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본관은 무송
2. 생애
윤택의 손자로 총명하고 민첩하면서 학문을 좋아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에 익숙해 이제현이 기이한 재주라 여겼으며 공민왕 때 조선의 대과와 같은 예부시에서 을과 1등을 하여 선발되었다. 급제자 중 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 춘추수찬(春秋修撰)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좌정언이 되었다. 이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김흥경과 내시 김사행이 병국해민(病國害民)한다는 극언의 소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말투가 강했다. 황제가 좋아하는 신하들을 두고 그들이 임금의 뜻에만 맞추어 나라를 피폐하게 한다는 주장과 함께 충렬왕 때부터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놀러다닐 때가 아니라면서 김광대를 참수해 석실 공사를 중지하고 화원을 부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공민왕에게 상소가 올라가기 전에 여러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역으로 탄핵당하여 파직되었다. 고려에 깊은 회의를 느낀 그는 이후 조준, 정도전과 어울리며 과격함과 과단성으로 이성계의 정치적 돌격대장 역할을 했는데 권문세족들에게 당여들이 밀릴 때마다 직접 과격한 상소를 올리거나 동지들을 규합해 불리한 조정 여론을 돌파했다.
우왕 때 전교시승, 성균관사예, 전의부령, 예문관응교 등을 차례로 역임했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이 매우 가난했는데 이존성이 우왕에게 이야기해 쌀 10석을 하사받고 전교부령이 되었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고 회군 3등 공신에 책록됐다. 이성계에게 곽광의 전기인 <곽광전>을 바쳤고 창왕 때 전교령이 되자 옛 제도를 따르고 축문, 사소와 종묘, 적전의 제사를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도록 건의했으며 우사의대부가 되고 이인임의 죄를 논의했다가 등창으로 휴가를 청해 그 틈에 상소가 중지되었다가 대사성으로 승진해 이인임의 죄를 논의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공양왕 때 조준의 천거로 좌상시, 경연감독관이 되었으며 과거에 조준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공양왕 때 많은 상소를 올렸다.
이숭인이 전제개혁에 반대하고 고려파 사대부들과 권문세족을 연합시키려 하자, 영흥군의 옥사를 빌미로 이숭인을 참소.
변안열이 우왕 폐위를 반대하고 반기를 들 낌새가 보이자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림.
공양왕에게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를 강의받아야 한다고 상소.
우왕, 창왕을 유배지로 호송한 신하들에게 공신호를 내려주는 것을 반대했지만 거부됨.
승려 찬영을 왕사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 왕실과 고려 국교였던 불교 기득권 간의 결탁을 끊으려 함.
직접 건의하는 제도를 폐지하자 반대 상소를 올림.
공양왕이 장당현으로 행차할 계획 국고를 낭비하는 대규모 행차 계획을 반대.
장당현으로 행차하는 것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예의판서로 승진했다가 송문중에게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윤소종은 동서 최을의와 노비를 두고 다투다가 반복해에게 청탁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상시가 되어 시비를 자주 벌여 왕의 미움을 샀다가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공양왕의 귀에 들어갔으며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윤소종은 금주로 유배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 끝까지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방원의 손에 정몽주가 죽은 후에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건강을 크게 해친 후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1392년 10월 13일에 병조전서를 지내면서 조준, 정도전, 정충, 박의중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1393년 8월 2일에 병으로 사직했다가 9월 17일에 사망했다.
3. 여담
철저한 유교(성리학) 원리주의자였다. 조선이 성립된 다음, 태조가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성석린 등과 함께 척불상소를 올려서 불교 척결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쉽게 말해 불교라면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러 가지로 당대 관인들보다는 후대 사림과 비슷하다고 보여질 정도로 철저하게 유교원리주의를 주장한 인물.
지독한 공민왕 바라기였다. 그의 문집인 동정집을 보면 엄청난 양의 공민왕에 관련된 한시들이 나오는데, 공민왕이 살아 있던 시절엔 공민왕을 찬양하던 시들이 있었고, 공민왕 사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민왕을 그리워하는 시들을 많이 남겼다. 동정집의 문헌을 읽어보면, 윤소종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공민왕 생전과 공민왕 사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공민왕이 죽은 이후에 전조를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시를 짓기도 했다. 물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이후로도 공민왕에 대한 애절한 충심은 변하지 않아서 꿈 속에서 공민왕이 나와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시도 있는 걸 봐서는 죽을 때까지 공민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정몽주에게 정관정요를 강독하게 했는데, 이때 윤소종이 "군주로서 요순과 삼대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당태종은 따를 것이 못 된다"라며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권했다고 한다. 두 책 모두 군주의 치세를 다루지만, 정관정요는 특히 강한 왕권으로 제국을 이룬 당태종의 제왕학을 다뤄, 공양왕이 이성계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주제에 정치적 야심을 보인 데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윤소종은 아직은 명목상 고려의 신하였고 왕을 능멸한 셈이지만 유교적 이상향인 조선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거침없었다.
저서로는 동정집이 있으며, 그의 아들이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인 윤회인데, '구슬 삼킨 거위 때문에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숭인(李崇仁)의 뛰어난 재능을 질투했고 스승인 이색(李穡)이 이숭인만 칭찬하고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해 오던 차에, 영흥군(永興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윤소종이 이를 틈타 이숭인을 죽일 목적으로 이숭인을 탄핵하는데 조준과 윤소종은 친척으로 조준과 친하려고 접근한 정도전이 후에 이를 알고 이숭인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조준은 이숭인과도 먼 인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