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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문익첨(文益瞻)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0|조회수30 목록 댓글 0

1. 개요

여말선초의 유학자, 정치인, 관료. 하지만 학자보다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시대는 바야흐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이었는데 목화의 보급으로 조선의 의복 문화는 물론 상거래 관행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2. 생애

원 간섭기 와중인 1329년(충숙왕 16년)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고 1360년(공민왕 9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서 경자방(庚子榜) 문과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병과 4위로 급제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몽전쟁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는 공민왕 연간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위해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 본토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원나라뿐 아니라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한때는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고려가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던 것에 불만이 있었고, 원나라 말을 안 듣는 공민왕 대신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지만 원나라 조정에서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책봉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 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으나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파의 움직임을 고려 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는데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 원나라가 보낸 덕흥군의 군대는 고려에 진입하다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문익점은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서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결국 1375년(우왕 1년)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는데 어디까지나 목화 보급 공로 덕분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와 입장을 같이 했는데 결국 급진파 사대부가 정권을 잡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래서 조선 개국 후 문익점은 새 나라에 반대해 관직도 마다하고 초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관직, 강성군(江城君) 봉호, 시호로 충선(忠宣)을 더해주고 후손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3. 평가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공헌한 인물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의 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과 같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다.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화북산 목화를 가져왔다는 게 주 내용. 알려진 이야기처럼 문익점이 그 정도로 산업스파이는 아니고 그냥 어렵지 않게 구해올 수 있었던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10년에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의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짠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사실 예전부터 학계는 물증만 없다 뿐이지 중국에 그 흔한 목화가 고려시대 말에서야 들어왔을 리가 없고 이미 삼국시대부터 썼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그동안 삼국시대 면직물 증거를 찾는데 눈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게 발견된 것. 호두도 비슷한 야사가 있었지만 신라 민정문서와 광주 신창동 유적에 이미 고려 이전부터 호두와 호두나무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처럼, 이런 식으로 언제 뭐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야사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만 문익점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인지라 사철 온난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계로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 색복지를 봐도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나오지 면직물은 언급되지 않으므로 백제 때부터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래종의 수량이 극히 희소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이나 모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은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모피에 비해 대량공급이 원활했고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元)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盛囊以來]."

이 목화씨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원 조정의 유배지였던 강남에서 가져왔다면 사행 중 뭔가 죄를 얻어 강남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며, 그냥 장강 이북이라면 그냥 길거리의 흔한 목화씨를 가져온 셈이기 때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사서 기록으로 소설을 써대던 위인전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리가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이다.

줄거리에 들어간 세세한 에피소드는 호탄 왕국에 시집온 공주의 누에알 밀수 이야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승들이 누에알을 지팡이에 숨겨 밀수한 이야기,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한다.(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조상이 반역자라고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은 충신으로 변경된다. 후손들이 쓴 책 '사실본기'에서는 이 과정에 황제와 맞짱을 뜨는 장면을 추가해버린다. 정사인 고려사절요에는 자기 조상이 역적으로 되어 있으니 임팩트로 엎어버리려고 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서장관 문익점이 원나라 황제하고 맞짱뜨면서 설전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당연히도 200% 허위. 오히려 덕흥군 파였다. 사실 조선에서 떠받드는 명나라 황제가 아니라 이미 망한 원나라의 몽골족 오랑캐 황제이므로 역사 왜곡의 부담도 훨씬 덜했을 듯.

이 시기 강남은 홍건적이 득세하고 한족이 난리를 치던 상황이라서 원나라 조정의 힘이 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덕흥군과 함께 원나라 궁궐에서 고려 조정을 꾸리고 있던 상황의 문익점이 강남으로 여행을 떠날 일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이런 신화는 목화는 본래 강남산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근이 처음 언급할 때는 그냥 '강남에 가서 가져왔다' 였는데, 그걸 남효온이 쓴 책에서는 강남에 유배간 것으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다.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가지고 왔다였다가 주머니, 붓대 등 여러차례 변화를 거쳤다. 그 최종본이 붓두껍. 굳이 '붓두껍'이라는 아이템이 된 것은 선비와 문인을 상징하는 붓이 문익점의 이미지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했다.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이유로 거짓. 이것을 고려 멸망과 엮기도 하는데,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이 부분은 사실 확인이 안된다. 이후 과정도 당연히 마찬가지. 이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소설로 일관된 관련 글들에서 퍼져나간 이야기들로 이런 것들은 역사서에 남지 않는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다만 해당 내용이 아주 근거없는 찌라시는 아닌데 이게 무려 조선왕조실록 문익점 졸기에 남아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방직 기술이 국가 기밀이라는 서술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나머지 원면으로 실 뽑는다는 게 고난도의 기술일지는 몰라도 국가 기밀일 수는 없다. 이게 사실이면 원나라에서 길쌈하던 여자들은 모조리 국가 기밀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중국에서 농경 발전을 위해 만들어 유통시켰던 농서들은 목화 가공 관련 정보도 실려 있는 경우가 많으니 원나라는 1급 기밀 정보를 민생을 위해 기밀해제한 나라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단지 잘 대접해준 후 물어봤다고만 되어 있다. 즉 적어도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에서 배워온 건 맞지만 그게 금지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랬다면 졸기에도 그렇게 남아야 했을 테니.

이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민간어원이다. 물레의 원형은 김해시에서 출토된 가야 토기까지 올라가고, 문익점의 후손들이 손을 댄 것은 씨아 정도였다. 무명은 목면(木綿)을 중국어로 발음한 무몐을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문익점의 아들들은 중자 돌림으로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5명이다.

4. 기타

모카씨를 밀반입해 한국 사람들이 모카라떼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위인이라는 개드립도 있다. 사실 원문을 보면 글 바로 아래 '지금 헷갈리는 사람 우리랑 동급^^'이라고 적혀 있어서 몰라서 저렇게 쓴 게 아니라 농담한 거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잘리고 나머지만 돌아다니고 있다. 한국에 양탕국(가배)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고종 때였다. 이 드립은 별에서 온 그대 1화에서도 천송이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리면서 무식 인증을 한 바 있다.

문익점의 전설은 태조 이성계가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았다는 두문동 72현 전설에서 이들이 유일하게 내보낸 생존자가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라는 전설과 조사의의 난이 각색되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함흥차사의 전설, 양녕대군이 호쾌한 대인배였다는 전설과 더불어서 여말선초 4대 거짓 전설로 남았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에 목화 시배지와 문익점 선생 생가라는 유적이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문익점을 모신 사당인 문익점부조묘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다. 이는 문씨 본가가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기 때문이라 그런것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문래동(文來洞)'은 '문익점이 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또는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문래동의 유래는 옛날 이 일대가 모래가 많은 곳이라서 '모랫말'이라 부르던 걸 음차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며 문익점과 관련된 설은 비슷한 발음에서 유추,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보의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과 비교하면 묘하다. 둘 다 고려 시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추우면 가죽옷을 입으면 되지 하던 양반이다.

문재인 대통령, 문무일 검찰총장, 문희상 국회의장의 직계 조상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문씨 중 남평 문씨가 거의 대부분이다. 남평 문씨 내에서도 문익점의 후손이 아닌 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남평 문씨들이 문익점의 후손인 것은 사실이다.

문익점의 후손은 조선 왕실과 약간 이어지는 편이다. 문익점의 딸은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와 결혼하였고, 그 아들이 태종 이방원 편에 선 완령군 이백온이다. 또한 문익점의 8대조인 문극겸이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의 장인으로 윗대로 올라가면 문극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공통점도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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