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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사충신께 사죄 드립니다.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15.07.18|조회수54 목록 댓글 0

순절암 상부에 참판공 할아버님의 선대이신 諱 昌(휘 창)님과 友意(우의)를 다져 제명 각인한

大明 嘉靖 丁酉(대명 가정 정유 西紀1537년) 原州 元栢壽(원주 원백수). 星山 金璟.(성산 김경)宋昌.(송창) 孫岩(손암). 님의 글씨가 478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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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암 기(殉節巖 記)

사충단(四忠壇)의 축조(築造)를 마치고 발걸음이 미친 이곳.

김해성(金海城)북(北)쪽에 한 암석(巖石)이 있는데 우뚝 솟은 모양이

맹수(猛獸)가 무엇을 치고 깨무는 형상(形狀)이라.

부인(府人)들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송공 순절암(宋公 殉節巖)이라 한다.

이는 천자가정년간(天子嘉靖年間)에 참의송공 휘 빈(參議宋公 諱 賓)의

부친 휘 창(父親 諱 昌) 및 그 오래된 친구들이 제명(題名:성명을 사람의

눈에 자 띄는데 적음)하였으며 그뒤 임진란(壬辰亂)에 미쳐 송공(宋公)이

부성(府城)을 지키다 이곳에서 마침내 돌아 가셨다. 그뒤 송공(宋公)의

후손(後孫)들이 이어서 글을 새겼으며.

내가 송공(宋 公)의 위열(偉烈)을 추모(追慕)하고 그 돌이 오래 되어

그 내력(來歷)이 없어질까 두려워 함이라 그 돌에 낀 이끼를 털어 버리고

주위 담장을 고치고 다스린 뒤에 김해부(金海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순절암(殉節巖)이 있음을 알리라.

바라건데 송공(宋公)의 이름이 이돌의 수(壽)와 아울러 다른 날에 우리나라의

고사(故事)가 되기를 바라노라.

 

임신중춘(壬申仲春)

 

부사(府使) 팔계(八溪) 정현석(鄭顯奭) 근지(謹識)

 

殉節詩(순절시)와 附殉節詩(부순절시)의 해석과 배경/八甫 宋春復

 

殉節詩(순절시) 참판공 諱 賓 의 장대벽상 순절시

 

粤自先公 荷國恩 (월자선공 하국은)

아! 내 선조님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孫何背祖 向犬戎 (손하배조 향견융)

자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를 따르리오

力盡孤城 無奈何 (역진고성 무내하)

성은 외롭고 힘은 다하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先斬二帥 效丹忠 (선참이수 효단충)

먼저 두 적장을 베어 단충(丹忠)을 보이리라.

人之仗節 人何勸 (인지장절 인하권)

남의 절개 가질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二子如今 任自量 (이자여금 임자량)

자네들은 이제 자네들 마음대로 하시게나

報國殉身 吾已決 (보국순신 오이결)

나는 이미 나라 위한 순신을 결심 하였네 

北向百拜 辭吾王 (북향백배 사오왕)

북향백배 올리오며 나랏님께 하직 드리오!.
 

1.월(粤)은 어조사월인데 두터움을 강조하는 글의 첫머리에 쓰임.

선공(先公): 선조님. 하(荷): 짐하

2.배조(背祖): 조상을 배신함. 견융(犬戎) :오랑캐

3.진(盡): 다할진. 내하(奈何): 어찌하나

4.참(斬): 참할참. 수(帥): 장수수. 단충(丹忠): 붉은 충정

5.장절(仗節): 절개를 잡다. 장(仗):짚을장. 하(何):어찌하

6.이자(二子) 손아래 사람. 임자(任自):자네, 당신. 량(量):헤아릴량

7.순(殉): 따라죽을순. 이(已): 이미이

8.북향백배(北向百拜): 북쪽을 향해 백번절함. 사(辭): 사직할사

 

附殉節詩(부순절시) 순절시에 붙여......

 

將臺壁上 表丹忠 (장대벽상 표단충)

장대의 벽상에는 붉은 충정 뚜렷한데

盆城壇中 熹燭香 (분성단중 희촉향)

분성산 충단에는 향촉이 희미하네 

義魄生生 徊竹島 (의백생생 회죽도)

의로운 넋 살아있어 죽도에 서성이고

雄魂繞繞 神魚峯 (웅혼요요 신어봉)

웅혼은 아직까지 신어산을 맴돈다 

任辰效闡 士林根 (임진효천 사림근)

그 옛날 임진년의 본보기는 사림의 근본인데 

英傑匹夫 今人商 (영걸필부 금인상)

지금은 영걸 필부 모두 다 장사치네

君不見之 麥田史 (군불견지 맥전사)

그대는 못 보았는가? 보리밭의 역사를...

三溪洗心 獨祠向 (삼계세심 독사향)

나홀로 마음씻고 충단으로 향한다!

 

1.장대(將臺): 김해성 안에 장대라는 누대가 있었으며 참판공 께서 장대의 벽에 순절시를 남겼음.

2.분성단중(盆城壇中): 분산성안의 충단. 희(熹): 희미할미

3.의백(義魄): 의기로운 넋. 회(徊): 배회할회. 죽도: 가락면 일대

4.웅혼(雄魂): 웅장한 기상. 요(繞): 두를요. 신어봉: 신어산 봉우리

5.효천(效闡): 본받고 드러냄. 사림(士林): 선비들

6,영걸필부(英傑匹夫): 뛰어난 사람과 보통사람. 상(商):상인,상민 

7.군(君):당신. 불견(不見):못봄. 맥전(麥田):보리밭, 김해성전투에서 보리를 베어 단을 쌓아 성이 함락된 고사. 사(史):역사사

8.삼계(三溪):물이 깨끗한 충단 가까이 있는 동네. 세심(洗心): 마음을 씻다. 독(獨): 홀로독. 사(祠): 사당사.

순절시는 임진왜란때의 첫 의병장 이시며 김해 분성산 사충단의 주인으로 모셔져 있는 나의 12대조 할아버지 불천위 참판공 휘 빈(諱 賓)의 충절을 드러낸 시다. 

임진왜란으로 말하면 가장 먼저 이순신 장군이나 송상현 공을 떠올리게 되는데 물론 그분들의 충절은 더없이 숭고해서 단군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흠모하고 존경하여 아직도 거국적으로 대단히 추앙해 마지않는다.

이런분들의 영전앞에 오늘 화두로서 존명을 거론하는것은 이분들의 위명에 시비를 하거나 털끝만큼의 흠을 낼 의도는 전혀없다.

다만 같은시대, 같은사상, 같은연배, 같은이유로 다 같이 위대한 불굴의 선비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다 같은 운명의 죽음을 맞이한 그들이었지만 드러나 보이는 역사의 평가는 너무 크게 달라서 400년도 더 지난 지금이지만 다시한번 그 때를 되돌아 보면서 내 할아버지와 이분들에 대한 충절의 값을 한번 더 따져보고 싶을 뿐이다.

1.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으로 충절을 보인 송상현 공은 1551년생이며 1576년 문과에 급제, 관리로서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4월15일 아침 왜군이 동래성을 에워싸고 길을 빌려 달라고 하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는 말로 항복을 거부하여 적이 격분 총공격을 감행 이에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엄청난 전력의 열세로 불과 한나절만에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러러 조복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않은채 전사하였다. 뒤에 이조판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렬의 시호를 내렸으며 부산충열사 등에 배향 되고있다.

2.백의종군(白衣從軍)하신 이순신장군은 1545년생이며 참판공보다는 3살이 적고 충렬공보다는 6살이 많으나 1576년 무과에 급제, 관리로서 등용된 시기는 충열공과 같은해이다. 왜침을 사전에 예견하고 준비를 하였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아 해전에서 수많은 승리를 하였으나 아군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하는등 장수로서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활약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결국 마지막 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전사하였다. 뒤에 선무공신 일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조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의 시호를 내렸고 아산의 현충사 등에 배향 되고있다.

3.이상 두분의 충신들은 조선역대 위인중 최고로 존경받는 충렬공과 충무공 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분들은 그 당시 최대의 국난에 직면하여 출중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나라의 명에 의해 나라를 지켜내야 하는 어쩌면 현직관리로서 의무이자 임무를 수행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관리들은 죄다 도망질을 쳤으니까 자기들만 목숨바쳐 싸울 이유는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국록을 먹는 촉망받는 관리로서 나라의 명에 응하여 의무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다 장렬하게 순직한 충신이었다' 라는 당연한 내용외의 설명은 더 이상 할수 없는 것이다. 

4.내 할아버지 참판공은 1542년생으로 향시에 5번 합격하고도 예조에서 번번히 꺽여 과거를 포기하고 선비의 길을 가던중 1592년4월 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이 없는 포의의 몸이지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의병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임란 최초의 의병장이다.

다대포, 부산진성, 동래성이 차례로 한나절 또는 반나절만에 떨어지는 상황을 보고 지원왔던 초계군수는 물론 아무리 만류해도 현직부사까지 도망가는 불리한 전장에서 함께 들어온 의병들을 독려하며 "나라위해 한번죽음은 선비의 분수이다. 도망하여 후손에게 치욕을 남기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라고 외치면서 중과부적으로 수많은 왜군과 대치하여 싸우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공은 적정을 살펴 수비만 한것이 아니고 야음을 틈타 성밖 멀리 죽도(가락면)에 까지 나가 공격하여 적의 목을 많이 베었다. 이후로 적이 겁을내어 공격이 뜸 하였다. 관군은 도망하고 500명도 안되는 의병만 남아 지키기를 여러날13,000명의 대군으로 들판의 모든 보리를 다 베어 담을 쌓아 성을 넘어 공격해 오니 더이상 지키기는 힘들었다. 어쩔수없이 부하들에게 몸을 피할것을 권하였으나 모두가 공과 함께하기를 원하여 결국에는 수백명의 의병과 함께 적의 칼날을 받고 넘어졌다.

이때를 당하여 절구 이수를 지어 장대의 벽에 남긴글이 곧 충(忠)이 드러난 순절시다.

 

난이 끝난 한참후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 참의로 추증되고 고종조에 가증되어 참판공이 되었으나 조정이 바뀔때마다 사당이 헐리고 재건되는등 수난이 많았다. 한갖 포의(布衣)인 선비의 몸으로 저 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창의(倡義)하여 영남뿐 아니라 전국 의병의 효시로서 그 후 곽재우, 정인홍등 많은 의병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결국은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되어 그 규모가 가이 관군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반면에 관군은 한달만에 한양을 내어주고 의주로 피란하는 지경에 이러렀으며 그래서 임진왜란은 의병전쟁이라는 사학자들의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조직과 훈련으로 조련된 관군도 한나절을 버티기 힘든 싸움에서 선비의 몸으로 의병으로 6일간이나 성을 지켜냄으로서 진주성등 아군의 방비할 시간을 벌었고 의병조직의 선례를 보였으며 의병으로도 싸울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줌으로서 그 업적은 실로 세세한 글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비교하여 간추려 보면

5.현직부사나 관리께서 순직하면

조정에서 시호도 내리고 벼슬도 최대한 높인다.

조정및 유림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영웅으로 만든다.

사당도 크게 짓고 후배 관리들도 잘 받들어 모시므로 화려하고

웅장하여 늘 많은 사람들이 찾고 붐빈다. 

예) 안락동 충열사, 아산 현충사

6.최초의 의병장이 순절하면

후손과 뜻있는 선비들이 아무리 상소해도 잘 들어주지 않는다.

향민과 향사들이 사당을 세워 기리면 뜯어라고 한다.

선비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상소하면 그때서야 벼슬도 쬐끔

올려주고 배향도 허락한다. 그러나 끝까지 시호는 없다.

홍보도 안하고 예산지원도 흉내만 내므로 사당이 늘 쓸쓸하고

초라하여 일부의 후손 외에는 찾는 사람이 드물다.

예) 김해 동상동 사충단(송담서원)

7.도망간 부사는 어찌되었나?

지원왔던 초계군수와 관군이 도망을 하므로 이놈들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북문을 통해 빠져나가 강창(지금의 강동나루터)에서 배를타고 진주방면으로 도망하였으나 도망한 장수는 죽이므로 (도망친 지원군 이유검도 조선군에 체포되어 목이 베임)산으로 숨어들어 뒤에 의병이 조직될때 김면 의병장의 휘하에 있다가 진주목사가 전사하자 목사가 되어 진주성이 함락될때 또다시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왜군들이 패잔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잡혀 곧 흉한 꼴로 일생을 마쳤다.

8.이 글을 읽은 독자들 께서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무었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파당을 지어 자리싸움에만 급급한 관리들이 한쪽은 전쟁이 난다 하고 한쪽은 전쟁이 없다고 하며 오로지 정권장악의 탐욕만을 위한 정치 현실에서 그 시대 그나마 위대한 선생이 셨던 조 남명 께서 벼슬은 멀리하면서도 후학들에게 선비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고 그의 뜻을 따르는 수많은 후학들이 국난을 만나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으로 일어나 선생의 선비정신을 꽃피운 결과로 볼수있을 것이다.

남명 조식선생이야 말로 고금을 통들어 최고로 성공한 선생이라 하지 않는가?.

참고로 남명선생은 김해에서 30년간이나 후학을 가르쳤고 왜란발발 20년전인 1972년에 돌아 가셨으며 그의 제자들이 임진란 당시 당대 사림의 거두로 성장해 있었다. 지금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남명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으며 후손과 뜻있는 분들이 향사를 드리고 있다.

9.부 순절시에 대해서는 참판공의 후손으로서 참판공의 순절당시가 51세였고 지금 내 나이가 51세인데 400년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도대체 선비정신이 뭔지 어떤 정신의 지배세계가 그런 큰 힘을 발휘하는지 현재의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하기 조차 힘들다.       

나도 그와같은 상황에서 적군의 칼날앞에 목을 내놓고 담담히 초개같이 죽음을 받아드릴 만큼의 대단한 용기와 자신감이 조금이라도 내재해 있을까?.

턱도 없이 무리한 상상도 한번 해 보면서 새삼 그 사상의 위대함과 주저없는 행동은 지금의 나로 하여금 무한한 경외심으로 가득채워 마음을 사로 잡히게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세태의 속물적인 계산 값으로도 도저히 환산할수 조차 없는 이 위대한 자산인 선비정신이 어느듯 아무도 모르게 혼란한 시장통의 아우성 속으로 조금식 사라져 이제는 어느순간 영원히 잊혀지고 버려지고 말 운명의 가슴아픈 스글픔도 함께 느낀다.

매일 매일 남들과 같이 늘 바쁘게 살면서 그나마도 선조의 후덕인지 내림인지 참판공 할아버지의 표충을 흠모하여 이웃들에게 팔불출 소리를 들어 가면서 까지 순절시를 외우고 다니면서 자랑해 마지않는 나 이지만 여태까지 초하루 보름날 분향에도 겨우 한번밖에 참여하지 못 해본 불초하고 얼치기 후손인 형편에 누가 누구에게 원망하고 비교하고 또 따져서 훈업을 더욱 빛내고 할 형편이 겠는가?.

다만 내집이 부산 충열사에서 그리 멀지않아 그 충열공의 위용을 잘 알고 있고 년중 충무공 드라마를 줄줄이 방송하니 그기에 또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그에 조금도 못지않고 오히려 더욱 훌륭한 공훈을 드러낸 분이 우리 할아버지 참판공이신데 교과서에 라도 올라서 조선 선비의 기개를 일월처럼 드러내어야 할 위인께서 여태 제대로된 평가 한번도 못 받은것 같아서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 더 이상 표현할수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멀찍이 백보 천보 뒤에서라도 후손된 도리와 의무를 행할 마음의 다짐을 한번더 새로이 하면서 외람되이 순절시의 꽁무니에 졸렬한 한마디를 달아 보았는데 부끄럽기 그지없다.

 

殉節岩(순절암)
2015년 07월 15일 (수) 송종복 sojobo@hanmail.net
  
▲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殉:순 - 목숨을 바치다 節:절 - 절개 岩:암 - 바위

 국가의 충성으로 맺어진 바위가 몇 있다. 부여의 낙하암, 경주의 대왕암, 진주 촉석루의 의암, 그리고 김해의 순절암이다. 유독 순절암의 안내간판이 없는 것은 김해문화의 수치다.

 국가의 충성으로 맺혀진 바위가 많다. 大王岩은 신라 문무왕이 ‘나는 죽거든 수중바위에 묻어 달라. 해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하여 붙인 이름이다.(경주시 1967년 7월 24일 사적 158호). 落花岩은 충남 부여 백마강변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백제가 망하자 많은 궁녀가 이 바위에서 투신하였으므로, 이를 미화해 낙화암이라 했다.(1984년 5월 17일 충남 문화재 110호). 義巖(의암)은 진주 촉석루 남강의 바위로, 1593년 7월 29일 논개가 왜장 로쿠스케를 껴안고 투신한 곳이다.(경남기념물 235호).

 그러면 김해에 있는 ‘순절암(殉節岩)’은 어떠한가. 1592년(선조25) 왜적 풍신수길이 부산을 급습해 동래와 양산을 함락시키고, 18일에 김해 죽도(竹島)에 진주했다. 4월 19일에 불암창까지 조총을 쏘며 진격해 오자 20일에 성이 무너졌다. 이때 김해를 향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나라의 부름도 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의병장이 있으니, 바로 송빈(宋賓) 장군이다.

 부사 서예원도 도망가는 판에, 그는 김해성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모아 중군도총으로 3일간이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하자, 성내의 큰 바위에 올라 임금을 향해 북향재배 하고는 전쟁 중에 순절했다. 1630년 <김해읍지>에 이 바위를 ‘宋公殉節岩(송공순절암)’이란 기록이 있다. 또 1736년에 부사 한행( )이 중각했다. 그 후 1964년 이 바위 위에 증이조참판 청주송공순절 기념비(贈吏曹參判 淸州宋公殉節 記念碑)를 세웠다.

 경남도는 이 바위를 1974년 2월 16일 경남기념물 4호(지석묘)로 지정했다. 정말 웃지 못 할 일이다. 필자가 1960년대 초 동래의 P대 사학과에서 공부할 때 ‘고고학’이란 커리큘럼(교과과정)도 없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학문이며, 당시 <국사세미나>에도 ‘고인돌(지석: Dolmen)이란 고대인의 족장의 무덤이다. 아니다. 수호지역의 경계표지다’라고 왈가왈부한 적이 있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 제일 많고 흔한 바위이다. 수적으로 3~4만 개나 된다 하니, 그 존재가치는 미미한 실정이다. 고인돌의 용어조차 없던 시대에 성내의 큰 바위에서 순절했고. ‘순절암’이라고 세긴 바위에, 또한 그 충성을 기리어 세운 ‘기념비’에, 후대에 와서 엉뚱하게 ‘지석’이란 간판을 세웠다니 무지몽매한 짓이다. 이 같이 조국을 지키다 순절한 공의 안내판이 없다는 것은 타 시군에 비하면, 김해문화는 불모지대임을 자인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조유식의 허튼소리- 김해 사충신께 사죄드립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난 이후부터 전국의 중소 도시마다 자기 지역의 역사적 인물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역사인물들이 방송과 문화예술의 발달로 새롭게 조명되면서 국민적 인기가 높을수록 서로 그 주인공이 자기 지역 출신이라며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법적 판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이처럼 경쟁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주된 목적은 지방자치단체의 홍보와 관광 등 재정적인 경제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도시라는 이미지 효과와 교육적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김해는 전국의 중소도시와는 달리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발굴과 보존 업적계승사업을 비롯하여 활약상 등 예우와 홍보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어떻게 보면 김해의 자산이자 자랑이며 김해 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그러한 역사적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를 지키다 전사한 송빈(宋賓)ㆍ이대형(李大亨)ㆍ김득기(金得器)ㆍ유식(柳湜) 네 충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단(墓壇)이 김해 표충사인 사충단이다.

 

사충단을 동상동 산 중턱으로 옮겨놓고 옛날 동구 밖 상엿집처럼 냉기만 쌩하게 도는 곳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사충신에 대한 선양사업은 고사하고 사충단 관리도 엉망이다.

 

김해시가 운영하고 있는 역사 유적지 체험탐방 코스에서부터 관광 안내 지도에서조차 사충단은 제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 년 365일 중 사충신이 순절한 매년 4월(음) 20일 제례를 봉행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364일 사충신은 외롭다. 사충신은 김해를 지키기 위해 왜놈들과 싸우다 전사한 자랑스러운 의병장이자 우리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훌륭했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들을 모신 묘단인 사충단이 이웃에 있어 재산증식에 방해가 된다며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참으로 대단했던 김해 유지 4~5명이 의기 투합하여 동상동 구산동 개발 지역으로 옮겼다가 조합장을 비롯하여 일부 조합원들의 이전요구로 또다시 현재의 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충신이 노해서일까?

 

그동안 사충단을 두 번이나 옮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재력가 지역유지 4명은 사충단을 옮긴 이후 가정 파탄과 사업몰락 등으로 파산하여 김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며 두 번째 사충단을 산으로 밀어 올린 조합관계자들도 조합부도와 함께 상당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이라도 민관이 합동으로 의병장사충신을 잘 모시는 운동을 해야 한다.

 

사충단을 김해시 봉황동 봉황대 유적지 인근으로 옮겨 의병박물관을 신축하여 사충신의 업적과 행적 활약상 김해성 전투과정 전사과정 그리고 전사 이후 나라에서 내린 각종 벼슬과 고지 등을 중심으로 사충신 유물들을 전시하여 교육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민 누구나 찾기 쉽고 참배하기 좋은 장소에 사충단이 있다면 관광명소로도 크게 기여될 수 있을 것이다. 김해시와 교육당국 시민단체 등 민관이 합동으로 사충신 선양사업을 추진하여 김해시민으로서 자긍심과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러운 김해 인으로 육성해야 한다.

 

몰지각한 지역토호세력들에 의해 자행된 사충신에 대한 만행에 김해후인들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를 올려야 한다.

 

1972년도부터 사충단의 비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방조자인 필자도 그동안 마음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죄스러움을 사충단을 도심으로 옮겨와 사충신 선양사업을 시민운동사업으로 발전시켜 보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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