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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김숙흥(金叔興)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13 목록 댓글 0

1. 개요

제2차 여요전쟁때 활약한 고려의 군인

2. 생애

기록상 김숙흥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요나라)의 성종이 개경에서 퇴각할 때, 귀주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 1만 명을 습격해서 죽였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이전 김숙흥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 출신지도 부친의 성함도 알 수 없고, 다만 모친의 성이 이씨였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양규는 그나마 고려사에 개인의 열전이 남아 있지만, 김숙흥은 개인의 열전이 없으며, 전쟁 당시의 행적이나 사후 보상을 받는 것도 고려사 세가와 자신의 상관이었던 양규 열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름자에 숙(叔)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한자 문화권 이름의 백중숙계와 연관지어 보면 셋째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 급(級)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 양규가 퇴각하던 거란 침략군을 무로대 등지에서 공격하여 승리하다.

귀주에서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참살한 이후 양규와 합류하여 양규와 행동을 함께 하다가 1011년 음력 1월 28일,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애전(艾田)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얼마 뒤에 거란(契丹)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孤軍]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하다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거란군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김숙흥과 양규는 휘하의 고려군 병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와 김숙흥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양규와 김숙흥의 엄청난 전공인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에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훗날 제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지원하고, 전시에 꼭 필요한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 덕분에 외교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더불어 성종 야율융서에게 정신적으로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와 김숙흥의 게릴라 전술에 계속 털리면서 품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모욕을 당한 것이다.

명색이 황제인 성종의 군대는 양규와 김숙흥의 격렬한 저항으로 돌아가는 길이 말이 아니었다. 무기가 녹슬거나 말이나 낙타들도 죽는 등 귀국길이 영 좋지 않았으며, 거기다가 압록강을 건너려던 순간에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정성이 뛰쳐나와 그들의 배후를 찔렀다. 정성의 게릴라 전술도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간 거란군의 위세에 밀려 숨죽이고 있었던 고려군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지금이 기회다!"라면서 복수전을 단행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규와 김숙흥은 백성들의 구출 뿐만 아니라 고려의 병사들에게 거란에 대한 저항 의식까지 심어주었다.

3. 사후

김숙흥(金叔興)에게는 장군을 추증했으며, 또 그의 모친 이씨(李氏)에게 곡식을 지급하게 하고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추증한 장군 김숙흥은 변방의 성을 지킬 때부터 적과 용감히 싸워 파죽지세의 승리로 전공을 세웠으나, 복병이 쏜 화살에 맞아 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거의 노고를 기념하여 마땅히 후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그의 모친에게 매년 곡식 50석을 종신토록 주노라.”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사후 김숙흥은 그의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김숙흥을 장군직으로 추증했고, 그의 어머니인 이씨에게는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김숙흥의 전사 이후 현종의 교서와 보상을 받는 사람이 어머니 이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나 자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거나 자식이 있었더라도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사 당시 꽤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별장 중에서도 10대 별장도 있었으니 최대한 젊게 잡으면 사망 당시 10대 후반, 많이 잡으면 20대 중후반 정도의 나잇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였으니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었다. 뒷날 제11대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도록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평안도 선천에 삼충사(三忠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양규, 김숙흥, 유백부를 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 측에서 김숙흥이 안동 김씨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사 등 관찬 사료에 그의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현재로써는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반도에서 김씨는 신라 계통의 성씨여서 경상도 지역 어딘가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김숙흥이 신라계 김씨 출신이라면, 고구려계 패서호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 상관인 양규와 함께 싸운 것이니 이들의 분투는 고구려계 인물과 신라계 인물이 함께 '고려'라는 하나의 통합된 국가 아래 싸웠던 민족 통합의 상징이자 고구려 계승 의식과 신라 계승 의식이 공존했던 당시 고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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