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조: 강여청(姜餘淸)
중시조: 강궁진(姜弓珍)
2,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3. 1,016명 (2015년 기준)
금천 강씨(衿川 姜氏) 또는 금주 강씨(衿州 姜氏)는 명칭상으로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정확하게는 사라진 행정구역인 시흥군 일대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 금주(衿州) 지방의 호족 강여청(姜餘淸)을 시조로 여기고 있으며, 중시조로는 고려의 삼한벽상공신인 강궁진(姜弓珍)이 있다. 금천 강씨 세보는 강궁진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진주 강씨 인헌공파(仁憲公派)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진주 강씨의 시조로 알려진 강이식(姜以式)과 금천 강씨의 시조인 강여청 사이의 계보는 강씨 족보 이외의 객관적 사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강이식의 실존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금천 강씨 족보는 강이식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강여청·강궁진부터 기술하고 있으며, 진주 강씨의 분파로 여겨지는 집단 중 가장 오래 전에 분가된 파벌이기 때문에 메이저 분파인 박사공파(博士公派) 등 다른 진주 강씨 관련 다수 분파들과도 부계 혈족상의 거리가 이미 상당히 멀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주민등록 시스템에도 본관이 금천(衿川) 또는 금주(衿州)로 적혀서 행정적으로는 이미 진주 강씨와 별개로 간주되어 왔다.
2015년 기준 주민등록상의 본관을 기준으로 금천+금주 강씨를 모두 합친 인구는 1,016명으로 110만명이 넘는 강씨 전체 인구의 0.1% 미만에 불과한 소수 성씨이다. 평안도 지역에도 후손이 소수 잔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파악은 불가능하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파로 4개의 분파가 존재하지만 분파별 정체성을 만들기에는 절대적인 인구수가 워낙 적어 큰 의미는 없다.
2. 역사
시조인 강여청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강감찬 열전 등에 다소 남아있으며, 그의 일족은 통일신라 말에 금주(금천)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손인 강궁진 대에 이르러 왕건의 역성혁명과 고려 건국에 일조, 삼한벽상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 呂侯) 봉작되는 등 유력 지역 호족으로 성장한다. 이때 강궁진은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관향(貫鄕)을 하사받아 금주 강씨가 되고 중시조로 여겨진다. 강궁진의 아들이 바로 제3차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이다. 이후 조선조까지 이어져 세종실록지리지 148권 경기도 광주목 금천현 편에도 금천 지역의 6대 토성인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씨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최대 집성촌인 경기도 광명시 일대에 터전을 잡은 것은 한성판윤을 역임한 16대손인 강양(姜揚) 대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성종 23년(1492)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문과 장원급제자이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강숙돌(姜叔突)과 임진왜란 시기 강항(姜沆), 강찬(姜燦) 등 몇몇 관리 출신 의병장들을 배출하였다. 유력 인사로는 인조 시기에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을 두루 역임한 문신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참조가 있다.
병자호란 후 민회빈 강씨에게서 비롯된 강빈옥사로 인해 강석기의 묘조차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심각한 멸문의 위기에 몰렸으나 강석기의 증손자인 강봉서(姜鳳瑞)가 여종의 도움으로 충청도 광천으로 탈출에 성공하였고, 현재 남아있는 금천 강씨는 모두 강봉서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강봉서는 숙종 때 복권되어 영회원이 있는 옛 금천군 아방리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선대의 가세를 복구하지는 못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수 문중으로 남았다.
아방리 일대 집성촌에 거주하는 후손들의 토지에 일제시대인 1934년에 서면보통학교 부설 노온사 간이학교가 인가되었고 이는 현위치에 있는 온신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금천 강씨 대종회 또한 같은 지역에 위치한다. 남아 있는 금천 강씨 종중에서는 매년 가을 낙성대에서 열리는 강감찬 축제에서 강감찬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시제를 지내고 있다.
3. 인물
강감찬 - 고려의 문하시중
강석기 - 조선의 우의정이자 소현세자의 장인. 민회빈 강씨의 부친
민회빈 강씨 - 소현세자의 정비
강우규 - 일제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