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임란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에 대한 소고 / 八甫 송춘복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16.02.13|조회수97 목록 댓글 0

2014년 경남향토사 논총에 게제된 논문입니다.

 

 

 

 

 

 

 

1-03 임란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에 대한 소고

 

김해: 송춘복

 

 

Ⅰ. 서론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수많은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혼인 불굴의 도전정신과 강한 자주정신의 힘이 깊숙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정신, 고려의 삼별초 같은 결사적인 항쟁정신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정신들이 충(忠), 효(孝), 의(義)를 숭상하는 유학(儒學)과 접목되어 더 강력한 선비정신으로 발현(發現)하면서 사족(士族)들에게는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최상의 가치로 여겨졌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란 평소에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충과 효를 궁구하고 나라의 위난이나 불의를 만나면 여지없이 의(義)를 행하는 것이 곧 충이면서 효인 신념이므로 오로지 이 의(義)의 유무(有無)로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 사족(士族)들 간의 사회적 기준과 신념이 어떤 위난에 자신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은 의(義)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므로 이를 지키고 계승함에 있어서는 곧 생명과 같이 중히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국난에 임하여 순절(殉節)로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곧 자신에게 기회이자 영광이며 지극히 당연한 도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토대위에 피어난 한 떨기 우국충정의 꽃이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의 시원지(始原地)인 김해와 그 주인공인 의병장 송빈(宋賓)이다.

 

 

 

또 당시는 영남의 거유였던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20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이때의 김해는 남명이 18년간이나 기거하면서 가르치고 남긴 경(敬)과 의(義)라는 선비정신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김해는 남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위국 헌신하는 사충신과 같은 대절(大節)들이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발생지를 망우당 곽재우를 주축으로 한 경남의 의령지역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요즘에 와서는 유팽로 선생이 주도한 전남 곡성지역이 의병의 시원지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학술대회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의 정의는 바른 사실에 근거한 바른 기술(記述)에 있다. 당시의 정황이 미쳐 드러나지 않아 오랫동안 오도된 역사라도 진실이 드러나면 즉시 수정해야 마땅한 것이다.

 

 

 

김해 송빈의 의병 참여는 임진왜란의 진로만 살펴도 알 수 있다. 왜군의 부산포 최초 출현은 1592년 4월 13일 오후이며, 다음날 부산진성, 이틀 만인 15일에는 동래성이 무너지고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병력이 김해성에 당도한 것이 17일이었다. 김해에서 3일간 격전 끝에 성이 무너진 날이 20일이다. 앞서 18일에 관군의 수장인 김해부사와 초계군수가 도망간 이후 만 이틀간은 민(民)이 주체가 된 의병들만의 항전이었으니 왜란의 전투상황을 보아서도 의병의 시원지가 김해인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이에 비해 망우당 곽재우가 의령에서 봉기한 날은 4월 22일이며 이보다 앞서 곡성 출신 월파 유팽로 선생의 4월 20일 봉기 주장도 김해보다는 빠르지 않다. 이런 사실들이 400여 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으니, 당시에는 지극히 상식이었던 내용들까지 점차 잊혀져가고, 각자의 입맛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도 되고 또 왜곡이 심화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역사의 진실에서 멀어진다.

 

 

 

국가는 백성이 지키는 것이며 역사는 지난 길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다. 혹자는 임진란을 의병전쟁이라고 한다. 관군들은 일찍 무너지거나 도망가기에 바빠 김해성이 무너지고, 정확히 13일 후 수도 한양이 점령당했으니 그래서 일개 포의(布衣)들이 중심이 된 김해 의병들의 선비정신이 더 돋보이는 이유이다. 그런 정신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우리를 포함하여 먼 후대까지 두고두고 계승하고자 김해의 의병장인 중군도총 송빈을 재조명하고 이의 바른 사실을 찾아 정립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임진왜란 김해성 전투의 전말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의 오우라 항을 출발하여 당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당도하여 해상에서 진용을 갖추며 하루를 지냈다. 14일 아침부터 공성포(攻城砲)와 조총으로 집중공격을 받은 부산진성의 첨사(僉使) 정발(鄭撥) 장군과 동래성을 지키던 부사 송상현은 불과 한나절을 못 버티고 순직(殉職)하고 좌병사 이각은 진영을 불사르고 도망친 후, 첫 관문이었던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순식간에 함락된다.

 

 

 

17일 의기 충만한 왜군들은 제1번대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는 밀양, 청도 방면으로 진격하고, 제2번대 가또(加藤淸正)는 언양, 경주로 진격하고, 제3번 대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1만 3,000여 명의 병력과 병선들은 다대포를 거쳐 장락포(獐洛浦: 녹산면)를 경유 죽도(竹島:가락면)에 정박하여 김해성을 공격할 최종 전투에 대비하는 한편 우리말을 잘하는 왜군으로 하여금 지세와 정보를 정탐케 하여 만반의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김해성의 수장(首將)인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과 함께 일반 병사들을 동원하여 성을 경계하고 있던 중 뒤늦게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성중(城中)에 의논할 만한 사람을 물으니 모두 우리 고을에 명망(名望)이 있다는 송빈을 추천하였다.

 

 

 

부사는 즉시 편지로 송빈을 불러 중군도총(中軍都摠)에 임명하고 오로지 성을 정비하는 일과 지키는 계책을 그에게 맡겼다. 이에 송빈은 성중의 장사들을 다 모아 충의(忠義)를 떨쳐 맹세하기를 “김해는 적이 오는 길의 요충인데 안록산의 난리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막아낸 것같이 해야 한다.”,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는 것이니 마땅히 각자 忠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어찌 적에게 항복하겠는가?”, “살아서 자손에게 부끄러움을 남기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자!” 하니 모두가 답하기를 “죽고 살기를 오직 명령에 따르겠소!”하였다.

 

 

 

이로부터 성첩을 보수하고 군사를 정돈하며 향우(鄕友)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를 발탁하여 나누어 성문을 지키도록 하고 이인지(李麟趾)는 군량을 조달하여 수성할 계획을 하였다. 이후 적이 와서 성을 포위하자 중군도총 송빈이 밤에 手下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가 기습으로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갑자기 일격을 당한 적은 당황하여 물러가는데 죽도까지 추격하였다.

 

조금 후에 수많은 왜적들이 바다를 덮쳐오니, 성중으로 되돌아와 부사 서예원과 지원 왔던 초계군수 이유검과 함께 성첩을 다시 보수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독려하며 지키기를 엄령하였다. 그러나 적은 왜장 구로다를 비롯하여 1만 명이 넘는 대군과 당시 포르투갈과의 교역에서 얻은 조총을 대량생산하여 신무기로 무장한 상태였고, 김해 성중의 아군들은 부민(府民)을 포함하여 약 1천여 명 정도였다 하니 양진영의 전투력은 서로 비교할 수조차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마침내 적은 19일 새벽 성 밖에 당도하여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화살과 조총, 철포를 퍼부으며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성중의 아군들도 높고 견고한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적으로 응전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성호(城壕)가 깊어 적이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런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가 다소 용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사관(射官) 백응량(白應良)과 같은 군사들이 큰 활로 성곽 가까이 접근하는 적들을 화살 하나에 한 명씩 명중하며, 말을 탄 적의 부장까지 사살하는 전과가 있었다.

 

또 아군에게는 죽음을 각오한 결사항전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예상 외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된 적은 쉽사리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일단 물러갔다. 그리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적은 하루 낮 동안 4차례나 공격과 후퇴를 거듭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그날 밤 여러 방책을 쓰던 적은 기괴한 왜병 복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중으로 던지고 괴상망측한 복색으로 교란책동을 감행하니 열세의 병력으로 하루 종일 무리한 전투로 말미암아 극도로 지친 군사들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하였고, 충천하던 사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를 본 초계군수 이유검은 전황이 매우 불리함을 느낀 나머지 성을 지키는 수문병을 죽이고 서문을 열고 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사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도주하려 하자 송빈은 “성주(城主)가 나라의 후은(厚恩)을 입고 일방(一方)의 의무를 맡았으니 이런 위급한 때를 만나 국은(國恩)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그 거취를 가벼이 하여 인심을 이산(離散)시켰으니 홀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소!”하고 책망하니 감히 떠나지 못하다가 밤중에 적이 보리를 베어 성호를 메워오자 부사는 홀로 북문을 열고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도망쳤다.

 

주장(主將) 부사 서예원이 도망친 사실을 들은 송빈은 비분에 찬 심정으로 향후의 대책을 계획하고는 그가 말하기를 “이미 쥐새끼 같은 주장까지 도망쳤으니 끝내 수성이 불가하면 이대형, 김득기 두 분께서도 목숨을 보전함이 옳지 않겠소.” 하였다. 그러자 “두 분께서도 이미 입성할 때 명(命)을 성과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생사 또한 선생과 함께하겠소!”하였다.

 

그리고 성중의 남은 병사들과 부민들을 모아 달래며 주장(서예원부사)이 도망쳤으니 송빈으로 하여금 함께 추대하여 주장(主將)으로 삼고 성과 함께 죽기로 맹서하며 독전(督戰)하니 모두 감격하여 성중의 사기가 생사를 초월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송빈은 절구 2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정녕 선비의 기개다.

 

 

 

粤自先公荷國恩 아!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국은을 많이 입었는데

 

孫何背祖向犬戎 후손이 어찌 조상을 등지고 오랑캐를 향하랴?

 

力盡孤城無奈何 성은 외롭고 힘은 다하니 이제는 어찌할 수 없구나.

 

先斬二帥效丹忠 먼저 두 적장을 베었으니 붉은 충심은 보였노라!

 

 

 

人之仗節人何勸 사람의 절의 갖추기를 남이 어찌 권하랴?

 

二子如今任自量 그대들은 그대들 스스로 헤아리기 바라오.

 

報國殉臣吾已決 나는 이미 나라 위한 죽음을 결심하였네.

 

北向百拜辭吾王 북녘 향해 백배하며 임금님께 하직 드리오!

 

 

 

위 순절시 2수에서 본 바와 같이, 이런 비장의 순절시를 남기기 전에 김해성은 사방에 지원을 요청했었다. 지원요청의 당위성은 충분했다. 김해는 창원, 마산, 진주로 가는 길목이자 멀리 호남까지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상감사 김수(金晬)는 부산과 동래의 함락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백성들에게 피난할 것만 지시하고 본인은 거창으로 물러나 머물렀다.

 

 

 

이때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도 지척인 창원에서 군대를 거느리고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다. 창녕군수 이철용(李哲容), 창원군수 장의국(張義國), 의령군수 오응창(吳應昌) 등의 각 고을 수령들도 왜국의 대군이 침략했다는 소문에 지원요청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관할지역 방어도 제대로 못한 채 살아날 연구에만 골몰하니 믿고 의지할 수 없는 백성들은 입과 입을 통해 첫 소문에 왜군 20만 대군이 자고나면 40만, 50만으로 확산되어 극악한 공포 분위기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백성들은 고을마다 웅성웅성 벌집 쑤신 듯 허둥대는 상태였고 이런 오합지졸 같은 주변 관군들의 처신 아래 풍전등화 같은 김해성의 운명은 밖으로부터 어떤 관군이나 개미새끼 한 마리도 지원받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김해 부사가 도망친 직후 이런 와중에도 읍내 산산(蒜山) 사람 유식(柳湜)이 가동(家僮) 수십 인을 이끌고 입성을 하고, 뒤이어 함안의 이령(李伶)이 무리 수십 인을 동반하고 입성을 하니, 성중은 또다시 백만 원군과 같았다.

 

 

 

이때에 적군이 성중에 물길을 끊을 요령으로 성 밖 호계(虎溪)를 흙 가마니로 막았는데 이로 인해 성중의 굶주린 백성들과 군사들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이를 본 유식이 땅을 파자 물이 거짓말처럼 솟구쳤다. 이 물을 적군에게 보였는데 적은 신장(神將)이 있다 하여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20일 아침 적들은 밤새 들판에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고 볏단을 모아 성호를 메우고 그 높이를 성벽과 나란히 쌓은 후 각종 화기를 난사하며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 대군으로 물밀듯이 총공격을 가해왔다.

 

 

 

의병장 송빈을 위시하여 누구 한 사람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직 적을 하나라도 더 내가 먼저 죽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연달아 동문과 서문이 무너졌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아비규환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 처절한 전투는 마지막 한 명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어졌다. 의병장인 중군도총 송빈도 결국 절명의 순간이 다가오자 성내의 대석(大石)이 있는 곳으로 적을 몰고 이동했다. 이곳은 송빈의 부친 송창이 고을의 명망 있는 향우 3명과 우의를 다지며 결의의 각명(刻名)을 한 곳이다.

 

 

 

이곳을 최후로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곳을 택해 충과 효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대석에 오르자 또다시 화살과 창칼이 동시에 온 몸을 파고들었다. 그런 절명의 순간에도 입으로는 그침 없이 짐승 같은 적의 부당한 침략을 꾸짖었다. 실로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의 충절과 용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김해성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성을 함락한 왜적들은 끝까지 대항한 보복으로 이 전투에서 죽은 자기들의 군신(軍神)들에게 혈제(血祭)를 지낸다는 핑계로 남은 여자아이, 노인들, 개나 가축들까지도 모조리 살해했다. 그러나 그 후과는 적의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를 꺾어 공격의 의지를 늦추므로 진주성과 전남지방의 방비에 절대적 시간을 벌었고, 김해의 전황이 알려져 밀양, 상주, 충주까지 결사 항전하는 용기를 보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총 흥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김해성은 적의 입장에서는 전략상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점령해야할 요충지이자 교두보였기 때문에 1만 3,000여 명의 대군으로 집중공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관군이 포기한 김해성을 순수 민중(民衆)들이 중심이 된 소수의 의병과 의병 지휘자들이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기개로 적의 최정예 부대와 맞서 끈질기게 항쟁하며 만 이틀을 사수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참으로 전례를 찾기 힘든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하겠다.

 

 

 

반면에 김해성을 탈출한 이유검은 관군에 붙들려 경상감사 김수에 의해 참수를 당했고, 진주로 도망간 서예원은 삭탈관직 당했다. 그 후 1차 진주성전투에서 목사 김시민이 전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발탁으로 진주목사가 되어 성을 지키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성루를 넘자 목사의 신분도 잊고 또다시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성의 함락과 함께 6만여 군관민이 몰살을 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이 한 장면으로 의인(義人)과 졸부(拙夫)의 극명한 대조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2. 송빈 선생 사료선(史料選)

 

 

 

1) 진주목사(晋洲牧使) 이규년(李奎年)이 찬(撰)한 송빈 공의 행장(行狀) 전문은 아래와 같다.

 

 

 

公諱賓字士信淸州人也五代祖諱承殷官至大司成娶興海崔氏直提學淵之女也始居金海高祖諱叔亨官至參軍娶觀察使趙桱之女最有令望與濯纓金先生相友善語在濯纓集會老堂記曾祖諱有浩中生員娶牧使金繼根之女祖諱經官節制使娶綾城具氏致謙之女考諱昌官至節制使娶金海金氏節孝先生孫進士泰碩之女生公于府西下界里第卽嘉靖壬寅歲也公生有異質幼時人皆以奇兒稱之七八歲時能學詩書輒解文義聯言爲句詞意驚人嘗與群童擧網於前川還遊亭上忽有買客數人至衣冠僕從一如兩班行色睨公遽呼爾公凝然不答小選客食午反又呼曰爾來公厲聲怒叱曰吾觀汝行止必商賈何敢慢我以網之故遊此見侮卽取網燒之其中老者一人前拜曰君忍子識鑑旣明氣宇又峻他日必爲大人君子公之兒時氣像類此者甚衆十餘歲時讀書于下界牛膝庵一日樵童忽縛飛鳥而來公見之謂樵童曰莫殺林間無辜之物此乃以曾參得名之鳥也卽取而放之本庵僧見之傳播人口遠近聞者莫不奇之又孝於親得甘旨之味則雖微物必進昏定晨省出告返面之節必遵小學之道故舊族党皆以誠孝老成之人稱之公兄弟六人雁行居二事長兄如嚴父與群弟處寢必同衾食必同盤孝友之性蓋其天賦然也及長力學不倦兼事詞場之文以詩發解者五詩義俱中者一而終屈禮部自此因廢擧業沈淪自晦天性慷慨有大節不事産業容貌魁偉志氣卓犖至於臨大事決大疑勇斷不滯一世之人咸推重焉公與熊川倅相識嘗往其邑談論之際忽有倭船來侵海浦勦掠無數熊川倅大恐閉門欲拒公曰有一策焉洞開城門凝然不動賊必懷疑而散去矣倅一如公言賊果不感犯城倅大異之以爲公之智略緩急有恃云萬曆二十年壬辰四月十三日倭寇下陸時變出倉卒捏禦無備金海府使徐禮元大以爲懼詢以可與議事之人衆咸推公卽裁書邀公公居一邑之隅尙未聞亂馳入城中見府倅倅素聞其名見而大喜援以中軍都摠之任防備之事守禦之策專委於公時賊已泊竹島矣公告於太守倭變猝起家人不知避我故歸家處置家累而還矣太守許之公單騎出北門加鞭而來此時公長子廷伯在八聖寺治經是夜天雨瞑瞑咫尺不辨只有一把火光自洞下來須臾庵及門外出而視之乃公也蒼黃迎拜曰夜深天雨山路甚險有何大事乘危冒驗之若是也公執手而言曰倭寇猝至時勢甚急太守委我以守城之任余旣受人之重責已決殉國之志若夫成功則天也不然惟有死而己汝急還家將母與弟速避遠地廷伯挽裾而泣曰家君急於君辱之際已決取義之地兒子忍獨圖活於父君危禍之時乎寧辱同隨父君於城中死生與同公正色曰余則赴 國之亂不負臣子之節汝則全室而避不節妣祖之嗣是乃爲人臣爲人子忠孝兩全者也卽斷袖不顧而還入城中曉鷄初鳴公見府倅倅大喜曰吾之所以初許還家者知君忠義必不貳也公乃仗義奮忠悉會將士而誓曰金海卽賊路要衝不啻若睢陽之保障金海失守是無嶺南也無嶺南是以國與賊也宜各盡忠貞同死於國不有圖生之計也衆皆曰死生惟命於是保葺城堞整敕士卒李公大亨金公得器守城門李麟趾調軍糧以爲死守計居數日賊圍城三匝灌水北門公率數百騎夜出城門與賊交鋒斬首數百級賊以爲神將在此遂去追至竹島所殺甚衆俄而賊船蔽洋而來公知兵寡勢弱還入城中自此援兵外絶資糧內虛晝夜拒戰兵盡力竭府倅知不可守欲開北門走公抗言曰主公受國厚恩任一方鎖鑰之責而當此危急之際支死力禦生不負人臣之節死當爲義士之鬼寧忍爲背義圖生獨不愧於心天乎府倅義之不敢棄去一日賊設偶人乘夜投入城中衆心洶惧皆失去就而公鎭定人心力戰不己賊終不敢入賊又乘天黑刈麥堆塡城壕須臾與城齊賊捫入蹂躙城遂陷府使遁去北門赴晋州營公竟死之部下梁業孫者公之入城時同隨人也潛伏積屍中伺賊睡熟而逃因傳公之終始事頗詳悉賊之蹂城也公獨奮擊賊俄而凶鋒逼迫公猶短兵相接與賊觝角者久之諸倭交聚白刃亂加身無完處遂顚仆而猶罵賊不絶口卽是月二十日也亂靖後事聞于 朝 贈工曹參議配安東權氏崙之女也生二男二女長廷伯中萬曆丙午進士志行高潔權任鄭仁弘累要不就及其歿也桐溪鄭先生輓曰北風心不變南國一人存娶通德郞安德凱之女四男一女男齊賢齊聖齊文齊元女適鄭喜漸次廷男娶李夢軫之女生二女適郭弘㙉郭弘坤以兄子齊聖爲後女適參奉曺元海次適通德郞安後凱皆有子女內外曾玄共略千人公歿之後百有七十年戊子忠武公後孫李君鳳祥宰本府披閱州誌悼其名節之湮沒倡勸士林捐捧資力倂祠于府西之歌谷扁之曰表忠祠其玄孫集道復等將其事實來訪于晋陽之衙屬余術之余不敢以文拙辭畧擧其槪而書之以備秉筆者採擇焉

 

晋州牧使 李奎年 謹狀

 

 

 

이상의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송빈(宋賓)공의 자는 사신(士信), 호는 송담(松譚)이며 청주(淸州) 송씨이다. 5대조 승은(承殷)은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흥해 최씨 직제학 연(淵)의 딸과 혼인하여 비로소 김해에 살았다. 고조 숙형(叔亨)은 벼슬이 참군이며 관찰사 조경(趙桱)의 딸과 혼인하여 고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망(聲望)을 가졌으며 탁영 김일손 선생과 교류한 사실이 탁영집과 회로당기에 남아있다.

 

증조 유호(由浩)는 생원시(生員試)에 등과하여 목사(牧使) 김계근(金繼根)의 딸과 혼인했고, 조부 경(經)은 벼슬이 절제사(節制使)로 능성(綾城) 구(具)씨 치겸(致謙)의 딸과 혼인했고, 고(考) 창(昌)은 절효선생(節孝先生)의 손자 진사 태석(泰碩)의 딸과 혼인하여 김해의 서쪽 하계(下界)리 집에서 태어나니 조선 중종 37년(1542년)이었다.

 

 

 

공은 나면서 특이한 기질이 있어 어릴 때 사람마다 다 신기한 아이로 일컬었다. 7-8세 때에 능히 시서를 배워 문득 문장의 뜻을 알고 말을 이어 글귀를 지으니 그 뜻이 자주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앞 냇물에 그물을 던지다가 정자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던 어떤 장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의관의 치장이나 종들을 거느린 모습이 한결 양반의 행색과 같았다.

 

문득 공을 보고 ‘너’라고 부르니 공이 화가 나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들이 또 불러 ‘얘야 너 오너라.’하니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꾸짖기를‘내가 너의 행동거지를 보니 반드시 장사치로서 어찌 감히 나를 업신여기는가? 내가 그물을 가지고 여기서 놀다보니 모욕(侮辱)을 받았다.’하고 즉시 그물을 불 질러 버렸다. 그중에 한 늙은이가 나와 절하며 ‘그대가 아이로서 알고 살핌이 이미 밝고 기상이 또 높으니 후일에 반드시 대인군자가 되리라.’하였다. 공의 아이 때 기상이 이와 같은 일이 매우 많았다.

 

10여 세 때에 하계리 우슬암(牛膝庵)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하루는 나무하는 아이가 문득 까마귀를 잡아 묶어오니 공이 초동(樵童)에게 이르기를 ‘숲 사이 죄 없는 동물을 죽이지 말라. 이 까마귀가 증삼(曾參)의 이름을 얻은 새이다’하시며 곧 풀어 놓아 주었다. 이 절의 중이 이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알려 원근에서 이를 기특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어버이에게 효도하여 달고 맛난 음식을 얻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올리며 조석으로 출필고(出必告) 반필면(返必面)의 절차를 반드시 소학(小學)의 도를 따르니 벗이나 일가들이 다 성효(誠孝)로 노성(老成)한 사람으로 일컬었다.

 

 

 

공의 형제가 6인인데 서열이 둘째라 장형 섬기기를 엄한 아비처럼 하였고 여러 아우들과 거처함에 잠잘 때는 이불을 같이 덮고 음식은 반상을 같이 하여 효도, 우애하는 성품이 하늘에서 타고난 듯하였다. 자라서는 힘써 배워 게으르지 않으며 겸하여 과문(科文)에 힘쓰며 향시(鄕試)에 시(詩)를 지어 발표한 것이 5번이며 시(詩)의 뜻을 맞춘 것이 한 번이었는데 끝내 예조(禮曹)에서 꺾어졌으나 드디어 문장(文章)으로서 이름이 났다.

 

이로부터 과거를 그만두고 잠깐 실의와 낙담이 있었으나 천성이 강개하고 큰 절의(節義)가 있어 결코 산업(産業)에는 힘쓰지 않았다. 용모가 크고 위대하며 지기(志氣)가 우뚝하여 큰일에 임하고 큰 의혹을 결단함에 이르러 용단하여 막힘이 없으니 일세(一世)의 사람들이 다 공을 추중(推重)하였다.

 

공이 웅천(熊川) 현감과 서로 알기에 일찍이 그 고을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왜선(倭船)이 와서 해변의 포구를 침략하는데 한두 번이 아니라 현감이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항거하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성문을 활짝 열고 조용히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의심을 품고 흩어져 가리라’하였다. 이후 현감이 한결같이 공의 말처럼 하니 과연 적이 성을 범하지 못하였다. 현감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공의 지략에 완급이 있어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만력(萬曆) 20년 임진 4월 13일 왜구가 육지에 내려 갑자기 큰 변란이 일어나니 막을 준비가 없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이 크게 놀라 의논할 만한 사람을 물으니 모두 공을 추천하기에 즉시 편지로 공을 불러 맞이하려 하였다. 공이 일읍(一邑)의 모퉁이에 살아 아직 난리를 듣지 못했는데 급히 말을 달려 성중에 들어가 부사를 만나니 부사가 본래 그 이름을 듣고 크게 기뻐 중군도총(中軍都摠)의 임무를 맡겼다.

 

방비하는 일과 지키는 계책을 오로지 공에게 맡겼는데 당시에 이미 적은 죽도(竹島)에 임박해 있었다. 공이 부사에게 고하여‘왜변이 갑자기 일어나 가족들이 피할 줄도 모르고 있으니 내가 집에 돌아가 집안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리다.’하여 태수가 허락하니 공이 단기(單騎)로 북문을 나서서 채찍을 더해 달려오니 이때 공의 장자 정백(廷伯)은 팔성사(八聖寺)에서 경(經)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날 밤 하늘에 비는 내려 어둡고 어두워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는데 다만 한 줄기 불빛이 골짜기로부터 내려와 잠깐 사이에 문밖에 닿기에 정백이 문을 나서 보니 곧 공이었다. 창황히 맞이하여 절하며 ‘밤은 깊고 비가 와서 산길이 매우 험한데 무슨 큰일이 있어 모험하심이 이와 같으십니까?’ 공이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왜구가 갑자기 이르니 형세가 매우 급하다. 태수가 나에게 성을 지킬 임무를 맡겼으니 내가 이미 남의 중책을 맡아 이미 순국(殉國)할 뜻을 결단했으니 만약 성공하면 천명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니 너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어미와 아우들을 거느려 속히 먼 곳으로 피하여라.’

 

정백이 소매를 잡고 울며 말하길 ‘아버님이 임금이 욕되는 처지에 급급하여 이미 의(義)를 취하여 죽음을 결단한 곳에 자식이 차마 아비와 임금이 위태롭고 화를 당할 처지에 홀로 살기를 꾀하겠습니까? 차라리 성중에 함께 따라가 죽고 살기를 함께하겠습니다.’ 이 말에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위난에 임하여 신자(臣子)의 절의(節義)를 저버리지 않겠으나 너는 피란하여 집안을 온전히 하여 조상의 대를 끊지 않음이 곧 인신(人臣), 인자(人子)로서 충효(忠孝)가 양전(兩全)하는 도리니라.’하며 곧 소매를 끊어 돌아보지 않고 성중으로 돌아오니 첫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공이 들어가 부사를 만나자 부사가 대희(大喜)하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집에 돌아가기를 허락한 까닭은 그대의 충의가 반드시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하였다. 공이 이에 의(義)와 충(忠)을 떨쳐 장사들을 다 모아 맹서하기를‘김해는 적이 오는 길의 요충인데 당나라 안록산 난리 때의 수양성을 보장(保障)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이 없어지고 영남이 없다면 이는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이니 마땅히 각자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요 삶을 꾀할 계책은 없어야 하오.’하니 모두가 다 ‘죽고 살기를 오직 명령에 따르겠소.’하였다.

 

이에 이대형, 김득기는 성문을 지키고, 이인지는 군량을 조달하여 사수할 계획을 하였다. 며칠 뒤에 적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며 북문에 물을 대니 공이 밤에 수백 기(數百騎)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적과 직접 접전하여 수백의 왜적 목을 베었다. 적은 놀라 신장(神將)이 여기 있다 여겨 물러났으나 죽도(竹島)까지 추격하여 죽인 적이 매우 많았는데 얼마 후에 적선이 바다를 덮어 밀려오는 것을 보고 군사는 적고 형세가 약함을 알아 도로 성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밖으로 원병이 끊어지고 안으로 양식이 비어 밤낮 항거하여 싸우려니 아군의 힘이 다하였다. 부사가 지켜내지 못할 줄 알고 북문을 열고 달아나려 하니 공이 항언(抗言)하여 말하기를 ‘주공(主公)이 나라의 후은을 받아 일방(一方)을 지킬 직책인데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사력(死力)을 다해 막아 인신(人臣)의 절의(節義)를 저버리지 않고 마땅히 죽어 의사(義士)의 귀신이 될 것인데 어찌 차마 의리를 배반하고 살기를 도모하니 홀로 마음과 하늘에 부끄럽지 않소이까?’하니 이럴 즈음 적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밤을 타서 성중으로 던지는데 민중(民衆)의 마음이 두렵게 여겨 어쩔 줄을 몰랐다. 공이 인심(人心)을 진정시키고 힘껏 싸우기를 마지않으니 적이 끝내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때 구원 왔던 초계군수 이유검이 도망을 가고 부사도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북문을 열고 진주로 달아났다. 왜적은 야음을 틈타 들판의 보리를 베어와 해자(垓子)를 메우기 시작하더니 잠깐사이에 성 높이와 나란하였다. 적이 총공세로 몰려 들어와 유린하니 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공도 끝내 죽었다.

 

부하 양업손(梁業孫)이란 자는 공이 입성할 때 같이 따라간 사람이었다. 쌓인 시체 가운데 엎드렸다가 적이 잠들기를 기다려 도망하여 공의 시종(始終)에 관하여 전함에 매우 상세하였다. 적이 성을 넘을 때 공이 홀로 분발하여 적과 맞붙어 싸우는데 조금 후에 많은 적들의 칼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공을 핍박하는데도 공은 오히려 짧은 칼로도 겨룬 지 오래였다. 이에 모든 적들이 함께 몰려들어 흰 칼날로 어지럽게 덮치니 몸이 완전한 곳이 없었으나 드디어 엎어져서도 오히려 적을 꾸짖는 말이 입에 끊어지지 않았으니 곧 이 달 20일이었다.

 

 

 

난이 끝난 후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 공조참의를 증직(贈職)하니 배위는 안동 권씨 윤(崙)의 딸이었다. 2남 2녀를 낳아 장자는 정백(廷伯)이니 만력(萬曆) 병오(1606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지행(志行)이 고결하여 권신(權臣) 정인홍(鄭仁弘)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죽음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만장(輓章)을 지어 이르기를 대북(大北) 정인홍의 바람에 마음변하지 않은 사람 남국에 한 사람 남았네(北風心不變 南國一人存)라 하였다.

 

통덕랑(通德郞) 안덕개(安德凱)의 딸과 결혼 4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재현(齋賢), 재성(齋聖), 재문(齋文), 재원(齋元)이요 딸은 정희점(鄭喜漸)에게 갔다. 다음 정남(廷男)은 이몽진(李夢軫)의 딸과 결혼 2녀를 낳아 곽홍전(郭弘㙉), 곽홍곤(郭弘坤)에게 갔고 형의 아들 재성으로 후사를 삼았다. 공의 딸은 참봉(參奉) 조원해(曺元海)와 통덕랑 안후개(安後凱)에게 가서 다 자녀를 두었고 내외 증손, 현손 약 천 인이 있다.

 

 

 

공의 몰후 117년 무자년에 충무공의 후손 이봉상(李鳳祥)이 본부(本府)의 부사로 와서 주지(州誌)를 열람하다가 그 명절(名節)이 인몰(湮沒)함을 슬퍼하여 사림(士林)에게 권하여 자력(資力)을 내어 부서(府西)의 가곡(歌谷)땅에 사당을 지어 편액을 표충사(表忠祠)라 하였는데 그 현손 集, 道復 등이 그 사실을 가지고 진양의 관아로 찾아와 나에게 서술하기를 부탁하니 내 감히 文辭가 拙하므로 사양하였으나 대개 그 개략을 들어 썼으니 뒷날 붓을 잡은 선비가 채택하기를 바라노라.

 

 

 

 

 

2)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1785년에 찬(撰) 행장

 

 

 

이상 생략(전반부의 내용은 이규년의 행장과 대동소이함으로 銘과 아래 부분만 인용한다. 원문생략)

 

 

 

公이 죽었으나 역시 의관장(衣冠葬)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자손들이 해마다 선조의 무덤 곁에서 제사를 드렸고, 배위의 무덤은 강원도 철원산 자좌에 있다. 공의 몰후(歿後) 117년 무자년(1708)에 김해부사 이봉상(李鳳祥)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읍지(邑誌)를 열람하다가 임진년 순절신(殉節臣) 송빈 公의 사적을 보고 개연(慨然)한 느낌이 있어, 사림(士林)에 권하여 사당을 세워 표충사(表忠祠)라 하고 공을 향사(享祀)하니 곧 초(楚)나라 사람이 나라를 위해 죽은 의리였다. 내가 국상(國殤)의 사(詞)를 외우니 이러하다.

 

 

 

操吳戈兮被犀甲(조오과혜피서갑) 오나라 창을 들고 무소 갑옷을 입고

 

車錯轂兮短兵接(거착곡혜단병접) 차축을 맞부딪쳐 창과 칼이 벌이는 접전

 

이라고 한 것은 초군(楚軍)이 오나라 병사의 창과 갑옷을 뺏어 입고도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말한 것이고

 

 

 

霾兩輪兮縶四馬(매양륜혜집사마) 박힌 두 바퀴 한 데 얽힌 네 마리 말

 

援玉枹兮擊鳴鼓(원옥포혜격명고) 구슬 박힌 북채 뽑아 북소리 울려대도

 

라고 한 것은 전황이 불리해도 나 자신의 죽음을 잊고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며

 

 

 

 

帶長劍兮挾秦弓(대장검혜협진궁) 장검을 차고 진나라 활을 낀 채

 

首身離兮心不懲(수신이혜심부징) 머리와 몸이 서로 떨어져도 마음은 후회 없어라.

 

라고 한 것은 죽음에도 긴 칼을 차고 적국 진(秦)나라 활까지 뺏어 낀 채로 죽으며 몸체가 떨어져도 그 정신은 고향에 돌아가듯 여김을 말하는 것이고

 

 

 

 

身旣死兮神以靈(신기사혜신이령) 몸은 이미 죽었어도 넋은 살아 있어

 

子魂魄兮爲鬼雄(자혼백혜위귀웅) 그대들 혼백은 뭇 영혼의 영웅이어라.

 

라고 한 것은 초군(楚軍)들의 혼은 죽은 후에도 남아 나라를 지키기 때문에 여러 영혼 중에서도 으뜸임을 말함이다.

 

 

 

초나라 사람이 국치(國恥)를 중히 여기고 국난에 다다름이 이와 같이 절실한 연고로 그 마침에 비록 집이 석 집이었으나 진(秦)나라를 멸망시켰음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 임진년 왜적이 올 때는 그 전의 삼포(三浦)나 오도(五島)의 왜란처럼 침략이나 도적질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국이 전국의 군사를 모집하여 실로 천지를 휩쓸어 오는 형세이니 어찌 태평시대의 편안과 즐거움에 젖은 백성으로 조련되지 않은 군졸과 완전하지 못한 성으로 능히 적을 당하겠는가? 하물며 이때는 주장(主將)이 도피하고 인심(人心)이 풀려 읍내의 문무(文武) 장수나 아전이나 군졸들이 다 쥐구멍을 찾아 달아난 상태였다.

 

 

 

공이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피를 흘려 마시며 몸을 뛰쳐 순국(殉國)하여 이를 뉘우칠 줄 모르니 이런 의열은 일월로 더불어 빛을 다투리라. 李공 대형과 金공 득기도 역시 함께 죽으니 뒤에 오는 충의지사(忠義之士)가 발자취를 잇대어 일어나 적이 마침내 패망하여 돌아간 것은 나라를 위해 죽은 이 영혼들의 남은 의열(義烈) 때문이었다.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아 조정에서 여러 번 포증(褒贈)하는 전례(典例)가 있었고 뒤의 부사가 사당을 세우는 거사가 있었으니 아아! 성하도다! 공의 6세손 태증(泰增)이 진주목사 이규년의 행장을 가지고 다시 정복(鼎福)에게 행장을 구하니 드디어 당일의 사실을 널리 찾아 그 대략을 서차(序次)하고 김해의 사림에게 질정(質正)을 구하며 붓 잡은 대가(大家)를 기다려 채택(採擇)하게 하노라.

 

 

 

 

 

3)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1799년 찬(撰) 유허비명(遺墟碑銘)

 

 

 

이상 생략하고 말미의 銘만을 소개한다.(원문생략)

 

 

 

去固可免(거고가면) 떠나면 진실로 죽음 면하지만

 

曰我不爲(왈아불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旣定厥志(기정궐지) 이미 죽음을 정하셨으니

 

受斫如飴(수삭여이) 칼베임도 달게 여기셨지

 

屹彼萊城(흘피래성) 저 우뚝한 동래성에서도

 

死者姓宋(사자성송) 돌아가신 분이 송 씨였는데

 

公在其時(공재기시) 송빈 공께서도 그 당시에 있어

 

榮名與共(영명여공) 영광된 이름이 함께하였지

 

翳然遺墟(예연유허) 아득히 가려진 남은 옛터에

 

尙有肹蠁(상유힐향) 아직도 울리는 그때의 소리

 

作詩鑽石(작시찬석) 시를 지어 돌에 새기나니

 

永蔽天壤(영폐천양) 영원히 천지를 덮으리로다.

 

 

 

 

 

4) 순조(純祖)의 치제문(致祭文) 1833년 癸巳 正月

 

 

 

國王遣侍臣禮曹正郞李虔愚致祭于金海表忠祠

 

국왕께서 신하 예조정랑 이건우를 보내시어 김해 표충사에 제사를 올리게 하셨다.

 

 

 

惟靈匹士(유령필사) 아! 영령께서는 필부의 선비이시니

 

疏遠于國(소원우국) 나라에는 소원할 것임에도

 

克全天彛(극전천이) 하늘의 본성을 온전히 이기시어

 

扶植綱常(부식강상) 강상의 도리를 심고 일으켰도다.

 

 

 

嶪嶪金官(업업금관) 우뚝이 높은 김해성에

 

島夷猖獗(도이창궐) 섬 오랑캐가 미쳐 날뛰니

 

一二同心(일이동심) 한 분과 또 두 분이 한마음으로

 

投身矢石(투신시석)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곳에 몸을 던지셨도다.

 

 

 

視死如歸(시사여귀) 죽음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여기시고

 

心存社稷(심존사직) 마음은 사직을 지키는 데 있었도다.

 

贈爵表勳(증작표훈) 표덕한 공훈으로 벼슬도 내리셨으나

 

先祖惻怛(선조측달) 열성조께서도 애석히 여기셨던 바이로다.

 

 

 

同堂躋享(동당제향) 한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一體三卓(일체삼탁) 한 몸같이 세 분이 뛰어나셨도다.

 

揭示東史(게시동사) 우리 역사에 높이 들어 알리셨으니

 

短兵勞伐(단병노벌) 열세의 병력으로 힘써 물리친 것이로다.

 

 

 

義辨熊魚(의변웅어) 의는 웅어(熊魚)를 가리듯 의를 취하고

 

不計功業(불계공업) 공이나 업적은 염두에도 없었으니

 

大嶺以南(대령이남) 우리나라의 큰 고개(鳥嶺) 이남에서

 

名高朱雀(명고주작) 그 이름이 남방의 신 주작처럼 높도다.

 

 

 

日星昭森(일성소삼) 해처럼 밝고 별처럼 빽빽하여

 

光載竹帛(광재죽백) 오래도록 청사에 남아 빛나리라.

 

歆我牲酒(흠아생주) 올리는 나의 술과 고기를 흠향하사

 

格斯告實(격사고실) 이와 같이 사실을 바르게 고하노라!

 

 

 

 

 

5) 순절암기(殉節巖記) 1872년 부사 정현석(鄭顯奭) 근지(謹識)

 

 

 

순절암기(殉節巖記) 원문

 

 

 

築四忠壇記履及子城北有石屹然猛獸搏噬之狀詞于府人則曰宋公殉節巖也盖我 皇明嘉靖年間參議宋公諱賓之先諱昌與舊要題名而及壬亂宋公守府城遂慬於是其後雲仍繼刊之余慕公之偉烈恐其石之久而泯也與其來耳謀不笞而剔之治垣而僚之然後人之過府者知有是巖也庶宋公之名幷壽于石而欲爲他日是邦之故事云爾

 

 

 

위 내용을 풀이하면 사충단(四忠壇)의 축조(築造)를 마치고 발걸음이 미친 이곳 김해성 북쪽에 한 큰 암석이 있는데 우뚝 솟은 모양이 맹수(猛獸)가 무엇을 치고 깨무는 형상이라 부민(府民)들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송공 순절암(殉節巖)이라 한다. 이는 천자가정년간(天子嘉靖年間)에 참의공 송빈의 부친 휘(諱), 창(昌) 및 그 오래된 벗들이 제명(題名)하였으며 그 뒤 임란에 이르러 송공이 부성(府城)을 지키다 이곳에서 마침내 순절하셨다.

 

그 뒤 송공의 후손들이 이어서 글을 새겼으며, 내가 송공의 위열(偉烈)을 추모하고 그 돌[石]이 오래되어 내력이 민멸(泯滅)될까 두렵도다. 그래서 돌에 낀 이끼를 털어내고 주위 담장을 고치고 다스린 뒤에, 김해고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순절암(殉節巖)이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라. 바라건대 송공의 이름이 이 돌의 수(壽)와 아울러 다른 날에 우리나라의 고사(故事)가 되기를 바라노라.

 

 

 

 

 

6) 외의 기록문

 

 

 

▹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행장후서(行狀後叙)

 

▹ 진사(進士) 곽재일(郭在一)의 주촌면 가곡 송빈 독향(獨享)시의 상량문(上樑文)

 

▹ 진주목사 이규년의 송공독향(宋公獨享)봉안문(奉安文)

 

▹ 영가후인(永嘉後人) 권상규(權相圭)의 표충사 유허비(遺墟碑)

 

▹ 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의 기적비문(紀蹟碑文) 등이 있다.

 

 

 

7) 참고로 당시 송빈과 함께 순절한 향우 이대형과 김득기 및 유식의 행장을 사충단 향례 차서에 따라 요약 소개한다.

 

 

 

⑴ 이대형(李大亨)공의 행장 요약

 

 

 

공의 휘는 대형(大亨)이요 자는 태래(泰來), 호는 관천(觀川)이며 본관은 재령이다. 이조 중종 38년(1543)에 나서 50세이던 1592년에 죽었다.

 

평소에 신의가 있고 진실하여 참으로 부드러웠다. 시비를 가리고 사변(事變)에 나아감에는 확연히 그 움직이지 못할 뜻이 있어 고을에서 공론으로 조정에 천거한 것이 2번이었고 비록 조정에 발탁되지는 않았지만 그 행의(行義)의 독실함과 믿음은 온 세상이 다 알았다.

 

향사(鄕士) 송빈의 향우로 부사 서예원과는 인척의 의(誼)가 있어 난에 이르러 부사의 부름에 장정 100여인을 이끌고 성중으로 들어가 남문을 지켰다. 왜적의 무리에 성이 함락되자 동지 두 사람과 일시(一時)이 입절(立節)하였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밤을 틈타 성중에 잠입하였다가 장남인 우두(友杜) 역시 왜적에게 살해되었고 부자(父子)의 유해조차 찾을 수 없어 초혼장(招魂葬)을 지냈다.

 

 

 

(2) 김득기(金得器)공의 행장요약

 

 

 

공의 휘는 득기(得器)이며 자는 구오(俱五), 호는 거인(居仁)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조 명종 4년에 나서 44세이던 1592년에 죽었다.

 

평소에는 사물(事物)에 담담하여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없으며 사람을 대함에는 공손하고 위엄이 있어 장난으로라도 버릇없는 낯빛이 없으며 검소와 절약으로 율기(律己)하고 가법(家法)이 원래 엄정하여 일찍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자리 구하는 일은 그 뜻이 아니었다.

 

공이 봉시장사(封豕長蛇)의 왜변을 듣고 분연히 몸을 던져 성중으로 들어갈 행장(行裝)을 재촉할 때 공의 17세 된 6대독자 간(侃)이 ‘이번 걸음이 돌아오기가 바랄 수 없는데 병든 어미와 약한 자식을 두고 어찌 몸을 가벼이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만류를 하였는데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삶을 버리고 순국(殉國)함에 급한 것이 곧 신자(臣子)의 대절(大節)이라 내가 한 번 과거하여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이 평민과 다르니 어찌 차마 처자를 보호하고 풀숲사이에 살길을 찾겠느냐?’하며 입은 도포 한 벌과 머리털 한웅 큼을 주며 이르기를 ‘나는 이번에 죽기를 결단하니 다른 날 이 옷과 머리털로 너의 어미 무덤에 합장하라’하고 채찍을 재촉하여 성중에 들어가 동문을 맡았다. 난에 성이 함락되자 아들 간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잠입하였으나 밤중이라 분별 할 수가 없었다. 뒤에 공의 유명으로 옷과 머리털로 합장(合葬)하였다.

 

 

 

(3) 유식(柳湜)공의 행장요약

 

 

 

공의 휘는 식(湜)이며 자는 락서(樂棲) 본관은 문화(文化)인이다. 이조 명종 7년에 나서 41세이던 1592년에 죽었다.

 

문화유씨는 고려로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명현(名賢)과 대작(大爵)이 빛났다. 공도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 뜻이 크고 소사(小事)에 구애받지 않는 절의(節義)로 선조들의 정자를 수리하고 날마다 거기에 거하며 경서와 병서를 연구하며 살피니 당시의 사람들이 낙오거사(樂吾處士)라 하였다.

 

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침입하니 공이 분연(奮然)히 백형(伯兄)에게 아뢰기를 ‘대란(大亂)을 만났으니 의리는 마땅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합니다. 병법에 형은 마땅히 집을 지켜야하고 저는 한 번 죽어 임금께 보답하는 것이 저의 뜻입니다.’하니 백씨(白氏)가 그 의리(義理)를 장하게 여겨 집안의 종 수십 명을 붙여주어 공이 마침내 처자(妻子)와 이별하고 칼을 잡고 성중으로 들어가니 부사 서예원은 이미 진양으로 달아난 뒤였다.

 

공이 드디어 의사(義士) 송빈, 이대형, 김득기와 함께 죽음을 맹서하고 지키는데 적이 물길을 끊어 성중이 목마름에 견딜 수 없어 항복을 말하는 자까지 있자 말한 자를 목 베어 경계하며 우물을 파서 적에게 보이니 적이 놀라 신장(神將)이라 여겼다. 적이 보리를 베어 성을 넘어오자 적과 맞붙어 많은 수급을 베고 결국 宋, 李 , 金 三公과 함께 전패(殿牌)아래 통곡하며 죽었다. 뒤에 옷과 신발로 장례하였다.

 

 

 

 

 

8) 송빈을 비롯한 사충신의 증직(贈職)내용과 가증(加贈)연조

 

 

 

⑴ 선조 33년 庚子(1600)에 증직(贈職)한 내용

 

 

 

송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이대형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김득기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유식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⑵ 순조 34년(1834)에 관찰사 서희순(徐熹淳)을 비롯한 고을수령들의 여러 장계와 수십 년 거듭된 경상좌우도 유림들의 잇따른 가증(加贈)상소에 의해

 

 

 

 

㈀ 송빈 고종 12년 乙亥(1875)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 이대형 고종16년 庚辰(1879)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 김득기 고종16년 庚辰(1879)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 유식 고종 21년 甲申(1884)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

 

 

 

 

 

9) 사당건립 및 거듭된 훼철과 복원의 역사(歷史)

 

 

 

⑴ 숙종 33년 丁亥(1707) 충무공의 후예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송빈의 사당을 지어 봉향할 것을 조정에 상소하다.

 

 

 

⑵ 숙종 34년 戊子(1708)에 김해군 주촌면 양동리 가곡에 사당을 세워 표충사(表忠祠)라 하였는데 이 표충사는 송빈 선생을 홀로 독향(獨享)하는 사당이었고 매년 2월 8일 향사를 올렸다.

 

포산(苞山) 곽재일의 상량문과 진주목사 이규년(李奎年)의 봉안문과 축문이 있다.

 

 

 

⑶ 영조 18년 辛酉(1741) 표충사가 戊子(1708)년에 세워졌으나 집사자(執事者)가 조정에 戊子년을 戊戌년으로 잘못 혼동 보고하는 바람에 훼철대상이 되어 훼철됨.

 

 

 

⑷ 정조 9년 甲辰(1784) 경상도 유림(儒林)들의 표충사 재건 상소로 진례면 신안리 무송에 부설(復設)되었다. 이때로부터 이대형, 김득기를 더하여 三忠을 향사하고 사호(祠號)를 송담사(松潭祠)라 하였다.

 

 

 

⑸ 순조 원년 辛酉(1801) 순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2번째 철폐되었다.

 

 

 

⑹ 순조 24년 甲申(1824) 밀양 안경제(安景齊) 등 25읍(邑) 148명을 비롯하여 도내(道內) 유림들의 20년에 걸친 복원 상소로 순조의 윤허를 얻어 다시 부설되고 사호(祠號)를 올려 송담서원(松潭書院), 송담사(松潭祠)라 하였다.

 

 

 

⑺ 순조 33년 癸巳(1833)에 왕이 송담사(松潭祠)를 다시 표충사(表忠祠)로 사액(賜額)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물(祭物)과 함께 예조정랑 이근우(李虔愚)를 특사(特使)로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⑻ 순조 34년(1834)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 서희순(徐熹淳)이 宋, 李, 金 三公에게 조정에 가증(加贈)하기를 아뢰고 고종 3년(1866) 경상도 유림 정경(鄭儆), 김종걸(金宗杰) 등 25인이 가증내리기를 상소하고 이어 유림지사 허조(許祚), 김종걸 등 27인이 재차 상소하다.

 

 

 

⑼ 고종 5년 戊辰(1868)에 송담서원 표충사가 서원 훼철령에 의해 3번째 훼철되다.

 

 

 

⑽ 고종 8년 辛未(1871) 훼철 후 3년간 선산 성언술(成彦述), 창녕 조창현(曺昌賢) 등 90여 인의 경상좌우도 유림들이 대대적으로 통문을 돌리며 복설운동을 한 결과 고종황제의 윤허를 얻어 동래와 진주의 예에 따라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유식(柳湜)을 더하여 사충신을 위한 사충단(四忠壇)을 설단하고 향사를 받드는 절차와 절목(節目)을 정하였으며 이후로 고종황제로부터 김해 세무청을 통하여 제수전(祭需錢)을 받아 향사를 받들다.

 

 

 

⑾ 1978년 12월 사충단을 김해시 동상동 228번지로 이전하였다.

 

 

 

⑿ 1995년 5월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시비, 도비, 국비의 보조로 사충단을 현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로 이전하고 동시에 송담서원 표충사를 복원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무공의 후예 부사 이봉상(李鳳祥)의 상소로 1708년 주촌 가곡에 표충사를 세워 송 선생 독향→ 1741년 훼철→ 1784년 진례 무송으로 옮겨 李公, 金公을 더하여 삼충신을 모시는 송담사 복설→ 1801년 훼철→ 1824년 다시 무송 송담사 복설→ 1868년 3번째 훼철→ 1871년 김해 읍내로 옮겨 柳公을 더하여 사충단을 설단하고 송담서원 표충사로 복원되는 수난의 역사를 볼 수 있다.

 

 

 

 

 

Ⅲ. 결론

 

 

 

의병장 송빈의 위국 헌신하는 의로운 행동과 충절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시원에 대한 고찰과 함께 새로이 재평가하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평소에는 도덕이니 학문이니 하면서 성인군자인척 대인처럼 행동하는 인물들이 많지만 막상 국난에 임하여는 진정 자신의 생명을 던져 절의를 드러내는 이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많지 않다.

 

 

 

당시 김해성의 상황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관군(官軍)의 수장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진 부사 서예원이나 초계군수 이유검 뿐 아니라 주변 고을의 거의 모든 수령들이 주저하다 숨거나 도망치기에 바쁜 무리들이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본성이다. 보통 사람들의 본성은 누구나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정신이 윤리와 도덕으로 꽉 들어찬 양심의 소유자는 그 양심의 힘에 의해 부정과 불의 앞에 생을 초월하는 강력한 정의의 용기를 드러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갈고 닦는 부단한 수양과 정진한 학문을 통하여 스스로 체득한 어떤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을 우리는 진정한 선비라고 여기고 추앙하는 것이다.

 

 

 

위의 글 행장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의병장 송빈께서 부사의 부름을 받고 장자 정백을 만나 사지(死地)로 가는 길을 만류하는 정백에 대하여 의(義)를 행함이 곧 충효가 양전(兩全)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붙드는 소매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는 대목에서 강철같이 무장된 선비정신의 내면이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정신은 두고두고 이 땅에 살아 있는 우리들의 귀감인 것이며 민족의 후일을 담보하는 징표인 것이다. 그래서 순암 안정복도 公의 의열(義烈)이 도화선이 되어 뒤에 수많은 충의지사들이 일어나 왜적이 마침내 패망하여 돌아갔다 하였고 금대 이가환도 떠나면 살 수가 있었지만 죽음도 달게 여겨 동래성의 송상현같이 우뚝했다 하였고 순조임금도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천성(天性)을 온전히 이겨내고(克全天彛) 죽음으로 강상의 도리를 일으키고 심었으니(扶植綱常) 이런 사실들이 해처럼 밝고 하늘의 별들처럼 빽빽하게(日星昭森) 오래도록 영원히 역사에 남아 빛나리라!(光載竹帛) 하면서 제문을 통하여 최고의 극찬과 함께 염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송빈 선생의 실천적 선비정신과 충절정신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큰 유산과도 같은 정신적 자산이자 대대손손 이어가야 할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당시부터 공조참의라는 증작(贈爵)까지 하고서도 정사(正史)에서도 누락되고 현대의 사학(史學)에서도 외면되어 오늘 현재까지도 가까운 도민들은 물론 향읍인 김해에서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김해성의 왜란기록이나 난중잡록만 참고하더라도 김해가 의병의 효시(嚆矢)이며 시원지 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이미 너무 고착화된 인식 탓인지 학계에서도 간혹 연구논문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지역 관계(官界) 또는 사회적 관심을 끄는 데 부족하고 이를 바로잡을 기회는 요원한 실정이다.

 

 

 

그런 결과의 소산들이 결국 동래하면 송상현, 의령하면 곽재우와 같이 김해의 정신을 상징하는 어떤 조형물도 하나 없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등 정보의 바다 또는 홍수 속에 산다고들 하는 요즘이지만 김해의 송빈 의병장 또는 의병들의 활약상은 인용할 만큼 체계적이고 신빙성 있는 매체나 공공기관의 기록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와 같은 현상들이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되고 현재까지도 진실이 가려진 사정의 이면에는 지난 역사에서의 정치적인 이유도 크게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의병장 송빈의 독향사우(獨享祠宇)였던 표충사를 필두로 표충사에서 송담사로 또다시 표충사로 충신들을 기리는 사당의 건립과정과 건립된 사당이 3번이나 훼철을 당하는 수난은 어찌 보면 천대나 멸시에 가까웠다. 이런 수난의 과정들을 보면서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던 권신(權臣)들이 난이 평정되자 당리당략에 따라 한사코 훼손하고 폄하하는 데만 골몰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1728년 소위 영남반란으로 규정된 이인좌의 난(亂) 이후 영남우도가 중앙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되기 시작하면서 1741년 첫 번째 송빈의 독향사우가 헐린다. 이후 김해는 남명학(南冥學)의 본고장이란 정치적인 편견에 의해 복설과 훼철이 거듭된다.

 

 

 

결국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국력이 점차 쇠해지고 병인년과 신미년의 잇따른 양요(洋擾)에 이어 또다시 일본의 노골적인 침탈이 엿보이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朝廷)의 권신(權臣)들은 임진년의 영웅들을 다시 들추어 낼 필요성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것이 고종이 윤허한 김해의 사충단과 뒤이어 참판으로 가증(加贈)까지 한 이유라면 이해가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필자의 생각과 추측일 뿐이지만 사실에 가깝다면 그런 정치적 시대적 환경을 무릅쓰고 수백 년에 걸쳐 이의 부당을 아뢰고 끈질기게 상소한 김해의 여러 수령들과 도유(道儒)들의 의로운 행동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고 숙연한 마음 또한 금할 수 없다. 지난 수백 년의 과오나 편견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 시대에 와서 이런 소중한 정신문화를 잠재우는 것은 중앙정부는 물론 도나 시의 입장에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충렬의 역사는 국민들의 혼을 깨어있게 하고 민족의 자부심과 결집성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앞 다투어 챙기는 정신문화가 충혼탑, 위령비, 의사나 열사들의 동상건립, 충렬을 기리는 재현행사 등등 너무 지나쳐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이다.

 

 

 

현재 사충단이 있는 김해의 송담서원 표충사는 매년 이를 기리는 향례를 하면서도 인근 지역 아파트 주민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김해시의 3부 요인과 사충신의 후손들이 참여하고 읍내 유림들이 주관을 하지만 워낙 소수이다 보니 늘 조용하게 지나간다. 또 시내 주택가 좁은 골목길에 소재하여 접근조차 쉽지 않은 순절암이나 사충단의 소재를 가리키는 안내판조차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눈에도 안 띌 정도니 당시 시신마저 찾지 못한 영령들의 혼백이 4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편한 잠자리에 못 들고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삼시도하(三豕渡河)의 고사(故事)가 있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魏)나라 역사서에 오랫동안 오도되었던 삼시도하(三豕渡河)를 기해도하(己亥河)로 바로잡아 그 유명세로 위공(魏公)에 봉해졌다는 이야기 이다.

 

한시바삐 우리도 정의에 찬 후학들이 함께 힘을 모아 의병의 시원지(始原地)와 같이 수백 년 오도된 역사의 진실규명과 김해성의 송빈 의병장을 비롯한 충신들의 순국(殉國)정신을 현창(顯彰)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민족의 영원한 안녕과 지역사회의 긍지는 물론 또다시 경술국치와 같은 치욕의 역사는 근절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수백 년 통한(痛恨)의 영령들을 위로하며 차후 국토보전의 첨병으로 우뚝 설 것을 기대한다.

 

 

 

 

 

 

 

 

Ⅳ 참고문헌

 

 

 

▹ 사충실기

 

▹ 김해읍지

 

▹ 송담서원기

 

▹ 선조 수정실록

 

▹ 국조보감

 

▹ 난중잡록

 

▹ 청주 송씨 세보

 

▹ 거인실기

 

 

 

저자: 송 춘복(경남향토사학자, 부동산협회 위촉강사, 한문교실강사)


jQuery.noConflict(); // jQuery.fn.UOCLike.defaults.host = 'http://like.daum.net' jQuery.fn.UOCLike.defaults.updateServiceCategory=true; jQuery("#blogLikeBtn").UOCLike({ buttonType : 'pc', showLayer : false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