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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우현보(禹玄寶)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0|조회수16 목록 댓글 0

1. 개요

여말선초의 문관. 고려의 재추. 조선의 백작, 청백리.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1383년 (우왕 9년)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당시 지공거(知貢擧)로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인민(李仁敏)과 함께 과거 시험을 주관한 이방원의 좌주이다.

2. 생애

충청도 단양군 사람이며 부친은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이다. 1355년 (공민왕 4년)에 문과 급제해 춘추검열(春秋檢閱)이 되고 거듭 승진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낼 때 윤소종이 김흥경, 김사행 등의 간신들을 탄핵하자, 우현보는 윤소종이 직무를 게을리한다는 핑계로 윤소종을 탄핵해 축출시켰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선박 건조 등 수군 양성 및 군사력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관한 법령들을 다시 살펴보고 이를 시행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우왕 초에는 밀직대언(密直代言)에 제수되었다가 제학(提學)으로 승진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가 제사를 지내려 하자 우왕이 금주령 때문에 산신에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묻자 술을 신에게 바친다는 증명서를 받으면 가능할 것이라 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이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바뀌었다가 곧이어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左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1388년 (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시중(右侍中)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만에 파직되고 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양왕이 즉위한 이후로는 이성계의 반대파에 해당되어 정몽주와 당여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인해 옥사가 일어날 때 무고되었는데, 김저의 옥사가 일어날 때 진술 중에 우현보의 이름이 나와 그를 죽이거나 가산을 적몰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관직을 그만두는 선에서 끝났다.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가 윤이·이초의 옥사 때 체포되어 공양왕이 그를 처벌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어쩔 수 없이 공양왕이 우현보를 철원으로 유배보냈는데, 얼마 못 가서 사면되어 단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몽주가 살해당하고 김진양 등이 국문당할 때 우현보의 이름이 나와 도평의사로부터 체포되어 유배되었으며, 계림(雞林)으로 옮겨져 유배되었다.

그러나 우현보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먼 곳으로 유배되어 다시는 등용되지 못하는 조치를 받았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1398년 (태조 7년) 정도전 일파가 제거된 뒤 복직되었다.

1399년에는 단양백에 봉해졌고, 1400년 1월 28일에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문생 이래로부터 듣고 이방원에게 이를 알리면서 2월 13일에 추충보조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11월 1일에는 전지 70결을 하사받고 11월 13일에 사망했다.

3. 여담

아들 5형제 모두 문과 급제하였다.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는데 앞장선 정도전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정도전의 어머니가 고려말기쯤 우현보의 집안에서 일하던 여종의 피가 섞여있어 이에 트라우마가 있던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조선개국에 반대한 반 역성혁명파의 유력 인사들을 처리하던 중 이 원한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현보의 다섯 아들들 중에서 세명을 장살시켜 끔찍하게 죽여버렸다.

다만 정도전 관련이 아니더라도 그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다. 상술한 윤소종이 간신배들을 탄핵했을 때 오히려 윤소종을 축출했고, 심지어 당시 집권층인 이인임 일파의 권세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국왕인 우왕 대신 이인임 패거리였던 염흥방이 자기 멋대로 국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는데 끼어서 함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에도 최영의 무리한 제2차 요동정벌을 말리지 않았으며, 나중에 시행되는 토지제도 개혁(과전법)을 반대하는 데 동참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에 우현보는 이방원, 즉 훗날의 태종이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2차 문과 과거에서 급제했을 때 과거를 관장하는 지공거(고시관) 직책을 우현보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의 과거제도는 과거 급제자들이 과거를 관장하는 지공거를 맡은 고위 관료들과 일종의 피후원(문생) - 후원자(좌주) 관계를 맺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런 피후원 - 후원 관계는 같은 당여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양왕 때 이색과 정몽주와 더불어서 우현보가 고려수호파의 핵심으로 갑자기 대두된 이유는 우현보를 좌주로 따른 문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색과 정몽주는 우현보 이상으로 문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세 거물의 문생들이 고려수호파의 마지막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방원 또한 우현보의 문생이었기 때문에 이색이 숙청당하고 정몽주가 참살당해서 고려수호파가 정치적으로 궤멸당하는 상황에서도 우현보는 가벼운 유배형인 경외종편에 그치는 행운을 얻었다. 이후 우현보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의 음모를 재빠르게 이방원에게 알리는 공을 세우고 얼마 못가서 사망하였는데, 이방원은 스승의 예로 각별하게 우현보의 죽음을 기렸고 우현보의 자손들을 우대하였다.

참고로 이방원은 이숭인의 문생이기도 하였는데, 1차 시험인 진사시의 지공거가 바로 이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숭인에 대해서도 이방원은 스승으로 모셨다. 공교롭게도 우현보와 이숭인 모두 정도전과는 악연으로 얽혀있었고, 우연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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