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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이색(李穡)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0|조회수32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와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2. 생애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이곡이 복주(지금의 안동)에 부임하여 사록참군사(事錄參軍事) 벼슬을 할 때, 영해 지역 토호였던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딸과 혼인하여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했다.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워서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에서는 2등으로 합격했다. 앞서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 최승우 등도 당나라에서 급제했다고 하지만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한 것이므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데 비해 이색의 전시 2등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른 어마무시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을 이유로 고려로 귀국했다. 고려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무신정권의 잔재였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해 관리들의 토지를 빼앗아 분배하자는 토지 개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제자인 정몽주가 정권을 잡으면서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성계파의 역성혁명에 찬성하지 않았기에 조선이 건국된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절연한 제자 정도전은 이색을 자연도(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보내려 했다. 담당 관리가 자연도가 무인도임을 들어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는 것은 바다에 밀어 넣는 것이다."라고 하며 암살 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장흥으로 유배를 갔고, 후일 사면되어 한산백이 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암살 음모를 저지하고 이색에게 각종 특전과 재물을 내리거나 잔치를 베풀어 최대한 예우하려 했으나, 이색은 고려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이색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색을 군신이 아닌 친구의 예로 대우하며, 접대했을 때 떠나가는 이색을 직접 배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왕이 된 이성계가 직접 방문했는데도 "나를 개국 당시 불렀다면 예우를 차려서 자리가 빛났을 텐데, 왜 말 장수 따위에게 일을 시켰습니까?" 같은 폭언을 내뱉어 다혈질인 남은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남은의 형인 남재는 넌지시 그의 아들 이종선에게 "공이 광언(狂言)을 내뱉어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화를 입을 것이다."라면서 피신을 권하고 자중할 것을 권했다.

결국 다음 해인 1396년 6월 17일 피서를 가겠다며 여강(驪江,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로 떠나던 중 배 위에서 급사했는데, 이를 두고 정도전의 독살로 추측하는 시각이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

死生之理, 吾無疑矣.

3.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의 재능)가 없다." 하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듯하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았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승려인 혜근(나옹선사)의 비문과 인각사 무무당기를 써주는 등 불교와 친하게 지내곤 해서 이후 성리학자들에게 내내 까였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조선이 숭유억불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 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였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물론 이름만으로 천 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 일단 사후 629년 동안 이름 남기기는 성공했다.

4. 여담

같이 문과에 급제한 박상충의 처남이기도 하다.

1388년 문하시중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어를 해보라고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이색은 원나라의 북경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남방 출신이어서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고 웃었고 이색은 돌아와서 "나는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 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라고 깠다.

하지만 서로 발음이 너무 달라서 소통이 안 될 정도였다면, 이색 또한 주원장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통역을 통했어야 정상인데, 기록대로라면 이색은 주원장의 질문을 통역 없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주원장도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음에도 이색과 진지한 대화를 피하고자 일부러 말씨를 조롱하고 못 알아들은 척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로 말씨 때문에 못 알아들었더라도, 주원장이 이색과 진지하게 대화할 뜻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통역을 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색의 말을 알아듣고 통역해준 명나라 관리가 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색의 뜻과는 달리 진지한 질문을 하지 않고 넘겼다. 따라서 주원장은 이색과 진지한 대화를 회피하고자, 일부러 이색의 중국어를 조롱하며 면박을 주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 당사자 이색 또한 주원장이 진짜로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대화를 회피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분개하였다.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림관에서 지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이 흰 깃에 질 줄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쓴 것이 그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목은 선생이 당대에 좀 배운 사람인데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라고 하면서 《동사강목》에 실었지만...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사육신 중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지함이다. 그리고 이지함의 조카인 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색의 또 다른 손자인 이맹균 (1371~ 1440)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훗날의 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간 이맹균은 몇 달도 안 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훗날 19세기 초엽 먼 후손 중 한 명이 길주로 유배를 가서 1807년 9월부터 11월까지 총 약 2개월간 유배지 생활을 기록한 북정일기를 작성하는데, 이 서적은 19세기 초엽 조선 시대의 사회상과 유배인의 생활을 담아낸 기록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영종도의 옛 이름인 '자연도'를 제목으로 한 시를 썼다. 영종 씨사이드파크 캠핑장 부근 방죽에 이 시가 설치되어 있으나 관리 부실로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게 몇 개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은 영종도에 이색을 유배보내어 몰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모의했었던 적이 있다.

정도전은 당시 동문이었던 이숭인 등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의 장형을 집행할 때 황거정과 손흥종 등의 수하들을 시켜 몽둥이를 엉덩이가 아닌 등골에 내리쳐 집행하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려 했는데 형 집행 현장에서 이색의 문하생인 김여지가 판관이 되어 이를 막았다. 결국 아예 유배처에 갇혀 있던 이종학에게 암살자 손흥종을 보내 한밤중에 몰래 목 졸라 죽였으나, 이것이 후일 조정에서 재수사되어 신원되었다. 이색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고 당시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려는 신원 작업을 위해 수하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탄핵 운동이 활발하게 일었다. 심지어 남은의 형인 남재도 암살 음모를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었을 정도.

세상을 떠난 지 한참 지난 태종 11년에 이색의 비문으로 인한 대역죄, 필화 사건이 비화된 적이 있다.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색의 비문이 명나라로 갔다가 역수입 되어 태종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 내용에 "당시(공양왕 시기)의 권력자(用事者)가 공을 꺼려서 장단으로 귀양보냈다"와 같은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글을 읽은 태종은 글의 권력자란 태조를 가리킨 것이 아니냐며 글을 찢고 대노 했는데 작성자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하륜임이 드러났다. 당황한 하륜이 하루에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가며 권력자란 조준, 정도전을 가리켰다거나 이미 죽은 권근의 핑계를 대는 등 사죄문을 보내며 애걸하자 하륜을 아끼던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글의 권력자는 조준과 정도전이 맞다고 입장을 바꿨다. 대간에서 "공양왕 시기에는 조준이 권력을 잡은 적도 없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따랐는데 무슨 소리냐, 이성계를 말한 것이 맞다" "전하께서도 이색의 행장을 보고 분노해 찢어버리고 검열하지 않으셨느냐"등의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할 말이 없어져서 "어허, 내가 병이 발작해 들어주기가 어려우니 물러가라" 같은 어이없는 소리까지 하며 이를 무시했다.

유교의 종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이 점이 두고두고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꾸로 불자였던 이성계는 불교를 믿는 것이 유학자들인 신하들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유학의 종주인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그럼 니가 이색보다 잘났냐?"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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