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장군의 낙동강 방어전투(2020년 경남향토사 논총 제 30집 "6.25 70주년 특집" )

작성자장군|작성시간21.08.05|조회수169 목록 댓글 0

1. 낙동강 방어전투란

  우리는 6.25를 기억하면서도 한국전쟁의 영웅 워커 장군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군과 UN군이 1950년 8월, 9월 낙동강 부근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가 바로 “낙동강 방어 전투”이다. 개전 후 국군은 북한군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UN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여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이와 같은 낙동강 방어전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 남짓하여 대한민국의 대부분이 점령당하여 국가가 백척간두의 운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동강 방어 전투는 국군과 UN군이 대한민국의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 여건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세 이전의 기틀을 마련한 작전이었다.

  그 당시 낙동강 방어선 편성은 북쪽(왜관-팔공산 –보현산 –영덕)은 국군이 담당하고, 서측(왜관 –마산 진동리-진해만)은 UN군이 맡았다. 북한군이 부산 점령을 목표로 총공격한 8월, 9월 그들의 공세를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퇴하였다. 즉 국군과 UN군은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마산·대구·경주 축선을 고수하여,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부산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한 선에서 북한군의 전쟁목표를 분쇄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렇듯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공세이전의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방어에서 공격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후퇴에서 반격으로의 대전환을 이루게 하였다.

 

2. 절박한 낙동강 방어전투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하여 덩케르크까지 밀려 바다로 철수하였듯이, 낙동강선이 돌파되면 제2의 덩케르크가 될 뻔 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더구나 낙동강 방어선을 지탱하지 못하면 한국 정부는 제주도나 대마도로 이전하여 제2의 대만이 되거나, 아니면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될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맥아더 원수가 구상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도 낙동강 방어선이 유지될 때에야 가능한 작전이다. 이때 이 전투를 지휘한 지휘관이 바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이었다.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물러 설 수도 없고,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 뿐” 이라고 하면서 낙동강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방어하였다. 1950년 7월 29일 그가 지휘하던 예하 사단에 하달한 제 8군 사령부의 작전 명령은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 후퇴나 철수, 그리고 방어 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퇴각 할 곳은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 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하고,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이처럼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이란 비장한 각오로 낙동강을 방어한 워커 장군, 그가 구사한 낙동강 방어작전의 작전개념은 바로 ‘내선작전(內線作戰)’이었다. 이 작전은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예비대를 확보하여 방어선이 무너지면, 바로 뚫린 적의 돌파구를 과감하게 역습하여 전선을 회복하는 작전이다. 이는 지휘관이 작전현장에 상주하면서 적시 적절한 지휘결심을 하였을 때 가능한 작전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워커 장군은 내선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가장 먼저 전투력의 신속한 집중과 절약, 정확한 정보획득을 통해 호기(好機)를 포착하여, 이를 타격하는 모든 결심을 신속히 직접 하였다. 무엇보다도 필드를 뛰어다니며 현장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지휘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워커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특히 워커는 킨 특임단(Kean TFT) 같은 신속 대응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방어를 이끌어 나갔다. 또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수하여야 하는 전투에서는 한번 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그의 별명인 ‘불독’처럼 끝까지 버텨내도록 부하를 채근하고 지원하였다.

  둘째는 공중 우세권(優勢權)과 제해권(制海權) 장악으로 적(敵)은 병력 집결이 불가능했고, 적(敵) 전차를 무력화 했으며, 기동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셋째는 병력물자의 신속한 증원이었다. 군수품의 국내 사전비축을 위해 긴급물자는 공중수송으로, 기타물자는 해상수송을 선택하였다.

  넷째는 교두보내의 치안확보에 주력하였다. 특히 전투경찰을 활용하였고, 북한군 제2전선 부대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피난민 통제, 구호, 교통 통제와 야간 통행금지 등을 강화하여 내선작전지역의 위험을 극복하였다.

넷째는 내선의 이점을 이용하여 기동 예비대인 미24사단과 미1해병여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끝으로 낙동강 방어선 사수는 전투의지를 강조하는 워커 장군의 탁월한 지휘통솔력이었다. 가장 위험한 전투현장을 직접 방문해 부하들에게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의지를 주입해서, 절대절명의 낙동강 방어 전투를 역전시켜 대한민국을 구출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3. 아! 워커 장군

  워커 장군은 우리 고장인 낙동강에서 이렇게 시(時)·분(分)·초(秒)를 다투는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내선작전으로 예비대를 기동화하여 낙동강방어선 고수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도록 병력을 차출하여 적극지원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격작전으로 인천 상륙부대와 성공적인 연결작전 후에 38선 돌파하여 북진을 하였다.

  특히 워커장군은 UN군과 한국군의 낙동강방어 전선(戰線)을 재 조정(調整)하여, 최후의 결전 장소로 새로운 낙동강 방어선으로 전투부대를 이동시키고방어 정면을 축소 조정하여 병력을 절약하고 예비대를 확보하였으며, 또한 방어력을 확충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고 상륙군과 연결 후에 반격작전을 성공시키었다. 이와 같은 워커 장군의 낙동강방어선 조정은, 한국전쟁에서 최고의 결정으로 전후(戰後)에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진정 대한민국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한국전 최전방의 소총 중대장으로 참전,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이 공로로 은성 무공 훈장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워커 장군이 전방 시찰과 함께 아들 샘 워커를 축하하기 위해 가던 중, 지금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현장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따라서 워커 장군이 아들과 함께 했던 6.25전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곳이 많다. 서울 워커힐 호텔, 서울 워커힐 아파트, 캠프 워커, 대구시 남구에 있는 주한 미군 육군 비행장 캠프 워커, 미국 육군이 워커 장군을 기리어 명명한 M41경전차 워커 불독, 6.25전쟁 초기 미 8군사령부였던 워커 하우스(부산 부경대학교 내), 워커 장군 전사지 표지석(서울 도봉동) 등…!

워커힐 호텔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리어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국전쟁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 고장 낙동강에서 워커장군은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이지만, 맥아더와 비교하면 철저하게 잊혀 진 인물임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끝) 경남향토사 논총 제30집 181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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