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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신숭겸(申崇謙)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56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始祖)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고려사》에는 강원도 광해주(光海州: 春川) 사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가, 918년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협력, 태봉의 국왕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1등 개국공신이 되며, 아마도 이 즈음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받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927년(태조 10) 9월 공산(公山)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2. 생애

2.1. 출신지

신숭겸은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즉 강원도 춘천 인물로 실렸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춘천도호부 인물조가 아닌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실렸다. 우거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을 뜻하므로, 글자 그대로 그 지역 출신이 아니라 그 지역에 머물며 활동하던 인물에 관한 기록이다. 같은 책 평산도호부 편에도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인데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원조에도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기록되었다. 즉, 고려사는 인물의 최종 관직이나 주요 활동지를 중심으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어, 신숭겸은 장성하여 기반을 잡은 춘천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각 지방의 유래와 뿌리를 상세히 조사하여 편찬된 지리지로, 신숭겸의 출생지가 곡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궁예의 태봉국의 무장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918년 태봉국의 국왕 궁예가 폭군이 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손을 잡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왕건과 함께 태봉국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1등 개국공신이 된다. 이후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받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2.2.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유래

신숭겸은 활솜씨가 뛰어났다. 태조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으며, 세 번째 기러기를 화살로 맞추었다고 하여 이 모습과 비슷한 한자인 申(신)씨 성과 본관인 평산(平山) 땅 300결을 하사받아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 300결의 땅을 궁위전(弓位田)이라고 하며 궁위방(弓位坊)이라고도 한다. 그의 후손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묘도 이 궁위방에 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평민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예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나 매곡성주 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같은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며 수많은 성씨의 시조가 후삼국시대 호족이다.

한반도의 성씨 개념은 일부 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문종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라는 법령을 내리게 되면서 귀족들이 성씨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문종이 그런 법령을 내린 이유는 그 전에는 명문가 출신들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 사용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도 어떠한 기록에도 선대의 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 문종 9년 이전에도 김씨나 박씨 같은 왕족, 백제 대성팔족, 가야계 김해 김씨, 신라삼최와 같이 중앙의 일부 귀족은 성씨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왕건이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주는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귀족들의 성씨 사용이 활성화 되지 않자 이를 보완한 게 문종 9년 과거 응시자의 본관과 성씨를 응시 자격으로 하는 ‘봉미 제도’이다. 본명이 ‘능산’이고 동생 이름이 ‘능길’인 걸 보면 성을 칭할 정도의 유력가가 아니더라도 뭘 알긴 아는 집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청주의 호족이던 청주수(淸州帥) 진선, 선장 형제의 예도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으로부터 성씨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이름에 같거나 비슷한 글자를 넣어 성씨의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능이 성이었다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능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인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2.3. 왕건을 살리고 전사하다

고려 개국에 이바지한 개국공신 무장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한고제 유방을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을 본떠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고, 그 과정에서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간신히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쳐서 생존할 수 있었다. 후백제군은 왕건의 옷을 대신 입은 신숭겸을 왕건인 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호의,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난전 중 전사했고, 와중에 김락의 아우 김철만 유일하게 생존해서 후백제 멸망전인 일리천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신숭겸의 희생에 감동한 태조 왕건은 그를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尉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했다. 이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고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전투 승리에 왕건까지 죽인 줄 알고 기쁨에 잔뜩 취했는데, 가져간 수급의 얼굴을 알아보자 왕건이 아니라 신숭겸으로 판명되면서 실망했으며, 특히 견훤이 가장 분개했다고 한다.

아울러서 훗날 전사하여 목이 없어진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어렵사리 겨우 찾았지만, 머리만은 끝끝내 찾지 못해서 왕건은 대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고 미리 정해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매장해주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차례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도통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하며, 일제시대에는 모 일본 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잠시 하마한 뒤 분향 후 지나갔다고 한다. 이 묫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가 보면 석물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영락없는 왕릉의 모양새며, 특히 맑은 날에 묘로 올라가 보면 춘천시내가 훤히 보인다.

3. 가족 관계

아우: 능길(能吉) - 원윤

아들: 신보(申甫) - 원.

딸: 평산군부인 신씨(平山郡夫人 申氏)

외손자: 김화제(金華齊)

딸: 변한국부인 신씨(弁韓國夫人 申氏)

외손자: 박란(朴瀾)

딸: 평산신씨(平山申氏)

외손자: 우신(禹臣)

손자: 신홍상(申弘尚)-삼한벽상개국공성제자

증손: 신성(申晟) - 원윤

현손: 신경(申勁) - 태자태보

내손: 신유비(申愈毘) - 승지

곤손: 신명부(申命夫) - 녹

잉손: 신응시(申應時) - 전서

운손: 신영재(申令材) - 도관

이손: 신적(申示+滴) - 병부낭

4. 기타

고려 16대 왕 예종이 서경(평양시)의 팔관회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신성대왕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대신해 전사한 공신이다. 그 공을 높이고자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는데 태조께서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래서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자 예종이 감격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인 ‘도이장가’를 지어 두 사람의 넋을 기리고 신숭겸의 각각 5대손, 6대손, 7대손인 신경(申勁), 신유비(申愈毘), 신명부(申命夫)에게 벼슬과 상을 하사했다.

후손인 문정공 신현(申賢)의 전기라고 주장되어지는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살펴보면 신숭겸의 선조가 신라의 신자천(申自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화해사전은 신숭겸의 선조가 신농, 신백(申伯)이고 신숭겸의 후손 중 이미 그 본관이 밝혀진 다른 신씨들도 마구적혀있어 등의 후 평산신씨대종중에서도 위서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신현의 후손인 평산신씨 판사공파 측과 화해사전에 그 선계가 수록된 아주신씨 측에서는 아직 이 화해사전이 위서가 아니라고 주장중이다.

한국사에 길히 남을 충신이다 보니 신숭겸의 명백한 후손인 평산 신씨 이외에도 굉장히 많은 가문들이 신숭겸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익휴(申益休)를 시조로 하는 아주 신씨, 신승휴(申承休) 또는 신인적(申仁適)을 시조로 하는 은풍신씨, 삼중대광 신성부원군 신찬(申贊)을 시조로 하는 신천신씨, 명확한 계보가 불분명한 곡성신씨 등이 있다.

고려를 이은 조선 왕조도 신숭겸을 충절의 본보기로 삼아 후손이 혜택을 입었다. 신숭겸의 평산 신씨는 조선의 무반 명문가 중 하나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같이 남한강에 투신자살한 신립과 신경지, 임진왜란 때 해유령 전투에서 임진왜란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으나 장계를 올리지 않아 탈영한 걸로 착각한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당한 신각,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하다가 남원성 전투 때 전사한 신호,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신경진, 나선정벌 때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신류, 조선이 강화도 조약과 조청수륙무역장정 등의 근대 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 측의 대표였던 신헌, 독립군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통의부의 총사령관이었던 신팔균, 구한말 최초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도 평산 신씨다. 반면 문반이었던 신잡과 신흠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특히 신흠은 탄금대 전투 때 참전까지 했으면서 살아남아서 인조반정 이후까지 활약했다.

대구 지묘동에 사당이 있고, 파군재 삼거리에 동상이 있다. 그리고 역시 대구 파군재 삼거리 근처에 표충단이 있으며 묘는 춘천에 있다. 참고로 춘천의 신숭겸 묘는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도굴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과 그냥 부인을 함께 안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숭겸의 묘는 총 10개 있다. 도굴 방지용 가묘가 구월산과 신숭겸이 전사한 팔공산에 각각 3개씩 있고, 춘천에 도굴방지용 가묘가 2개 더, 그리고 몸이 묻혀 있는 상술한 봉분 3개의 무덤까지 3개, 그리고 머리는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묻혀 있다. 중국 허창에는 목이, 당양에는 몸이 묻혀 있는 관우와 비슷한 셈이다. 특히 춘천에 있는 신숭겸 장군묘는 왕건이 미리 자신이 묻힐 자리를 정한 릉자리일정도로 풍수지리학적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당 중 하나라고 한다.태안사에 몇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신숭겸의 애마 용마(龍馬)가 신숭겸의 목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3일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며, 목과 말을 묻고 장군단이라 하여 매년 3월 16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호환이 일어나는 등 사찰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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