으로 섬겼던 것이다. 13,14세 때에 경전(경전)을 모두 읽었고 각체(각체)의 과거문(과거문)도 모두 잘하였으므로 신공이 늘 칭찬하여 말하기를, “앞으로 크게 성취하여 내가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 15)에 약포(약포) 정탁(정탁) 공이 본주(본주)의 교수가 되어 왔으므로 공이 가서 《서경(서경)》을 배웠는데, 정공이 매우 칭찬하며 훌륭한 스승에게 찾아가 학문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계해년(1563, 명종 18) 봄에 귀암(구암) 이정(리정) 공에게 예물을 가지고 가 뵈었더니, 이공이 국가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 허여하고 《근사록(근사록)》을 가르쳐 주며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하도록 권하였다. 가을에 방백(방백 관찰사의 별칭)이 고을에 순행와서 과거를 보일 때 ‘운학부(운학부)’를 지어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그 부에,

도 팽택이 심양으로 돌아갈 때 구름이 무심히 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 도팽택귀거심양무심출수
이 적선이 동정호를 바라볼 때 학이 호수가 끝나는 곳에서 보이지 않네 / 리적선서망동정수진불견
라는 한 구절이 나오자 방백이 장단을 치며 경탄하기를, “세상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향시(향시)의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명성이 온 도내에 떨쳐졌다.
무진년(1568, 선조 1)에 감사(감사)인 임당(림당) 정유길(정유길)과 진주 목사(진주목사)인 송정(송정) 최응룡(최응룡)이 인근 고을의 유생(유생) 10명을 선발하여 단속사(단속사)에 회접(회접)시켰는데, 공이 그 접장(접장)이었다. 이에 앞서 휴정(휴정)이 《삼가귀감(삼가구감)》이란 책을 지었는데 유가(유가)의 설을 끝에 기재하였고, 또한 사천왕(사천왕)이란 불상(불상)을 건조하였는데 그 형상이 매우 괴이하고 우람스러웠다. 공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이 중이 너무도 유가의 도를 무시하였다.” 하고, 동아리[접중]가 그 책에 서명한 것을 가져다 찢어버리고, 중들을 시켜 불상을 헐고 책의 원판을 태우게 하였다. 조남명(조남명)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말세의 인물들은 간혹 젊었을 때에는 기개가 드높다가도 점차 연약해지고, 후생(후생)들은 온갖 일에 대해 적당히 넘기려고만 하니, 어떻게 진취할 수 있겠는가. 공자(공자)께서 광간(광간 뜻이 크고 언행이 대범한 사람)을 취택하신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하였다. 이튿날 공이 선생에게 배알(배알)하자 선생이 맞아 들여 매우 친절하게 이야기하였다. 조금 지나서 수우당(수우당) 최영경(최영경)이 왔는데 선생이 공을 가리키며 불상을 헐어버린 일을 말하자 최공이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경의를 표하였다. 공이 그대로 머물면서 《서경(서경)》의 의심나는 뜻을 질문하였더니, 선생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미 독실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우윤공이 병석에 누워 계셨기에 공이 정성을 다하여 구호하고 치료하였는데, 몹시 애태우고 걱정한 나머지 음식을 목에 넘기지 못했고 옷의 띠를 풀 겨를이 없었다. 운명하자 시체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던 끝에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고, 밤낮으로 곡하여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제사 지내는 술잔과 그릇들은 자신이 직접 살펴 씻었고 주방의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여막(려막)에서의 시묘살이에 대해 백씨(백씨), 중씨(중씨)와 약속을 정하기를, 중씨는 집에 돌아가 모친을 모시고 제사를 대신해 지내도록 하고 공과 백씨는 시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친에게 문안드릴 때와 삭망(삭망) 및 명절에 제전 올리는 때 이외에는 여막에서 나오지 않았고, 최질(쇠질)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에 보리죽만 먹었다. 그리고 상례(상례), 제례(제례)를 한결같이 주자(주자)의 《가례(가례)》에 따르면서 귀암(구암)이 여묘살이할 때의 절문(절문)을 참작하여 행하였다. 신미년(1571, 선조 4) 봄에 복제가 끝났는데, 7월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기를 부친상 때와 똑같이 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여묘살이할 적에 공이 백씨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의 체백(체백)이 공산(공산)에 계셔서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지만, 반혼(반혼)하지 않은 채 수묘(수묘)만 할 경우 이것은 체백만을 중시하고 신혼(신혼)을 경시하는 것이니, 예가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장자이시니 의당 신주를 모시고 반혼하시어 제사를 주관하셔야 합니다.” 하고 공이 중씨와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에 가족들을 데리고 진주 경내에 피란하였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진양성(진양성)이 함락될 때 중씨가 죽었는데, 공이 유해(유해)를 찾아 장사 지내고 갑오년에 집에 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금릉(금릉)에 피란했다가 기해년(1599, 선조 32) 고향에 돌아왔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이종영 희인(리종영희인), 이대약 선수(리대약선수)와 계서계(계서계)를 맺고 매년 3월 보름과 9월 보름에 윤번으로 돌아가면서 서로 방문하기로 하였는데, 동계(동계) 정온(정온)도 와서 참여하였다. 공이 이 계를 위해 서문을 지었으니, 바로 옛 사람이 진솔회(진솔회)의 연회를 베풀던 뜻이다.
공이 평소에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교제할 때에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부당하게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여기고 기어이 나서서 구제해 냈다. 늘 수우당(수우당)의 억울함을 애통하게 여겨 동계(동계) 제공과 함께 대궐에 상언(상언)하여 신원(신원)시켰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 의병장(의병장) 김덕령(금덕령)의 충용(충용)을 허여했었는데, 그가 도망한 군졸을 죽인 일로 인하여 수금되었을 때에는 공은 그를 대신해 글을 지어 체찰사(체찰사) 이원익(리원익)에게 그의 억울함을 변론하는 한편 진양(진양)의 유생(유생)들에게도 상소하여 신구(신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역적 이몽양(리몽양)의 공초(공초)에 나와 체포되었을 때에는 공이 진사 문홍운(문홍운)과 함께 소장(소장)을 올려 억울한 것을 변론하였으나 구제하지 못했는데, 공이 이 일을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나중에 동계가 국사(국사)를 의론한 것으로 인하여 예측할 수 없는 화단을 받게 되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강상(강상)의 책임을 질 사람은 이 사람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사호(사호) 오장(오장), 설학(설학) 이대기(리대기)와 함께 소장을 올려 신구하였는데, 관철되지 못하자 돌아왔다. 공이 의리를 행하는 데 용감한 것이 이러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생원시(생원시)·진사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전에 우윤공이 임종할 때 공에게 이르기를, “나는 독신으로 부모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과거보는 일을 그만둠으로써 입신 양명(립신양명)하여 부모의 명성을 드러내는 도리를 하지 못했다. 따라서 너는 노력하도록 하되 내가 죽었다고 게을리 하지 말라.” 하자, 공이 울면서 그 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경학(경학)을 강습하는 여가에 과거 공부에도 부지런히 힘써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전후로 초시(초시)에 합격한 것이 24번이었는데, 이 때에 와서야 약간 성취했던 것이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동당시(동당시)에 장원하여 서울에 갔으나 세도(세도)가 혼란한 것을 보고는 끝내 과장에 들어가지 않고 돌아왔는데, 이 때부터 영원히 은거하려는 계책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 사자(사자)들이 학문할 줄을 몰랐으므로 공이 사문(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봄에 자신이 거주하는 금산리(금산리)에, 여씨(려씨)의 향약(향약) 및 퇴계(퇴계)의 동약(동약)을 모방하고 거기에 약간의 조항을 증감하여 약속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또 옛날 소학(소학)·대학(대학)의 규칙에 의거하여 양몽재(양몽재)·지학재(지학재)를 설립하고 고을의 후생들로 하여금 나이에 따라 나누어 거처하며 학업을 익히게 하였는데, 하진(하진)과 조겸(조겸), 한몽일(한몽일) 공 등 몇몇 사람이 믿고 따르면서 협찬하였다. 이에 10년도 채 못 되어 문풍(문풍)이 크게 진작했고 과거에 오른 사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비난하는 말이 떠들썩하였으나 나중에는 먼 데 가까운 데 사람이 모두 따랐다고 한다.
남명 선생이 고금의 예를 참작하여 혼례·상례를 정했는데, 난리를 겪고 나서 그 예가 폐지되고 다시 불가(불가)의 법을 따랐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혼례·상례에 세속의 고배상(고배상) 차림을 좇지 않자 당시 사대부들 중에 이것을 따른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또 그렇지 아니하여 이전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혼례 때에 고배상을 차리는 것은 그래도 혹 세속을 따를 수 있는 일이지만, 초상이나 장례 또는 소상(소상)·대상(대상)·담제(담제) 때에도 모두 고배상을 차리고 때로는 빈객들이 술을 청하며 즐기기까지 하는 것은 매우 형편없는 짓이다.” 하고, 동지들과 함께 남명의 예를 복구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풍습이 약간 변경되었다.
공은 선고(선고)의 뜻을 따라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으나, 자신을 단속하는 일에 엄격하여 잠시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거주지에 부사정(부사정)을 짓고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았고, 또 양직당(양직당)을 건립하고 명(명)을 지었는데 그 명에,

양직당 북쪽에 자라는 천 그루의 대나무는 / 당지북천간죽
그 속이 비었고 그 마디가 곧으며 / 기심공기절직
더위를 없애고 눈 서리도 제거하는데 / 각염서배상설
군자가 그러한 형상을 법으로 삼아라 / 군자이취위칙
나의 도리를 실천하고 본성을 회복하는데 / 천오형부오성
정직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잘 기르는 것이라네 / 선기양직이경
언제나 이 명을 보며 스스로 경계하도록 한다 / 상고시용자경
하였다. 그리고 창가의 벽에다 ‘직방대(직방대)’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놓고 해석하기를, “무엇을 직(직)이라 하는가?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방(방)이라 하는가? 일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대(대)라 하는가? 기량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일이 방정하지 못하면 부정하게 되며, 기량이 위대하지 못하면 협소하게 된다. 그런데 간사한 것, 부정한 것, 협소한 것은 군자(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정직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경(경)’에 있고 방정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의(의)’에 있고 위대하여지게 하는 공부는 ‘성(성)’에 있다. 한 곳에 집중하여 딴 생각이 없는 것이 ‘경’이니 이것은 마음의 주장이 되고, 헤아려 적당하게 하는 것이 ‘의’이니 이것은 일의 주장이 되며, 진실되어 거짓이 없는 것이 ‘성’이니 이것은 몸의 주장이 된다. 마음과 일과 몸에 주장이 있을 경우에는 군색한 행동이나 부정한 길로 빠지는 데 대한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스스로 경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을 위하여 부사정(부사정) 동쪽에 네칸의 집을 짓고 지은사(지은사)라 명명하였는데, 이것은 옛 사람의 “자식을 교육시켜 보고서야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는 말을 취한 것이다. 동쪽 방의 현판을 이고재(이고재)라 하였으니 이는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언고행]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행고언]’고 한 뜻을 취한 것이고, 서쪽 방의 현판을 사유재(사유재)라 하였으니 이는 ‘낮에는 행하는 것이 있고[주유위] 밤에는 터득하는 것이 있고[소유득]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에도 기르는 것이 있고[순유양]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보존하는 것이 있다.[식유존]’고 한 뜻을 취한 것이며, 중간의 두 칸을 삼어당(삼어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부모에게 효도하고[효어친] 어른에게 공순하고[제어장] 벗에게 미덥게 한다.[신어붕우]’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시(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부사정 북쪽에 지은사가 있고 / 부사정북지은사
이고재 서쪽에 사유재가 있네 / 이고재서사유재
날마다 삼어당에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 일향삼어근착력
심오한 경지에 이르는 계제가 되리라 / 승당입실가성계
하였다. 그리고 또 만오잠(만오잠)을 지어 벽에다 써 붙였고 성성잠(성성잠)을 지어 자손들에게 남겨 주었으며, 또 동현찬(동현찬)을 지어 앙모하는 뜻을 부쳤고 사우록(사우록)을 지어 강마(강마)의 즐거움을 드러냈으니, 학문하는 데에 독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되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고 한 말은 공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이다.
공은 벼슬길에 나가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20년 동안 한가롭게 수양하였는데, 만년에 수직(수직)으로 통정대부의 자계(자계)를 제수받았다. 숭정(숭정) 임신년(1632, 인조 10) 11월 1일에 부사정에서 고종(고종)하였으니, 향년이 87세였다. 고종하기 하루 전에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남명 선생(남명선생)이 임종할 때 안팎이 안정하도록 경계하였는데, 군자가 임종하는 것은 이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종하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이 목욕하고 가묘(가묘)에 배알한 다음 집안의 안팎을 불러 일일이 다 묻고 천천히 말하기를, “각자 너희들의 처소에 돌아가라.” 하였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하고 나서 잠이 들어 편안히 운명하였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이듬해 1월에 본 고을의 북쪽에 있는 감암산(감암산)의 자좌 오향(자좌오향)의 자리에 장사 지냈으니,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공은 풍모가 뛰어나고 기량이 심후하여 급한 말을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갖지 않았으며 다급하고 놀라운 상황을 당했을 때에도 법도를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없이 조용하였다. 젊은 나이에 귀암(구암)의 강석(강석)에 있을 때 귀암이 공의 강론이 정세하고 분명하다고 칭찬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므로, 귀암이 말하기를, “성군(성군)은 남이 알지 못하는 덕행을 지닌 군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운 아이란 칭호를 받았으니, 평소에 부모의 뜻을 잘 받들고 순종하여 충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양친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묘살이를 6년 동안 하였다. 그리고 선친의 기일(기일)을 당할 때마다 제삿날 7일 이전에 대청과 뜰을 청소하였고, 제삿날에는 자신이 직접 그릇을 씻고 제물들을 점검하여 정결하게 하기에 주력하였으며, 제사 지낼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애모하여 주위 사람들까지도 슬퍼하게 하였고, 3일이 지나서야 평소의 침소로 돌아왔는데,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백씨(백씨), 중씨(중씨)와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낮에는 밥상을 함께하고 밤에는 이불을 같이하면서 매우 즐거워하고 화목하여 화기가 애애하였다. 두 분 형님이 먼저 별세하였는데, 둘째 형님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기에 공이 그 제사를 받들었다. 두 분 형님의 기일(기일)을 당할 때에도 매양 선친의 제사 때처럼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였으며, 종일 슬퍼하여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늘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데는 정성과 공경을 우선으로 삼는다.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명(신명)과 교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7일 동안 산재(산재)하고 3일 동안 치재(치재)하는 법을 설치한 이유이다. 그리고 제물(제물)은 풍족하게 차리든가 약소하게 차리는 데에 달려 있지 않는 것이니, 정성스럽고 정결하게 차리지 않는다면 비록 풍족하게 차린다 하더라도 신명이 어찌 흠향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집의 형편에 맞게 해야 한다는 훈계를 말한 까닭이다.” 하였다.
평소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가묘(가묘)에 배알한 뒤에 서실(서실)에 물러나와서 책상을 마주하여 꿇어앉아 옛 서책을 열람하였는데, 그 경우에도 마치 손님을 대하는 듯이 엄숙하였다. 혼자 있을 때에는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 태만한 모습을 갖지 않았으나 손님이 왔을 때에는 편하게 앉기도 하며 품행을 단속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대개 공이 자신의 학덕을 감추어 학자의 명칭에 자처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람들에게 화내고 꾸짖는 말을 하지 않았고 매질을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이 저절로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잘못이 있을 경우 간곡히 타일러 스스로 고치도록 하였으므로 집안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숙연하고 화목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 집안 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어느 집이든 간에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은 국가의 조세(조세)와 집안의 제수(제수)를 마련하는 데에 있으니, 자신이 먹고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조세는 가난한 백성들보다 먼저 바쳐야 하고, 양식이 떨어졌더라도 제수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남명(남명)과 귀암(구암)의 문하에 노닐며 경(경)·의(의)와 효제 충신(효제충신)의 교훈을 듣고 말하기를, “두 분 선생의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효제 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해질 수 없고 경·의는 효제 충신이 아니면 설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나의 마음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을 다할 뿐이다.”라고 하고, 종신토록 복습(복습)하였는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가르칠 경우에 모두 이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공은 경전(경전)을 널리 연구하고 백가(백가)의 서적에도 모두 통달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게 여긴 나머지 30세 이후에 또 쌍계사(쌍계사)에 들어가서 경서(경서)와 《심경(심경)》 및 《근사록(근사록)》 등의 성리서(성리서)를 반복해 읽었는데, 당시 독서에 분발하여 음식먹는 것도 잊어버렸으며 전심으로 연구하고 3년 만에 돌아왔다. 이후로 지난날 의심스럽고 알 수 없던 것들이 얼음이 풀리듯 풀리어 환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않았으며,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매우 진지하게 토론하여 천리(천리)와 인사(인사), 성(성)과 명(명)의 뜻과 의리[의]와 이욕[리], 공(공)과 사(사)의 구분을 환히 분석하여 말하였으므로 듣는 이들이 싫증을 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리설(성리설)에 대해서 물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하니, 익혀 행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위로 천리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아래로 인사를 배우지도 않고 갑자기 위로 천리를 알려고 한다면 뜻이 고원(고원)한 데에만 달려가게 되어 아래로 인사를 배운 것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성인(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순서대로 차근히 진보하도록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작위(작위)를 도둑질하는 것 같은 행위는 바로 양심을 훔치는 행위로서, 나중에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많은 서책을 박람한 뒤에야 번다한 내용을 수습하여 간략한 데에 나아가게 되고 자신에 돌이켜 요약한 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맹자(맹자)의 이른바 ‘널리 배우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자신에 돌이켜 요약을 말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절은 중대한 것이다. 사람이 금수(금수)와 다른 것은 예로써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는 자신의 마음을 다할 뿐이다. 문왕(문왕)이 반찬을 살펴본 일과 자로(자로)가 먼 곳에서 쌀을 지고 온 일은 모두 자식의 직분에 당연한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얼음 구멍에서 고기가 뛰어나온 왕상(왕상)의 일이라든지 겨울에 죽순이 돋아난 맹종(맹종)의 일 같은 것은 이들이 마음을 다한 데 대해 하늘이 감동하여 그러한 일이 있게 된 경우이니, 무엇 때문에 기이한 일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는 그 방도가 무궁한 것이다. 이리하여 부모를 섬기는데 증자(증자)처럼 하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도 맹자께서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신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학문을 하면서 부귀와 영달을 그리워하고 험한 옷과 나쁜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뜻이 확립되지 못하여 끝내 성취하지 못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목숨을 해치는 것으로는 주색(주색)만한 것이 없는데, 술에 대한 욕심은 그래도 절제할 수 있지만 색욕은 더욱 심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색을 삼가기를 마치 원수를 피하는 것처럼 해야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색을 경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타의 일은 볼 것도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말하기를,

“사자(사자)의 포부는 매우 커야 하는 것으로 우주의 허다한 일에 대해서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니 산수(산수), 군진(군진), 의약(의약), 천문(천문), 지리(지리)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모두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력(학력)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이러한 것에 유념하려고 할 경우에는 뜻이 산만하여 학업이 전일하지 못하게 된다. 재능만 있고 학덕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소강절(소강절)이 말하기를, ‘단지 간웅(간웅)의 심술만을 키울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의리를 알지 못하고 실속없는 문장에만 전심할 경우에도 그 폐단이 또한 이러한 것이다.”
하였다.
공이 사람들과 교제할 경우에는 성의를 쏟고 규각(규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반드시 현명하고 우매한 사람과 간사하고 정직한 사람을 구별하여 교제하였다. 정능(정릉)이란 자는 정인홍(정인홍)의 손자인데, 이위경(리위경)과 함께 임강정(림강정)에서 놀이하면서 여러 차례 공의 아들들에게 같이 뱃놀이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집안은 위세와 권력이 매우 대단한데, 선비인 사람은 권문(권문)의 자제들과 교유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나는 정능의 사람됨을 보건대 겉모습은 공순한 것 같지만 속마음은 실제로 흉악한 자이니, 함께 교유해서는 안 된다.”
고 하였으므로 아들들이 모두 가지 못했다. 그 후 듣건대 폐비(폐비)의 흉소(흉소)를 올리는 계책을 그 놀이에서 결정했다고 하니, 공의 사람을 알아보는 현명함이 또한 이러하였다.
이 때에 광해군이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정인홍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한 번 도계(도혜)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공은 정인홍과 함께 남명(남명)을 사사(사사)하였고 진주(진주)와 합천(합천)이 모두 강의 오른쪽에 있는데다가 공의 부자의 명성이 당시에 알려졌는데도 끝내 낮은 벼슬 한 자리도 받지 않았으니, 공의 청백한 지조와 절의를 이에 더욱 알 수 있다. 공은 젊었을 때 경국 제세[경제]의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펼칠 수 없었으므로 옛날에 성주(성주), 현신(현신)이 서로 만난 경우를 볼 때마다 잇따라 감개하였다. 그리고 모문룡(모문룡)이 가도(가도)에 와서 주둔했을 때 공은 이미 걱정하여 시(시)를 지어 탄식하였으니 강호(강호)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늘 잊지 못했던 것이다. 몸을 결백하게 하고 멀리 은둔하여 있으면서 자신을 굽혀 벼슬을 얻으려는 뜻을 갖지 않았으니, 공과 같은 분은 《주역(주역)》 둔괘(둔괘)의 ‘비둔(비둔)’의 뜻을 터득한 분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향(향)에서 천거하고 리(리)에서 선발하는 법이 폐지되어 후대에는 오로지 과목(과목)만으로 인재를 뽑기 때문에, 명경과(명경과)에 응시하는 자들은 단지 입으로 외우는 것만을 주력하여 체험과 실천을 하지 못하고 제술과(제술과)에 응시하는 자들은 전적으로 화려한 문장만을 일삼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며,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무리가 날로 조정에 진출하여 임금의 덕이 성취되지 못하고 조정이 바르지 못하며 백성들이 불안한 원인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식자(식자)들이 근본을 아는 논설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아유가(아유가) 5장(장)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고, 또 섭빈사(섭빈사)를 지었는데 그 서문(서문)에 이르기를, “옹(옹)은 일찍이 직(직)과 설(계)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으나 직과 설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였고 만년에는 소선(소선)이라 자칭하였으나 진짜 신선이 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저 흰 머리털이나 뽑으면서 단지 아이들의 비웃음만 초래하고 있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공자(공자)께서는 ‘70세에 마음의 하고 싶은 바를 따라 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옹은 용렬한 사람이니 어떻게 성인처럼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법도에 벗어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경치가 좋은 산수(산수)에 몸을 맡기고 멋대로 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노니는 것은 그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 산수에 유람하는 취미를 지녔으므로 젊었을 때는 서울에 노닐면서 삼각산(삼각산)의 백운대(백운대)에 올라갔고, 중년에는 충원(충원)에 노닐면서 계족산(계족산)에 올랐으며, 노년에는 동해(동해)에 가서 여러 고을을 두루 관람하였다. 동도(동도)에 가서는 봉황대(봉황대)에 오르고 포석정(포석정), 월성(월성), 계림(계림) 등의 고적을 구경하였고, 세 번이나 방장산(방장산 지리산의 이칭)에 노닐며 천왕봉(천왕봉)에 올랐다. 그리고 계해년(1623, 인조 1) 가을, 공의 나이가 78세일 때 또 방장산에 유람하여 상봉(상봉)에 올랐고 유산시(유산시) 1백 86구(구)를 지었는데, 그 시는 구양수(구양수)의 여산고(려산고)와 한창려(한창려)의 남산시(남산시)의 체를 본뜻 것으로서 시구(시구) 내용이 청신(청신)하고 장려(장려)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외워 회자(회자)되었다고 한다.
공의 외손서(외손서)인 안창한(안창한) 공의 아들 시진(시진)이 공에게 수업하였는데, 임신년에 공이 임종할 때 학문하는 데에 긴요한 조항을 물었더니 공이 18개 조항을 구두로 불러 주었다. 그것은 침상단편(침상단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기(리기)의 근원과 심성(심성)의 분계로부터 학문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분석하고 조목별로 논열한 것으로서 모두가 후학들에게 절실한 내용이었다. 8, 9십의 나이에 정력이 이러하였으니, 만약 평소에 진정으로 학문을 쌓고 실제로 마음을 다잡지 않았더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젊었을 때부터 문장에 주력하였는데, 재기(재기)가 남보다 뛰어난데다가 때로는 산사(산사)에서 때로는 학사(학사)에서 문을 닫고 서적들을 섭렵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여러 서적 중에서도 좌구명(좌구명), 유종원(류종원), 한퇴지(한퇴지), 구양수(구양수)의 저서에 대해 더욱 힘을 쏟았다. 이리하여 문장을 지을 적에는 아예 생각하지 않고 지어도 미리 지어 놓은 것을 써내는 듯하였으며 기이하고 고상한 것을 숭상하지 않고 단지 이치의 우수함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필법(필법)은 기세가 강건하고 기이하여 당대에 으뜸이었는데, 공이 소시에 쌍계사(쌍계사)에 있으면서 갈필(갈필)로 반석에다 서법을 익혔기 때문에 글씨의 획이 철사와 같이 힘이 있었으므로 당시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공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만년에 초서(초서)와 예서(례서)의 두 가지 체로 《천자문(천자문)》을 써서 집에 간직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가 귀중한 보물로 여기며 감상하였다. 공의 언행(언행)과 시문(시문)을 정시남(정시남) 사문(사문)이 수집하여 책을 만들었으나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모두 재가 되었고, 단지 유고(유고) 3권만 남아 있고, 또 편찬한 진양지(진양지)가 있다.
배위 밀양박씨(밀양박씨)는 만호(만호) 사신(사신)의 딸이자 병조 판서 증 좌의정 익(익)의 6대손이다. 성품이 엄숙하여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6년 먼저 별세하여 본주(본주) 송곡(송곡)에 장사 지냈다.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박은 진사이고 세마(세마) 이흘(리흘)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한영(한영)·해영(해영)·낙영(락영)·제영(제영)이고 사위는 안몽진(안몽진)이다. 둘째 용(용)은 조광현(조광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우후(우후) 수영(수영), 통사랑(통사랑) 사영(사영), 문영(문영)이다. 셋째 횡(횡)은 유제(류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창영(창영)과 무공랑(무공랑) 호영(호영)이다. 넷째 순(순)은 진사 박민(박민)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원영(원영)과 진사 치영(치영)이다. 다섯째 황(황)은 직장(직장) 하경(하경)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기영(기영)·운영(운영)·만영(만영)이다. 장녀는 이윤(리윤)에게 출가하여 딸을 낳았는데, 사위는 안창한(안창한)이다. 둘째 딸은 동지(동지) 최설(최설)에게 출가하였다. 지금 6대, 7대가 되었는데, 내외 자손이 몇 명인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 공은 훌륭한 재덕(재덕)을 지닌 분으로서 끝내 시골에서 늙었고, 몸이 죽어 지하에 들어가자 유적(유적)이 없어진 지가 1백 50여 년이 되었다. 하늘이 이러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서 보답하는 이치를 끝내 증험할 수 없게 하였으니 선행을 하는 자들을 무엇으로써 격려할 수 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80여 년이 되어서 사림(사림)이 추모하던 끝에 향선생(향선생)을 사(사)에 제사하는 의식을 거행하여 공을 임천사(림천사)에 배향하였다. 공의 6대손 동망(동망)이 가장(가상), 연보(년보) 및 유집(유집)을 소매 속에 넣고 그의 사형(사형) 동익(동익) 및 족질(족질) 사렴(사렴)의 뜻으로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떻게 선배들의 덕행을 표현하는 글에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이가 많아 죽음이 다가온 처지인데 무슨 정력으로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동망씨가 간절히 청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천리 길을 찾아온 것은 실로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바라건대 유념해 주소서.” 하였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이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니 문장을 잘하고 못하는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가장 및 연보와 본집(본집)을 가져다 한결같이 그 내용에 따라 간추리고 증감하였으되 나도 모르게 문장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공의 언행 가운데 빠진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상세히 기재하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의 일에 목숨을 바친 증 공조 참의(증공조참의) 송공(송공) 행장 을사년


공은 휘가 빈(빈)이고 자가 사신(사신)인데, 청주(청주) 사람이다. 5대조 사성(사성) 휘 승은(승은)이 처음으로 영남의 김해(금해)에 거주하였고, 고조는 참군(참군) 숙형(숙형)인데 훌륭한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탁영(탁영) 김일손(금일손)과 서로 친한 벗이었다. 증조는 생원 유선(유선)이고, 조부는 절제사(절제사) 경(경)이다. 선고(선고)는 절제사 창(창)인데, 진사 김태석(금태석)의 딸인 분성 김씨(분성금씨)에게 장가들어 가정(가정) 임인년(1542, 중종 37)에 김해부(금해부) 서쪽의 하계리(하계리)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기특하고 뛰어난 자질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세 때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문리(문리)가 갑자기 통하였고, 간혹 지은 시구(시구) 중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앞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적에 장사꾼 몇 사람이 사인(사인)의 차림을 한 채 강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공을 부르되 반말로 너라고 하였으므로 공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사꾼들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너도 와서 먹어라.” 하자 공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행동을 보니 장사꾼들이 분명한데 장사꾼으로서 감히 사인에게 너라고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리고 그물을 걷어 올리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하찮게 보는 것은 필시 이것 때문일 것이다.” 하고 그물을 태워버렸다. 이에 그들 중 연장자 한 사람이 나와 절하며 말하기를, “동자의 기상이 매우 비범하니 필시 귀인이 될 것입니다.” 하고, 사과하며 떠나갔다. 그리고 10여 세 때 우슬암(우슬암)에서 독서하였는데, 나무꾼 아이가 까마귀를 잡았기에 공이 그 아이에게 말하기를, “이 새는 어미에게 먹이를 먹여 은혜를 보답하는 새로서 옛 사람이 ‘새 중의 증삼(증참)이다.’라고 하였으니,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까마귀를 달라고 하여 놓아주었더니, 듣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효성과 우애의 마음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소학)》의 도리에 따라 온화한 모습으로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가 6명인데 공은 둘째로서 형에게 공경하고 아우들을 사랑하여 화락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장성해서는 효제(효제)를 행하는 여가에 과거 공부를 익혀 향시(향시)에 다섯 번 합격하였으나 예부(례부)의 복시(복시)에 연달아 낙방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문장의 명성이 알려졌다. 공은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도 끝내 쓰임을 받지 못하자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스스로 학문과 행실을 수양하였다. 성품이 강개(강개)하여 절의를 지녔고 일을 당했을 때 용단을 내려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가 와서 질문하였다. 공이 웅천(웅천)의 수령과 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갔었는데, 그 때 약탈을 일삼는 왜적(왜적)들이 그 고을에 쳐들어왔다. 본관 수령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허허실실(허허실실)은 병가(병가)의 실정인 것이다. 이들이 한때 약탈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함부로 인심을 소요스럽게 하지 않아야 될 것이니, 성문(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왜적들도 의심하고 물러갈 것이다.”고 하자, 수령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방어하는 데 있어서 계책이 없었기에 공의 말대로 하였더니, 적들이 과연 의심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일로 인하여 공이 또 지략이 훌륭하다고 알려졌다.
만력(만력) 임진년(1592)은 바로 우리 선조대왕(선조대왕)께서 재위한 지 25년이 되는 해인데, 이 해 5월에 왜적이 대대적으로 출동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13일에 상륙하여 부산(부산)을 함락시키자 첨사(첨사) 정발(정발)이 전사하였고, 15일에 동래(동래)를 함락시키자 부사(부사) 송상현(송상현)이 전사하였다. 김해(금해)는 동래와 가까운 곳인데, 본관 수령 서예원(서례원)은 본시 겁이 많아 큰 일을 할 수 없는 자여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그는 공이 온 고을의 명망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공은 집에서 변란의 소식을 들었는데, 장자 정백(정백)이 팔성사(팔성사)에 가서 독서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받지 못한 선비지만 평생의 뜻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지금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본관 수령과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네가 같이 따라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아버지는 충성에 목숨을 바치고 아들은 효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너는 급히 집에 돌아가 너의 어머니 및 아우와 함께 멀리 피란하여 선대(선대)의 혈맥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정백이 울면서 소매를 잡고 함께 따르려고 하자, 공이 끝내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과 효도는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기가 어려운 것이거늘 나는 충성하고 너는 효도하는 것이 어찌 두 가지를 동시에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소매를 자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떠나갔다. 서예원이 공을 만나 보고 매우 기뻐하여 중군(중군)의 직임을 맡기며 말하기를,

“국가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인데 문관(문관), 무관(무관)의 직임을 따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군(군)은 사류(사류)이지만 이 고을의 명망이 군보다 더한 사람이 없으니, 이 직임을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공이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직임을 받았다. 그리고 장졸들을 소집시키고 맹세하기를,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은 것은 신자(신자)의 분수이다. 지금 왜구의 변란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저들을 맞이하여 항복하겠는가? 아니면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겠는가? 더구나 이 김해부(금해부)는 바로 적의 침입로에 있어서 요충지이니, 그야말로 당(당) 나라 때 장순(장순)이 수양(휴양)을 사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김해부를 사수하지 못하면 영남이 적에게 함락되고 영남이 함락되면 국가가 망하게 된다. 죽기는 똑같은 것이니, 차라리 국가에 목숨바쳐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살아서는 수치를 받고 죽어서는 자손들에게 부끄러운 덕을 남겨주겠는가.”
하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같은 고을의 벗인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 등을 발탁하여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이인지(리린지)에게 군량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사수의 계책을 하였다. 며칠 후 적들이 와서 성을 포위하였는데, 공이 밤중에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의 수급(수급) 수백을 베자 적이 도망쳤으므로 죽도(죽도)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적선(적선)이 바다를 덮으며 왔으므로 공은 성에 들어와 성을 보수하고 지켰다. 이 때 밖으로 구원병이 끊겼고 안으로 군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적과 밤낮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서예원은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북문(북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항언(항언)하기를,

“성주(성주)께서 나라의 많은 은총을 받아 한 지방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나라의 은총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도리어 거취(거취)를 경솔히 함으로써 인심이 흩어지게 한다면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자, 서예원이 떠나가지 못했다. 19일 밤에 적들이 들녘의 보리를 베어다 성 아래에 쌓아 참호(참호)를 메우고 쳐들어왔으므로 그 세력을 당하지 못하여 성은 끝내 함락되고 서예원은 북문으로 도망쳐 진주성(진주성)으로 갔으며, 주장(주장)이 없어지자 사졸들은 흩어졌다. 이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홀로 싸웠는데, 적들의 칼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화살이 집중되었다. 적들이 투항하라고 소리치자 공이 분노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남은 군졸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싸움을 그만두지 않다가 적의 창에 맞아 죽었는데, 바로 이달 20일이었다. 이 일을 부하 양업손(량업손)이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전하였으니, 아, 장렬하여라. 공의 충렬(충렬)이 끝내 조정에 알려져 난이 끝난 뒤에 공에게 공조 참의(공조참의)를 추증하였다.
공의 배위는 안동(안동) 권윤(권륜)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정백(정백)은 진사이다. 고상한 품행을 지녀 광해군 때에 북당(북당)에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동계(동계) 정온(정온)이 지은 만사(만사)에 “북당의 거센 세력에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라, 남쪽 지방에 한 사람만이 있었네.[북풍심불변 남국일인존]”라고 한 구절이 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제현(제현), 제성(제성), 제문(제문), 제원(제원)이고 딸은 정희점(정희점)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정남(정남)은 2녀를 두었는데 곽홍전(곽홍전), 곽홍곤(곽홍곤)에게 출가하였고 형의 아들 제성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참봉 조원해(조원해), 참봉 안후개(안후개)에게 출가 하였다.
공은 전사(전사)하였기에 의관(의관)조차도 수습하여 장사 지내지 못했으므로 분묘가 없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해마다 선영(선영)의 곁에서 제사를 지낸다. 배위는 묘가 모지(모지)에 있다고 한다. 117년이 지난 무자년(1708, 숙종 34)에, 임진년에 순절(순절)한 충무공(충무공) 이순신(리순신)의 후손인 부사(부사) 이봉상(리봉상)이 주지(주지)를 열람하다가 공의 사적(사적)을 보고 개연(개연)히 감탄하여 사림(사림)들에게 권고하여 충렬사(충렬사)란 사당을 건립하고 공을 제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바로 초(초) 나라의 굴원(굴원)이 국상(국상)을 지은 뜻이다. 내가 국상을 읽어보건대 그 가사에,

방패를 잡고 무소가죽의 갑옷을 입었음이여 / 조오과혜피서갑
양쪽 수레가 마주치자 칼을 잡고 싸우네 / 차착곡혜단병접
라고 한 것은 양쪽이 서로 무기를 잡고 접전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수레의 두 바퀴를 묻고 네 마리 말을 메어둔 채 / 매량륜혜집사마
북채를 잡고서 북을 두드려 울리네 / 원옥포혜격명고
라고 한 것은 자신을 잊고서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고,

긴 칼을 차고 진에서 생산되는 활을 잡았음이여 / 대장검혜협진궁
머리와 몸이 둘로 나뉘어지더라도 마음은 떨리지 않네 / 수수리혜심불징
라고 한 것은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 것이고,

몸은 이미 죽었지만 신명은 영특하여라 / 신기사혜신이령
혼백이 강하여 귀신의 우두머리가 되었네 / 혼백의혜위귀웅
라고 한 것은 아름다운 혼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초 나라 사람은 국가의 수치를 중하게 여기고 국난(국난)에 달려가는 것이 이처럼 절실하였다. 그러므로 초 나라가 종말에 ‘세 집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진(진)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왜적이 한창 쳐들어 올 때의 상황은 지난날 삼포(삼포) 및 오도(오도)에 일시적으로 약탈한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고, 온 나라의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는 기세야말로 실로 천지를 뒤덮어 버릴 듯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태평 시대의 안일한 끝에 훈련시키지 않은 군졸들과 견고하지 못한 성(성)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때 주장(주장)이 도망쳐 인심이 이미 해이해졌고 고을의 문무관들이 모두 쥐처럼 숨어 버렸는데, 공은 백면 서생(백면서생)으로서 피범벅이 된 채 눈물을 삼키며 나라에 몸을 바쳐 죽으면서도 후회할 줄 몰랐으니, 그야말로 공의 충정은 일월처럼 빛난다고 이를 만하다. 이 때 이대형(리대형), 김득기(금득기)도 공을 따라 죽었고, 이후 충의(충의)의 선비들이 잇따라 일어나 적들이 끝내 패망하여 돌아갔으니, 이것은 나라에 목숨을 바친 공의 영혼의 공렬인 것이다.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관직을 추증하여 표창하는 일이 있었고 후임 수령이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있었으니 아, 훌륭하도다. 그런데 영종조(영종조) 때 각도(각도)의 서원(서원) 가운데 함부로 설치된 것은 설치 연도를 따져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이 때 공의 사당도 철폐 대상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한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금상(금상) 계묘년(1783, 정조 7)에 본읍(본읍)의 사론(사론)이 다시 일어나 도백(도백) 및 어사(어사)에게 정장(정상)하여 끝내 다시 건립하였다. 공의 후손인 태증(태증)이 진주 목사(진주목사) 이규년(리규년)의 장문(상문)을 가지고 와서 다시 나에게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당시의 사실을 널리 찾아 내어 대략을 서술함으로써 김해(금해) 사림들에게 수정을 받아 사관(사관)이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선교랑 증 사헌부 지평 파록 황공 행장(선교랑증사헌부지평파록황공행상) 병오년


공의 휘는 여구(여구)이고 자는 인로(인로)인데, 선조는 창원(창원) 사람이다. 원조(원조) 충준(충준)이 고려에 벼슬하여 시중(시중)을 지냈고, 3대를 지나 거정(거정)이 조선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개국공신)에 참여하여 형조 판서를 지냈는데 공에게 9대조가 된다. 증조 휘 도(숙)는 돈녕부 도정(돈녕부도정)인데, 선묘(선묘) 계사년(1593, 선조 26)에 대가(대가)가 영유현(영유현)에 머물 때 공이 현령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물품을 바쳤으므로 상이 가상하게 여겨 유소보결(류소보결)과 화각채필(화각채필)을 하사하였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집에 전해지고 있다. 조부 휘 재중(재중)은 김포 현령(금포현령)이고, 선고(선고) 휘 집(집)은 홍천 현감(홍천현감)이다. 선비(선비) 청송심씨(청송침씨)는 판관(판관) 제겸(제겸)의 딸이고 부원군(부원군) 강(강)의 손녀인데, 인조(인조) 기묘년(1639, 인조 17)에 정려문(정려문)을 하사하였다. 심씨는 씨족이 성대하고 관직이 고귀하였는데, 판관의 형인 의겸(의겸)이 국정을 담당하여 세도를 부리면서 현감공이 사림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어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감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청론(청론)이 중시하였다.
공은 만력(만력) 무신년(1608, 선조 41) 5월 2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준수하고 특이하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좌우에서 힘든 일을 수행하고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현감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며 말할 때마다 효자라 하였다. 장성해서는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에 노력하였으며, 책을 읽다가 옛 사람이 효도와 의리를 행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책을 덮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기를, “선비는 기개와 절의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고무되어 분발하였다. 약관(약관)의 나이가 지났을 때 올바른 행실로 명성이 알려져 여러 차례 천발(천발)에 올랐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현감공이 홍산(홍산)의 농장에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이 훼손되어 상(상)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는데, 공이 상구(상구)를 잡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픔으로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고 상제 노릇 하기를 예도에 지나치게 했으므로 모친이 걱정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너의 집이 본시 효성으로 알려졌지만, 부자 모두가 상중에 죽을 경우 이것은 예도에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노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감격하여 울면서 모친의 명을 받들고 양천(양천)의 선산에 상구를 모시고 와서 장사 지냈으며, 이어 모친을 모시고 묘소 아래에서 여묘(려묘)살이를 하였다. 이 때에 오랑캐가 쳐들어 온다는 경보(경보)가 있어서 인심이 술렁이며 두려워하였으므로, 공이 모친을 모시고 다시 홍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차마 묘소의 곁을 멀리 떠날 수 없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 해 12월에 오랑캐가 군대를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여러 고을이 붕괴되자 상이 황급히 남한산성(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대신들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강도(강도)에 피란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하급 관직의 반열에조차 들지 못했지만 임금께서 외로운 성 안에 가 계시고 부친의 상을 마치지 못한데다 분묘가 이곳에 있으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종묘·사직이 있는 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온 가족을 데리고 강화(강화)에 들어가 마니산(마니산) 서쪽 기슭에 우거하였다. 공이 친구들과 약속하기를,

“이와 같이 지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죽음을 도피한 사람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것 또한 기필할 수 있겠는가. 이곳에는 피란 온 사람들이 많다. 나는 상복을 입은 사람이어서 전쟁의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바이다. 하지만 서로 단결하는 것은 국가와 사가(사가)를 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니, 제군(제군)들은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는가.”
하자, 여러 사람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피란 온 사우(사우) 및 서민(서민), 노복(노복)들을 소집하여 얼마쯤 되는 인원을 얻고 군대를 편성하여 나루를 지키고 요해지(요해지)를 점거함으로써 적의 목을 베거나 생포한 것이 많았다. 이에 피란 온 사람들이 많이 와서 1개 부대를 이루어 ‘황모(황모)의 군대’라고 칭하였는데, 그것은 그 계획이 공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때 검찰사(검찰사) 김경징(금경징)은 바로 원훈(원훈) 김류(금류)의 아들로서 교만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였고, 부사(부사) 이민구(리민구)는 일개 문인(문인)이었는데, 이들은 말하기를, “강화는 대강(대강)이 있는 천연의 요해지이므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하며 밤낮으로 연회를 즐기면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분개하여 상복차림으로 그의 막하(막하)에 가서 높은 음성으로 말하기를,

“이 때가 어떠한 시기인데 공 등은 날마다 술을 실컷 마시고 연회를 크게 벌이며 군무(군무)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급하게 되고도 신자(신자)들이 목숨을 보전한 경우란 없었다.”
하고, 이어 의병(의병)들에게 무기와 화약을 지급할 것을 청했는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경징 등이 좋지 않게 여기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집에 돌아와 모친께 아뢰자, 모친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는 각자 스스로 조치해야 할 뿐이다.”
하고, 이후로 상복을 벗지 아니하며 몸을 단속하고 집에 전해 온 문서들을 수습하여 별도로 보관하였는데, 공이 그 뜻을 알고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오랑캐가 강을 건너와 강화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의병이 진영을 마니산 아래에 옮겼는데, 오랑캐의 기병(기병)이 수없이 몰려와 그들의 칼날이 닿는 데마다 피가 흘러 길바닥을 덮었다. 공은 의병들과 힘을 다하여 방어하였지만 강대한 적에게 약소한 군사로써 대적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이 눈물을 흘리며 의병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국가를 위하여 이 일을 수행해 왔으니 끝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이 죽는 것은 국가에 아무런 이익이 없을 터이니, 수영(수영)에 가 있으면서 3도(도)에 격문(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소집한 다음 동쪽으로 가서 근왕병(근왕병)이 되는 것만 못하다.”
하자, 의병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모친 및 가족들을 데리고 의병들을 이동시켰는데, 미처 배를 출발시키지 못했을 때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몰려왔다. 모친이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갑자기 물 속에 뛰어들자 공이 다급한 소리로 크게 울부짖으며 바다에 따라 들어가 죽었으니, 바로 정축년(1637, 인조 15) 1월 25일이었고 이 때 공의 나이가 30세였다.
함께 따라 죽은 사람은 별좌(별좌) 유춘(유櫄)의 아내와 금구 현령(금구현령) 조견소(조견소)의 아내 및 딸이었고, 공의 어린 아우 흥호(흥호)와 출가하지 않은 누이도 물에 빠져 함께 죽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뒤에 득운(득운)이란 종이 얼음덩이 속에서 누이의 시체를 찾아냈는데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 뒤에 충현공(충현공) 이돈오(리돈오)의 아들 후성(후성)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한 가문에 순절(순절)한 사람이 이처럼 많은 까닭은 어쩌면 천지의 정직한 기운이 공의 일가에만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장렬하여라. 숙종(숙종) 을묘년(1675, 숙종 1)에 정려문(정려문)을 하사하고 영조(영조) 기사년(1749, 영조 25)에 지평(지평)을 증직하였다.
공의 전배(전배) 증 숙인(증숙인) 청송심씨(청송침씨)는 심지하(침지하)의 딸로 일찍 죽어 무후하였는데, 역촌(역촌)의 술좌(술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후배(후배) 증 숙인 양천허씨(양천허씨)는 증 이조 판서 요(요)의 딸이자 악록(악록) 성(성)의 손녀이며 초당(초당) 엽(엽)의 증손녀인데, 시례(시례)의 가문에 태어나 부덕(부덕)을 모두 지녔다. 공이 순절하던 날 아침에 첫돌이 지난 아이를 업고 의창군(의창군 선조(선조)의 서자(서자) 이광(리광))이 거처하는 집에 갔었는데, 군부인(군부인)은 바로 숙인의 고모이고 숙인의 어머니 이씨(리씨)가 그 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노(궁노)가 배를 대어 기다리고 있을 때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다가왔으므로, 이씨가 숙인을 데리고 같이 타고 교동(교동)으로 가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숙인이 직접 공이 죽은 전쟁터에 가 보았는데, 늙은 여종 몇 사람과 마을 사람 가운데 얼음 속에 숨어 죽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자세히 전하였다. 숙인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며 갯벌을 걷고 물 속을 헤매면서 하늘과 신명에게 기도하였고, 사람들을 모집하여 표류하는 시체들 속에서 공과 가족들을 찾아 내게 하되 자신이 바느질한 옷의 혼솔과 차고 있었던 물건들을 가지고 식별하였다. 7일이 지나서야 심 부인(침부인) 및 공의 시체를 끌어 냈는데, 얼굴 모습이 산 모습과 같았고 상복을 묶은 것이 이전 그대로였다. 숙인이 직접 염(감)하고 관(관)에 넣어 양천(양천) 남산역(남산역)의 해좌(해좌)의 자리에 장시 지냈다. 숙인이 공의 시체를 찾을 때 피란 온 사람들 중 자기 부모의 시체를 찾은 사람이 많았고, 자손이 없는 시체에 대해서는 숙인이 집을 팔고 재물을 모아 묻어주었으니, 아, 훌륭하여라. 이것이 어찌 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숙인은 공보다 2살 아래이고 공보다 28년 뒤에 죽었으니 바로 현종(현종) 갑진년(1664, 현종 5) 3월 27일이다. 공의 묘에 부장(부장)하였고, 숙종(숙종) 을묘년(1675, 숙종 1) 정려문(정려문)을 내렸다.
1남 의를 두었는데, 의는 화변을 겪은 이후로 매우 애통한 마음을 지녀 종신토록 서쪽으로 중국을 향하여 앉지 않았고 갑신년(명(명) 나라가 청(청) 나라에 망한 해임) 이후의 달력을 보지 않았으며, 아들들에게 과거(과거)를 보지 말도록 하다가 손자 대에 이르러 응시하도록 하였다. 아들이 5명인데 우일(우일)·우청(우청)·우성(우성)·우천(우천)·우서(우서)이고, 딸이 6명인데 윤협(윤협)·이명설(리명설)·이세익(리세익)·윤봉기(윤봉기)·이기령(리기령)·조형망(조형망)에게 출가하였다. 우일은 3남을 두었는데 섬(섬)·정(정)·민(민)이고, 2녀는 권세연(권세연)·허식(허식)에게 출가하였다. 우청은 2남을 두었는데 호(호)·정(정)이고, 딸은 이진백(리진백)에게 출가하였다. 우성은 3남을 두었는데 진사(진사) 최(최), 담(담), 무과(무과) 만(만)이고, 4녀는 이지영(리지영)·권돈(권돈)·박사원(박사원)·유형기(류형기)에게 출가하였다. 우천은 2남을 두었는데 욱(욱)과 진사 흡이고, 딸은 이규(리규)에게 출가하였다. 우서는 5남을 두었는데 문과 현감(문과현감) 빈(), 문과 면(면), 인(▼), 윤(▼), 성(성)이다. 외손 및 증손, 현손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주역(주역)》에 “사람의 도리는 인(인)과 의(의)다.”라고 하였는데, 인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는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지금 공이 충효를 실천한 것을 보건대, 죽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인의의 도리를 다한 경우라 이를 만하다. 세교(세교)가 쇠퇴한 이후로 인의의 도리가 밝지 못하고 충효의 행실을 들을 수 없을 뿐더러, 부모를 망각하고 임금을 배반하는 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아, 누구인들 남의 자식된 사람이 아니며 누구인들 남의 신하된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의 유풍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 뜻을 세우게 될 것이다. 어찌 백이(백이)의 유풍을 들어야만 뜻을 세우겠는가. 또한 붓을 잡은 군자(군자)가 기록하기를 바라는 바이기에 가장(가상)에서 뽑아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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