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꿀 힘과 지략 갖춘 아이들 나라에서 역적 누명 씌워 죽여버린 탓 진례 청주 송씨 집안에도 큰 걱정 "이제부터 숨기고 잘 다스리겠습니다" 진례면에는 청주 송씨(淸州 宋氏) 집성촌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학문 높은 선비가 많이 났다 하여 김해부사가 석축을 쌓아 보호한 마을이 있으니 바로 담안(장내·墻內)이다. 조선 정조 임금 때 담안마을에 송임(宋琳)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부터 범상치 않더니 송임은 세 살배기 아기 때 돌절구를 밀어버렸다. 범상치 않은 아들의 힘을 본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했다. 황급히 아기를 안아서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를 살펴보았다. 솜털만 보송보송할 뿐 겨드랑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기가 혹시 아기장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을 바꿀 힘과 지략을 갖춘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나라에서는 그 아기를 찾아내어 역적의 누명을 씌워 죽여 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화근을 미리 없애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쩌다 아기장수가 태어나면 아무도 몰래 아기를 죽이는 참혹한 일도 있었다. 송임의 어머니는 어렵게 얻은 자식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면서 남편과 의논했다. "설마 우리 임이가 아기장수는 아니겠지요? 혹시라도 모를 일이라 겁이 납니다."
그러나 송임의 아버지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넘겼다.
"임진년에 김해읍성에서 순절하신 할아버지께서도 힘이 좋으셨소. 허나 그 힘을 나라를 위해 쓰셨지요. 우리 임이도 그럴 재목인가 보니 지레 염려하지 말구려."
임진년 왜란 때 김해읍성에서 순절한 송빈(宋賓)은 송임의 7대조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순절 후 이조참판에 추서되었다. 후손들은 뒷산에 첨모재란 재실을 짓고 극진히 우모(寓慕)했다.
그러나 송임의 아버지도 사실은 걱정이 되었다. 하여 날마다 아들을 유심히 살폈다. 송임의 힘은 정말이지 남달랐다.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밭을 갈다 넘어진 황소를 번쩍 들어 일으켜세우질 않나, 진흙탕에 빠진 수레를 일으켜 혼자 끌어내질 않나…. 아버지도 마침내 송임의 예사롭지 않은 힘을 마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아버지는 송임에게 먹을 것을 조금만 주도록 했다. 만약 힘을 쓰기라도 하면 엄히 꾸짖었다. 글공부도 하지 못하도록 책과 종이를 아예 주지 않았다.
"때가 되어 네 힘을 쓸 곳을 찾기 전까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히 살아야 한다."
부모는 송임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나 송임은 영특해서 서당에 다니는 동무들에게서 몰래 글을 배웠다. 배가 고프면 집 밖으로 나가 힘을 써주고 먹을 것을 얻어 배를 채웠다. 유서 깊은 양반가문에 태어났는데도 글도 읽지 말라 하고, 남다른 힘을 타고 났는데도 그 힘을 쓰지 말라 하니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 | | ▲ 그림=김기영 화가 |
열네 살이 되자 송임은 김해의 씨름판을 장치고(혼자 판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부모의 걱정은 여간 크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군사가 들이닥쳐 아들을 잡아갈 것만 같아 늘 조마조마했다. 하루는 송임이 씨름판에서 탄 황소를 몰고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송임을 마당에 꿇어앉히고 절굿공이로 몹시 치게 했다. 하인이 달려들어 내리쳤지만 절굿공이만 부러질 뿐 송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다섯 개의 절굿공이가 부러진 뒤 아버지는 송임을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네 힘이 얼마나 되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씨름판에서 아직 상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밤마다 불티재까지 단숨에 올라가서 탕건바위를 열 번 들었다 놓았다 한 후에 노티재까지 달리는데 반의 반 식경밖에 걸리지 않고, 노티재에서 활천고개까지 한 식경에 능히 달린다는 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송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우리 집안은 이제 망하게 생겼다."
"저를 머슴 대하듯 하시더니 이제는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송임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 첨모재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힘센 장군감 하나 점지해주시면 송자 빈자 할아버지의 한을 풀리라 빌었더니라. 하지만 임아. 신하의 학문이 임금을 넘어서면 이는 교만이라 곧 불충이요, 장수의 무예가 지나치게 출중하면 나라에 위협이 되는 법이니 역시 불충이니라. 이것이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법이다. 불충은 곧 역모이니 너의 출중한 힘으로 인해 너와 우리 집안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구나."
그때 어머니가 사랑으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아기장수 이야기를 들려주며 통곡했다. 부모의 진심을 알게 된 송임은 그제서야 잘못을 빌었다.
"용서하십시오. 소자의 소견이 좁아 큰 걱정을 끼쳤습니다. 이제부터 힘을 숨기고 잘 다스리겠습니다."
"시절이 태평하여 너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함이 안타깝구나. 하지만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니 몸과 마음을 잘 간수하여야 한다."
제 처지를 알아차린 송임은 스스로 힘을 다스리고 숨기는 일에 힘썼다. 한 끼에 쌀 두 되 닭 세 마리를 먹어치우던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였고, 오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불티재에서 노티재, 활천고개까지 달음박질하고 오던 일도 그만두었다. 몰래 읽던 책도 다 불살라버리고 머슴들과 농사일을 했다.
청년이 된 송임은 키가 9척이나 되었다. 기골이 장대한데다 날렵하기가 비호 같았으며, 목소리는 우렁찼다. 또 도량이 크고 성품이 활달해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김해부는 물론이고 사방 고을의 여러 장사들과 형제처럼 교류하며 지내니, 차츰 농사일을 팽개치고 집 밖으로 나돌게 되었다.
백방으로 아들의 힘을 다스릴 방도를 구하던 송임의 어머니는 어느 날 한 도승을 만났다.
"불티재 너머에 돌부처를 모시게. 그러면 아들의 힘을 제법 꺾을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못이 있거든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하게."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못이라니, 아기장수의 짝이라는 용마가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대 아들의 말은 아니네. 하지만 아들의 힘이 워낙 특별하니 미리 조심해야 한다네."
아들이 아기장수가 아니라는 말에 송임의 어머니는 한시름이 놓였다. 그래서 당장 돌부처를 깎을 돌을 구하고 장인을 불렀다. 불티재 너머에 돌부처 불상을 깎아 세운 송임의 어머니는 아들이 제 명을 다할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런 후에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못이 있는지 은밀하게 수소문해 보았다. 그러나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못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남편에게 꾸지람이나 들었다.
"유학을 하는 선비로서 그처럼 용렬한 짓을 한다면 세간의 웃음을 살 것이오. 임이가 이제 마음을 잡은 듯하니 장가를 들여 내보냅시다."
장가를 든 송임은 고모실로 살림을 났다.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뒷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바위를 캐내고 나무를 뽑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을 혼자서 다 해치웠다. 그러고도 힘이 남으면 멀리 날음산고개까지 단숨에 달려가 그 아래에 있는 못에 뛰어들었다. 넓은 못을 헤엄치며 다니는데 바닥까지 내려갔다 박차고 오르기를 반복하니 못은 금방 진흙탕이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목욕을 하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이태가 지난 뒤 송임은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임은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기를 빤히 바라볼 때면 섬뜩한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놈 참. 애비 보기를 마치 아랫사람 보듯 하질 않나."
송임은 아들을 본 체 만 체 하고는 농사일에 전념했다. 논밭에서 한바탕 힘을 쓴 뒤에는 날음산고개 아래 못에 목욕을 하러 갔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고부터 날음산고개 아래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면 꼭 말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송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말 울음소리를 들은 뒤로는 이상하게도 힘을 다스리기 어려워졌다. 오밤중에도 힘이 솟아 주체할 수 없었으며, 절반으로 줄였던 식사량도 다시 늘어났다.
날마다 먹고 마시는데 양이 차지 않으니 송임은 다시 씨름판을 기웃거렸다. 김해 씨름판에서는 상대가 없어 창원이며 밀양, 상주, 안동까지 원정을 다녔다. 황소를 타면 그 자리에서 잡게 해서 먹고 마시니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줄줄 따라다녔다. 힘을 쓰기 시작하자 자꾸 힘을 쓸 일이 생겼다.
송임은 활천고개에서는 새색시를 물고 가던 호랑이를 만나 단 두 주먹에 때려잡았다. 밤마다 김해읍성에 나타나 사람을 해코지하는 처녀귀신과 맞장도 떴다. 의령에서는 이무기를 맨손으로 해치웠고, 창원에서는 곰 두 마리를 상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송임을 송장군이라 부르며 치켜세웠다. 송임은 기고만장해졌다.
"송장군에게 가서 물어 보자. 내가 그른지, 네가 그른지."
"송장군이라면 저 불한당을 단숨에 제압해버릴 것이야. 어서 가서 모셔오게."
우렁찬 목소리로 송임이 호통을 치면 아무리 험한 싸움판이라도 곧 끝장이 나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힘과 기세에 눌려 감히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임이 나타나는 곳이면 그가 힘 쓰고 몸놀리는 것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송임은 큰 바위를 번쩍 들어 힘을 보여주거나, 기둥이나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리는 등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그에게는 장난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관리나 부자들은 먹을 것과 술을 그득히 차려놓고 송임의 힘과 재주를 보고자 했다.
힘 쓰는 일에 재미를 들이다 보니 송임은 집에 붙어 있을 겨를이 없었다. 며칠씩, 몇 달씩 집을 비우기 예사였다. 어쩌다 집에 들러도 아기며 농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 "아들을 살리기 위해 용마 너를 죽였으니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 (5)천하장사 송장군 ② | | |
| 아기장수 운명 타고난 송임의 아들 겨드랑이 비늘 날로 커지며 힘자랑 아내는 아이가 해 입을까 노심초사 "날음산 못 용마를 죽여야 한대요" 용마 잡은 뒤 아들의 비늘 잘라내
참다 못한 송임의 아내는 아기를 안고 담안마을 시댁을 찾아갔다. 하소연을 들은 어머니는 며느리를 불티재 돌부처 앞에 데리고 갔다.
"이 불상은 네 남편의 힘을 꺾어 보려고 모신 것이다. 너도 여기 와서 정성을 들여 보거라."
송임의 아내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처님께 지성으로 빌면 겨드랑이에 비늘이 돋은 우리 아기도 살펴주실까요?"
며느리의 말을 들은 송임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아기의 옷을 헤집고 살펴보니 겨드랑이에 반짝이는 비늘이 돋아 있었다. 남다른 힘을 가진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였는데 손자까지 아기장수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송임의 어머니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기를 안고 돌아온 송임의 아내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전해 내려오는 아기장수의 이야기대로라면 아기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나라를 뒤엎고 새로 세우려고 할 것이니 우환덩어리였다. 송임의 아내는 아기의 겨드랑이를 남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불티재에 돌부처를 세워 남편의 힘을 다스리도록 한 도승을 찾아나섰다. 여러 날을 헤매고 다닌 끝에 도승을 만난 송임의 아내는 아기를 살릴 방도를 간청했다. 도승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도승은 아기가 태어난 고모실 입구에 두 기의 석탑을 세우라고 하더니, 날음산고개 아래 못에 용마가 있다고 했다.
"그 못을 메워 버리거나 용마를 잡아야 한다네. 용마의 기운까지 꺾어야 장수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야."
| | | ▲ 그림=김기영 화가 |
날음산고개 아래 못이라면 남편이 수시로 목욕을 하는 곳이었다. 남편 송임이라면 능히 용마를 잡을 수 있을 것이지만, 도무지 집에 붙어 있지 않으니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송임은 아기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마치 소 닭 보듯 하고 있었다.
송임의 아내는 아득하기만 했다. 못을 메워 버리고 싶었지만 쉬운 일도 아니었다. 날음산고개 아래 큰 못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 못에서 물을 끌어다 마을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데 둘레가 이천 척이나 되었다. 그렇게 크고 오래된 못을 메우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아기는 점점 자라기 시작했고, 겨드랑이의 비늘도 조금씩 자랐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송임의 아내는 석탑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는 황소와 힘을 겨루었고, 거침없이 먹고 자라는 것이 장마철 풀 자라는 것과 같았다.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그 무렵, 송임은 의령 씨름판을 장치고 함안 씨름판으로 가고 있었다. 봇짐을 지고 고갯길을 설렁설렁 걷던 중에 날이 저물어 송임은 주막에 들어갔다. 동이에 국밥을 말아오게 해서 다 먹고, 술도 동이째 마셨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송임은 걸음을 멈췄다. 몸집이 아담하고 곱상하게 생긴 도령이 손톱으로 굵은 참나무를 쪼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던 것이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송임이었다. 그러나 손톱으로 통나무를 쪼개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호기심이 동해 성큼성큼 도령에게 다가갔다. 도령은 송임을 힐끔 쳐다보고는 태연히 손톱으로 참나무를 쪼개 아궁이에 던져넣기를 계속했다. 송임은 손톱으로 장작을 쪼개고 있는 납작하고 작은 도령의 손과 두툼하고 크기가 솥뚜껑 만한 자기 손을 비교해 보았다.
"조막손이 하는 일을 내가 못하랴."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참나무 한 토막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손톱으로 쪼개 보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손톱만 빠질 듯이 아플 뿐 참나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송임은 방에 들어가 목침을 베고 누웠다. 그러나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후다닥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도령은 다른 방의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었다. 입성은 남루했지만 두 눈과 얼굴에 야릇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김해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송임은 힘 좀 쓰는 것 같으니 어디 한 번 겨뤄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었다.
"보다시피 할 일이 많습니다."
도령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더니 주막집 뒤로 갔다. 태산처럼 높이 쌓여 있는 나무더미 앞에서 슬쩍 뒤꿈치를 구르니 도령의 몸이 어느새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도령은 한 아름 통나무를 어깨에 걸치더니 휙 몸을 날려 다른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하릴없이 마당을 서성이다 송임은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뒤척이고 있으려니 도령이 들어왔다.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도령은 다른 손님이 베고 있는 목침을 손톱으로 절반으로 쪼개 베고 누웠다. 그리고는 곧 잠이 들어버렸다.
송임은 멀뚱멀뚱 도령을 쳐다보았다. 아기처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모습이 엄청나게 먹고 마신 뒤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코를 고는 자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얼마나 힘이 센 놈일까."
송임은 참지 못하고 도령을 흔들어 깨워 물었다.
"저는 지리산에서 왔습니다. 갈 곳이 없어 여기 몸을 의탁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있지요. 이름이란 것이 있긴 한데 부끄러워 감히 들먹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빤히 쳐다보는데 그 눈길이 차분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이놈 봐라 싶어 송임은 힘껏 도령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써도 도령은 한 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이맛살만 살짝 찌푸렸다.
"내 여태 여러 씨름판을 돌아다녔지만 자네 같은 장사는 처음일세."
그리고 그만한 힘을 가졌으면 이렇게 허드렛일이나 거들고 지낼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지리산에서 두 형님과 함께 도적질을 해먹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소를 팔고 돌아가는 사람을 쫓아 돈을 빼앗으려 하는데 제사에 쓸 돈이라며 내놓지를 않더라고요. 하여 제가 제사에 쓸 만큼만 남겨두고 내놓으라 하니까, 두 형님께서는 모조리 다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면서 형님들을 멀리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그때 큰형님은 백두산까지 날아갔고 작은형님은 한라산까지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사에 쓸 돈은 남겨두라고 한 저에게는 인정을 베풀어서 여기 함안까지만 던져줄 테니, 조용히 살라고 하더군요. 그때 떨어지면서 바위를 짚었는데 이렇게 손이 납작해져 버렸습니다. 장사께서도 어쭙잖은 힘 가지고 으스대지 말고 집에 가서 농사나 지으시지요."
그렇게 말한 도령은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송임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새벽 무렵 깜빡 잠이 들었다 깬 송임은 부랴부랴 도령을 찾았다. 그러나 주모는 고개만 흔들었다.
"그렇게 힘 좋은 도령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수? 하지만 내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은 저 영감탱이 뿐이라오."
주모가 가리키는 아궁이 앞에는 부지깽이 드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한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송임은 황급히 집 뒤로 보았다. 태산같이 높던 나무더미 대신에 궁색하기 짝이 없는 장작개비만 몇 아름 쌓여 있었다. 힘을 함부로 쓰고 다니는 자신에게 하늘이 불호령을 내린 것을 깨달은 송임은 씨름판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김해 집으로 길을 잡았다.
고모실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송임은 골짜기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내려갔다. 골짜기 중간 개울에서 윗저고리를 다 벗고 겨드랑이를 천으로 감싼 아이 하나가 한 손으로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고 가재를 잡고 있었다. 송임이 기척을 하자 아이는 한 손으로 밀어젖힌 바위를 놓지도 않고 쳐다보았다. 송임은 깜짝 놀랐다. 몇 년 동안 들며날며 얼굴만 보아온 바로 자기 아들이었다.
송임은 비로소 아들을 안아 보았다. 그리고 겨드랑이를 감싼 천을 들춰보았다. 아이의 겨드랑이에는 반짝이는 비늘이 선명하게 돋아 있었다. 송임은 너무나 놀라 아이를 꼭 껴안았다.
"애비가 너무 무심하였구나."
송임은 아이를 안고 부랴부랴 골짜기를 내려왔다. 고모실 입구에 도착하자 전에 보이지 않던 두 개의 석탑이 동쪽과 서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저 탑은 어머니께서 세우신 거랍니다. 아버지께서 오시면 용마를 잡아주실 거라고 하셨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에 송임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내가 용마를 잡아주고 말고. 너는 아무 걱정 말거라."
서둘러 집으로 간 송임은 아내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밖으로 나돌며 힘자랑을 하고 다니는 사이에 아이는 벌써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송임은 아내에게 아기를 맡기고 날음산고개 아래 못으로 달려갔다. 옷을 벗어던지고 고요한 못물을 노려보았다. 어느 때 들었던 말 울음소리를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꼭 아이가 태어나던 무렵이었다.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마음껏 헤엄을 치던 그 못에 용마가 있었다니.
송임은 곧 못에 뛰어들었다. 크게 숨을 머금고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물 위로 솟구치기를 거듭하면서 용마를 찾았다. 못물은 금세 진흙탕이 되었다. 이리저리 못을 휘젓고 다니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살펴보았다. 진흙탕이 된 못 저쪽에서 말 한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힘껏 헤엄을 쳐 다가간 송임은 용마에 올라탔다. 주먹을 휘둘러 콧잔등을 내리쳤다. 펄펄 날뛰는 용마와 씨름하기를 한 식경, 마침내 송임은 용마를 못가로 끌어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용마가 숨을 거둔 것을 보고 송임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불에 태웠다.
"아들을 살리고자 너를 죽였으니 나를 용서하거라."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송임은 아이의 겨드랑이를 싸매고 있는 천을 풀었다. 선명하게 돋은 비늘이 날개처럼 하늘로 뻗어 있었다. 송임은 아이의 몸을 묶고 눈을 가린 뒤 그 비늘을 칼로 도려냈다. 송임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송임은 실존했던 인물로 성품이 순수하고 도량이 크며, 또 병서에 통달한 장사였다고 한다. 나라에 전쟁이 없으니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두루 유람하며 지냈는데, 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의 품행이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진례 송장군'에 대한 여러 종류의 설화가 만들어진 듯하다. 또 아기장수의 힘을 다스리기 위해 세웠다는 두 개의 석탑 중 하나는 지금도 고모실에 남아 있다.
| 조명숙 작가 |
|
|
청주송씨 乙酉譜 上卷 85면 참조 祖 ;상훈(商燻) 父 : 도증(道增) 임 ( 琳 ) 字 : 내윤(乃潤) 서기1790년生(正廟14년庚戌6月11日生) 正廟十四年 性純謹有大度通兵書多將略國家無事 不能展其所蕰渡鴨江周遊天下只記日 記而還名曰十二國路程記東國與地勝覽所載 성품이 순수하고 삼가며 큰법도가 있었다. 병서에 통하여 장수의 도량이 있었지만 나라에 일이 없을때는 마음에 축적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펼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 천하를 두루돌며 12국 노정기라는 일기를 기록하여 돌아왔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