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에 대한 추억 / 송유창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21.04.02|조회수107 목록 댓글 1
1967년 5월 한 참 바쁜 보리타작이 어느 정도 끝나가는 오후였다. 나는 그 때 모선재(慕先齋:청주송씨 사천공파 제실)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아버님께서 무엇인가를 싼 하얀 보자기 하나를 들고, 아무른 예고도 없이 내가 공부하고 있는 모선재로 오셨다. 별다른 말씀도 없이 그냥 공부하는 방을 한 바퀴를 휘익 둘러보시고는, 들고 오신 하얀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으시고는 그냥 방을 나가시었다. 아버님이 나가시자마자 나는 모시보자기를 풀어 보니, 놀랍게도 밭에서 캔 삶은 감자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간식은 항상 어머님이 챙겨 주셨는데, 왜 그 날은 갑자기 아버님이 감자를 들고 직접 오셨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내가 집에서 보리타작을 하시는 아버님을 도와드리는데 보리의 칼크래기가 나의 오른쪽 눈에 들어와, 나는 갑자기 눈을 뜰 수가 없어 한 손으로 눈을 감싸고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버님이 언제 달려 오셨는지 나의 손을 가만히 떼면서 먼저 증상을 물어보셨다. 나는 눈에 들어간 보리의 수세미의 끝이, 눈을 뜨면 자꾸 눈 안쪽으로 파고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먼저 나를 안정시키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나에게 양쪽 눈을 감게 하고는 당신의 혀를 이물질에 충혈 된 나의 눈 속에 넣어, 혀끝으로 부드럽게 더듬으면서 이물질을 눈 한 쪽 끝으로 밀어 내시었다. 참 신기하게도 이물질이 눈 끝으로 밀려 나오면서 금방 나의 눈은 정상이 되었다. 만약 아버님이 이 응급조치를 해주시지 않았다면 병원까지 가는 소동이 일어났을 상황이었다. 너무 간단하게 처리하시는 이 응급조치법을 아버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아버님이 치료를 해 주셔서 나았을 때, 나는 그 때 왜 “아버님 고맙습니다!” 라는 감사의 말씀을 한 번 드리지 못하였을까 하는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혹시 아버님이 보리타작 때의 이 일 때문에 나에게 미안해서 재실을 찾아오신 것일까? 아니면 당연히 공부하고 있을 자식이 갑자기 한 번 보고 싶어 보러 오신 것일까?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갑작스럽게 왜 아버님이 나의 공부방을 찾아오셨는지 지금도 더 궁금할 뿐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가끔은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지고, 문득 자식들이 보고 싶어 전화상으로 나마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리고 나도 부모님이 남기신 가문의 전통을 아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고, 아들이 우리 가문의 전통을 잘 이어줄 자식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마 아버님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줄 장남이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해서, 갑자기 재실로 찾아오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현역 시절 전 후방 어디에서 근무하든,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대였지만 어머님에게 매주 2-3회 안부전화를 꼭 드렸다. 그러나 우리 연배의 대부분 사람들은 아버님이 특별히 야단치지도 않았는데도, 아버님과는 대화하기가 좀 어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주로 어머님에게만 전화를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님께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아버님이 터득하신 삶의 지혜나, 아버님이 자식에게 남겨 주시고 싶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왜 직접 여쭈어 보지 못하였을까? 요즘 생각해보면 아버님이 비록 자식인 우리들과 사소한 대화는 없으셨지만, 오히려 마음속으로는 어머님 보다 더 태산 같은 정을 품으시고 우리들을 걱정하셨던 분이다. 나는 아버님에게 결심을 받아야할 일이 있어도, 항상 어머님을 통한 간접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래서 아버님은 일반적으로 어느 집이나 그렇듯 좀 엄격하고 무서운 이미지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학교에 들어가는 돈도 모두 내가 벌여 주는데, 저 놈은 왜 한 번도 나에게 돈 달라 소리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왠지 아버님께 일상적인 대화 외는 중요한 일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웠지만, 어린 나는 항상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나 하고 아버님에 대한 나의 생각이 떠나 본적은 없었다. 그리고 아버님도 항상 내가 하는 일을 멀찍이서 지켜만 보고 계셨다. 그러니까 부자간에 의시결정을 위한 중요한 대화는 어머님을 통해하였지만, 직접 대화보다 더 깊은 부자간에 이심전심의 대화는 한 번도 끊어 진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자지간의 부족한 대화문화는 예를 중시하는 우리의 유교적인 풍습에서 기인된 것 같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유추해보자면 아버님도 할아버님과 부자지간에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부자지간에 허물없는 대화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아버지는 자식들과 쉽게 대화에 나서지 못하셨고, 그래서 아버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나 역시 아들과의 대화에 서툴렀다. 그러나 요즘은 일반적으로 옛날 아버님 시대보다는 훨씬 다양한 부자지간의 대화는 이뤄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아들에게 보다 많은 나의 경험을 남겨주고 싶어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아들에게 많은 경험을 주고 싶어 노력 하듯이, 아버님도 많은 삶의 지혜를 나에게 남겨주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가문의 전통, 선대 조상들의 일화, 가문의 할 일, 자신의 철학, 인생의 지혜,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경험과 용기, 유산문제와 유언 등...... 내가 지금 자식들과 격의(隔意)없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싶어 하는 마음만큼, 아버님도 얼마나 자식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을까? 이러한 아버님의 의도를 내가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거의 어머님하고만 대화를 하는 불효(不孝)를 저질렀다. 나는 아버님으로 부터 수많은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전수 받지 못했으면서도, 오히려 나는 자식에게는 나의 경험 모두를 전수하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버님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모두 전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 자식에게 전수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이 시작되는 그날 밤에 바로 야간열차를 타고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내려왔다. 할머님과 삼촌이 부모님처럼 자상하게 잘 보살펴 주셨지만 그래도 빨리 시골에 내려오고 싶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라 아무리 학업이 중요하다지만, 그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 한다는 것은 향수병으로 고통스러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떠나 보지 않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산이나 대구 같이 가까운 곳이었다면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 시골에 잠깐 들렸다가 갈수 있었겠지만, 서울에서 시골까지는 한 번 오가는 것은 요즘 외국에 한 번 다녀오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시대였다. 이유는 바로 교통수단의 문제와 교통비에 대한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그 때 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대부분의 어른들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디를 왔다 갔다 하는 자체를 사치(奢侈)로 여겼다. 우리집이 비록 시골에서 다소 어려움 없이 사는 집이였지만, 가고 싶다고 함부로 어디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때는 서울까지 고속버스도 없었으며 열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열차 중에 새마을호는 너무 고급스러워 감히 탈 수가 없었고, 완행열차인 무궁화호가 나에게 꼭 어울리는 교통수단이었다. 서울을 오가는 방법으로 상경 시는 구포나 진영역에서 승하차하였으며, 지금처럼 SNS를 통한 사전 예매도 할 수 없어 대부분 해당 역에서 입석표를 구입하여 타고 다녔다. 통상 서울역에서 내려 올 때는 22:00시나 23:00시경에 열차를 타고, 올라갈 때는 구포나 진영역에서 입석 열차를 타면 7-8시간 걸려 그 다음날 아침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시골에 내려올 때는 고향을 내려오니 마음이라 가벼웠지만, 방학이 끝나고 상경 할 때는 마음이 무거워 피로가 가중 되었다. 그래서 방학을 맞아 시골에 오면, 나는 아예 고향 밖으로 나다니는 일 없이 오직 집에서만 지내다 올라가곤 하였다. 이러한 습관은 사관학교 생도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상 아침 6시경에 구포역(龜浦驛)에 내리면 부산 교통부에서 출발하여 진례로 오는 첫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러나 구포역에서 통상 20-30분 정도를 기다려야 붉은색의 동신버스가 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구포역에 내리면 벌써 고향엘 다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진례로 가는 버스를 타고 보면 아침도 굶었지만 벌써 시골집에 도착한 포근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놈의 버스는 직행이 아니다 보니, 김해 버스정거장에서 20-30분, 장유에서 10여분씩을 기다리다가 비포장도로를 하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었다. 동신버스가 10시경에 진례파출소 앞에 도착하면, 나는 내리자마자 단숨에 익숙한 점고개를 넘어 송정 집으로 향하였다. 점고개를 넘자마자 바로 벽송산 아래에 오목한 우리 밭(송정리 481.482번지)이 나온다.
7월 하순의 한 낮 더위가 바야흐로 기승을 부리려는 시간인데, 어머님은 지금 당신이 누워계신 점고개 밭에서 콩밭을 매고 계신다. 나는 점 고개를 넘어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오래 동안 떨어졌던 어머님을 보면, 내가 먼저 달려가 “엄마!” 하고 어머님을 안아 보겠다는 마음을 꼭 먹곤 했다. 그러나 막상 손엔 호미질로 굳은살이 늘고 배적삼에 땀에 젖은 어머님을 보는 순간, 왠지 나는 쑥스러워서 매번 조금 전의 생각과 전혀 반대의 행동을 저지르곤 하였다. 그렇게 어머님에게 안겨보고 싶은 행동이 마치 객지로 떠난 자식이 나약해 보이는 것 같고, 장남이 어린애처럼 어리광 부리는 행동 같아 나는 한 번도 실천해보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애 같이 한번 덥석 안겨서 땀 냄새 시큼한 어머님 냄새를 실 컷 맡아나 보았더라면, 이처럼 애잔한 그리움은 없을 것을....... 내가 밭둑을 내려가며 겨우 그리움에 목이잠긴 작은 목소리로 “이 더운데 뭐하시는 교?” 하는 말이 보고 싶었던 어머님께 드리는 첫 인사였다. “왔나? 할매는 잘 계시나(서울에서 막내 삼촌과 함께 계시기 때문)...?” 하시며 어머님은 할머님의 안부를 먼저 물으신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시부모님의 안부를 먼저 살피며 큰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시는 어머님이셨다. 부모가 자식을 멀리 보내놓고 애타게 보고 싶었다고, 자식은 부모님이 그리워 남몰래 이불 속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머지 할 말을 대신하였다. 사실 내가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바로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서 서울에 큰 이모 댁을 처음 갔을 때부터, 부모님이 그리워 밤마다 이불 밑에서 혼자 많이 울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후에 막내 삼촌과 할머님과 같이 하왕십리동에서 살았다. 그 당시 비가 오려거나 날씨가 저기압 상태가 되면, 왕십리역에서 들리는 밤 열차의 기적소리가 유난히 가깝고도 크게 들렸다. 그런 날이면 어린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어머님과 아버님이 보고 싶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그 때 그냥 시골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나서, 내가 왜 서울까지 올라와서 이러는지 하고 후회하기도 하였다. 내가 평생 동안 두 분을 이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특별히 효자라서가 아니다. 이는 아마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부모님의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애틋한 부모님의 정에 굶주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일상을 같이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오늘날까지 더 부모님을 그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식은 타향으로 내보내야 효자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님은 금방 하시던 호미질을 멈추고 당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시골 반찬을 만들어 주시려고, 도랑건너 밭에서 콩잎, 깻잎, 호박잎과 가지를 주섬주섬 따시고는 나를 앞세우고 집으로 가셨다. 가는 길에 어머님은 그 동안 집성촌 동네의 변화 사항을 조목조목 알려주시면서, 어떤 분은 병환에 계시니 먼저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누구 집은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니 찾아뵙고 위로해 드리도록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인사를 어머님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기에 나는 동네에서 인사성이 제일 밝은 아들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집에 가방을 내려두자마자 바로 아버님이 계시는 연못건너 논(송정리 556번지)으로 갔다. 7월의 한 낮 더위를 아량 곶 하지 않고 벼논두렁에서 풀을 베는 사람은 그 넓은 들판에 아버님 혼자밖에 없었다. 부지런하신 아버님은 벼논에서 나오는 증탕 같은 습기가 숨을 턱턱 막는데도 혼자서 풀을 베신다. 연못 둑을 지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논과 연결되는 논두렁을 타고, 아버님이 계시는 논을 찾은 나는 “저 왔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린다. 아버님은 인자하신 눈빛으로 “그래 ...”가 대답의 모두였다. 자식은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논두렁이라는 이유에 명분을 붙여 큰 절을 생략을 하고, 아버님은 자식에게 그동안 고생했지 하고 묻고 싶은 말씀대신에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내가 “더우신데 점심식사 하시려 들어 가입시더...”하고 말씀을 드리면, “알았다. 들어가자!“ 하시며 그제야 낫질을 멈추시며 빠른 점심을 위해 논둑으로 나오신다. 더위에 햇빛이 눈부신 대 낮에, 참 오랜만에 부자(父子)는 파란 나락들이 출렁거리는 논두렁길을 따라 함께 걷는다. 아버님이 앞서고 아들이 뒤를 따른다. 아버님은 긴 군용바지 하의에 윗도리는 곤색 무명적삼을 입으셨지만, 논의 흙탕물들이 군데군데 묻어 상하가 동색이다. 바지 끝을 걷어 올리신 왼쪽 장단지에는 벌써 거머리가 몇 군데를 물었는지 붉은 핏자국에 흙 딱지가 붙어있다. 160cm 키도 안 되시는 저 체구로 어떻게 이 농사를 지을 수 있으실까? 아버님을 뒤따르면서 나는 언제가 아버님을 꼭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다시 해본다. 집 가까이 오는 길에 아버님의 뒷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강제징용으로 일본군에 끌려가셨다 살아오신 역전(力戰)의 용사답지 않게 왜소한 아버님의 체구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놀라곤 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 꼭 아버님과 함께하는 행사가 있었다. 고레골의 논에 있는 웅덩이를 퍼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秋魚湯)을 끄려 먹는 일이다. 고레골의 논은 산월저수지 물길 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저수지 물을 대기가 여의치 않은 하늘바라기 논(天水畓)이다. 그래서 물이 많이 나는 논 구석에다 두세 평가량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그 웅덩이의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짓는 논이다. 그 당시는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를 않아서 그 웅덩이에는 미꾸라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여름 방학 때면 벼가 어느 정도 자란 상태이고, 웅덩이를 퍼면 금방 물이 또 고이므로 웅덩이를 비워도 벼농사에 큰 문제가 없을 때이다. 그래서 아버님과 형제들은 물 퍼는 양동이와 미꾸라지를 담을 그릇만을 가지고 연례행사처럼 웅덩이를 퍼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웅덩이 물은 깨끗하고 논 모퉁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미꾸라지를 잡을 수 없는 우리 집의 양식장 같은 곳이다. 아버님은 물을 펄 곳에 뗏장을 올려놓고는 양동이로 물을 먼저 퍼내신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때라 힘이 넘쳐서, 아버님이 푸시는 양동이를 받아서 내가 물을 거의 다 퍼내곤 했다. 물이 잦아들면 뻘 속에서 손가락 굵기보다 큰 누런 미꾸라지들이 장어처럼 기어 나왔다. 금방 반 양동이 정도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미꾸라지를 잡아 집에 오면 오랜만에 귀향한 자식을 위해 어머님은 온갖 채소를 가득 넣어 추어탕을 끄려 주셨다. 이 추어탕도 내가 이제는 맛볼 수 없는 추억의 맛이 되었다. 가끔 김해에 사는 여동생이 고맙게 끄려주는 추어탕으로, 어머님의 그 맛을 더듬으며 애써 나는 나를 위로한다.(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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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버님에 대한 추억|작성자 송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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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송유원 | 작성시간 21.09.14 고향의 아름다운 追憶,

    그리고 부모님께 대한 사랑과 효심이

    가슴을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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