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서 임진왜란 첫 전국 의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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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왜적은 파죽지세로 진격해왔다. 부산에서 거의 패전하고 김해성으로 침입, 4월 18일 다대포를 건너 죽도에 진출해 19일 새벽부터 김해성전투가 시작됐다. 이때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대병을 거느리고도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왜군이 저녁에 허수아비를 성안에 던져 넣어 소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김해부사 서예원과 초계군수 이유검은 도망가자 김해성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4월 20일에 성이 함락됐다. 이때 김해의 대유학자인 송빈(宋賓) 의병장은 왜적이 부산에서 분탕하고 곧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김해부내의 유생에게 격문을 보내 급히 김해성으로 집결하도록 독려했다. 왜적과 접전이 되자 송빈 의병장은 김해성의 남문을 지키며 뛰어난 지략으로 왜군을 물리치다 전사했다. 이어 이대형 의병장은 김해성의 북문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고, 김득기 의병장은 김해성으로 달려가 동문을 지키면서 수많은 왜군을 무찌르다 전사했고, 류식 의병장은 서문으로 달려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이로서 네 의병장은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장렬히 순절했다. 이와 같이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의병을 모집해 전국의 첫 관문인 김해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네 분의 공을 기리기 위해 고종(高宗)의 명으로 1871년에 사충단(道기념물 제99호)을 건립했다. 처음에는 동상동 873번지에 세웠으나 지금은 동상동 161번지 일원에 확장 이전했으며, 매년 순절일인 4월 20일에 부사주제 아래 향사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 중단됐다. 그 후 1946년부터 후손과 지방민이 표충회를 조직하고 관민합동으로 매년 제향을 받들고 있다. 한편, 1708년(숙종 34) 김해부사 이봉상의 발의와 지방사림의 도움으로 김해시 진례면에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웠다. 1833년(순조 33)에 영의정 남공철이 왕에게 아뢰어 표충사(表忠祠)로 사액됐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송담서원이 헐렸다가, 1871년 부사 정현석이 왕명을 받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해도호부는 태종 13년(1413)에 설치됐고, 세조 5년(1459)에 김해진관(金海鎭管)을 설치했다. 이때 웅천과 완포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 칠원은 군사적으로 김해의 통제를 받게 했다.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석성으로 문종 원년(1451)에 둘레 4천418척, 높이 13척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임란 충신들을 모신 사당은 송담사에서 표충사, 송담서원 등으로 이름이 격상되다가 조선 말 고종의 왕명으로 관직을 높이면서 김해성 안의 동상동에 사충단을 지어 위패를 옮겨 모셨다. 지금은 분상성 중턱으로 이건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한편, 곽재우의 의병장은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따라서 김해의 의병 전투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의병장의 전투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의병 전투이었으니, 김해의 송빈 의병장은 전국 최초의 의병장 전투임을 알려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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