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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별묘제사.송담서원 표충사 향례에 많은 참석 바랍니다.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16.05.24|조회수309 목록 댓글 0

불천위 제사(不遷位 祭祀)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이의 제사를 영구히

지낼 수 있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불천지위(不遷之位),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이 죽으면 그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도 좋다고 나라에서(왕이) 허락한 신위(神位)입니다.

보통 제사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때 모시게 됩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불천지위, 불천위에 봉하면 그 분의 제사는 영구히 지낼 수 있게 됩니다.

큰 공훈을 세운 이를 둔 가문에 이 불천위 제사가 있습니다.

이 불천위 제사는 그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판공(參判公) 휘(諱) 빈(賓) 내외분의 불천위(不遷位) 별묘(別廟)를

김해시 진례면 담안 첨모재(瞻慕齋)에 뫼시고 매년 (음력) 4월19일.2016년5월25일참판공 할아버님 (음력) 5월27일 증.정부인(增.貞夫人)할머님의 불천위 제사를 봉행하고있는 우리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될줄 압니다.특히 참판공 제사를 봉행한 다음날 매년 음력 4월20일 2016년5월26일 오전10시에는 김해시 동상동161번지 송담서원내 사충단(四忠壇)표충사(表忠祠)에서 사충단 표충회(四忠壇 表忠會)주관으로 김해시장이 제주(祭主)가되시고 경찰서장 교육장이 3헌관이되어 매년 수백명씩 참석하여 정성껏 향사(鄕祀)를 받들고 있다.

종친 제위께서도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2016년도 5월25일(음력4월19일)은 김해시 진례면 담안 첨모재 별묘 참판공(參判公)할아버님의 불천위 별묘 입제일 입니다. 종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

제사 봉행은 5월25일 자정에(밤12시정각)에 김해시 진례면 담안 제실(첨모재) 별묘에서 봉행됩니다.   

문의처  010-2859-3356 송유장

          010-2540-3615  송유룡

 

"왜적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

(13)꽃이 진 자리:임란 김해 사충신(1)
2015년 04월 22일 (수) 09:16:29 호수:219호  12면조명숙 작가 report@gimhaenews.co.kr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한 지 이틀만에
 죽도에 도착한 왜군 김해성 공격 채비
 송빈·이대형.김득기 "성을 지키겠다"

 왜군, 1차 공격 이틀 뒤 대대적 침략
"도적놈들에게 성을 내어줄 수 없다"
 결사항전으로 두번의 공격 막아내는데…

1.
1592년 임진년 전쟁은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번대가 절영도에 배를 대고 부산진과 다대포, 동래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틀 뒤 가토 기요마사가 2번대를 이끌고 언양과 경주를 통해 한양으로 길을 잡을 예정이었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3번대는 4월 14일에 다대포를 거쳐 장락포(獐洛浦·녹산면)를 경유, 죽도(竹島·가락면)에 도착했다. 구로다는 조선말에 능한 군사로 하여금 지세와 정보를 살피게 하면서 영남 내륙의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인 김해성을 칠 준비에 들어갔다.
 
부산진으로부터 왜군이 침략했다는 봉화가 피어오른 하루 뒤인 4월 14일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부산진성과 다대포진, 동래성이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진주에 내려와 있던 경상감사 김수(金수)에게 파발을 보낸 김해부사는 창원에 진주해 있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에게도 김해성의 위급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의령, 함안, 합천 등의 부사와 군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또 지역의 유지인  송빈(宋賓)과 이대형(李大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
 

  
▲ 그림=범지 박정식



 
 김해부사의 서찰은 진례 담안마을 송빈에게 전달되었다. 청주 송씨 집성촌인 담안은 김해부에서 마을을 담으로 둘러 특별히 보호할 정도로 덕망과 학식을 갖춘 선비가 많은 마을이었다. 송빈은 이대형과 마찬가지로 향시에 합격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경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송빈은 천성이 맑고 깨끗했으며, 풍채가 보통이 넘는 장사로 의로움을 사랑했다.
 
김해성이 위급하다는 서찰을 받은 송빈은 진례 신안 팔성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는 큰아들 정백(廷白)에게 갔다. 출정의 뜻을 알린 송빈은 정백으로 하여금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우들을 살피도록 했다. 그리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격문을 써서 여러 마을에 돌렸다. 이튿날 격문을 보고 모인 의병과 함께 김해성에 들어가니, 벗인 이대형과 김득기(金得器)가 와 있었다.

 

이대형은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보이며 함안 산인면에 고려동이라는 자치구역을 형성하고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살다 간 모은 이오(李午)의 6대손이었다. 이대형은 재령 이씨 특유의 엄격한 성품에 신의가 있었고, 성정은 부드러웠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경시에서는 번번이 낙방한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신어산 아래에 관천재(關川齋)를 짓고 살면서 양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김해부사의 인척이기도 했던 이대형은 서찰을 받고 아들 우두(友杜)와 사두(思杜)를 불렀다.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이우두와 이사두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함께 싸울 것을 자청했다. 그러나 이대형은 함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을 아껴 선조의 대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는 것 또한 충임을 들어 두 아들을 피난하게 했다. 그리고 마을을 돌며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갔다. 김해부사는 몹시 기뻐하며 공진문(拱辰門·북문)을 지키도록 했다.
 
김득기는 거인리(居仁里·외동) 사람이었다. 성품이 담담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공손했으며, 평소 습관이 검소하고 가법이 엄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찍 무과에 급제했으나 당쟁이 난무하는 중앙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득기는 효심이 깊고 출세에 뜻이 없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다.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된 김득기는 17세의 아들 간(侃)에게 병중인 아내 신씨(辛氏)를 부탁했다. 그리고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입고 있던 도포와 함께 6대 독자 아들에게 주고 김해성에 들어와 있었다.
 
송빈.이대형. 김득기는  김해성을 지키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김해부사는 송빈을 중군도총으로 삼아 서문을 지키는 소임을 주고, 김득기에게는 해동문(海東門·동문)을 맡겼다. 또 합천 초계에서 군수 이유검(李惟儉)이 병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중위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이로써 김해성은 비로소 왜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피난하기에 급급하던 부민들이 김해성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며 의병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때 김해부에서 점고한 군사는 속군과 속현의 군사 600명에다 의병을 합쳐 1천 명이었다. 김해부사는 군사 1천 명과 피난민 1만 명이 먹을 군량 조달의 일을 이인지(李麟趾)에게 맡겼다. 이인지는 즉각 성내를 돌며 군량을 모았다. 그러나 이제 막 보리가 피기 시작한 4월 보릿고개였다. 먹을 만한 것이라곤 깡그리 쓸어 모아도 사흘치가 채 되지 않았다. 초계군수가 이를 보고 성급히 말했다.
 
"다대포와 부산진성, 동래성이 무너지는 데 한 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 왜구의 침입은 예사롭지가 않아요. 승산을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초계군수는 공명심이 많았다. 합천 초계는 영남 내륙이라 비교적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김해부사의 서찰을 받고 초계군수는 작은 공을 세워 벼슬을 높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김해성에 와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왜군의 수가 20만이라느니, 30만이라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계군수를 불안하게 한 것은 자신 외에 어떤 지역에서도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라를 침범한 적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일 것이오. 어찌 승산을 따져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오? 김해부는 특히 들판이 넓고 비옥하여 물산이 많으며 삼포(三浦·동래 부산포, 웅천 내이포, 울산 염포)와 가까우니 군관민이 합심하여 방어해야만 하오."
 
송빈이 우렁찬 목소리로 훈계하며 노려보았다. 김득기, 이대형도 송빈에게 합세하니 초계군수는 오금이 저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4월 17일 마침내 왜군이 김해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척후병의 전갈이 왔다. 왜군은 죽도에서 강창(江倉·서부동)과 불암창(佛巖倉·불암동)으로 나뉘어서 쳐들어왔다. 그 수가 1천 명이 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한 김해부사는 피난민들을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탄탄하며, 성곽을 둘러싼 성호(城濠·해자)가 깊었다.
 
해동문과 진남문 앞에 도착한 왜군은 곧바로 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높은 성곽과 성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은 오후가 되어서야 조총과 화살을 쏘면서 전투 분위기를 조성했다. 왜군의 수가 조선군과 비슷한 것을 보고 초계군수는 괜한 걱정을 했다며 마음을 놓았다. 초계군수의 눈에는 왜군이 오합지졸로 보였다. 김해부사 또한 왜군을 가벼이 여기므로, 김득기가 크게 우려하며 말했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합니다. 한나절만에 부산진과 동래를 무너뜨린 왜군이니, 한 번 싸움으로 끝장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송빈과 이대형도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김해부사는 하는 수 없이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저물자 조선군은 성문을 열고 왜군 진영을 습격했다. 왜군 진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곧 진을 흩트리고 달아났다. 이때 목이 달아난 왜군의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
 
김해성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군사들과 의병, 그리고 부민이 마음껏 기뻐하고 있을 때,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여세를 몰아 왜군의 뒤를 쫓아갔다.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왜군이 고작 1천의 군사로 영남의 관문을 공략하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병장들의 충언보다 어서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강창에서 초선(정탐선)을 타고 도망친 왜군의 뒤를 쫓던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미명 무렵 죽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초여름의 무성한 갈대숲 사이에 정박해 있던 왜군 3번대와 마주쳤다. 선발대로 보낸 1천 명 중 절반을 잃어버리고 노발대발해 있던 3번대 총사령관 구로다는 초선을 향해 조총과 화살을 퍼붓게 했다.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초선을 모두 빼앗기고 겨우 성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무찌른 적은 선발대에 지나지 않았소. 열 배나 되는 군사가 죽도에 상륙해 있었습니다. 김해성을 노리고 있는 왜군은 3번대 주력군이랍니다."
 
죽도에서 목격한 왜군의 규모를 알리는 김해부사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렸다.
 
"올 테면 오라고 하시오. 닥치는 대로 베어 줄 것이니."
 
우람한 풍채의 송빈이 칼을 뽑아 휘두르니, 김득기가 거들었다. 이대형은 겁에 질린 김해부사에게 창원에 있는 경상우병사에게 다시 지원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내도록 했다.
 
4월 18일 왜군이 죽도에서 김해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소문이 성내에 퍼지자 겁을 먹고 달아나는 부민과 군사가 속출했다.
 
"작은 공을 세우려다 목이 달아나게 생겼구나."
 
초계군수는 변방의 성에서 싸우다 죽게 될 것이 억울했다. 앞뒤 사정을 살피지 않고 군사를 끌고 온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초계군수는 달아날 기회를 노렸다.
 
4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왜군은 대대적으로 김해성을 향해 몰려왔다. 단숨에 성을 점령하려는 듯 왜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그 수가 1만 3천에 이르는 것을 보고 성내의 군사와 의병, 피난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 예의를 모르는 도적놈들에게 순순히 성을 내줄 수는 없소."
 
왜군의 규모는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의병장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왜군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곧 첫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깊은 성호를 건너지 못한 왜군은 멀찌감치서 활과 조총을 쏘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더니 물러나 한참을 잠잠하다가 또 공격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왜군은 무기와 사다리를 들고 호에 뛰어들었다. 호에 뛰어든 왜군 중 일부는 물에 빠진 개미처럼 허우적거렸고, 또 일부는 무사히 호를 건너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그리고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민과 의병들이 성벽 아래로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었다. 성벽을 오르던 왜군이 비명을 지르며 호에 떨어졌다. 김해부사는 진남문에서, 초계군수는 해서문에서, 그리고 의병장들은 해동문과 공진문에서 그렇게 싸웠다. 두 번째 전투에서도 왜군은 성벽에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어찌 왜적에게 목숨을 구걸한단 말인가"… 붉은 꽃이 된 사충신과 의병들
(14)꽃이 진 자리:임란 김해 사충신(2)
2015년 05월 06일 (수) 08:57:00 호수:221호  11면조명숙 작가 report@gimhaenews.co.kr
  
▲ 그림 = 범지 박정식


김해성을 향해 물밀듯 밀려드는 왜군
사충신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으로 맞서
의로운 죽음으로 끝난 임란 최초 의병전
그들이 진 자리 아직도 그 향기 남아

 

 

2.
두 번째 전투가 끝난 뒤에야 총사령관 구로다는 김해성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성벽과 깊은 호에 기대어 있는 김해성에서 시간을 끈다면 한양까지 단시일에 진격하려던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은빛 의자에 높이 앉아 김해성을 노려보던 구로다는 군사들을 성의 북쪽으로 보냈다. 구로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성의 젖줄이 되고 있는 호계천 상류를 흙가마니로 막았다. 호계천의 물길이 막히자 제일 먼저 실개천이 말랐다. 그리고 개천과 우물이 점점 마르기 시작했다. 
 
김해성 조선군 진영에서는 구로다의 전략을 알지 못했다. 겹겹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왜군의 수가 엄청나기는 했으나, 해동문에서 백응량(白應良)이라는 군사가 대궁을 쏘아 말 탄 왜장을 쓰러뜨리자 사기가 충천해있었다. 백응량은 세 번 더 활을 쏘아 왜군 세 명을 쓰러뜨렸다. 
 
해동문에서 장수를 잃자 왜군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공격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호를 헤엄쳐 건넌 왜군들이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돌과 끓는 물을 부었다. 어린아이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달려들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었다. 낮이 제법 기운 뒤에 왜군은 세 번째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군사들과 피난민들이 지친 몸을 잠시 쉬고 있을 때, 세 번째 공격에서 실패한 왜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해괴망측한 춤을 추는 등 야료를 부렸다.
 
세 번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김해부사와 의병장들은 불안했다. 성호를 건너 성벽을 오르는 왜군을 막아내느라 군사와 부민들은 지쳐 있었다. 식량은 바닥이 났고, 성내의 개천과 우물이 말라버렸다. 김해부사와 의병장들은 애타게 원군을 기다렸으나 경상우병사는 물론이고, 창원뿐만 아니라 창녕, 의령 등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서도 서찰 하나 없었다.
 
김해부사는 각 성문을 맡은 의병장들을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중위장 초계군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위장을 찾아오라. 한 시가 급하다."
 
김해부사가 내린 영을 듣고 나간 부관이 잠시 뒤 돌아왔다. 부관은 초계군수가 해서문 수문장을 베고 달아나 버렸음을 알렸다. 어이없는 사태에 의병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김해부사가 분연히 일어나며 당장 가서 잡아오겠다고 나섰다. 송빈이 김해부사 역시 싸울 마음을 잃어 달아날 작정임을 알고 크게 꾸짖었다.
 
"나라의 은덕을 입은 관리로 성의 방어를 맡았으면서 이런 위급한 때를 만나 거취를 가벼이 하다니, 용서할 수 없소이다."
 
해가 질 무렵에 왜군은 한 번 더 성을 공략했다. 호를 건너 성벽을 오르는 왜군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죽을 힘을 다해 네 번째 전투를 치른 군사와 부민들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그 와중에 김해부사까지 성을 빠져나가 사라져 버렸다. 성을 지켜야 할 주장(主將)과 중위장이 달아나 버리니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대형과 김득기는 송빈으로 하여금 주장(主將)에 앉게 하고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마침 산산(蒜山·대동 예안리 마산)사람 유식(柳湜)이 수십 명을 이끌고 북문을 통해 입성했다. 왜군이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히 성으로 들어온 유식은 의병과 부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송빈, 이대형.김득기에게 유식은 백만원군과 같았다.  
 
유식은 성종 때 수군절도사를 지낸 문화 유씨 용(墉)의 손자였다. 유용은 전라우수사를 지냈고, 숭록대부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말년에 주촌 천곡리 덕진교 상류에 낙향했다.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현(名賢)과 대작(大爵)이 수두룩했던 가문에서 태어난 유식은 뜻이 크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절의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서와 병서를 읽으며 지내던 중에 왜군이 월당진(月堂津·대동 월촌리)을 건너 김해성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유식은 왜군이 한양을 침범하면 임금이 욕을 당할 것이라 염려하며 백형(伯兄)에게 집안을 부탁했다. 유식의 뜻을 가상히 여긴 백형은 집안의 장정과 노비 1백을 모아 함께 가도록 했다. 주장 송빈은 유식에게 해서문을 맡겼다. 이대형이 공진문을, 김득기가 해동문을 맡고 송빈이 진남문을 맡으니 김해성은 의병이 지키게 되었다. 이때 유식의 나이 41세였고, 의병장 중에서 가장 젊었다.
 
유식은 성내 우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말을 듣고 망루로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그러더니 곧 관아로 달려와, 객관 앞의 마당을 파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관 마당에서 폭포 같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의병들과 부민들이 하늘이 돕는다 기뻐했다.
 
네 사람의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가 선두에 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김해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있을 때 함안 사람 이령(李伶)이 왜군과 싸우기를 각오한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또 입성했다. 김해성은 다시 결사항전의 의기로 넘쳐났다. 
 
왜군 첩자가 성내에 있다가 이 일을 목격하고 조선군 중에 신장(神將)이 있다며 구로다에게 알렸다. 그러나 구로다는 코웃음을 쳤다. 구로다는 들판에 가득한 풋보리를 베어 성호를 메우게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조선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밤새도록 소규모 소동을 일으켜 조선군 진영을 교란하도록 했다. 
 
4월 20일. 이른 아침 동문을 지키던 김득기와 병사들은 밤 사이에 성벽 아래 성호가 보릿단으로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수많은 왜군들이 풋보리를 베어 날라 성호를 메웠고, 그 높이가 이미 성벽에 가까워져 있었다. 보릿단을 밟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왜군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김득기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해동문에서 유식이 있는 해서문 쪽으로 물러났다.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왜군은 조총과 대포, 화살을 퍼부으며 해서문으로 밀려왔다. 해서문이 무너지자 김득기와 유식은 해동문으로 갔다. 해동문에는 공진문에서 밀린 이대형이 와 있었다. 의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군과 맞섰다. 여기저기서 몸이 쪼개지고 피가 나는 아비규환의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와 부민이 왜군의 칼날 아래 무참히 쓰러졌다.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시체가 언덕이 되었다. 
 
마침내 이대형, 김득기, 유식은 전패(殿牌· 임금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전(殿)을 나무판에 새겨 객사에 위패처럼 걸어 놓은 것)가 걸려 있는 객사까지 밀렸다. 왜장은 세 의병장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대형, 김득기, 유식이 거부하고 무기를 버리지 않으니 왜군들이 칼과 창으로 수없이 찔렀다. 이대형, 김득기, 유식은 의병들과 함께 전패 아래서 절명했다.
 
세 의병장들의 죽음을 목격한 한 부민이 진남문에서 버티고 있는 송빈에게 몸을 피하기를 권했다. 송빈은 듣지 않고 절명시를 읊은 뒤 성내 큰 돌 위에서 마지막까지 왜군을 베었다. 왜군이 칼과 창으로 무수히 찌르고 사지를 잘랐으나 입이 움직일 때까지 왜군을 나무라다 마침내 절명했다.
 
한편, 부친의 뜻에 따라 이대형의 아들 이우두와 이사두는 상동 감물야촌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김해성으로 부친을 찾으러 갔는데, 큰아들 이우두는 왜군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부친과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한 이사두는 빈 상여로 감물야촌 봉발산에 초혼장(招魂葬)을 지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다 진주성에서 패한 왜군은 이듬해 8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략했다. 이때 경상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창궐했는데, 함안의 주익창(周益昌), 필창(必昌) 형제도 분연히 일어나 칼을 잡았다. 주익창, 필창 형제가 장렬히 죽으니 두 아내 이씨(李氏)와 김씨(金氏)도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주익창의 아내 이씨 부인이 이대형의 형 이대윤(李大胤)의 딸이었다. 재령 이씨 한 가문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났다 하여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하였고, 관천재가 있던 마을은 삼방동(三芳洞)이 되었다.
 
송빈이 마지막까지 왜적을 꾸짖다 순절한 바위는 부친 송창(宋昌)이 고을의 향우들과 우의를 다지고 뜻을 함께하며 이름을 새긴 바로 그 바위였다. 김해 여러 지역에 있는 지석묘 중 하나이기도 한 그 바위에 후일 후손들이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이라 새겼다. 송빈의 아들 송정백은 시체더미 속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양업손(梁業孫)을 통해 부친의 처참하고 의로운 죽음을 알게 되었다. 부친의 시신 일부를 겨우 찾아 장사지낸 송정백은 곽재우 휘하 의병으로 들어가 부친의 뜻을 이었다. 곽재우는 김해성 전투가 끝난 이틀 뒤 의병을 일으켰다. 

 

 


 
김득기의 아들 김간은 부친이 일러준 대로 식솔들을 데리고 주촌면 노래실(양동리)로 피난을 갔다. 김해성이 함락되자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러 잠입하였으나 밤중이라 시신을 찾지 못했다. 김간은 부친이 남기고 간 도포와 머리카락으로 선산에 장사를 지냈는데, 어느 날 왜군 소부대가 노래실로 쳐들어왔다. 식솔들과 마을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갑자기 산 위에서 많은 병사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해성 전투에서 의병에게 호되게 당한 왜군 소부대는 엄청난 의병이 몰려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해 달아나버렸다. 왜군이 달아난 뒤 김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서는 죽은 김득기가 후손을 지킨 것이라 했다. 
 
유식이 객사 앞에 판 우물은 유공정(柳公井)이라 하여 이후 오랫동안 김해성에 식수를 공급했다. 후일 후손들이 우물을 메우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으니, 지금도 그곳에 있다.
 
한편 김해성을 버리고 달아났던 초계군수 이유겸은 후일 전쟁 중 도망한 죄를 물어 참수되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같은 죄로 삭탈관직 당했으나 이후 고령과 거창에서 발기한 의병장 김면(金沔)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김시민의 뒤를 이어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함안 사람 안민(安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즈음에 상동 감로사에 선조 안향(安珦)의 시판(詩板)을 다시 만들러 와 있었다. 안민은 왜적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양민들을 처참하게 도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정 백여 명을 모아 김해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입석강(立石江·불암동)에서 왜적의 대부대와 맞닥뜨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며칠 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들 신갑(信甲)이 부친의 행적을 쫓다가 "조선 충신 안민 여기서 죽다(朝鮮忠臣安愍死此)"라고 적은 판자와 뿔로 된 호패를 발견하고, 이를 수습해 장사지냈다.
 
김해성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났으니,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전이었다. 의로움으로 피어난 꽃 , 송빈,이대형. 김득기, 유식은 목숨을 다했으나, 꽃이 진 자리에는 아직 그 향기가 남아 있다.



송담서원 지난 6일 '사충신 향례' 봉행
후손과 부산·경남 유림 150여명 참석


제60회 현충일이던 지난 6일 삼방동 충혼탑에서는 현충일 추념행사가 열렸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과 국군 장병들을 기리는 행사였다.

이날, 동상동 송담서원에서는 또다른 '현충 행사'가 열렸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사충신'인 조선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1542~1592), 이대형(李大亨·1543~1592),김득기(金得器·1549~1592),  류식(柳湜·1552~1592)(<김해뉴스> 2012년 5월 2일자 10면 보도)의 충절을 기리는 '송담서원 사충신 향례(享禮)'가 바로 그것이었다.

  
▲ 지난 6일 동상동 송담서원 '사충신 향례'에 참여한 유림들이 사충신의 충절을 기리며 절을 올리고 있다.


송담서원(원장 허선)은 매년 음력 4월 20일이면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키다 충절한 사충신의 위패를 모셔놓고 사충신 향례를 봉행한다. 올해는 마침 현충일과 날짜가 겹쳐 향례의 의미가 더 컸다. 허선 원장은 "올해는 현충일에 향례를 봉행해 더욱 뜻이 깊다.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이들의 충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사충신과 애국선열의 공을 다시 한 번 되새겨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송담서원은 사충신 향례 시작 30분 전인 오전 10시부터 부산, 창원, 함양, 진주 등에서 온 유림과 사충신의 후손들로 북적였다. 올해 참석자는 150여 명에 이르렀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경수 경남도당위원장도 이날 행사를 참관했다.

유림들은 유건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원에 들어서기 앞서 '시도기(時到記·어떤 장소에 간 시간 등을 적는 기록)'에 자신의 성명과 관향, 자 등을 적었다. 서원에 들어선 뒤에는 어른들에게 큰절로 안부를 여쭸다.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키다 순국하신 사충신의 충절을 추모하는 향례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선 원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오전 10시 30분 사충신 향례가 시작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향례를 관장하는 제관의 이름을 적고 각 집사들의 역할을 분정(分定·임무를 나누는 것)했다. 올해 향례의 초헌관은 조경용 김해향교 전 전교, 아헌관은 김효구 김해향교 전 전교, 종헌관은 노영칠 김해향교 수석장의가 맡았다. 향례를 진행하는 집례는 김동환 성균관유도회 장유지회장, 대축은 조희욱 김해향교 수석장의가 각각 담당했다.

  
▲ 집례를 맡은 김동환 성균관유도회 장유지회장이 향례를 관장하는 제관의 역할을 알리고 있다.


집례는 각 제관의 분정을 창방(唱榜·결과를 밝히는 것)했다. 헌관, 제사, 유림 들은 알자(謁者) 이선규 성균관유도회 김해지부 총무의 인도에 따라 차례로 사충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표충사로 걸음을 옮겼다. 알자는 초헌관, 분헌관(제사 때 여러 신위(神位) 앞에 술을 붓는 분헌례(分獻禮)를 맡는 제관)과 각 집사를 안내하는 제관이다.

집례는 향례의 순서가 적힌 홀기(笏記)를 순서대로 읽어 나갔다. 알자가 초헌관을 제향 때 제관들이 손을 씻는 관세위( 洗位)로 안내했다. 초헌관은 술잔을 올리기 위해 손을 씻었다.

경찰이 하늘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예포에 이어 향례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다. 사충신이 의병장이라는 뜻을 기려 과거에는 포를 쏘았다고 한다. 지금은 다소 간소해져서 총을 쏜다. 항례는 향을 피우고 행사를 준비하는 전폐례(奠幣禮) ,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이 차례로 사충신의 제사상에 술을 따르는 헌작례(獻爵禮), 음복례(飮福禮)와 축문을 불태우는 망료례(望燎禮) 순서로 약 1시간 30분동안 진행됐다.

향례가 끝나자, 행사에 참석한 유림과 사충신의 후손들은 사충신의 충절에 대한 김해시민들의 무관심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송빈의 제13대 종손인 송유장(70)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은 곽재우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선 최초로 의병장이 탄생한 곳은 바로 김해다. 사충신은 사흘간 목숨을 바쳐 김해성을 지켰다. 이들의 나라를 위한 충심에 김해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균관유도회 김영근(69) 회장은 "사충신 향례는 조선 최초의 의병장 사충신을 기리는 아주 중요한 행사다. 이들이 왜군에 맞서 사흘을 버텨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굉장한 업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어 후손으로 아쉽다"고 안타까워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임진왜란 첫 의병장 김해출신…아시나요?
2015년 06월 10일 (수) 10:17:35 호수:226호  19면취재보도팀 report@gimhaenews.co.kr

예린>>부끄럽다. 김해 출신이면서, 그리고 명색이 김해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기자라면서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장이 김해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송담서원 사충신 향례 취재 때 처음 알았다. 설명을 들으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리고 아쉬웠다. 김해의 역사적 인물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사람들은 유림들과 사충신의 후손들 뿐이었다. 역사교과서에 사충신이 조선 최초의 의병이라고 기록되도록 만들기 위해 김해시, 시민들이 한 마음이 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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