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부자유친(父子有親)?

작성자장군|작성시간21.08.05|조회수288 목록 댓글 0

  1972년 7월 초순경, 육군사관학교 2학년생도 때에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 휴가 중인 어느 날 아침 10시쯤에 외가 집에서 낯선 분이 부고(訃告) 한 통을 들고 왔다. 아침 일찍부터 아버님이 논에 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아 어머님이 아버님이 계시는 곳을  알려 주셨다. 요즘은 각종 소셜 네트워크(SNS)를 이용하여 친척 간 길흉사 소식을 바로바로 주고받을 수 있지만, 그 때는 친척 집에 누가 상(喪)을 당하기라도 하면ㅡ통상 장례는 3일장으로 급히 연락해야 하므로 ㅡ꼭 알려야할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몇 번 밖에 없는 시골 버스를 타고 인편으로 부고를 전해야했다. 논에서 김매기를 하시던 아버님은 부고를 보셨는지 바로 집으로 오셨다. 수염 많으신 분이라 면도부터 시작하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이 면도를 하시면 통상 출타하시거나 아는 분의 길흉사에 가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 때 아버님이 면도를 하시면서 옆을 지나는 나에게 “외가 집 상가(喪家)에 지금 가려는데 나와 같이 가겠느냐?”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얼른 같이 가겠다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다. 왜냐면 어릴 때부터 아버님과 함께 길을 나선 기억은 설날이나 추석 날 선조들의 산소에 성묘하러 갈 때 외는 특별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후에 사관학교의 정복을 입고 아버님과 같이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정복 차림으로 아버님과 함께 어디엔가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특히 시골의 조그마한 면(面)에서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어 놓고, 아버님이 처가 상가에라도 가서 아들 자랑(?)을 한 번 하시고 싶어 그러시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날이 대외적으로 내가 육군사관학교 정복을 치려입고, 아버님과 함께 하는 처음의 외출이었다. 바로 육사 하정복을 입기위해서 사관학교에서 숙달된 ‘선착순 개념’에 입각하여 외출 준비를 바로 시작하였다. 브라소(쇠붙이 광내는 상표이름)를 이용하여 먼저 버클(buckle)을 닦고, 이어서 정모의 학교마크에 광을 낸 후에 구두약으로 단화까지 깨끗이 손질을 하였다. 순식간에 하정복인 하얀 상의에 자바라가 달린 쥐색하의를 입으니 아버님과 함께 외가로 출발할 준비가 완료 되었다. 이로서 집에서 사관학교에서 배운 선착순 실력을 처음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버님보다 먼저 출발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상가에 도착하고는 그 상가가 아버님의 처당숙(妻堂叔)이 되시는 분, 즉 어머님의 친정 당숙이 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님은 당신의 친정 당숙 장례식에 부자(父子)가 함께 가는 것이 고마우셨는지, 아버님의 흰 두루마기를 꺼내시어 동정을 펴고 먼지를 털면서 아버님이 입기 편하시도록 옷깃을 잡아 주셨다. 아버님과 나는 면소재지에 있는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으로 빨리 가기위해, 동네 샛길인 점고개를 넘어서 버스 정거장으로 급히 갔다. 길을 가면서는 사관학교에서 배운 상급자 수행 때의 예의대로, 아버님의 우측으로 1보(步), 후방으로 3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갔다. 서둘러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니 10여분을 기다리지 않아 진영(進永)에서 장유(長遊)를 거쳐 김해(金海)로 가는 동신버스가 왔다. 아버님은 정복을 입은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 정거장을 지나는 아시는 분을 보면 그 때마다 나를 불러 그 분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진영에서 진례(進禮)로 오는 동신 버스는 많은 승객을 태워, 만원에 가까운 상태로 기다리는 진례 버스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아버님과 함께 버스를 탔으나 승객이 많아 아버님은 앉지 못하시고, 차의 출입문에 안쪽으로 서시고 내가 출입문 바깥쪽에 선채로 차가 출발하였다. 몇 정거장이 지나자 새로 타는 승객들에 밀려 나는 아버님 뒤에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그때처럼 아버님을 그렇게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다. 아버님은 키가 작으신 분이셨는데 정모까지 쓴 내가 옆에 서니 더욱 작아 보이셨다. 그 때가 50대 초반의 연세였는데 벌써 귓가엔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시고, 농사를 지으시다 오랜만에 입으신 흰 두루마기며 중절모자(中折帽子)는 몸에 맞지를 않아 조금 어색해 보였다. 승객이 많은 버스 내에서 나는 정모가 벗겨지지 않도록  수시로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한 손은 버스 손잡이를 바꿔 잡으며 가다가 손잡이를 잡은 아버님의 손을 보게 되었다. 차를 타시기 전까지 논매기를 하시던 아버님의 손가락은, 아직도 물에 퉁퉁 불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까만 논흙이 그대로 끼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우리를 키우시느라 평생을 고생하신, 왜소한 아버님을 나는 왈칵 껴안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복잡한 차속에서도 사관생도로서 당신보다 훨씬 커버린 아들을 둔 사실이 자랑스러웠는지, 상기된 얼굴로 승객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주위의 시선들을 눈여겨보시는 듯 했다. 호국간성(護國干城)이라는 정규장교 후보를 아들로 둔 당신은 무척 자랑스러우신 모습이었다. 나는 차가 비포장도로로 가면서 흔들릴 때마다 혹시 아버님이 불편하시지나 않나 하고 신경을 쓰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외가 집으로 가는 길목인 김해시 명법동 다리에 도착하였다.
  외가 집 동네는 김해시 화목동(七山)이다. 통상 외가 집에 갈려면 장유 내덕을 지나 명법다리에 내려서 대법리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그러나 그날은 명법다리에 내려서 명법 쪽으로 가시지 않고, 다리 건너편 명법 마을 뒷산으로 바로 올라가시었다. 아버님도 처음이신 길 같은데도 용케 길을 찾으시며 산길을 헤치며 올라 가셨다. 7월 초순의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인데도 아버님은 산길을 아량 곳 하시지 않고, 육사에서 각종 군사훈련을 받은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셨다. 나는 아버님의 뒤에 바짝 붙어 산 중턱쯤에 이르니, 갑자기 곡(哭)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산 중턱에 마련된 천막 빈소(殯所)에 도착하니, 상주(喪主)들은 찾아온 문상객들을 맞으며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노력하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느라 조심하고 있었다. 상주 분들을 뵈니 외가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시던 어머님의 당숙께서 별세하신 것이다. 느닷없이 우리가 산속의 빈소에 들어서니 상주들은 적잖게 놀라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님에게 당숙이면 무척 가까운 촌수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일가(一家)를 통상 10촌으로 보았으며 한 집에 살기도 하였다. 하여튼 어릴 때 외가 집에 가기만 하면 이 집에 가서도 사고를 많이 쳤던 집이었다. 
  장지(葬地)에 차려진 빈소에서 고인을 향하여 아버님을 따라 큰 절을 두 번 올리고, 다시 상주들과 예를 갖춘 후에 아버님은 상주 한분 한분들에게 다가가며 그 분들을 소개 해주셨다. 어릴 때 외가 집에 가기만 하면 하도 말썽을 부려서인지 그 분들은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대가족 제도하의 시골집에서 할머님과 삼촌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다가, 외가 집에만 가면 해방된 기분으로 외가동네에서 까불다가 남의 장독까지 깨기도 하였다. 그 사고뭉치 외손(外孫)이 다 커서 사관생도가 되어 더욱이 오늘 문상까지 왔으니, 상주들은 내가 기특해 보였는지 내손을 꼭 잡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가 거의 오후 2시가 다 된 무렵이라 상주들을 뒤로하고 점심이 준비된 장막(帳幕)으로 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그 쪽으로 가시면서도 대부분의 외가 사람들을 모두 다 아시는지, 연신 중절모를 벗으시며 “진례 송서방입니다“ 하며 인사를 하시고는 나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그리고 상가(喪家)에서의 예절을 그때그때마다 하나씩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 
   이어서 점심 요기(療飢)를 준비한 산중 장막 내에서 돼지국밥을 드시다가도, 아버님은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과 거의 인사를 나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님은 처가동네에서 예의 바르면서도 인기가 아주 좋았던 분 같았다. 게다가 그 곳에서 외갓집에 가지도 않고 외삼촌들도 뵙고, 어릴 때 외가댁에서 촌수도 모르고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은 우리를 더욱 밝은 표정으로 맞아 주셨다. 당신의 친정집 당숙 장례식에 부자를 함께 보냈으니, 자신의 위치가 아주 든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었다고 주위에 말로만 하시다가, 처음으로 나를 데리고 처가에 가서 인사 시키고 왔으니 만족하신 표정 같았다. 아버님 생전인 그때만큼은 나는 최소한 아버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들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님의 그 바람만큼이나 국가를 위하여 더 오래 헌신 하지 못하고 일찍 전역하여 항상 죄송스런 마음이 남아 있다. 
  나의 아버님은 사실 일제강점기에 파파뉴기니아섬 라바울의 일본 해군비행장 공사장에 일본군 군속으로 강제징용을 당하셨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오신 분이다. 그 당시 아버님은 어디로 가는 배인지도 모르고 타셨는데, 김해에서 부산, 부산에서 일본, 일본에서 파파뉴기니아 라바울로 가는 배였다고 한다. 배를 탄 기간은 대략 석 달 정도 걸렸다고 하셨다. 요즘처럼 안전한 여객선도 아닌 군 수송선을 타고, 남태평양의 폭풍과 예상할 수 없는 전쟁의 위험 요소가 도사리는 라바울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라바울 비행장 공사장을 매일매일 폭격해오는 미군기들의 기관총 사격을 피하며, 숨져가는 피해 동료 군속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삶의 기적만 바라며 숨어 지냈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 풍토병을 극복하고 죽음의 전투현장에서 용케 살아오신 분이다.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전쟁사를 배운 나로서는 도저히 아버님의 생환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빠삐옹’이란 영화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고통을 인내하며, 삶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당신을 생환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관생도가 되기 전까지, 아버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면서 라바울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이나, 귀국 시에 목숨이 걸린 수많은 위험과 고통에 대해 집에서나 주위 사람들에 한 번도 이야기 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의 강제징용 사실은 같은 동네 사람들조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평생 동안 이 강제징용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시며 조용하게 사신 분이다. 이처럼 아버님의 시골에서 조용한 은거는, 아마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 운동가들에게 올리는 진정한 마음의 사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지 못하신 채, 일본에 강제징용을 당하셔서 짧은 기간이나마 일본에 동원되었던 사실을 평생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며 사신 것이다. 오직 강제적으로 일제에 끌려갔던 사실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시고, 속죄(?)하듯 사시는 줄 모르고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어리석게도 아버님이 그저 농사만을 짓는 평범한 농부로 알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을 닮지 못한 아닐 불(不), 닮을 초(肖)의 ‘불초(不肖)’의 자식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후에도 자식인 나에게 까지 부끄러운 당신의 과거라 생각하셨는지, 라바울 강제징용의 참상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시기를 끄려하셨다. 그 때 아버님에게 비참한 강제징용의 참상을 좀 더 자세히 여쭈어봤다면, 라바울 해군비행장 공사장에서 있었던 강제징용의 실상을 역사자료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식민지국민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가셨던 아버님은, 당신의 나라가 왜 독립이 필요한 가를 뼈저리게 느끼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한 나라가 독립된 나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제강점기에 몸소 체험하신 분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시면서 자유 민주주체제가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이러한 시대에 한편으로 나는 어렸지만, 아버님의 의도를 살피고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일 만큼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다. 
   그러나 지난 12일(2021월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등과 관련해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에 강한 유감을 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특히 군함도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지옥섬'이라고 불리면서 조선인 노동자 122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유네스코 결정문안은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해석 전략을 일본에 요청했다며, 강제노역 등 유산을 둘러싼 역사의 어두운 면도 전부 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당사국(일본)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하게 유감을 표명한다(strongly regrets)"고 명시했다. 특히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과 일본 정부의 징용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유산위는 인포메이션 센터 설립과 같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일본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강제징용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반성 없는 일본의 소행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더욱이 한일간의 외교분쟁으로 150만 명에 달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는 뒷전에 밀려나 있다. 자식으로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그마한 보상이라도 받으면 그 보상비로 아버님의 강제징용의 행장을 꼼꼼히 적은 유허비를 꼭 세워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릴 때 나는 아버님이 강제징용의 죄책감으로, 이를 평생 동안 부끄럽게 여기시며 속죄하듯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분인 줄을 정말 모르고 자랐다.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부자유친을 보면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해준 친한 관계이므로,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사랑하여 가르치고,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뜻을 잇고 효도하면서 봉양한다(父子 天性之親 生而育之 愛而敎之 奉而承之 孝而養之)’고 풀이 하였다. 철이 들어서는 군 복무를 한답시고 아버님을 따뜻하게 한 번 모시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님은 췌장암으로 56살의 젊은 연세로 중위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좀 더 일찍부터 부자유친(父子有親)의 도리를 행하지 못한 점이 아직까지 가슴을 시리게 한다. 따라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와 아버님의 묘소를 더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시묘(侍墓) 살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불초자식의 죄를 면할 수 있을까? (끝)..2021.7.14..육사 2중대 원고
1972년 7월 초순경, 육군사관학교 2학년생도 때에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 휴가 중인 어느 날 아침 10시쯤에 외가 집에서 낯선 분이 부고(訃告) 한 통을 들고 왔다. 아침 일찍부터 아버님이 논에 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아 어머님이 아버님이 계시는 곳을  알려 주셨다. 요즘은 각종 소셜 네트워크(SNS)를 이용하여 친척 간 길흉사 소식을 바로바로 주고받을 수 있지만, 그 때는 친척 집에 누가 상(喪)을 당하기라도 하면ㅡ통상 장례는 3일장으로 급히 연락해야 하므로 ㅡ꼭 알려야할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몇 번 밖에 없는 시골 버스를 타고 인편으로 부고를 전해야했다. 논에서 김매기를 하시던 아버님은 부고를 보셨는지 바로 집으로 오셨다. 수염 많으신 분이라 면도부터 시작하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이 면도를 하시면 통상 출타하시거나 아는 분의 길흉사에 가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 때 아버님이 면도를 하시면서 옆을 지나는 나에게 “외가 집 상가(喪家)에 지금 가려는데 나와 같이 가겠느냐?”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얼른 같이 가겠다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다. 왜냐면 어릴 때부터 아버님과 함께 길을 나선 기억은 설날이나 추석 날 선조들의 산소에 성묘하러 갈 때 외는 특별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후에 사관학교의 정복을 입고 아버님과 같이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정복 차림으로 아버님과 함께 어디엔가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특히 시골의 조그마한 면(面)에서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어 놓고, 아버님이 처가 상가에라도 가서 아들 자랑(?)을 한 번 하시고 싶어 그러시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날이 대외적으로 내가 육군사관학교 정복을 치려입고, 아버님과 함께 하는 처음의 외출이었다. 바로 육사 하정복을 입기위해서 사관학교에서 숙달된 ‘선착순 개념’에 입각하여 외출 준비를 바로 시작하였다. 브라소(쇠붙이 광내는 상표이름)를 이용하여 먼저 버클(buckle)을 닦고, 이어서 정모의 학교마크에 광을 낸 후에 구두약으로 단화까지 깨끗이 손질을 하였다. 순식간에 하정복인 하얀 상의에 자바라가 달린 쥐색하의를 입으니 아버님과 함께 외가로 출발할 준비가 완료 되었다. 이로서 집에서 사관학교에서 배운 선착순 실력을 처음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버님보다 먼저 출발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상가에 도착하고는 그 상가가 아버님의 처당숙(妻堂叔)이 되시는 분, 즉 어머님의 친정 당숙이 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님은 당신의 친정 당숙 장례식에 부자(父子)가 함께 가는 것이 고마우셨는지, 아버님의 흰 두루마기를 꺼내시어 동정을 펴고 먼지를 털면서 아버님이 입기 편하시도록 옷깃을 잡아 주셨다. 아버님과 나는 면소재지에 있는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으로 빨리 가기위해, 동네 샛길인 점고개를 넘어서 버스 정거장으로 급히 갔다. 길을 가면서는 사관학교에서 배운 상급자 수행 때의 예의대로, 아버님의 우측으로 1보(步), 후방으로 3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갔다. 서둘러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니 10여분을 기다리지 않아 진영(進永)에서 장유(長遊)를 거쳐 김해(金海)로 가는 동신버스가 왔다. 아버님은 정복을 입은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 정거장을 지나는 아시는 분을 보면 그 때마다 나를 불러 그 분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진영에서 진례(進禮)로 오는 동신 버스는 많은 승객을 태워, 만원에 가까운 상태로 기다리는 진례 버스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아버님과 함께 버스를 탔으나 승객이 많아 아버님은 앉지 못하시고, 차의 출입문에 안쪽으로 서시고 내가 출입문 바깥쪽에 선채로 차가 출발하였다. 몇 정거장이 지나자 새로 타는 승객들에 밀려 나는 아버님 뒤에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그때처럼 아버님을 그렇게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다. 아버님은 키가 작으신 분이셨는데 정모까지 쓴 내가 옆에 서니 더욱 작아 보이셨다. 그 때가 50대 초반의 연세였는데 벌써 귓가엔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시고, 농사를 지으시다 오랜만에 입으신 흰 두루마기며 중절모자(中折帽子)는 몸에 맞지를 않아 조금 어색해 보였다. 승객이 많은 버스 내에서 나는 정모가 벗겨지지 않도록  수시로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한 손은 버스 손잡이를 바꿔 잡으며 가다가 손잡이를 잡은 아버님의 손을 보게 되었다. 차를 타시기 전까지 논매기를 하시던 아버님의 손가락은, 아직도 물에 퉁퉁 불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까만 논흙이 그대로 끼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우리를 키우시느라 평생을 고생하신, 왜소한 아버님을 나는 왈칵 껴안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복잡한 차속에서도 사관생도로서 당신보다 훨씬 커버린 아들을 둔 사실이 자랑스러웠는지, 상기된 얼굴로 승객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주위의 시선들을 눈여겨보시는 듯 했다. 호국간성(護國干城)이라는 정규장교 후보를 아들로 둔 당신은 무척 자랑스러우신 모습이었다. 나는 차가 비포장도로로 가면서 흔들릴 때마다 혹시 아버님이 불편하시지나 않나 하고 신경을 쓰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외가 집으로 가는 길목인 김해시 명법동 다리에 도착하였다.
  외가 집 동네는 김해시 화목동(七山)이다. 통상 외가 집에 갈려면 장유 내덕을 지나 명법다리에 내려서 대법리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그러나 그날은 명법다리에 내려서 명법 쪽으로 가시지 않고, 다리 건너편 명법 마을 뒷산으로 바로 올라가시었다. 아버님도 처음이신 길 같은데도 용케 길을 찾으시며 산길을 헤치며 올라 가셨다. 7월 초순의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인데도 아버님은 산길을 아량 곳 하시지 않고, 육사에서 각종 군사훈련을 받은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셨다. 나는 아버님의 뒤에 바짝 붙어 산 중턱쯤에 이르니, 갑자기 곡(哭)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산 중턱에 마련된 천막 빈소(殯所)에 도착하니, 상주(喪主)들은 찾아온 문상객들을 맞으며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노력하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느라 조심하고 있었다. 상주 분들을 뵈니 외가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시던 어머님의 당숙께서 별세하신 것이다. 느닷없이 우리가 산속의 빈소에 들어서니 상주들은 적잖게 놀라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님에게 당숙이면 무척 가까운 촌수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일가(一家)를 통상 10촌으로 보았으며 한 집에 살기도 하였다. 하여튼 어릴 때 외가 집에 가기만 하면 이 집에 가서도 사고를 많이 쳤던 집이었다. 
  장지(葬地)에 차려진 빈소에서 고인을 향하여 아버님을 따라 큰 절을 두 번 올리고, 다시 상주들과 예를 갖춘 후에 아버님은 상주 한분 한분들에게 다가가며 그 분들을 소개 해주셨다. 어릴 때 외가 집에 가기만 하면 하도 말썽을 부려서인지 그 분들은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대가족 제도하의 시골집에서 할머님과 삼촌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다가, 외가 집에만 가면 해방된 기분으로 외가동네에서 까불다가 남의 장독까지 깨기도 하였다. 그 사고뭉치 외손(外孫)이 다 커서 사관생도가 되어 더욱이 오늘 문상까지 왔으니, 상주들은 내가 기특해 보였는지 내손을 꼭 잡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가 거의 오후 2시가 다 된 무렵이라 상주들을 뒤로하고 점심이 준비된 장막(帳幕)으로 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그 쪽으로 가시면서도 대부분의 외가 사람들을 모두 다 아시는지, 연신 중절모를 벗으시며 “진례 송서방입니다“ 하며 인사를 하시고는 나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그리고 상가(喪家)에서의 예절을 그때그때마다 하나씩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 
   이어서 점심 요기(療飢)를 준비한 산중 장막 내에서 돼지국밥을 드시다가도, 아버님은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과 거의 인사를 나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님은 처가동네에서 예의 바르면서도 인기가 아주 좋았던 분 같았다. 게다가 그 곳에서 외갓집에 가지도 않고 외삼촌들도 뵙고, 어릴 때 외가댁에서 촌수도 모르고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은 우리를 더욱 밝은 표정으로 맞아 주셨다. 당신의 친정집 당숙 장례식에 부자를 함께 보냈으니, 자신의 위치가 아주 든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었다고 주위에 말로만 하시다가, 처음으로 나를 데리고 처가에 가서 인사 시키고 왔으니 만족하신 표정 같았다. 아버님 생전인 그때만큼은 나는 최소한 아버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들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님의 그 바람만큼이나 국가를 위하여 더 오래 헌신 하지 못하고 일찍 전역하여 항상 죄송스런 마음이 남아 있다. 
  나의 아버님은 사실 일제강점기에 파파뉴기니아섬 라바울의 일본 해군비행장 공사장에 일본군 군속으로 강제징용을 당하셨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오신 분이다. 그 당시 아버님은 어디로 가는 배인지도 모르고 타셨는데, 김해에서 부산, 부산에서 일본, 일본에서 파파뉴기니아 라바울로 가는 배였다고 한다. 배를 탄 기간은 대략 석 달 정도 걸렸다고 하셨다. 요즘처럼 안전한 여객선도 아닌 군 수송선을 타고, 남태평양의 폭풍과 예상할 수 없는 전쟁의 위험 요소가 도사리는 라바울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라바울 비행장 공사장을 매일매일 폭격해오는 미군기들의 기관총 사격을 피하며, 숨져가는 피해 동료 군속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삶의 기적만 바라며 숨어 지냈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 풍토병을 극복하고 죽음의 전투현장에서 용케 살아오신 분이다.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전쟁사를 배운 나로서는 도저히 아버님의 생환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빠삐옹’이란 영화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고통을 인내하며, 삶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당신을 생환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관생도가 되기 전까지, 아버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면서 라바울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이나, 귀국 시에 목숨이 걸린 수많은 위험과 고통에 대해 집에서나 주위 사람들에 한 번도 이야기 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의 강제징용 사실은 같은 동네 사람들조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평생 동안 이 강제징용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시며 조용하게 사신 분이다. 이처럼 아버님의 시골에서 조용한 은거는, 아마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 운동가들에게 올리는 진정한 마음의 사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지 못하신 채, 일본에 강제징용을 당하셔서 짧은 기간이나마 일본에 동원되었던 사실을 평생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며 사신 것이다. 오직 강제적으로 일제에 끌려갔던 사실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시고, 속죄(?)하듯 사시는 줄 모르고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어리석게도 아버님이 그저 농사만을 짓는 평범한 농부로 알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을 닮지 못한 아닐 불(不), 닮을 초(肖)의 ‘불초(不肖)’의 자식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후에도 자식인 나에게 까지 부끄러운 당신의 과거라 생각하셨는지, 라바울 강제징용의 참상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시기를 끄려하셨다. 그 때 아버님에게 비참한 강제징용의 참상을 좀 더 자세히 여쭈어봤다면, 라바울 해군비행장 공사장에서 있었던 강제징용의 실상을 역사자료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식민지국민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가셨던 아버님은, 당신의 나라가 왜 독립이 필요한 가를 뼈저리게 느끼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한 나라가 독립된 나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제강점기에 몸소 체험하신 분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시면서 자유 민주주체제가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이러한 시대에 한편으로 나는 어렸지만, 아버님의 의도를 살피고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일 만큼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다. 
   그러나 지난 12일(2021월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등과 관련해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에 강한 유감을 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특히 군함도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지옥섬'이라고 불리면서 조선인 노동자 122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유네스코 결정문안은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해석 전략을 일본에 요청했다며, 강제노역 등 유산을 둘러싼 역사의 어두운 면도 전부 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당사국(일본)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하게 유감을 표명한다(strongly regrets)"고 명시했다. 특히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과 일본 정부의 징용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유산위는 인포메이션 센터 설립과 같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일본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강제징용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반성 없는 일본의 소행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더욱이 한일간의 외교분쟁으로 150만 명에 달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는 뒷전에 밀려나 있다. 자식으로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그마한 보상이라도 받으면 그 보상비로 아버님의 강제징용의 행장을 꼼꼼히 적은 유허비를 꼭 세워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릴 때 나는 아버님이 강제징용의 죄책감으로, 이를 평생 동안 부끄럽게 여기시며 속죄하듯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분인 줄을 정말 모르고 자랐다.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부자유친을 보면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해준 친한 관계이므로,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사랑하여 가르치고,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뜻을 잇고 효도하면서 봉양한다(父子 天性之親 生而育之 愛而敎之 奉而承之 孝而養之)’고 풀이 하였다. 철이 들어서는 군 복무를 한답시고 아버님을 따뜻하게 한 번 모시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님은 췌장암으로 56살의 젊은 연세로 중위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좀 더 일찍부터 부자유친(父子有親)의 도리를 행하지 못한 점이 아직까지 가슴을 시리게 한다. 따라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와 아버님의 묘소를 더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시묘(侍墓) 살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불초자식의 죄를 면할 수 있을까? (끝)..

2021.7.14..육사 2중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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