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사 한 끼는 우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한 평범한 일상이다. 어머님 당시의 식사 한 끼 준비는 부족한 식자재와 미비한 조리시설로 인하여, 사람이 직접 식자재부터 요리까지 준비해야하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즉 모든 조리를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만들었으며 가스레인지나 전열기 등 최신 주방기기는 꿈도 못 꾸던 시대였다. 이런 환경에서 매 끼니마다 대가족이 먹는 방대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으며, 음식 준비 후에도 가족의 서열에 따라 별도의 상을 준비 하는 등 주부의 할 일은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해 오늘 날은 풍족해져서 웰빙 음식인가를 따져가며 먹을 뿐만 아니라, 식수 인원도 핵가족을 넘어 일 인 가구와 혼식이 일반화된 시대가 되었다. 때문에 내가 아무리 어머님시대의 상황을 설명해도, 지금 세대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며 또한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요즘 우리들은 특별하게 축하할 일이 있으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를 인터넷이나 전화상으로 예악한 후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 된다. 어머님 시대에는 바쁜 일철이 끝나야 겨우 가족들이 모여 좋아하는 음식 한두 가지를 직접 만들어서 먹을 정도였다. 특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춘궁기(春窮期)가 시작되어, 이때를 ‘보릿고개’라 하여 대부분이 세 끼의 밥을 다 챙겨먹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가난한 집이나 부자 집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가난한 집은 끼니를 준비할 양식이 부족해서 어려웠고, 잘사는 집은 못사는 집을 배려해서 마음대로 음식을 즐기지 못해서 어려웠다. 이 시대에 자기 것을 마음대로 쓴다고 누가 무슨 시비를 하겠냐마는, 없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예의와 염치(廉恥)가 있는 시대였다. 어머님 시대 음식의 특징은 주로 소박한 채소 위주의 음식으로서 요즘으로 말하면 웰빙(wellbeing) 음식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냉동보관시설이 부족해서 음식재료나 먹고 남는 음식들을 냉장 보관할 능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충분한 음식을 준비할 형편도 못 되었지만, 음식은 그 식구가 그 끼니에 먹을 양만큼 꼭 맞게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가 전업주부가 아니라, 농사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투잡(tow job)의 신분이었다. 물론 도회지의 주부는 예외였지만 적어도 내가 살았던 시골 즉 어머님의 상황은 그러했다. 당시 시골 어머님들은 통상 하루에 2, 3개 이상의 일들을 동시에 병행해야만 하였다. 시골 여느 집과 같이 우리 집도 아버님은 논일을 주로 하셨고, 어머님은 논일도 도우시면서 밭일과 주방 일을 대부분 담당 하셨다. 물론 가을걷이, 보리나 밀을 타작하거나 채소를 거둘 때는 공동으로 하셨지만 주방일 만은 오직 어머님의 소관이었다. 그러면서 고방(庫房)의 열쇠는 할머님이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바쁜 일철에는 어린 우리들의 손뿐만 아니라, 할머님의 손까지 빌려야 했을 만큼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소, 돼지나 닭 등의 가축을 키우는 일도 어머님의 중요한 몫이었다. 그 당시 가축을 기르는 일은 우리 집의 특별한 수입원인 동시에, 각종 음식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재활용하는 훌륭한 방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어머님은 우리를 한 번도 배고프지 않게 해주셨고, 식사 때마저 조금도 기다리지 않게 해주셨던 나의 어머님에 대한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먼저 내가 요리나 반찬을 만들어 보았거나 이에 대한 전문가라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릴 때부터 정성스럽게 마련해주시던 어머님의 그 음식들을 기억하며, 그 때의 소중한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어머님의 음식 맛을 볼 수는 없지만, 내 눈으로 보았던 어머님이 음식을 만드시던 모습과 내 혀로 느꼈던 음식의 맛은 적어도 적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취지로 나는 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며, 거듭 이야기 하지만 나는 요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임을 미리 밝혀 둔다. 1) 먼저 어머님은 식재료 현지 조달의 달인 모내기, 보리타작, 벼 추수시기 둥과 보리나 밀 파종 등의 농번기가 되면 지나는 낯선 사람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이 바쁠 때는 “죽었던 송장도 일어나 거드는 때다!”라며 어릴 때 할머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다. 그만큼 바쁜 시기에는 조그마한 일손이라도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이 농번기에 한 참 일을 하다 보면 일꾼들에게는 밥 때가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허기를 면할 수도 있지만 허리를 좀 펴고 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일꾼들과 같이 일을 하시다가, 그들의 식사를 준비를 해야 하는 어머님에게는 또 다른 일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전혀 망설임 없이 거의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하시다가 빈틈없이 식사를 준비해 내셨다. 보통 한 시간 전쯤에 일터를 슬그머니 빠져나와서 식사 준비를 하러 집으로 혼자 가신다. 아무리 내가 생각해봐도 어머님은 별도로 메뉴표를 만드시지 않았지만, 혼자서 이미 전날 밤에 일꾼들의 수와 그 들의 음식취향이 맞추어 거의 준비를 다 해 놓으신 것 같다. 논과 밭에서 준비하기가 어려운 재료는 5일장에서 이미 사와서, 전날 저녁에 다듬어 놓고 쌀과 보리쌀은 물에 불려놓고 오신 것이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에 밭에 들러서 풋고추, 애호박, 깻잎, 가지, 콩잎과 파 등을 능숙한 솜씨로 훌쳐 가시는 일만 남았다. 이 텃밭의 재료들이 어머님의 손을 거치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모든 일꾼들의 혀를 춤추게 하는 최고의 맛있는 한 끼의 반찬이 된다. 이 반찬의 재료들은 어머님이 밭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손길 하나로 모은 재료들이며, 이를 순식간에 반찬으로 만들어 내는 현지 조달의 달인이셨다. 전쟁에서 가장 훌륭한 지휘관은 주어진 가용자원을 우선적으로 활용해서 효율적으로 전투를 준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장수이다. 어머님은 별다른 음식재료를 구매하거나 준비하지 않고, 오로지 논과 밭에서 채취한 식재료만으로도 우리의 식탁을 항상 풍성하게 꾸리셨다. 당신은 이 재료들을 준비하는데도 주위 사람의 도움 하나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현지의 재료들만을 이용하여 손맛을 내시는 분이셨다. 특히 보리타작 할 때는 전년도 김장김치 담글 때에 김칫독 채로 묻어 뒀다가 꺼내 먹는 해묵은 김치, 모내기 할 때는 마른 갈치에다 감자를 넣고 조린 약간 매운 듯한 마른 갈치조림, 가을 추수 때는 노랗게 알이 밴 배추에다 멸치젓갈을 더한 배추쌈은 어머님이 만드신 최고의 별미였다. 이러한 모든 반찬의 재료들은 바로 그때그때 텃밭에서 구하거나 기존의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었지만, 어떤 값나가는 식재료들로 만든 반찬보다도 더 맛있고 귀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2) 어머님은 계절의 특미를 만드는 전문 요리사 어머님은 그 시대에 영양이 부족한 우리 집 식단을 그 계절에 맞는 특별 메뉴로 보완해 주시는 전문 영양사 같았다. 어떻게 아셨는지 해마다 때가 되면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그 재료가 들어간 그 요리를 우리 식탁에 준비해 주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식탁은 항상 그 계절에 딱 맞는 메뉴로 풍성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식탁의 메뉴도 바뀌니 항상 즐겁고 풍족했던 밥상이었다. 그로 인해서 나는 지금도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해주셨던 어머님의 손길이 스친 음식들이 자주 생각난다. 가끔 고향식당에서 어머님이 챙겨주셨던 그 반찬들을 만나면 더 애틋하게 어머님이 그립다. 아직도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남쪽의 초봄이 되면 어머님은 제일 먼저 갓 돋아난 부추를 잘라다가 부추 나물을 해주셨다. 부추를 완전히 푹 삶지 않고 약간 대치거나 가마밥솥에 넣어 익혀서, 밥 냄새가 풍기는 부추를 먼저 꺼내어서 고추장 양념으로 나물을 무쳐 주셨다. 남자에게 좋은 부추라면서 아버님 상에다 먼저 올린 다음에 형제들이 먹을 수 있도록 담아 주셨다. 나물 무치실 때 간을 보며 드신 것 외는 당신은 정작 조금도 드시지 않고...... 또한 겨우내 추위와 씨름하면서 모질게 자란 파란 잎과 하얀 줄기가 싱싱한 봄 세파를 뽑아 파의 실뿌리만 살짝 자르고, 이 또한 부추나물 무치는 방법으로 무쳐서 초봄의 별미로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토종 우엉이 잎이 애기 손바닥만큼 크면 잎을 줄기채로 따서, 역시 가마밥솥에 얹어서 은은하게 밥 냄새가 스민 우엉 잎 쌈을 먹게 해주셨다. 쌈장은 묵은 조선간장에 세파와 깨소금을 잔뜩 넣어서 만드셨고, 우엉 줄기가 입속에서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맛은 담백하기 이를 데 없이 좋았다. 이들은 밭에서 구하는 한겨울 추위를 이긴 초봄의 채소들이었다. 이러한 식단들은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그 영양가가 있으며 웰빙의 가치가 높은 반찬들이었다. 야생에서 얻어지는 별미의 반찬으로 쑥에 냉이와 굴을 넣은 쑥국은 기본이었다. 이때면 날씨도 따뜻해지고 해도 길어져서 나물을 캐기가 쉬워진다. 담장이나 울타리 사이에 보드라운 머위 나물은 보랏빛 줄기 채로 뽑거나 따서 먹는다. 최초에 돋아나는 부드럽고 작은 순들은 대쳐서 나물로 먹고, 조금 더 자라서 잎이 크게 되면 쌈으로 먹는다. 잎이 더 커서 억세게 되면 머위 줄기를 따서 잎은 버리고 줄기만 데친 다음에, 껍질을 벗긴 들깨를 넣어 나물로 무치면 이 또한 한여름의 별미가 된다. 머위는 어느 요리든 쌉쌀한 뒷맛이 마치 보약을 먹는 느낌이다. 머위 나물을 무치는 양념은 된장을 사용하여 무치는 방법이 있고, 간장에다 깨소금을 넣어서 버무려 무치는 방법이 있다. 된장으로 묻히거나 쌈을 싸 먹으면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지만, 조선간장으로 무치면 맛이 깔끔하고 훨씬 담백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된장에 무치는 머위 나물을 더 좋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봄철의 보약으로 이보다 더 좋은 나물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봄이 깊어지면 돌나물을 뜯어서 시원한 물김치를 담근다. 사실은 이 돌나물김치는 손이 많이 들어가는 반찬이다. 돌나물은 뜯기 좋게 낮은 곳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습기가 적은 높은 언덕이나 험난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고상하게 자라는 식물이다. 그래서 채취도 힘들지만 재료 자체가 부드럽고 다듬는데도 잔손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자주 어머님이 돌나물 물김치를 준비해 주신 것은 할머님이 특별히 좋아하신 덕분이다. 돌나물과 세파와 물의 비율을 효율적으로 잘 맞추면 오묘하고 깊은 맛이 나지만, 냉장고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쉽게 쉬기 때문에 제 때에 먹어야 하는 까다로운 물김치이다. 그리고 어린 열무가 새봄에 막 자라면 놈들을 솎아서 산초 양념김치를 담근다. 초봄에 새순으로 자라는 어린 열무는 소금에 절이면 부드러운 순 자체가 녹아내리므로, 뜨거운 물에 약간 숨을 죽일 정도로 대친 후에 붉은 고추, 마늘, 부추, 세파, 멸치액젓과 산초가루를 넣어서 담그면 초봄에 입맛을 당기는 별미가 된다. 초가을에도 김장 배추나 무씨를 뿌린 후에 어린 것을 솎아내어서, 진한 멸치젓갈에 산초를 넣고 담그면 가을에도 한 번 더 맛볼 수 있는 김치이다. 그 외 남쪽지방에서 구하지 못하는 원추리나 취나물 등은 가끔 시장에서 사와서 주로 된장에 묻혀 주셨다. 그리고 통영에서 많이 나는 크고 싱싱한 굴을 사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젓갈을 담그거나, 무나 홍당무를 잘게 썰어 넣고 담백한 굴김치를 담아주셨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먼저 상추가 자라고, 이때면 바다에서는 생멸치가 많이 잡혀서 바로 멸치쌈밥을 해주셨다. 멸치 쌈밥은 상추쌈을 준비해 놓고 그 위에 얹어 먹을 멸치조림을 준비하는 음식이다. 멸치조림은 가능한 싱싱하고 큰 생멸치를 냄비에다 넣고, 양념으로 고춧가루, 풋고추, 마늘과 풋마늘 잎을 넣고 국물을 좀 많게 하여 생멸치의 뼈가 물렁물렁하도록 조린다. 멸치쌈밥은 그냥 상추로 쌈만 싸 먹기보다 칼슘이 많은 생 멸치와 야채를 함께 먹도록 한 흔하고 싼 전형적인 경상도 음식이다. 지금은 경상도 지방에 멸치 쌈밥집 체인점이 생겨서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지만, 냉장 시설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는 멸치가 지천으로 나는 4,5월 한때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입맛이 없으면 장유의 멸치 쌈밥집에 가서 그 음식을 주문해 본다. 어릴 때 멸치는 조금 넣은 상추쌈을 한 입 가득 넣고 눈물을 글썽이며 먹던 생각을 하며 ......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면 우리 집 식탁은 다시 먹거리가 푸짐한 천국이 된다. 모두 밭이나 논두렁에서 채취 가능한 공짜 식재료들이 논밭에 늘였기 때문이다. 먼저 어머님이 콩밭이나 참깨 밭고랑 사이에 심은 열무를 뽑아 담근 열무김치가 있다. 열무만 심으면 열무가 자라면서 서로 치여서 줄기가 연약하고 잎이 크게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넓은 콩밭 사이나 참깨 밭에 열무 씨를 드문드문 함께 뿌려놓으면 열무가 이들 밭고랑 사이사이에서 함께 자란다. 이때 주위에 함께 경쟁하면서 자라는 열무가 없어ㅡ열무를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면 키만 크고 햇빛을 보지 못해서 질기고 맛이 없다ㅡ 햇볕을 잘 받아서 줄기와 잎이 통통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이놈들을 물김치로 담그면 식감이 약간 거칠게 느껴지지만, 아삭아삭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구수한 열무 맛이 난다. 700여 평의 밭에 심어 놓은 콩과 참깨들 사이에서 나는 열무로, 콩과 참깨들을 거두는 가을까지 우리 집 밥상에는 국 대신에 새큼한 열무김치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콩은 한 해 동안 내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제공하는 유익한 곡물이다. 먼저 콩이 어릴 때는 콩잎 새순을 따다가 살짝 익혀서 된장이나 간장으로 무쳐 나물로 먹는다. 그리고 콩의 잎이 조금 자라면 호박잎처럼 데쳐서 쌈으로 싸먹는다. 그리고 잎이 억세게 자라면 따다가 하루를 넘게 쌀뜨물과 된장을 풀은 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물에 씻어서 쌈으로 싸 먹는다. 억센 콩잎이 약간 곰삭으면서 아삭아삭하는 식감을 주면서, 콩잎에 밴 뜨물의 구수한 맛과 짭짤한 된장 맛이 어울려 한 여름의 별미가 된다. 또한 한여름의 싱싱한 콩잎을 따서 차곡차곡 접어 볏짚으로 묶은 다음에, 된장에 2-3개월 넣어 두면 된장콩잎이 된다. 이는 일 년 내내 밑반찬이 되고, 한여름에 찬 보리밥을 먹을 때 풋고추에 싸서 먹으면 개운한 최고의 여름반찬이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콩잎을 떨어지기 전에 한잎 두잎을 차곡차곡 따서 지푸라기로 묶어서 옹기독에 담가 둔다. 한 두 달이 지난 후 꺼내어 잘 씻은 다음에 빨간 고추, 마늘, 산초와 멸치 액젓으로 무치면 이 또한 일 년 내내 두고 언제나 먹을 수 있 짠 밑반찬이다. 아울러 깻잎도 똑같은 방법으로 새순은 양념으로 무쳐 먹고, 쌈도 싸 먹으며 큰 잎은 된장 속에 넣어서 먹기도 한다. 호박 잎 쌈은 가장 많이 먹는 기본 반찬이며, 늦가을에 호박순을 통째로 따서 시래깃국에 넣어 먹는 맛도 별미였다. 쌈 중에는 또 양대 잎 쌈이 있다. 양대는 콩과 식물이지만 밭 옆의 울타리를 따라 심거나 별 쓸모없는 땅의 한적한 곳에 대개 몇 포기씩을 심는 약간 소외된 작물이다. 그런데 이 잎을 따다가 가마밥솥에 넣어서 찐 후에 그 잎을 쌈으로 싸먹으면, 콩잎에 밥물이 베인데다 잎 자체에서 고유의 단맛이 나오는 쌈이 된다. 여름철에 여러 종류의 쌈 중에서 유일하게 잎에서 단맛이 나는 양대 잎 쌈을 나는 제일 좋아 했다. 찜국은 서양의 수프(soup)보다 진하면서 영양가가 많지만 손이 많이 들어가는대한민국 고유의 음식이다. 먼저 재료로는 찹쌀가루, 밀가루, 고사리, 대합이나 바지락 ㅡ과거에는 토종 논우렁이가 재료였으나 요즘은 토종 우렁이가 없어서ㅡ등의 조개류를 준비한다. 논우렁이가 들어가면 약간 흙냄새가 나지만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맛 또한 별미였다. 요리 마지막 단계에 부추와 방아를 넣도록 준비한다. 조리법은 맛이 우러나게 논우렁이나 조개류를 먼저 넣고 끓이다가, 물에 묽게 푼 찹쌀가루나 밀가루를 넣으면서 끓인 후에 어느 정도 맛이 나면, 이어 고사리, 부추 등의 채소를 넣고 먹기 직전에 부추나 방아를 새순채로 넣고 끓인다. 찹쌀가루를 조금 더 넣어 차지게 하면 허기를 면하는 한 끼의 끼니가 되고, 좀 묽게 해서 국처럼 훌훌 마시게 하면 수프가 되는 한 여름의 보양식이다. 뜨거울 때 훌훌 마시는 맛도 좋지만, 여름에 큰 양푼에 퍼서 식히면 묵처럼 굳어진 것을 차게 해서 먹어도 시원한 음식이 된다. 풋고추를 넣은 부추전 또한 자주 먹던 반찬이었다. 통상 부추전은 식용유를 붓고 프라이팬에 부쳐 부침개로 해먹는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어머님은, 상상 이외의 방법으로 부추전을 가마밥솥의 뚜껑 안쪽에다 붙여서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요즘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머님의 부추전을 만드시던 방법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부추전이 밥 위로 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밥 냄새를 머금은 채 솥뚜껑 붙어서 익어 나올 수 있을까? 어머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면 꼭 한 번 그 원리나 방법을 여쭤보고 싶다. 또한 여름의 별미로 갈대밭에서 나는 조그마한 게로 간장게장을 담가 먹었다. 할머님이 게를 무척 좋아하셔서 한해도 빠지지 않고 해마다 5-6월이 되면, 어머님은 시장에서 새까맣게 살아 움직이는 조그마한 갈대밭 게를 사오셨다. 그 게를 몇 번이나 깨끗하게 씻은 후에 전통간장을 넣어서 게장을 담근다. 보통 10여일 단위로 게장에 든 간장을 꺼내서 펄펄 끓인 후, 다시 그 게장에 간장을 넣어 세 번 정도를 반복하여 게장을 숙성 시켰다. 그러면 더위가 한창 인 여름철에 보리밥을 먹을 때 짭짤한 게장이 된다. 특히 크기도 작으면서 바싹바싹하게 씹히는 게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고추장을 발라 먹으면 이 보다 더 담백한 여름 반찬이 없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수역 전통시장엘 들렸는데, 서울 전통시장에서 살아있는 이 조그마한 갈대밭 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게를 보니 문득 옛날 할머님 생각이 나서, 나는 직접 게장을 한 번 담아보고 싶은 생각에 게 한 줌을 사왔다. 우선 게를 깨끗이 씻은 다음에 빈 꿀 병에 게를 넣은 후 조선 간장을 넣고 게장을 담갔다. 며칠 단위로 담근 게장의 간장을 꺼내어 정성스레 달인 후에 도로 넣고 해서 숙성을 시켰다. 집사람은 부엌일이라고 모르는 내가 게장 담그는 매 과정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여름철이 되어서 옛날의 그 맛을 생각하며 게 한 마리 꺼내어 먹어봤다. 그런데 너무 짜서 도대체 삼킬 수가 없었다. 아마 나의 손맛이 부족하고 싱겁게 먹는 식습관이 맛의 세계를 마비시킨 것 같았다. 다음에 시도할 때는 양조간장의 비율을 높여서 시도해 보겠다는 교훈만 남기고 끝내 그 게장을 다 먹지 못하였다. 나에게 이 사건은 역시 요리는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손맛과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7,8월의 더위가 극성을 부리면 그 바쁜 틈에도 어머님과 할머님이, 우뭇가사리 묵을 만들어서 훌훌 마시게 해주었다. 요즘은 이것도 여름철 장유 5일장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가을철 진미는 역시 추어탕(鰌魚湯)이다. 추어탕 재료는 누렇게 살이 찐 자연산 미꾸라지에다 어떤 채소를 넣어 끓이느냐에 따라 그 맛이 좌우된다. 요즘 대부분 미꾸라지는 양식이나 중국산을 쓰고 있어 추어탕 본래의 맛이 나지를 않는다. 옛날에는 농약을 거의 뿌리지 않아서 개천 어디서나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다. 특히 장마가 지거나 소나기만 내려도 동네 개울가에서 소쿠리로 떠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가을이 되면 월동을 위해 농로의 물골을 찾아 숨은 곳을 뒤지거나 천수답의 논 옆 웅덩이를 퍼서 잡기도 하였다. 아버님과 우리 형제들이 함께 나서서, 웅덩이를 퍼서 노랗고 살이 통통한 미꾸라지를 잡아 오면 어머님의 추어탕 요리가 시작되었다. 먼저 그 미꾸라지를 소쿠리에 넣고 소금을 약간 뿌린 다음, 거칠고 억센 호박잎을 따다가 미꾸라지 등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하얀 거품이 나오면서 미꾸라지가 해감도 되고, 비늘들이 모두 벗겨 나가면서 말끔한 민 살을 보인다. 이때 바로 솥에 넣고 불을 세게 때고 익힌다. 그런 후에 꺼내서 바로 국자나 주걱으로 뼈와 살이 분리되도록 문지른다. 그런 후에 다시 채로 옮겨서 물을 부으면 미꾸라지의 살과 뼈가 분리되면서 추어탕의 육수가 준비된다. 그 국물을 강한 불에 끓이면서 약간 숨만 죽여서 준비해 둔, 얼갈이배추와 계절에 맞는 채소들을 넣고 재래간장으로 간을 맞추면서 더 끓이는 것이다. 국이 다 끓어 퍼기 직전에 부추와 대파를 넣고 마늘, 산초, 붉은 고추와 풋고추 등을 다진 양념을 조금 넣으면 추어탕이 완성된다. 남원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뼈 채로 믹서기에 갈아서 만들지만, 어머님이 만드신 추어탕은 잔손질이 많이 들어가지만 재료가 신선해서 그 맛이 시원했다. 특히 국을 뜨기 전에 기본적으로 방아를 넣기도 하지만, 먹기 전에 먹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별도로 양념을 넣도록 준비해 주셨다. 특히 방아와 산초는 추어탕의 비린내를 잡아주는 화룡점정(畫龍點睛)의 양념이다. 통상 추어탕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끓여 두었다가 식사 때마다 들어 먹도록 준비를 한다. 그때는 추어탕에 들어간 채소나 양념들이 이미 익혀져서 싱싱한 맛을 잃고 마는데, 어머님은 대파, 부추와 방아 등의 싱싱한 채소나 양념들을 별도로 준비해서, 새로 끓일 때마다 조금씩 넣어 방금 끓인 새 맛이 나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님은 미꾸라지가 없는 철에는 미꾸라지를 대신하여 고등어를 이용하여 고등어 추어탕을 끄려 주셨다. 이는 싱싱한 고등어가 있을 때 만 끊일 수 있는 국이다. 미꾸라지를 대신해서 고등어가 들어갈 뿐 나머지는 추어탕을 끓이는 방법과 동일하게 채소나 양념이 들어간다. 사시사철 싱싱한 고등어가 보이면 항상 해주셨던 보양식이다. 이런 생선국을 먹으면서 조금도 비린내가 나지 않도록 한 것은 방아와 산초 같은 경상도의 허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가자미가 한창 일 때는 가자미를 이용하여 가자미 미역국을 많이 끄려 주셨다. 포항이나 동해 횟집에서는 봄철 가자미가 생산될 때는 쑥국이나 물 회를 많이 해 먹지만, 싱싱한 생물을 자주 접하기 어려운 내륙지역에서는 미역국에 가자미를 넣어서 끓인다. 어릴 때 가족 중에 생일이 있으면 으레 올라오는 국이 바로 가자미 미역국이었다. 물론 광어가 있을 때는 광어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몸값이 비싼 광어보다는 가자미가 들어간 미역국을 더 자주 먹었다. 가자미 철이 지나면 대합, 바지락이나 홍합 등 조개류를 넣어 끓이는 미역국을 더 많이 먹었다.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서늘해지면 초가을의 찬바람이 분다. 이때면 뒤늦게 열리는 부드러운 어린 참박이 있다. 물론 일찍 열린 박은 이미 바가지가 되었고, 늦여름에 열리는 박의 속과 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박살로 박 무침을 해 주셨다. 그리고 가을 기제사(忌祭祀)나 한가위 때는, 박살을 탕국에 무 대신에 넣어 박 탕국을 끓이셨다. 박살은 물이 많으면서 달큼하고 담백하여 맛과 향이 뛰어난 초가을의 반찬재료이다. 이 박살의 맛 때문에 나는 유성에서 근무할 때에 낙지에다 박살을 넣은 박연포탕 집에 자주 갔었다. 특히 늦은 여름부터 늦가을까지의 제사 시에는 거의 어머님은 박 탕국을 끓이셨다. 다른 지방엔 쇠고기를 넣어 탕국을 끓이지만, 우리 집은 박이 나지 않을 때는 거의 대합이나 바지락 등의 해산물을 넣어서 탕국을 끓였다. 그 당시 동치미는 집집마다 겨울의 주식처럼 많이 준비하는 김치였으며,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나면 응급조치 비상식품으로 집집마다 상비약 역할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 집도 큰 독 두 개에 동치미를 담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은 웃을 일이지만, 그 당시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일반화된 집집마다의 풍속이었다. 남쪽은 따뜻한 기온 탓에 12월이 되어서야 김장을 한다. 요즘 김장은 절인 배추를 사서 하거나 아예 김치를 사서 먹는 집이 대부분이다. 당시 김장은 일 년간 먹는 양식처럼 집집마다 많이 준비하였다. 그러자니 김장을 위해서 뭐니 뭐니 해도 배추 씨앗을 잘 골라서 배추를 심는 일이다. 그리고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양념 비법과 김장을 보관하는 방법에 따라서 김장김치의 맛과 향이 달랐다. 아버님은 그 당시 청방이라는 배추를 자주 심어셨다. 이 배추는 크게 자라지만 노란 배추속보다도 파랗고 쪼글쪼글한 잎 부분이 더 많은 배추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배추를 씹으면 육질이 단단하면서 특유의 매운 향이 입에서 알싸하게 났으며, 김장을 하면 배추 형태가 그대로 남는 기질이 강한 배추였다. 그만큼 잎이 어새면서 섬유질이 질긴 배추였으며, 어머님도 이 배추 품종을 좋아하셔서 해마다 우리 집은 이 배추를 심었다. 특히 이 배추는 날 것으로 쌈을 싸 먹으면 푸성귀 같은 배추의 섬유질이 씹히는 질긴 배추였지만, 배추의 향이 입안을 매큼하게 하는 최고의 배추 품종이었다. 김치의 젓갈은 어머님이 5월 초에 직접 두 상자 분량의 생멸치를 사 와서 소금만 넣고 담근 담백한 멸치 젓갈이었다. 양념은 집에서 수확한 고추, 마늘, 참깨, 김장을 위해 밭에서 특별히 키운 갓, 시장에서 사 온 청각과 굴 등을 듬뿍 사서 준비했다.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집안 식구의 식성에 따라 양념을 크게 맵지 않게 하였다. 파릇한 배추에 청각을 잔뜩 넣으면, 김치에 청각이 붙은 모습이 마치 배추에 거머리가 붙은 것 같아 보이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 김장김치는 보관 방법에 따라서 어머님은 두 종류의 김장을 해마다 하셨다. 바로 월동기간에 먹을 김치와 그 다음 해에 먹을 김장을 별도로 준비하셨다. 다음 해 모내기 때 쯤 먹을 김장은 양념을 담백하게 하면서 간을 조금 짜게 하였다. 김장독도 묻기가 편리하도록 작은 독을 준비 하였으며, 또한 독에 묻을 김치는 작은 배추로 준비하였다. 아마 독을 개방하면 금방 김치의 맛이 변하므로 꺼내어 먹기 쉽도록 작은 배추를 골랐던 같다. 김치는 담그는 즉시 해마다 독을 묻는 집 뒤 모퉁이에다 묻었으며, 주로 그다음 해에 모내기를 할 때 쯤 통상 김치독을 파서 반찬으로 하였다. 빨간 해묵은 김치가 나오면 이 김치 하나로만도 밥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울 수 있었다. 날씨가 조금 차게 되면 해조류(海藻類)로 우리 집 식탁은 더 풍성하였다. 11월 말이 오면 해조류로 풍족한 식단이 다음해 음력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졌다. 정확히 말해서 11월 말부터 다음 해 정월 대보름까지가 해조류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해조류가 새싹을 틔우므로 독소 같은 끈끈한 액체가 미끈거리며 나와서 먹기가 어렵다. 해조류는 초겨울부터 대략 두 달 반가량이 우리 집 겨울의 식단을 책임지는 최고의 반찬이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어떤 책에 내륙 사람들은 해산물이나 해조류를 많이 섭취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육류나 육지의 채소를 많이 먹는 것이 좋다는 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이 선택한 해조류 반찬은 이러한 원리를 따져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겨울에 싱싱한 야채를 먹기 힘든 상황에서 해조류가 가장 흔하면서 값이 쌌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하여튼 어떤 이유에서든지 어릴 때부터 만나기 시작한 해조류는 지금도 나의 가장 좋아하는 겨울 반찬이 되었다. 먼저 생미역은 싱싱한 바다 향기를 시장바닥에까지 실어다 준다. 미역을 고를 때는 색깔이 검은 미역일수록 깊은 바다에서 자란 좋은 미역이다. 햇빛을 적게 받았기 때문에 검은색을 띄고, 얕은 데 자란 미역은 해 볕을 많이 받아 담갈색을 띤다. 생미역은 깨끗이 씻은 후 그냥 잘라서 조선간장, 깨소금, 세파와 마늘만 넣고 담백하게 무쳐서먹을 수도 있다. 생미역 무침은 미역에서 나는 약간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면서 입속에서 이빨을 빗겨나가며 잘 씹히지를 않는다. 그러나 비릿한 바다의 내음과 함께 생미역 자체에서 나는 싱싱한 향기를 즐길 수 있어 좋다. 아니면 미역 자체를 약간 숨을 죽이듯 대처서 다진 마늘, 들기름, 세파와 조선간장을 넣어 무치면 좋은 반찬이 되지만, 며칠 지나면 미역에서 물이 나와서 맛이 떨어진다. 파래무침은 부드러우면서 조개껍질 같은 이물질이 없는 것을 잘 골라서 씻은 후에 미역무침과 같이 무쳐 먹는다. 물을 잘 짜서 묻히면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이다. 모자반 나물 또한 파래 나물과 같이 무치지만 그 맛과 향기는 사뭇 다르다. 부드러운 모자반 나물은 조그마한 공기 방울들이, 입 속에서 톡톡 터지면서 그 살들이 잇몸을 스치면서 바다 향기를 입속에 베게 한다. 창밖에는 한겨울의 추위가 전신을 움츠리게 하지만, 부드러운 모자반이 입속에서 전달하는 바다 맛은 계절을 잊게 하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해조류 중에 톳 나물은 요즘 산삼이나 녹용보다도 질병 치료에 좋다는 신비의 불로초(不老草)로 알려져 있다. 모양이 사슴 꼬리와 비슷해서 녹미채(鹿尾菜)라 불리는 해초이다. 각종 미네랄과 특수한 영양소가 다른 해조류 보다 월등히 많아서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해초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톳은 고흥에서 나는데 전량이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해조류이다. 살짝 데쳐서 무친 톳 나물은 변비가 있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식품이다. 담백하게 마늘을 다진 양념으로 무칠 수 있지만, 두부와 깨소금 등을 담뿍 넣어서 무칠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냥 무치는 톳 나물을 더 좋아한다. 톳이 입속에서 톡톡 터지면서 잘강잘강 씹히는 그 맛은 겨울 해조류의 정수라 할 정도로 맛이 깊다. 요즘의 건강식품이라고 부르는 모든 해조류 반찬은, 우리가 어릴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먹었던 어머님이 매끼 준비 해주셨던 반찬들이었다. 자식은 거의 부모의 식성을 승계(承繼)한다고 한다. 그래서 채식주의이셨던 어머님의 식성이 아직도 나를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따라서 나는 비싼 육류가 아닌 채소와 해조류를 이용한 식단으로, 나의 건강을 지켜준 어머님의 밥상이 너무나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님이 해주시던 귀한 자연 건강식을 나는 아직도 시골에서 고집하며 채소나 들깨를 심고, 국내외 여행을 할 때는 천연 꿀이 없나 하고 그 나라 재래시장을 기웃거린다. 어머님의 손맛을 못 본지도 이제 어언 20여 년이 지났지만,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해조류의 계절이 되면 어머님의 그 손맛이 새삼 그립다. 그리고 이러한 먹거리를 봐서 어찌 시골이라고 가볍게 볼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비록 문명의 이기와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이러한 계절의 별미들을 먹을 수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오로지 어머님 당신의 밥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 어머님은 맞춤식 식단의 전문가 어머님은 요리학교를 나온 요리사 자격증이 있는 분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들(삼촌, 고모, 사촌, 조카, 친척 등)이 좋아하는 반찬, 싫어하는 음식과 각각의 한 끼 식사 양까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일하러 오는 동네 분들의 식성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님이 식단을 편성하실 때는 그 끼니의 식수 인원들을 먼저 파악하시면서,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의 종류와 반찬의 양까지를 정확하게 맞추어서 식사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반드시 보이지 않는 어머님만의 원칙이 있었다. 그날에 식사하는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연장자(같은 연배일 때 항렬이 높은 사람)인 가를 먼저 배려하고, 다음으로 어린아이 위주로 메뉴를 준비하셨다. 두 번째 원칙은 식사하는 사람의 식사량도 따지지만, 만약에 음식이 남았을 때를 고려하여 음식을 준비하셨다. 그 당시엔 냉장고도 없었고 음식재료도 풍족하지 못하여, 식수 인원에 딱 맞게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다. 세 번째는 식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식성을 고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위주로 준비하셨다. 그리하여 어머님이 준비한 음식은 식사하는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남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 같지만, 대가족 제도에서 몇 십 명 일꾼들의 식사를 동시에 준비는 입장에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 어머님은 아무리 많은 식수 인원이나 바쁜 가운데도 실수 하나 없이 사람들의 식성, 양과 맛을 정확하게 맞추는 훌륭한 음식을 준비 하셨다. 특별히 어머님은 이러한 음식 준비를 하시면서 계산기나 저울 하나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감으로 식단을 꾸리는 전문 요리사였다. 그러나 이렇게 유능하신 어머님도 가끔은 일탈(逸脫)을 하실 때가 있었다. 어떤때에 가끔 어떤 음식을 ㅡ잘 쉬지 않고 오래가는 음식이나, 어머님이 좋아하는 반찬들ㅡ 터무니없이 많이 준비하실 때가 있었다. 우리 집 식수 인원과도 맞지도 않고, 평상시 어머님의 음식준비 철학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었다.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난 처음에는 나는 이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먹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어머님이 또 갑자기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날이 있어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다. 어머님에게 “평상시 낭비를 하지 말라고 하시드니 오늘 왜 이렇게 많이 준비 했어요?” 하고 나는 좀 이해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머님은 허탈하게 웃으시면서 “애야! 네 할머니가 어려서 시집온 나에게 식사하는 사람에 딱 맞추라고 하도 야단을 치셔서…” 하시며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그래서 내 오늘 그때 생각이 나서 일부러 좀 많이 했지...” 하시는 것이 아닌가? 어린 나이에 시집 오셔서 음식 준비 때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날 이후부터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나는 모르는 채하였다. 사실 어머님은 17살에 23살인 아버님께 시집을 오셨다. 그 당시 대부분의 집들처럼 우리 집도 농사는 얼마 안 되고, 증조부님은 서당에서 제자들이 봄과 가을에 주는 조금의 곡식들로 살림을 살자니 가세가 어려웠다 한다. 그런데 할머님은 임진왜란 시 의병장(義兵將)이신 곽재우(郭再祐) 홍의(紅衣)장군의 직계후손(直系後孫)이라면서, 어린 며느리를 혹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킨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때의 아픔이 생각나신 어머님은, 음식을 만드실 때 투사(投射)현상이 일어나 가끔 그렇게 하시는 것 같았다. 반면에 어머님의 친정은 김해시 칠산(화목)이었는데 꽤 잘사는 부잣집이었다. 어릴 때 내가 외가 집에 갔을 때 보면, 여러 채의 집들과 넓은 앞 뒤 마당이 있어 우리 집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그런데 어머님이 비교적 어린 나이로 아버님께 시집오게 된 사연이 있었다. 외할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아버님이 새 장가를 드시고 싶은 혼처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님의 형제는 3남 3녀로서, 큰 외삼촌과 큰 이모님은 이미 결혼을 하셨고 2남 2녀가 남았다 한다. 그런데 새로 오실 외할머님이 아이들이 많다고 꺼려하자, 외할아버님은 자식을 한 명이라도 줄이는 차원에서 갑자기 세 번째인 어머님의 결혼을 강행하셨다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17세의 어린 나이에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왔다고 하였다. 결혼을 준비할 나이도 아닌데 갑자기 장남인 아버님을 만나게 되어 우리 집으로 오신 후에, 할머님과 고부(姑婦)간의 사연이 많았던 같았다.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인한 반등 현상이 어머님에게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어머님 성씨는 안(安) 씨다. 요즘 고집이 센 성씨를 들라면 사람들이 ‘안(安) 강(姜) 최(崔)’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안 씨는 여자(女)가 갓(갓머리)을 쓴 성씨라서 그런지 남자들 보다 훨씬 여자들이 기질이 센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제일 무서웠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 번 하신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절대 용서를 하지 않으셨으며, 마지막까지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몰고 가셨다. 가끔 내가 동네 친구들과 놀이에 빠져서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시킨 일을 잊었거나 소홀히 한 때가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으레 어머님은 자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며 나를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그러면 나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동네의 다른 동무들 집에 놀다가 밤 10시쯤이면 슬며시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이 소꼴을 먹이러 가야 하므로 그 때는 어머님도 모른 척 해주셨다. 나는 벌칙으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찬물만 마시며 잠들곤 하였다. 어머님의 말씀은 중학교 시절까지 나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좌우했다. 그러나 어머님이 어릴 때 나를 그렇게 혹독하게 교육하신 것이, 오직 자식을 위해서 하신 일이었음을 알기에 나는 어머님을 더 사랑한다.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님이 제일 무서웠지만 지금은 자식을 위하여 하신 그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어머님은 생전에 나에게 돌아가시면 할머님 옆에 뭍히지 않으시겠다고 여러 번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돌아가시자 나는 아버님과 함께 두 분을 산월마을 앞에 별도로 모셨다. 그러나 그 산소 지역이 군인공제회의 ㈜복합김해레포츠 사업단에 수용되어, 다시 벽송산 아래 점고개 밭(진례면 송정리 481번지)으로 이장하여 할머님과 함께 모시게 되었다. 두 분이 생전에 보리, 참깨와 콩을 함께 심어시던 밭에, 가족묘원(家族墓園)을 만들어 어머님의 뜻을 어기고 4대조(代祖)분들을 나란히 모셨다. 5대 장손으로서 행한 일이니 어머님도 지금쯤은 모두 잊고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저승에서 두 분이 함께 후손들을 걱정해 주시고 계실 것이다. 4) 조리에서 전승불복(戰勝不服)의 전쟁원칙을 가르치신 어머님 어머님은 아무리 우리가 맛있어 하는 음식이라도 두 끼를 연달아 식탁에 올리지 않으셨다. 꼭 내어놓고 싶거나 우리들이 먹고 싶어 해도, 한 두 끼를 건너뛰게 하여 그 음식의 맛이 당기도록 식단을 편성하셨다. 그러한 첫 번째 이유는 먹는 사람입맛의 한계효용(限界效用)의 법칙을 잘 알고 계셨다. 두 번째는 다음 끼니까지 그 음식의 맛을 온전하게 보전할 냉동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그 음식보다 더 맛있는 특별한 계절의 음식을 내어 놓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 같았다. 어머님은 항상 오늘 식단을 준비하시면서 머릿속으로는 벌써 다음 식단과 연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계절마다 바뀌는 논밭의 자연 식재료와 집에서 준비된 젓갈과 양념, 그리고 가족들의 개별 취향에 대한 자료가 어머님의 머릿속에 마치 알파고의 컴퓨터장비에 저장된 것처럼 보였다. 어머님의 이러한 인공지능(AI) 같은 능력 때문에 시골이지만, 우리는 항상 창조적인 레시피(recipe)에 의한 음식을 맛 볼 수 있었다. 어머님은 바둑으로 말하면 수십 수를 미리 내려다보는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님은 통상 군사전략에서 말하는 “똑같은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구할 수 없다”는 전승불복(戰勝不服)의 병법을 잘 아시는 장수 같았다. 마치 전쟁에서 동일한 전투방법이 아닌 창조적인 전략전술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음식 준비에도 매끼 새로운 메뉴만이 우리 가족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원칙을 나에게 가르치시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머님은 한 메뉴를 두 끼를 연이어 내 놓아서는 우리 가족의 혀를 이길 수 없다는 입맛의 한계효용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셨다. 어머님은 최초 식단을 편성할 때부터, 두 끼를 연이어 먹는 메뉴가 없도록 준비하여 음식을 남기는 않도록 하신 것이다. 즉 같은 반찬으로 가족들의 입맛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들의 입맛을 어머님이 만든 새로운 메뉴에 따르도록 우리 혀를 훈련시키시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님은 음식을 통해서 나에게 전승불복의 원칙을 가르쳐 주셨던 위대한 나의 군사적 스승이기도 한 셈이다. 특히 음식재료도 다양하지 못하고 조리시설도 변변히 없는 아궁이에서 음식을 만들던 시대에, 어머님은 오로지 발품 하나로 자식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 하여 음식을 준비를 해주셨다. 5) 사후검토(AAR)를 통해 차기 식단을 반영하시는 분석 전문가 어머님은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시고 차리 신 후에, 그 음식을 먹는 우리들의 식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다. 물론 이미 먹는 사람의 식성과 기호를 고려해서 만드신 음식이지만, 절대 자만하시지 않고 마지막 단계까지 우리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살펴보셨다. 누가 어떤 음식에 젓가락이 몇 번이나 가는가를 헤아리시는 것 같았다. 그냥 지켜보시면 식사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줄까봐 다른 일을 하시는 척하며, 식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시거나 반찬을 추가로 더 주시면서 살펴보셨다. 먹는 사람들이 먹으면서 부지불식간에 내는 평을 먼저 귀담아들으시고, 때로는 그 맛의 반대 되는 질문으로 음식의 평가를 자청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면 맛이 어떠냐고 직접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지난 번 보다 고춧가루를 조금 더 넣었는데 맵지 않아?” 등 구체적인 변화를 이야기 하시면서 그 답을 어머님은 구하시었다. 맛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음식을 만든 사람이 질문하면, 음식을 먹는 사람 누가 바른 소감을 이야기 하겠는가를 어머님은 잘 알고 계셨다. 어머님은 이런 미세한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만든 음식의 개선점을 찾아, 다음 식단에 그 사람이 원하는 맛을 반영하도록 하는 사후검토를 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어머님이 지금에서야 한 가지를 이야기해도 전체를 통찰하시는 예리한 분석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거창한 사후검토 회의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분석하고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은 혼자서 식사를 준비하신 후에 그 식사하는 현장에서 자신의 요리를 평가받는 살아 있는 사후검토를 하시는 분이셨다. 그 말은 어머님은 아무리 바쁜 농번기이라도, 그냥 식사를 차려주시고 다른 일을 하러 가시는 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머님은 언제나 우리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 자신이 만든 요리에 대해 다른 보완사항이 없는지를 끝까지 살펴보시는 분이셨다. 아무튼 어머님은 이미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까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평가를 직접 확인하셨다. 이는 어머님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한 강한 책임감과 함께, 당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어머님의 모습은 자식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표시인 동시에, 아울러 자식인 우리들에게 하는 일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깨닫도록 하려는 무언의 교육 같았다. 6) 식단을 통해서 무한한 헌신의 리더십을 보이신 어머님! 그 시대에 다른 어머님도 다 그러하시듯 나의 어머님도 오로지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이다. 어머님은 끼니마다 준비하시는 반찬들의 재료들을 모두 밭이나 자연으로부터 직접 채취하시고, 그것들 하나하나를 직접 다듬고 손질하시느라 잠시도 쉴 틈 없는 분이셨다. 요즘처럼 마트나 슈퍼에서 다듬어서 파는 식재료들은 그 시대의 모든 주부들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즉 음식준비에서 돈이 적게 들어가는 식품은, 그만큼 노력이 더 들여가 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재료들은 돈을 주지 않고 구할 수는 있지만, 그 대신 채취로부터 다듬는 일까지 하나하나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무엇보다도 빨리 다듬는 요령 또한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모든 주부는 농사일이 주업이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부업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현대화된 첨단 조리시설도 없어서 조리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몇 배의 손이 더 필요했다. 따라서 반찬 재료 손질을 하면서 조리를 위한 솥에 불을 때고, 가마솥(대가족 식사준비라 주로 가마솥을 이용)에 밥을 안치는 동시에 또 다른 음식을 준비해야 함으로 우선순위가 중요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진 시간에 음식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특히 어머님 혼자서 짧은 시간에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날에는 최소한 불을 지펴주는 보조 한 명이 필요했다. 그때 장남인 내가 거들거나 큰 여동생이 도와드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어머님이 하시는 수많은 요리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음식점 같으면 몇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어머님 혼자서, 싫은 기색이나 힘들어하시는 표정 하나 없이 헌신적으로 챙기셨다. 또 한 어머님은 식사를 차릴 때에도 철저하게 식사하는 사람 위주로 준비를 하셨다. 항상 식사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따뜻한 음식이나 시원한 음식을 차려 주셨다. 절대로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식탁에 앉기 전에, 따뜻한 국물이나 찬 음식을 먼저 식탁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먼저 내어 놓으면 음식이 식거나 데워져서 그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내가 본의 아니게 식사 직전에 꾸물거릴 때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밑반찬같이 먼저 차려도 되는 음식들은 미리 차리셨지만, 뜨겁거나 차게 해서 먹는 음식들은 내가 식탁에 앉기 전에는 절대 내놓지 않으셨다. 그럼으로써 그 음식의 맛과 질을 보장하면서 그 음식을 준비해준 어머님의 정성을 느끼게 하셨다. 정성이 없는 식당 밥이 아닌, 마음이 담긴 정성의 밥을 그릇에 가득 채워 주신 것이다. 그 만큼 어머님은 먹는 음식에도 타임을 제일 중시 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음식을 차리는 입장에서 보면 중간에 잠깐의 시간이지만, 기다리는 일은 참 귀찮고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한 숨 돌릴 시간 없이 바쁜 농촌 일에 시달리는 어머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아까운 시간이다. 더욱이 하루 종일 궂은 논밭의 일로 누구보다도 더 지쳐계실 텐데, 어머님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식사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셨다가 음식을 차려 주셨다. 어머님은 자신의 몸 하나 돌보지 않으신 희생은, 마치 목마른 부하들에게 먼저 물을 마시게 하는 장수 같았다. 이렇게 자신의 몸 하나를 돌보지 않으시고 가족들을 위해서 무한한 헌신을 하시며 사신 분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어머님들처럼 내 어머님도 항상 몸이 불편하여 끙끙 앓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내색 한 번 않고 강한 어머님의 모습만 보이셨다. 이로 인하여 어머님은 평생 아프시지도 않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것이라는 착각으로, 나는 어머님을 너무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게 하였다. 이제 나도 여식을 시집보낸 아버지가 되고 보니 생전의 어머님이 왜, 그렇게 당신의 몸 하나 돌보지도 않고 밤낮으로 우리만 보살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왜? 당신은 한 번도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시고 그렇게 헌신만 하시다 가셨는지 따져보고 싶었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서운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한 일도 피하지 않고 먼저 나섰던 어머님이다. 마치 무한의 높이에서 의심 없이 뛰어내리는 폭포위의 물처럼,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시는 그런 분이셨다. 나는 이러한 어머님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알기 전까지는 무척 어머님을 원망하였다. 그런 원망 끝에 나는 어머님은 과연 무슨 철학으로 그렇게 사시다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나는 어머님 삶의 철학은, 대부분의 그 시대의 여느 어머님처럼 ‘자식과 가정을 위한 무한한 헌신(獻身)’ 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머님의 진정한 삶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조상들을 잘 모시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버님과 자식들 즉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셨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누구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만큼 소중한 삶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따라서 나는 어머님이 누구보다도 훨씬 더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시다 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의 삶을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고,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다시 나의 여생도 ‘어머님처럼 세상을 위하고, 자식과 가정을 위하여 더 헌신하는 삶을 살라’ 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었다. 아울러 자식인 내가 부족한 글 솜씨지만 어머님 당신의 끝없는 헌신을 기록으로 남기게 하는 용기까지 주시게 하였다. 어머님은 택호(宅號)가 ‘화동댁(花東宅)’이시다. 외가가 동네 동쪽인 화목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불렀다. 그 보다도 진짜 택호는 사람들이 “요량댁(料量宅)”이라 불렀다. 매사에 생각하여 헤아림이나 그러한 생각들이 정확하시고, 또한 어떤 일을 예측하심이 거의 적중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항상 어디에 가든지 매사에 주인처럼 행동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정신과 사회일원으로서 염치(廉恥)가 있는 행동, 그리고 가족과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해서는 무한한 헌신을 강조하신 분이셨다. 이와 같이 어머님의 밥상은 일 년 365일 동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수많은 자연 재료들을, 오로지 발품 하나로 텃밭을 다니시며 준비하시어 자식들에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셨다. 따라서 이런 어머님의 밥상은 어머님의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머님은 그 밥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헌신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어머님은 솔선하여 삶에서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식인 우리들에게 가르치셨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 삶의 목표는 바로 ‘헌신’이었으며, 그 삶의 목표에 가장 충실하게 살고 가신 분이 바로 어머님 당신이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님은 가장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사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울러 나는 사람의 삶의 목표는 누구를 위한 헌신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어머님의 헌신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자식이 있기에 어머님의 삶은 더욱 성공한 삶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2019.1.) 태그 취소 확인 [출처] 2.어머님의 밥상(2020.6.7)|작성자 송유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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