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이 측천무후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조 500년의 종묘 사직이 몽주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왕씨의 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광조(趙光祖) 曰
고려 말의 문관이자 성리학자. 호인 포은(圃隱)으로도 유명하다. 신진사대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이성계를 도와 고려 변화를 꿈꿨으나 더 급진적인 역성혁명을 꿈꾼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에 반대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2. 평가
정몽주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학문 · 외교 · 경제 · 군사 · 정치 · 인품 다방면에서 특출난 고려 최후의 보루였다.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2.1. 긍정적 평가
살아서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죽어서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격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며 대학자로서의 학문적 완결성과 관료로서의 실무적 역량을 모두 갖춘 고려 말기의 명재상이다. 당대에 단순히 그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업적같이 관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워낙 충성심이 강조되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충신이라는 것 빼고는 한 게 뭐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고려를 유지하면서 개혁해 보려고 애썼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로 추대한다고 하였다. 고려 시대 수도인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친명파로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앞장섰으며 실제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당시 명태조 홍무제는 고려와 북원의 사이를 의심하고 또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명 외교는 지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홍무제에게 억류당한 이전 고려 사신들을 풀려나게 해주고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켜 목적을 달성해냈으니 그 능력을 보면 알 만하다. 이는 홍무제에게 감명을 준 여러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명나라의 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이 뛰어나서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다고 평하였다. 태풍으로 표류하기까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 사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대단한 인물이다. 심지어 명나라로 갈 때는 죽는 게 거의 확정사항일 정도로 위험한데도 거절하지 않고 가서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노회한 정객이나 권력에 눈 먼 대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 부패한 고려 말의 정치판에서 그만큼 청렴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외교 활동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일종의 모금 운동까지 벌였다.
일본과의 외교 또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해배된 직후인 1377년 당시 들끓는 왜구 세력의 억제를 부탁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일본은 끝없는 전쟁 상태였고 왜구들 또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노략질에 나선 도적떼가 아니라 내전에서 패배한 세력들의 잔당으로 구성된 것이 상당수였다. 즉, 일본 본토에 찾아간다는 것은 왜구들의 마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이다. 당시 포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 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출했는데 이때의 상황이 눈물겹다. 당연히 처음부터 왜구나 일본의 영주가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걸렸고 준비해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탄식하는 시도 남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애쓴 끝에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에도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들을 고려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몽주의 이런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가 그때마다 고려인 포로를 100여 명씩 돌려보내 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끌려간 양민 구출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관리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볼 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그들을 구출한 점은 실로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정몽주는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반 이인임 운동을 벌이다 실패로 끝난 뒤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1년 만에 유배에 풀려나 상술한 외교 업무들을 떠맡았다. 이를 두고 단지 해배가 빨랐다는 것만 들어서 정몽주가 이인임 등 친원파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앞뒤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집권 세력인 이인임 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유배가 빨리 풀린 게 아니라 목숨이 보장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곳에 보낼려고 빨리 풀어준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 모두 전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정몽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평불만도 안 하고 헬게이트에 당당히 찾아가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인 포로들까지 더불어 데리고 오는 충격적인 대업적을 이루었다. 국가 중대사에서 이 정도로 혁혁한 성과를 보인 인물이니 정몽주에 대한 친원파의 소극적인 압박은 봐줬다기 보다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몽주의 공이 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꼬장꼬장하고 문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배포가 크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와 기록을 보면 당대에서부터 현재까지 호방하다는 감상이 꼭 등장한다. 또한 대단히 침착하여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한 치의 허투름도 없었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왕좌지재라 하였다. 게다가 직접 왜구 토벌전에도 참전하는 등 무관의 경험도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참고한 신율을 편찬해 법률의 정비로 국가의 혼란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이성계의 왜구 토벌 등에 따라 여러 차례 종군한 적이 있고 의창을 재건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후 이 의창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운 시설을 재건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고, 원칙도 없이 엉성하게 처리되던 회계 출납도 개혁하여 담당 관리를 두고 엄중히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으며 인재를 뽑아쓰는 일에도 이전과 다르게 엄중히 살펴서 행하여 허투른 인물이 발탁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야말로 만능 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한마디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법률 및 행정에도 뛰어났던 대단한 인물이다. 게다가 한창 세를 불려서 고려에서 상대할 자가 없던 이성계 일파와 맞서 팽팽히 대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치력 또한 보통이 아니며 그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용기도 높았으며 인품도 훌륭했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인망도 대단히 높았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박신이라는 관리는 백성들이 무기의 병화를 입지 않고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선생의 공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이방원에게 살해당해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조선 왕조에서도 평가가 매우 높았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극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정몽주 살해를 계획한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즉위 원년에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정도전을 폄하함과 동시에 대립했던 정몽주를 다시 띄워주기 위해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의 충절 항목을 실어 그의 충절을 본받게 하고자 했다. 세종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여말 삼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서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
라고 하여 이색이나 길재와 비교해도 매우 좋은 평을 내리면서 그가 충신임에 대하여 재론이 필요없다고 하였으며 그 학문적 능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한 점 때문에 조선 왕들에게 많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고려사 편찬에 있어서는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던 반면, 신왕조 건국 선전물(...)인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반역의 괴수이자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로 묘사하게끔 했는데 읽고 있으면 거의 대마왕 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졌고 조선 왕들도 후대로 갈수록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평가된다.
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 했고, 정몽주가 이씨의 원수라고 발언했으면서도 그 충절을 포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성리학 윤리와 질서를 추구하며 건국되었으면서도 건국과 찬탈 과정에서 벌어졌던 혼란과 악행으로 건국 이념과 괴리되었던 정치 현실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손상됨에도 성리학 윤리를 버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종 대에는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이 창건되었다. 숙종은 정몽주의 시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영조는 과거시험에서 정몽주의 후손이 장원급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시도 남겼다.
정몽주의 묘에 비석을 세울 때는 그가 고려의 신하로 죽은 뜻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조선왕조가 추증한 벼슬을 새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는 물론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들도 정몽주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정몽주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기도 했다. 성리학자로서 가진 사상과 식견을 자신의 시에 고도로 승화시켰다. 한문학이나 그에 관련된 전공을 한다면 한 번씩 짚고 넘어갈 정도.
2.2. 부정적 평가
정몽주의 행적을 연구한 일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미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몽주는 충신이 아니라 단지 대세를 잘 살펴서 줄타기를 잘한 노회한 정객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것은 그를 충신으로 미화 및 격상하여 표본으로 삼음으로써, 조선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성계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데에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회군 결정에 대해서 찬성하였으며 최영의 죽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폐위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해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었다. 우왕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까지 벌였던 사람이 말이다. 물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처음에는 몰라서 이성계 세력에 동참했다는 말도 나오지만, 어찌되었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의 행보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동참했다는 것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시각이 생겨 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정몽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건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역성혁명에 찬동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적다면 고려 왕실을 유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가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적 성리학을 도입했다는 것으로 그를 충신이라고 하는데 백성에 대한 애민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역사적 평가를 봐도 고려의 멸망은 백성들에게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정몽주가 고려의 멸망을 막으려고 한 시도는 애민의 입장에서 볼 땐 뻘짓이 되는 것이다. 고려 왕조와 고려 백성을 분리시킨 다음에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도 뛰어났으므로 그는 충신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그냥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전근대시대에 백성이란 윗 사람이 혜택을 베푸는 대상이었지 충성의 대상이 된 적은 없다. 성리학적 민본주의 또한 백성은 나라의 토대이므로 나라가 잘 돌아가기 위해선 윗 사람들인 왕실이나 관리들은 그들을 함부로 괴롭히면 안 되고 관대한 마음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 결단코 백성에게 주권이 있으므로 그들이 충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권은 천명을 통해 하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주에게 존재했고 따라서 오로지 군주만이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자유권을 가진 개개인에게 일단 주권이 있고 정치인의 통치권은 정치시스템을 통해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국민이 충성의 대상이 된 근현대의 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또한 인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시도할 당시 정몽주의 행동을 보면 고결한 도덕군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관들을 조종해 공양왕에게 이성계 일파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관원들을 시켜 이성계 일파를 고문해 죽여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는 등 대단히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에 부정적인 성리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정몽주를 미화하고 떠받들었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역성혁명을 방지키 위한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역성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성인으로 격상하면서 충의 표본으로 삼아 그를 통해 전 대신과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하여 역성혁명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려는 했다는 것이다.
2.3. 이성계의 동지, 고려의 신하
왕실에 대한 충성 같은 거창한 이야기할 필요 없이 정몽주 생전의 고려는 신하가 왕을 끌어내리는 게 특별하지 않은 나라였다. 심지어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하듯 공민왕까지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전근대 역사학에서나 유효할 충신, 역신 프레임을 걷어내고 현대의 연구를 종합하면 정몽주는 이성계를 과거 무신집정 같은 위치에 올려서 고려를 개혁하려 한 최측근이자 정치적 동반자였고, 딱 하나 왕조 교체에는 동의할 수 없어 결별한 뒤 선죽교에서 암살되었다.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최영과 우왕&창왕을 제거하는 과정은 고려 신하 정몽주에게 전혀 모순된 행동이 아니며, 정몽주는 현실주의 정치인이자 이성계의 당여로서 고려 부흥을 꿈꿨고, 공양왕 즉위 이후 왕조 교체라는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별하고 조선 건국을 결정적으로 늦출 뻔했으나 손을 쓴 이성계 일파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무장인 이성계에게 새 왕조를 세워, 어떻게 고려와 차별된 나라로 만들지 청사진을 꾸려준 사람은 정도전이지만 이성계가 그 청사진을 들을 위치로 오르는 데 기여한 사람은 정몽주다. 그는 정도전은 물론이고 이지란보다 이성계를 더 오래 받든 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다. 애초에 정몽주가 왕조차 갈아치우는 절대권력자 이성계에게 대항할 수 있는 권력이 있던 이유가 바로 이성계 세력의 2인자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이성계와 정몽주의 대립은 이성계의 세력과 고려의 구 세력의 대결이 아니라, 고려의 구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이성계 세력의 내부 분열에 가까웠다.
공민왕 11년 자신의 좌주였던 김득배가 공민왕이 배후 조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용의 난으로 제거되자 정몽주의 창창한 삶은 단숨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버린다. 과거 감독관과 합격생 사이에 맺어지는 고려의 좌주-문생 관계는 곧 스승과 제자이자, 정치적 후견인, 피후견인 관계로 문생은 좌주 없이 출세 할 수 없고 좌주는 문생들이 최대한 많아야만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현대인이 보기에 이색이나 정몽주에 비해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우현보가 여말에 조선 건국 세력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었고, 그러고도 살아남아 조선 기득권에 포함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많은 문생을 거느렸고, 그 문생 중에 이방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공양왕을 시위해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될 수 있었던 힘도 그가 과거시험 지공거를 맡아 문생들을 거느렸기 때문이며, 정도전이 당시 힘을 못쓴 것도 오랫동안 귀양살이 하느라 지공거를 못 해봤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폐쇄적인 관직 사회에서 좌주가 하루 아침에 살해당한 것은 곧 그와 이어진 문생 전부의 몰락이나 다름없었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정몽주는 2년 가까이 백두로 지내다 공민왕 13년, 남은 인맥을 동원해 여진족 삼선이 화주(和州)·함주(咸州)를 침입해 편성된 토벌군에 종군할 기회를 얻는다. 이 토벌전에서 고려군이 역으로 패하는 바람에 지휘부와 함께 위기에 빠진 정몽주를 구원해 준 사람이 바로 이성계였다.
이때가 서력 1364년. 이지란이 고려에 귀순해 이성계의 밑에 든 게 1371년이고, 정도전이 정몽주의 소개를 받아 이성계가 있는 함주 막사를 찾은 때가 1383년. 현대인들이 이성계의 가장 중요한 측근으로 떠올리는 두 사람보다도 정몽주가 압도적으로 먼저, 오래 이성계를 보필했다.
고려 말은, 100년간 지속된 무신집권기의 영향으로 문신이라도 병법을 공부해 무관으로 출세길을 뚫어보려 하거나, 아예 유력 무장 아래 문객으로 들어가 당여로 출세길을 도모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정몽주가 받들어 모신 김득배만해도 뛰어난 무장이기도 했고 조준, 남은 같은 조선 건국공신들이 종군, 군직을 경험한 바 있는 것, 정도전이 직접 군제와 병서를 저술할 정도로 조예가 있었던 것도 고려말 사회상의 영향이다.
당시 이성계는 쟁쟁한 선배 무장들을 죄다 의심하고 숙청해 죽여버린 공민왕이 정반대로 무한한 신임을 보내며 밀어주는 차세대 무장이었으니 그의 당여 자리가 탐날 만도 했다. 중앙으로 진출한 후 숙청된 선배 무장들을 보고 바짝 고개를 낮추고 겸손하게 처신하던 이성계 입장에서도 젊은 문인의 접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몽주는 자신의 인맥을 이성계에게 제공해 변방 무장 출신인 그가 성공적으로 신흥 유신들을 포섭하고 개경 정계에 녹아들 수 있도록 일정부분 공헌하는 한편 황산대첩과 여진족 토벌에 종군해 전장에서도 이성계 군대의 내실을 든든히 떠받혔다.
심지어 정도전을 이성계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정몽주다. 정도전이 여진족 토벌을 위해 출진난 이성계의 막사를 찾은 1383년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요청으로 조전원수로 함께 종군한다. 정몽주는 이때 경험을 여러 수의 시로 남겼는데 개중에 <삼봉에게 보내다>란 시가 있다.
정생이 떠난 동쪽 길이 더욱더 아득하니(鄭生東去路悠悠)
철령 높은 관문에 화각 부는 가을이로다(鐵嶺關高畫角秋)
군막에 든 빈객 중에 그 누가 첫째가던가(入幕賓中誰第一)
달 밝을 때 그 사람 유공루에 기대 있겠지(月明人倚庾公樓)
포은집 권2와 삼봉집 권8에 공통적으로 실려있는 이 시에 대해 삼봉전 주석은 계해년 가을. 1383년 가을에 지어졌다고 명시하고 있다. 시 첫행의 정생이 바로 정도전이고, 군막은 이성계가 주둔한 함주의 군막이다. 즉, 정도전이 처음으로 이성계를 찾아올 때 정몽주도 그자리에 있었고 접견을 마치고 떠나는 정도전을 배웅하며 이 시를 지은 것이다. 포은집과 삼봉집의 시문을 분석해 보면 정도전이 두 번째로 이성계를 찾은 1384년 여름에도 정몽주는 같은 장소에 있었다. 드라마 정도전 등에서 묘사한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만남과 실제는 많이 달랐다.
무신정권 100년, 원간섭기 100년을 체험한 유학자 정몽주에게 위화도 회군과 우왕 폐위는 전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수히 반복된 과거였다.
유학자에게 조공책봉 관계를 형성하고 섬기는 상국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상국을 공격하려 한 왕은 폭정으로 폐위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고 무신정권과 원간섭기를 거친 고려인들에게 뭘 잘못한 왕이 신하들 손에 끌려내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물러난 왕이 다시 즉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신정변 이래 무려 8명의 왕이 폐위되었고, 심지어 원종~충혜왕의 5대에 걸쳐 폐/양위와 복위가 반복되었다. 충목왕이 여기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고 그 동생인 충정왕조차 어린 나이에 폐위를 면하지 못했다. 오히려 40대 중반까지 보위를 지키다 간 공민왕 사례가 당시로서는 무려 1세기 만의 일이었다.
이는 창왕 역시 마찬가지다. 명태조 주원장은 몽골 혈통에다 요동을 치려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상국의 인정도 못 받은 왕을 끌어내리고 정당한(인정받을) 임금을 세우는 건 지난 200년간 고려의 현실과 결합한 유학적 세계관에서 딱히 망설일 일도 아니었다. 몽골이 재기할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당장 창왕조차 생존을 위해 명에 입조를 시도하는 판이었다. 이런 명-고려의 상하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미 몽골은 중화 패자의 지위에서 탈락했음이 명백했고 고려든 명이든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한 몽골에 의존해 연명해온 기존 명종계 고려 왕실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고려의 생존에 걸림돌이 될 상황이었다.
담백하게 정치인의 입장에서 봐도 무신정권이 종결되고 원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조금씩 권위를 올려간 왕실이 뭘 신통하게 해내질 못했다. 공민왕은 무모한 숙청의 반복과 토목공사 끝에 최측근(자제위)들만 데리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혔다 자멸했고, 우왕은 공민왕만도 못했다. 창왕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공민왕부터가 신하들에 의한 옹립, 원나라의 지명, 세대역행이라는 친명반원 성리학자들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손을 내저을 요소들로 가득찬 군주였으니 폐가입진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공민왕계 자체가 그다지 충성을 바칠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국을 이끌 거물이 된 정치인 정몽주 입장에선 무능한 왕들은 중국의 인정이나 받아내는 토템으로 놔두고, 최씨 정권이나 과거의 무신집정들보다 훨씬 건설적이고 비전이 있어 보이는 데다, 전우이고 코드도 잘 맞는 이성계를 확고한 권신으로 올려서 개혁을 추진하는 선택지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성계는 공양왕 이전까진 고려의 공신이었지 찬탈의 야욕을 보이지 않았고, 공양왕은 어쨌거나 당시 명종계를 제외하면 왕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반원친명이라는 기조에도 충분히 부합해 명에서도 호의적이었으니.
이성계가 역성의 야심을 드러낸 공양왕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두 사람은 결별한다. 약 25년 동고동락하다 인생 막판 2~3년쯤 정적이 된 것이다. 편을 바꾼 정몽주는 흥국사 9공신의 일원이라는 권위와 이색에게서 내려온 학맥, 좌주로서 가진 세력의 힘으로 이성계에 맞서고 명에 정식으로 공양왕의 책봉을 받아 이성계가 찬탈할 명분과 기회 자체를 없애버리려 했다. 공양왕에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주원장이 공양왕을 고려국왕으로 인정한다는 인신과 고명을 정식으로 내려주면, 이미 주원장에게 찍힌 상태였던 이성계는 중국을 재통일한 명과의 사대관계를 부정하는 역신이 되는 것 외엔 왕이 될 방법이 없으니까.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이성계 세력은 명에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이 출발하기 전에 정몽주를 암살했고, 정몽주만한 좌주가 없는 고려수호파는 쉽게 무너졌다.
3. 여담
고려삼은(또는 여말 3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 3은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꼽는다. 여말 3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다.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았다.
정몽주의 10대 조인 정습명(1094-1150)은 고려 인종 때 추밀원 지주사에 오른 사람으로, 태안 반도에 운하를 뚫는 공사를 맡기도 하는 등, 당시 고려 내에서 경륜을 인정받은 행정가였다. 삼국사기 편찬과 세자의 교육을 맡는 등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의종 대에 이르러 목숨을 걸고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말년에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의종의 버림을 받고 자결한다.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은 충효를 제일로 치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도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의 후손은 조선 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고려 말 아홉 효자 중 1명이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참살당하자 이성계 일파가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했기 때문에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는데 정종성은 동생과 함께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다고 하며 태종 때 정식 복권된 뒤에도 "정씨의 아들인데도 전하가 봐줘서 살아있는 줄 알아라."라는 식으로 폭언을 들었고 조정 권신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부친의 복권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 정종성의 딸은 조선 정종의 서자로 5번째 아들인 선성군과 결혼하였으며 서녀는 양녕대군의 장남 이개의 첩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조선 왕실과도 인척지간이 된다. 정종성의 얼녀는 세조 집권을 도운 한명회의 첩인데 반대로 아들이자 정몽주의 장손인 정보(鄭保)는 단종에게 충의를 다해서 사육신을 옹호하여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한 죄로 거열형에 처해질 상황에 놓였다. 정보가 끌려나간 후에 세조가 정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변에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여 이에 놀란 세조가 "충신의 자손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형을 중지하고 영일로 귀양을 보내며 가산을 적몰하는 데 그쳤다. 중간에 단성(現 산청군)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참소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명회는 정몽주의 또 다른 아들인 정종화의 딸도 자신의 첩실로 두었다. 정보 사건 때문에 이후로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이들은 계속 나오기는 했다. 정보는 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표창되었으며 조선 후기 신료들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평을 받는다. 단종의 충신들을 복권한 정조 또한 정보를 가리켜서 "과연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라고 하며 생육신들보다도 윗 줄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하였다. 정보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차남 정윤화는 과거에 급제해 출사한지 얼마 안 되어 면신례 때 혹독한 신고식을 당해서 사망하고 만다.
정몽주의 손녀가 명당터를 얻어서 자신의 시갓집을 잘 되게 하려고 무덤자리에 물을 부어서 정몽주의 원래 무덤자리로 예정되어 있던 명당을 훔쳤다는 야사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야사에 나오는 손녀는 실제로는 정몽주의 손자인 설곡 정보의 딸인데 그 딸이 이석형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젊은 나이에 죽자 정보가 원래 자기 무덤자리로 찍어놓은 곳에 딸을 묻었고 이석형도 후에 죽어서 아내 무덤 가까이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야사는 후에 이석형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자 생긴 이야기다. 실제로는 두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 정씨 가문의 선산에 이씨 가문의 묘소가 같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선산 분쟁이 일어나 이씨 가문의 묘소가 모두 이장되어 나가고 이석형의 무덤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정보의 사위인 이석형 또한 조선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1년에 세 번 장원하여 이래 없는 일을 탄생시킨 천재로 뛰어난 문장가이며, 판중추부사 등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세조 밑에서 벼슬했고 그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역시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정몽주의 라이벌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이 절의를 지키기는커녕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 평생 잘먹고 잘살며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 않은 것과는 비교된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 또한 정몽주의 자손으로 그 손자 정제현은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결혼하여 인평위가 되었다. 또 다른 손자 정제두는 양명학의 거두로서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에 종가의 대가 자주 끊어져서 그 후계 문제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이와 관련해서 조정 대신들이 옛 일을 상고하거나 종손으로 양자입적할 후손들을 물색하였고 왕명으로 양자입적의 예외를 인정하는 등 중요한 사안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정몽주가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림파의 비조였기에 그 종가의 후계 문제가 정치적인 색깔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종손의 후계 문제를 다른 가문들이 따라하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돌 신화로 활동하고 있는 신혜성이 정몽주의 32대 후손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신혜성의 친가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서찰 교지가 남아 있는데 모두 국보급 문화재라고 한다.
정몽주의 제자 중에 권우라는 인물이 있는데 후에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했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그 빈객이 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관계로 세종은 정몽주의 손제자격이 된다.
정몽주의 제자 또는 사제(師弟)인 권근은 그 파에 속하여 이성계의 반대파에 섰으나 스승이 이방원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바로 이성계 측에 붙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태종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등 권세를 누렸다. 후에 정몽주의 신원을 적극 주장하여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시키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비록 절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여 후학들에게 변절자로 비난받기는 하지만 외교면에서 공을 세웠고 문필과 학문에 뛰어났다. 권근의 손자가 한명회와 함께 세조를 옹립하고 훈구파의 대표 인물이 된 권람이다.
태종과 세종 때 명신으로 높이 평가받은 변계량 또한 정몽주의 제자로 외교 문서를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자 중신이었다. 선대를 모시는 법도를 엄격히 하여 정몽주의 행한 바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 시절 명신으로 이름을 남긴 영의정 하연은 그 부친이 정몽주의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다. 그의 강직함에 감탄한 태종이 그의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길재, 이숭인과 같이 지방으로 내려가 지역 사회에 성리학을 보급한 제자들도 있었다. 종국적으로 정몽주는 죽었지만 정몽주의 제자들은 훗날 사림파를 형성하여 풍파는 있었지만 조선 왕조 500년의 세월 동안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
후에 정적이 되는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사이이며 야사에서는 서로를 동심우(同心友, 같은 뜻을 가진 벗)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고 하며 맹자에 관한 서적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맹자는 역성혁명을 다룬 서적으로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로서 정도전과 대립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도덕의 종장, 문채의 으뜸"이라고 평하였고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했으며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 대해서 "정생은 막빈에 든 사람 중 가히 으뜸"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고 역사적으로는 이상을 부딪히는 정적이었으며 한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다는 점 등 인상적인 대비점이 많아서 자주 함께 거론된다. 태종의 집권 이후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간신으로 비하되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인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동방의 성현으로 성균관에 모셔지는 등 후세의 아이러니컬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강성 반불론자였던 정도전과는 달리 불교를 그렇게까지 배척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정몽주는 "삼한에 불교가 바야흐로 유행하니 왕사성(王舍城)에까지 가서 구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가 유행했던 사회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불교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정몽주가 승려와 자주 접촉했던 시기는 공민왕 5년으로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인데 이 해 여름에 김중현(金仲賢)이란 친한 벗과 함께 책을 가지고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를 방문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불교의 여러 경전을 통해 불교 교리를 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시문을 통해 불교 교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자중을 바라는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코 유학의 도를 떠나 불교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불교를 이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역시 유자로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공양왕이 찬영(粲英, 1328∼1390)을 맞아들여 왕사(王師)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유불이 높은 경지에 있어서 서로 통할 수 있음을 한편으로 인정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논할 때 불교는 미흡함이 있으며 불교처럼 현실을 벗어나 도를 찾기보다는 유학 경전을 통해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정몽주의 불교관은 많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단순히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불교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 불교 사찰을 공격한 유생들을 옹호하며 처벌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을 보필할 재주라 하여 왕좌지재라고 칭하였는데, 같은 평가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로는 순욱이 있다. 공교롭게도 순욱은 정몽주처럼 당시 무너져가는 후한을 일으키기 위해 진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며, 조조를 보필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오히려 나중에 가서는 조조의 역심을 알고 이에 대립하다 죽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특정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그 세력의 힘을 통해 무너져가는 나라(고려, 한)를 다시 일으키려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그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역모의 마음이 있어 이를 계기로 관계가 틀어지고 대립하다 죽음을 맞이하며 후에 결국 왕조가 교체된다는 점까지도 똑같다. 혁명파와 개혁파의 정치 성향이 같아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이 와 혁명파의 본심이 드러나면 서로 갈라지게 되는 숙명으로 보인다.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인물로, 임고면에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돼 있다가 1965년에 대충 건물만 복원한 걸 2009년부터 증축하여 지금은 상당히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면사무소보다 더 크다. 때문에 포항시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포은 선생의 고향[포은]이라고 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의 또 다른 고향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는 오천 읍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이고, 동해고속도로 포항~울산구간 공사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개발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기에 이를 노려 영천시가 포은 유적지 개발을 선점한 것. 영천시에서는 포은 선생의 생가, 임고서원, 가설 선죽교를 새로 복원했으며 영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포항에는 포은중학교와 포은중앙도서관, 포은오천도서관, 정몽주로가 있다.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도 밀어주고 있다.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명이 포은대로이며, 수지구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가 그의 호를 따서 명명되었다.
김씨 정권의 붕괴를 우려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역사 교과서를 통해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고 고구려 영토를 되찾을 기회를 날려버린 대역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강조하고 있다. 비록 김씨 정권에게 충성하라는 뜻이 깔린 것이지만 북한에서도 정몽주의 충심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
<고려사> 이색전에 따르면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사가 있었다고 한다.
'음주(飮酒)'라는 제목의 시도 지었는데 그 호쾌한 내용 덕에 고려-조선조 선비들에게 즐겨 낭독되었다고 한다.
飮酒(음주)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나그네 길 봄바람 만나니 미친 흥 절로 난다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집에 돌아와 돈을 다 썼다고 부끄러워 말자
剩得新詩滿錦囊 [잉득신시만금낭]
금낭(錦囊)에 한 가득 신시(新詩)를 얻었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묘살이 3년상을 최초로 이룬 고려 사람이라고 한다.
9살 때 쓴 편지가 있는데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9살 당시 외삼촌인 판서댁에서 머물던 중 한 여종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했는데 글을 몰라서 쓸 수가 없자 정몽주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여종의 남편도 글을 모르니 주변 선비에게 부탁해 읽었고, 그 선비는 여종의 글솜씨에 감탄하여 주변에 소개하게 되면서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당시 여인들의 연서에 즐겨 사용하는 문구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소문의 근원이 궁금한 사람이 찾아와 정몽주가 쓴 것이 밝혀졌다고.
相思曲(상사곡)
雲聚散月盈虧 [운취산월영휴]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妾心不移 [첩심불이]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緘了却開添一語 [함료각개첨일어]
(편지를)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 마디 덧붙이는데
世間多病是相思 [세간다병시상사]
세간에서 병 많은 것이 상사(병)이라 하더이다.
정몽주가 9살 때 여종을 위해 대필해준 연애편지
고려에 나타난 요괴를 보고 소년 정몽주가 혼란스러운 고려말을 예견하는 민간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흔히 정몽주의 학맥은 사림파로만 이어지고 훈구파와는 반대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의 제자인 매헌 권우는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며 세종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고 정몽주의 성리학적 민본주의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세종의 치세에 영향을 미쳤다. 기술 관료로 이름을 날린 정인지도 권우의 제자였으므로 정몽주의 학통에 속하고 정몽주의 제자나 가까운 사형제(師兄弟)들이 조선 초기 훈구파를 이루었던 관계로 이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을 일부 잇고 있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했으면서도 조선의 양대 정치사조에 모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말선초에 어지간히 이름을 남긴 인물치고 정몽주의 제자나 문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며 그들을 통해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지만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연산군 때 밉보인 죄로 처형당한 연산군의 스승 조자서의 아내는 남편이 죄인으로 처형당했지만 정몽주의 증손녀라서 연좌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무덤도 처음에는 이성계에 반대한 죄인이라 하여 승려들이 몰래 묻어줘야 할 정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 복권되면서 왕릉에 비슷할 정도로 우대받으면서 관리되었다. 오히려 조선 개국의 1등공신이지만 역적으로 찍혀 조선 말기 때 신원해 준 정도전과는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 몇몇 일화에서 보듯이 조선 시대 손꼽히는 폭군조차도 그 후손들을 죽이는 것은 피했을 정도이다. 이 정도면 중국 한나라 소하의 자손들에 대비될 정도의 특혜.
1990년대부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고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재평가되었던 것과 맞물리는 편인데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은 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 이미지만 강조되다 보니 고려 말 혼란기 속에서 제도 개혁을 위해서 노력한 점, 왜구 토벌에서도 활약한 점,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활약한 점 등의 능력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이 가려지는 경향도 크다.
원래는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관을 옮기던 중 명당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장하고 자손들이 터를 잡게 된 것이 현재 묘소라고 한다. 상당한 명당인데 후에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여 그 능터를 찾던 지관이 적당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 곳이 바로 정몽주의 현 묏자리였다. 이에 선조는 난색을 표하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충현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 하여 다른 곳을 찾아 의인왕후를 매장토록 했다.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 일대를 능골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일화에 따라서 왕릉 자리로 택지될 정도의 명당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하여 거의 왕릉 수준으로 다듬어져 있다. 유림의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정몽주가 죽자 이성계는 그렇게도 아끼던 이방원을 증오하게 되고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어찌보면 정몽주의 죽음이 1차 왕자의 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 셈이었다.
의외로 정몽주는 발해와도 관련이 있는데 그는 발해고성(渤海古城)이란 시를 써서 발해 유민에 대한 소회를 남긴 적이 있다. 아마 요동 지역을 지나갈 때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거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도중에 표류해서 말 안장을 씹어먹으며 2주간 버틴 끝에 구조되고 공문서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를 보아 신체가 튼튼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