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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서필(徐弼)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15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왕조 광종 대의 문신으로 서희의 아버지이자, 경기도 이천시 출신으로 이천 서씨 재상가를 시작한 인물

2. 생애

광종은 그동안 왕을 칭한 선왕들과는 다르게 대내외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부르며 권력을 쥐고 조정을 압도하는 철혈 군주였다. 『고려사』「광종 세가」에 명시되었을 정도로 신하들은 광종을 두려워했는데 유일하게 서필만이 이 '철혈 군주' 에게 직언을 올렸다.

『고려사』 「서필 열전」에 따르면 서필은 하급 관리였다고 한다. 유력 호족 출신 확률이 높은데 점차 승진을 거듭해 2품 1등위 대광 품계를 가지고 국무총리인 내의령 직위에 봉해졌다. 서필이 남긴 일화는 배짱이 매우 두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궐 소유의 말이 죽었다. 광종은 말 관리를 제대로 못한 담당자를 처형하려 했는데 서필은 공자의 예를 들며 광종에게 반대 의사를 드러냈고 결국 명령을 거두었다.

광종이 서필, 왕함민(王咸敏), 황보광겸(皇甫光謙) 등 중신들에게 귀한 그릇을 하사했다. 서필만이 거부했는데 이유는 비싼 그릇은 오로지 임금만이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마음에 든 광종은 "경이 보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나는 경의 말을 귀히 여기겠소."라 화답했다.

광종은 호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귀화인들을 중용하였다. 호족을 길들이기 위해 호족 출신 신하들의 집을 뺏어 귀화인 출신 신하에게 주었는데 서필이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통째로 바치겠다고 아뢰었다. 광종이 이유를 묻자 서필이 이렇게 말했다. "귀화인들이 오니 재상의 집은 모조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 집은 누추하나 가져가시고 저는 은퇴할 때 봉급을 모아 작은 집을 사서 늙겠습니다." 광종은 이를 듣고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호족 누르기가 과해졌다고 여겼고 집 뺏기를 멈추었다.

서필이 광종에게 "공이 있는 자에게만 상을 주셔야 하고 공이 없는 자에게는 상을 뺏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광종이 듣고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는데 다음날 측근 몇 명을 서필에게 보내 '공이 있는 자'와 '공이 없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서필은 "공이 있는 자란 호족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중앙 정부의 통치가 닿게 한 신하 식회(式會)를 의미하오. 공이 없는 자는 당신들이니 이 말 그대로 아뢰시오"라 말했다. 당시 제 일을 하는 신하들을 광종의 측근들이 모함하고 시기한 것을 면전에서 대고 직언을 올린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광종에게 클레임을 걸며 직언을 올렸지만 광종은 서필의 목숨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중용했고 이에 서필도 직언을 거듭 올리며 개혁에 일조했다.

광종이 필요한 부분은 왕권의 강화였다. 호족과의 혼인 동맹으로 이루어진 고려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족의 권력이 높아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집권으로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호족의 견제가 필요한 상황인데 금으로 된 귀한 술그릇 하사를 사양했던 일화에서 서필이 중용 되었던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서필이 금그릇은 오로지 왕만 쓸 수 있다고 거부하고 신하와 왕의 원칙을 지키며 격식을 차리는 행동은 광종으로는 왕권 강화에 필요한 부분인데 서필이 스스로 행동하니 직언은 깊게 받아 들이고 중용하는 것이다. 광종 재위 16년차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받아 사후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아들인 서희와 손자 서눌까지 생전에는 재상이 되는 영예를 누리는 것은 물론 성실히 고려를 이끌어 나갔고 사후에는 배향공신이 되었다.

4. 기타

서필의 먼 후손인 서공(徐恭) 의 묘지명이 현존하는데 서공 묘지명에서는 서필이 '태조성조공신(太祖聖朝功臣)'이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그려진 삼한공신들을 의미하는데 이천 서씨 가문이 후삼국 전쟁 때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예지 태묘조에 기록된 배향공신 중 개국공신에도 임명된 신하는 시호에 개국(開國)이라는 미칭이 붙어 있다. 서필은 시호에 개국이 붙어 있어 그가 고려 개국에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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