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민변의 아들이자 희비 윤씨의 외사촌이다. 또한 민개의 형으로, 원경왕후와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아버지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조선 제4대 임금이자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세종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조의 조카인 이천우의 장인이기도 한데, 태조 집안과 겹사돈 관계를 맺은 사실만으로도 당시 그의 가문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후에는 아들들이 모두 사위의 손에 죽는 비극을 겪게 된다.
2. 생애
2.1. 고려시대
여흥 사람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면서 맑고 소박해 사치를 싫어했다. 독서를 좋아했으며 1번만 읽어도 바로 기억할 정도로 명석했다고 하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다. 사위인 이방원도 민제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357년 4월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국자직학에 임명되었고 춘추검열로 선발되었다가 1362년 예문관, 1363년 통례문지후, 1366년 전리좌랑, 1371년 예부직랑, 1372년 전리정랑과 지제교, 1373년 성균사예, 1375년 전의총랑과 성균사성, 1382년 판전교시사, 1387년 지춘주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388년 판소부시사와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봉익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8월에 전공판서로 옮겼다가 예의판서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1389년 판도가 되었다가 7월에 전리, 9월에 개성윤 상의밀직사사 겸 예의판서가 되었다. 1390년 첨서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세자 좌빈객을 겸직했다가 1392년에 한양판윤이 되었다.
2.2. 조선시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7월에 자헌대부 예문춘추관 태학사에 임명되었다. 1394년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 수문전학사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명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며 돌아와서 삼사우복야 보문각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398년 정헌대부가 더해졌다가 옮겨서 보국숭록대부 여흥백 영예조사 겸 판봉상사농시사 수문전 태학사가 되었다.
젊어서 예를 안다고 알려져 숭록대부가 되어 예조를 겸직했다가 1399년에 지공거가 되고 겨울에는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1400년 3월에 수충보조공신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병조사 겸 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감예문 춘추관사 영경연사 여흥백으로 작위가 올려졌다. 4월에 좌명공신으로 고치고 9월에 좌정승으로 옮겼으며, 11월에 태종이 즉위하고 원경왕후가 중전이 되자 순충(純忠)이라는 호를 받으면서 여흥백에 봉해졌고, 1401년에는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의 호가 내려져 여흥부원군(麗興府院君)에 봉해지게 된다.
사극에서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민씨가 나중에 맞이하는 횡액은 원경왕후나 아들들 책임이 아니라 민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 왕자의 난이 불러온 혼란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태종과 하륜이 이전 정도전의 구상보다는 덜 하지만 기존 체제보단 훨씬 나아간 온건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막아세운 수구파 우두머리이자 정종~태종 초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민제였다. 민제의 아우 민개가 고려 멸망이 결정된 순간 통곡한 일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이들의 본질이 개혁이 아닌 반동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왕조의 간판은 바꿨을 지언정 기존에 누리던 특권은 그대로 누리길 원했던 민씨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조준의 경제육전으로 이어지는 태조 시절 개혁은 물론 경제육전에 실리지 않은 판지와 조례를 수록하고 의정부 신설 등 새로운 개편안을 담기 위해 시작된 태종 때 속육전 편찬까지 일련의 개혁 행보에 쉴 세 없이 반발하며 기득권 챙기기에 전념했다. 덕분에 태조~태종 시기 제도 개혁의 선봉이었던 조준과 하륜은 지속적인 음해와 정치 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태종은 즉위한 후부터 민씨 견제에 돌입한다.
1402년에 정종의 만류로 취소되었지만 태종이 가례색까지 설치하려는 시도까지 하며 의빈 권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이후 몇 달 뒤인 4월에 이러한 태종의 행동을 문제삼은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된다. 그런데 이 상소를 올린 이 중 한 명이 민제의 문생이었던 전가식이었고, 그가 상소를 올리기 전에 민제에게 사실 확인을 한 것이 순군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에 밝혀지게 되어 그 이후로 문생과 거리를 두게 된다. 거기다 7월에는 관리 추천을 잘못해서 윤곤, 이공효와 함께 탄핵당하기에 이르는데, 다만 그 해 8월에는 태종이 원경왕후와 함께 그의 집에서 잔치를 하였고, 11월에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종이 직접 출전하면서 그를 수성도통사에 임명하여 도성 수비를 맡기고 떠났으며, 태종 6년인 1406년 12월에도 그의 집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그리고 왕자들까지 참석한 잔치가 열리는데, 이때 후술되었듯 태종과 서로 말을 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원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태종의 양위 소동 당시 보였다는 반응이나 과거에 한 발언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과 명나라 황녀 간의 혼인 문제와 연관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두 아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2.3. 말년
1407년 아들들인 민무구과 민무질을 살리기 위해 먼 지방에 유배보낼 것을 요청해 각각 여흥, 대구에 유배되도록 했으며, 1408년 9월, 병으로 눕다가 향년 69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북한에 있으며, 현 북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개성시 광수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