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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조민수(曺敏修)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0|조회수9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말기의 무신이자 정치가

2. 생애

본관은 창녕 조씨이다. 야사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기골과 용모가 뛰어나 큰 인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삼과 동시에 살이 낀 관상으로 요절이 점쳐져서 아깝다는 예언을 들었다 한다.

공민왕 때 순천 수령으로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봉해졌고, 이후 전리판서, 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하고 충근보리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어머니가 성주 이씨로 조민수는 당대의 권신 이인임과 6촌 관계가 되는데 당상관이 되어 개경에 자리를 잡게 되지만 당시 실세인 임견미 등에게 밀려 존재감이 없었다. 이인임의 인척 지간이기는 해도 촌수도 멀고 집안 자체가 큰 권세가까지는 아니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신흥 세력인 염흥방, 임견미처럼 악착스럽지도 않았다. 이인임의 인척 중에도 유학자 이숭인처럼 권문세족들을 이성계 등이 혁파하려던 데는 하나같이 저항했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분명 있었다.

우왕 때 경상도 도순문사를 지내 김해, 대구 등에서는 왜구에게 패했으며 밀성과 청수역에서는 이겨 의복, 술, 말을 하사받았다. 이후 지문하부사로 승진하고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었는데, 당시 명나라 정요위도사였던 고가노가 나하추와 북원이 고려에 접근하는지 부하들을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정탐하다가 조민수에게 들켰다. 명나라의 군사들을 꾸짖어 쫓은 그에게 당시 친원 노선을 모색하던 우왕이 기뻐하면서 수시중 자리를 권했지만 자신의 공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라고 사양했다. 우왕은 억지로라도 앉힐 것처럼 굴었지만 조민수가 중앙군 유지비 부족 및 거듭된 흉년으로 구휼미까지 바닥나는 사태에 사급전, 구분전, 사사전의 조세를 국가에서 거두라는 내용을 보고 떨떠름해한다. 상소는 임견미 등 권문세족과 불교 측의 불만을 샀는데 우왕은 개혁을 추진할 힘도 의지도 없었으며 조민수의 사양을 받아들이는 대신 창성부원군에 봉하고 판문하부사를 내렸다.

우왕의 요동 원정군에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지만 거꾸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다. 쿠데타에 성공하자 조정 수반인 좌시중에 임명되었으나 창왕 옹립 문제로 우시중 이성계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세력 확대를 꾀한 것인지 인척 이인임을 불러들이자 건의했으나 이인임이 이미 죽어 실패했다.

그럼에도 결국 이색, 이숭인 등과 연합해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고 이성계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의 탄핵으로 부정부패가 드러나 창녕으로 유배됐다. 사실 이렇게 유배된 것 자체가 이성계 세력과의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창왕은 조민수의 유배 당시 즉위 초라 간신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며 자신의 본의가 아님을 밝혔다. 창왕은 생일 특사로 조민수를 석방하기도 했는데 풀려난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창왕이 신씨라 하여 폐위되고, 조민수는 창왕을 옹립한 죄로 또 유배를 갔다. 얼마 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대에 이르러 결국 유배지 창녕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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