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 제6대 성종 때의 관료. 고려 외교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신라의 김춘추, 정몽주, 조선의 이예, 최명길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외교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 서희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재상으로서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기도 했다.
2. 평가
세상은 한갓 송에 구준과 부필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여사제강》[24]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평가하지만 외교 뿐만 아니라 여요전쟁 승리의 포석을 마련하고, 국가 비전의 가장 큰 밑그림을 제시한 국정 설계자이자 전략가이다. 마찬가지로 장량도 유방에게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여요전쟁에 한해서는 장량에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임용한 박사가 언급했듯이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 공신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이후의 여요전쟁 동안 양규나 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담판으로 수복한 강동 6주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요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것. 물론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서희에 대해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만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서희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희
생전 서희는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서희가 사신으로 송에 갔을 때, 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관직을 주었고,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곧 고구려이고, 그렇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삼았으며, 국경을 가지고 논하면 거란의 동경까지도 모두 우리 경내다."라고 말한 것은 고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후 중국의 <송사>, <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람이다 보니 중국 학계에서, 특히 동북공정에 소속된 학자들이 서희에 대해 내놓는 평가는 박하고 싸늘하다.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중국의 학자들은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 하는데, 일본에서 안용복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학자 양바오룽(楊保隆)이나 장룽(張戎)은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 말은 고려의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 개경(개성)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실제 사실이 아니라 역사에 어두운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고구려 후계임을 강조하려고 서희가 일부러 즉석에서 지어낸 속임수가 섞인 거짓말이자 궤변술(詭辯術) 내지 말장난(文字遊戱)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중국의 학자 정촨수이(鄭川水)의 경우는 "고려는 신라를 계승해 건국된 것을 서희가 옛 고구려(高句麗之舊)라고 거짓말했으며, 그리고 당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치소인 평양을 고려가 멋대로 서경으로 바꿔 부르고 고려의 대도호부(大都護府)를 평양에 둔 일을 ‘수도를 평양에 정했다(都平壤)’고 속였으며, 거란의 영역인 압록강여진(鴨綠江女眞)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며 거란에 요구했고, 또한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할 합법적인 왕조라고까지 주장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정촨수이는 더 나아가서 엄연히 거란의 영역 안에 여진인들이 살고 있던 곳을 서희가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 속여서 고려가 그 지역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소손녕에게 요구하고 거부당하자(?), 당시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한 것에 요 성종이 영토 주권을 양보하는 매우 믿기 어려운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으며, 이후 거란은 고려로부터 강동 6주를 반환받기 위해 일곱 번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고려에 대한 군사적 침공까지 했던 것이라고, 서희의 협상이 거짓과 궤변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물론 여요전쟁의 발발까지도 고려에 그 원인을 돌려 버리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압록강 유역이 애초에 고구려령이고 애초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고구려부흥운동과 발해 건국으로 당나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신성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제대로 통치하지도 못한 데다 당이 멸망한 뒤에는 '번인(여진인)들이 멋대로 드나드는 황폐한 땅'으로 변할 정도로 통치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점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고려에서 평양이 서경(西京)이라 불리며 고려 왕조 내내 준수도급 대접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중국 학자들의 지적은 다분히 악의적인 것을 넘어 제대로 역사를 왜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외의 다른 시각에서 서희의 외교와 그 영향을 바라보고 평가할 여지를 한국 학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서희의 말이 거짓말이고 궤변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으로 거란의 입장에서 고려에서 철군하게 된 상황을 분석하는데, 거란의 입장에서 일단 '1차 상대'라고 부를 상대는 당연히 남쪽의 송이었고, 후방의 고려가 송과 통교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치 명청교체기 후금과 명나라, 그리고 조선의 구도와 같다. 그리고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간 이유와 마찬가지로 거란 역시도 송과의 전쟁을 위해 후방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결정했다.
청 태종과는 달리 고려의 봉산군(蓬山郡)을 차지한 거란의 소손녕은 그 시점에서 더 남진해서 개경까지 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속히 투항하고 얼른 땅 내놔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오는데, 서희는 이 시점에서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和議)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有可和之狀)”고 주청하면서 당시 고려 조정에서 일던 할지론을 무위로 돌리고 협상에 나섰다. 흥미롭게도 서희는 거란의 군사 동원을 ‘거란이 침공했다(契丹之侵)’이 아니라 ‘거란이 왔다(契丹之來)’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화의를 주청한 시점에서 이미 거란이 현재 고려로 더 치고 내려올 생각이 없고, 그저 군사를 동원해 유세를 떠는 것임을 서희는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의 소손녕이 거느린 대병력이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 고려 멸망이나 영토 획득보다는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인 고려 지역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었고 그 철수도 순전히 협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거란 입장에서도 다분히 전략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 서희와의 협상 직전에 고려 조정에서 이몽전을 보내 소손녕과 만난 자리에서 소손녕이 온 이유를 물었을 때, 소손녕은 "너의 나라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 이제 우리가 천벌을 대행하러 왔다(汝國不恤民事, 是用恭行天罰)"고, 자신들이 고려로 쳐들어온 이유를 '고려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라고 대고 있다. 협상 이후 고려의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 회복이나 '선 여진 축출 후 거란 수교'를 골자로 하는 소손녕의 협상 결과를 전해 받은 요 성종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청해 왔다. 군사를 돌리라"(高麗旣請, 和宜罷兵)고 명령해 거란은 고려에서 철수했다. 고려 영토 획득이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일단 소손녕의 거란군에게는 부차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소손녕으로서도 마냥 고려에 머무르며 고려와의 일전을 벌이기도 힘들었던 것이, 고려에서 답이 없자 소손녕이 화풀이 삼아 공격한 안융진(安戎鎭)에서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 고려에 귀부했던 발해 태자 대광현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 낭장(郞將) 유방(庾方, 고려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손자이다.)에게 패전을 겪은 상태였다. 화끈하게 차라리 전쟁 한 판 가자면 소손녕으로서도 못할 바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후방에서 치고 내려올 양규나 대도수, 유방의 고려군과 전방에서 항전을 각오할 고려 조정 및 고려 남부 지방군과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거란이 승리하더라도 송과의 대치 상태에서 중요한 병력을 까먹는 분명한 양패구상(兩敗俱傷)[39]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는 소손녕이나 요 성종에게 물러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체면'을 살려준 것이다.
즉 고려는 거란과의 협상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인정받고 동시에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수복하는 실익을 얻었지만, 거란도 반대 급부로 고려로부터 자신들의 요나라가 중국의 여느 '정통' 왕조처럼 정삭(正朔)을 가진 정통성 있는 왕조라는 인정, 나아가 송과의 대치 상황에서 후방인 고려 방면의 안정을 군사적 정복 없이 무혈로 얻어내는 동시에 고려와 송의 군사동맹을 표면적으로나마 와해시켜 고려 방면에 남겨 두어야 할 힘을 온전히 송으로 쏟을 수 있었다. 중국 학자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요 성종이 '강동 6주 할양'이라는 서희와의 협상 결과를 수용한 것이 마냥 '퍼주기 협상'은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강동 6주가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땅인지를 거란은 뒤늦게 알게 되고, 이 상황을 다시금 무력으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2차례의 큰 전쟁과 수십 차례의 국지전은 제대로 고려 땅에서 피를 보고 끝나면서 거란이 꿈꾸었을 장밋빛 미래는 무너졌지만, 이건 훨씬 후대의 협상 외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정촨수이는 서희가 고려가 고구려라는 주장이 소손녕에게 먹히지 않자(?) 방향을 바꾸어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며 서희를 '요 성종과 소손녕을 상대로 사기를 친 궤변가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애초에 상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해서 자신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해 내는 것, 동시에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불편함에 사로잡히지 않게끔 적절한 선에서 피차간 체면과 실익을 살려 주는 것도 훌륭한 협상 능력이자 탁월한 외교술이다. 이건 분명하게 거란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고려 외교술의 승리이고, 서희라는 인물이 고평가되면 고평가되었지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마냥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4. 기타
조선 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여 드림팀 올스타전 내각을 설정하는 만고도목 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46] 외교관으로서의 이미지는 현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절대적이었던 듯하다. 1999년 말기에도 사람들을 상대로 비슷한 설문조사 설정 놀이가 있었는데 외교부장관에는 서희, 대한민국 대통령에는 세종,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에는 이순신이 뽑혔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2동 국립외교원 야외에 그의 흉상이 있고, 외교부 청사 리셉션홀은 현판을 서희홀로 하면서 서희의 초상화까지 걸려있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자 영원한 모범으로서 그의 위상을 반영한 모습들이다.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장군이 아니다. 서희가 받은 병관어사(兵官御事)는 상서성 소속의 문관직이며 제1차 여요전쟁 당시 받은 중군사(中軍使) 직은 고려가 임시 군단을 조성한 뒤 비상설직으로 봉하는 지휘관 정도의 직위라 정식 무신 직위에 임명된 적이 없다. 고려 시대 군권은 문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고 본다. 그래도 중군사 직책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장군 호칭을 쓸 수는 있다.[47][48] 1980년대~1990년대에 나온 역사 만화 등을 보면 서희는 갑옷을 입은 장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아직도 여주에 있는 서희 묘 안내판에도 서희 장군 묘라고 쓰여 있다.
서희의 후손들도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제주도 설화에 서희의 15대손인 서린(徐燐)[49]이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 지역에는 100년 묵은 구렁이가 판을 쳐 사람들이 매년 그 구렁이에게 마을의 처녀들을 바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서린이 군졸들을 이끌고 구렁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구렁이를 죽였다고 한다. 이에 무당이 어떤 일이 있어도 뒤돌아 보지 말라고 했고 서린 역시 뒤를 보지 않고 달리다가 제주성 동문에서 자신의 부하가 소리치자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고작 19세 때의 일로 뱀 날에는 이 사람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서린이 마을 산적이나 도적을 토벌하다가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종(고려)
그리고 성종이 바른 말로 상소를 올린 정우현을 벌을 주려고 하자 서희가 '신하가 바른말을 하는 데는 벼슬의 높낮이가 따로 없는 법이니 정우현에게는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한다'라고 말을 한 뒤 서희의 말을 들은 성종이 정우현의 벼슬을 올려 주고 서희에게는 귀한 선물을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협상'에 관련하여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다.
2003년 4월, 이라크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공병 부대인 '서희 부대'는 그의 이름을 땄다.
KBO 리그 역사상 첫 단일 시즌 200안타를 친 서건창이 서희의 후손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 남당[50]에서는 한자 이름까지 동일한 동명이인의 화가 서희(徐熙)가 활동하고 있었다. 작품은 현대에는 모두 실전되었으나, 특히 화조화(花鳥畵)에 능했다.
5. 생애
5.1.1. 외교 담판
거란이 중원의 송나라를 침공하기 전에 후방의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발해를 멸망하고, 고려를 침공하여 위협하는 의도를 간파한다. 서희는 고구려 계승의 명분과 아직 소탕되지 않은 여진족의 저항을 압록강을 중심으로 같이 정벌하자고 합의 후 압록강 이남의 통제권을 수락 받으며 강화를 맺고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며, 향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할 강동 6주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둔다.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외교 담판 이후 거란 소손녕과 협상하고 돌아온 뒤 성종에게 겨우 압록강 이남의 땅만 되찾았으니 압록강 이북 요동까지 마저 회수하고 나서 거란의 요나라와 국교를 맺자고 건의 하였다. 하지만 성종이 거란과 여차하여 전쟁나면 고려가 위험하니 그동안 대비해야 한다고 만류하여 요나라와 국교를 맺었다고 한다.
5.1.2. 현대화
외교 담판 때 서희는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으니 압록강 하구의 고려 통제권 요청을 거란의 소손녕이 수락하여 합의하고,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이남까지 지역에 있는 여진의 잔여 세력을 축출한다. 이후 강동 6주의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성을 쌓고 요새화하여 거란의 재침공을 대비하는 전략적 안목과 대국적 시야, 행동력을 보여준다.
고구려 때도 북방 방어선은 1차 요동과 2차 압록강 주변이다. 서희가 수복한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는 고려의 불안한 북방 방어선을 회복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강동 6주는 거란 침공 외 여진과 마찰에도 중요한 요충지로 맹활약 하며 조선 때에도 4군 6진과 강동 6주는 북방 국경선이자 중요한 방어선으로 이용된다.
5.2. 후기[편집]
여요전쟁 이후
내사령(內史令)
내사령은 명목상 내사성 최고의 명예 직위로 고위 왕족, 공신들에게 임명했다. 중서령의 전신이다.
자꾸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이와 같이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와 격이 없는 선례를 남기면 후대에는 왕의 위신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까지도 고려하는 통찰력도 볼 수 있다. 서희 아버지 서필도 광종에게 금으로 된 술그릇을 하사 받은 적이 있는데 금 그릇을 신하가 쓰면 임금은 무엇을 쓸것이냐 지적하고 금 그릇은 임금만 써야 한다고 사양하며 왕과 신하의 격식을 차리는 모습을 보이는데 서희도 이런 원칙을 지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鄭又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7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으며 정신을 차리게 해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회담 이후 고려가 얻은 강동 6주 지역을 2년 동안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중풍으로 쓰러져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開國寺)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사찰에 시주를 하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레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인 서눌도 덕종 ~ 정종 때에 재상 자리에 올라서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대단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서희의 손녀이자 서눌의 딸은 현종의 제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