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려의인물

양규(楊規)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39 목록 댓글 0

1. 개요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했고, 원수(=거란군)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했다."

《고려사》<양규 열전>, 현종이 손수 작성하여 내린 글 中

고려 시대 초기, 11세기 초엽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 맹활약한 관리이자 군인이다.

거란-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요성종이 친정했을 때, 소수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끌려가던 여러 백성을 구출해낸 영웅으로 《고려사》에서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큰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에 해당한다.

제1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중군사 서희가 강동 6주를 차지하여 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제3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고려 군주 현종과 상원수 강감찬이 삼교천 전투, 귀주 대첩으로 길었던 대 거란 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그 사이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제2차 여요전쟁의 주인공으로 고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막아낸 구국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

2. 생애

2.1. 초기

대(對) 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선천군편에 따르면 양규가 안악군 출신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로 볼 때 그의 본관인 안악 양씨가 고구려와 발해의 토착 귀족 가문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발해의 유력 가문인 우성망족 중 하나로 양씨가 있고, 한국사에서 양규 이전 시대에 기록된 양씨라고는 발해의 양씨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양규는 안악 사람인데 고려 현종 2년에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거란과의 싸움으로 통천(通川)에서 죽었다. 벼슬은 형부낭중 벽상공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3 평안도 선천군

그의 부인 홍씨는 은율군군에 봉해진 사실로 보아 안악군 인근의 은율군 출신일 것으로 보이는데, 은율군은 오늘날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도 안악군과 이웃해 있다. 참고로 안악 양씨는 현재 남한에도 300여 명가량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본관이 있는 북한에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 버들 양(楊) 자를 쓰는 양씨의 대종(大宗)인 청주 양씨 측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양(楊)씨들이 모두 청주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중화 양씨, 안악 양씨도 마찬가지로 청주 양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집안으로서 양규 역시 계보를 따지면 청주 양씨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양규는 청주 양씨 시조 양기보다 300년도 더 전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은 높지 않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 고려 7대 목종의 치세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낭중이 되었다."

라는 기록만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측하건대 6대 성종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간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강조의 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피해 승려 행세를 하고 있는 현종이 옹립되자 요나라에선 그걸 명분으로 삼아 황제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였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없이는 이 요충지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2. 제2차 여요전쟁

2.2.1. 전초전: 흥화진 전투

제2차 여요전쟁의 첫 전투였던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 성종 휘하 40만 명의 대군이 양규가 지키고 있었던 흥화진을 1주일 간 공격했으나, 양규와 3천 명의 고려군은 이를 막아냈다.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전왕 왕송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전왕을 시해했기에 그를 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조를 잡아보내면 돌아갈 것이고 안 그러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용서해준다."

이에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항복 권유를 거절했고, 이에 성종이 다시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 옷과 은 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또 한번 보냈다.

요성종은 항복 권유가 소용 없음을 깨닫고 20만 명을 무로대(오늘날의 의주 남쪽 부근)에 남긴 뒤, 나머지 20만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30만 병력을 무너뜨리고 강조까지 포로로 붙잡은 뒤 처형했다. 이후 성종은 항복 권유문을 죽은 강조의 명의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나는 왕의 명을 받고 온 것이지, 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오."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요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고 하자 답변한 말.《고려사》<양규 열전>에서 발췌.

양규는 "우리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을 함락시켜 6,000여 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기지를 마련하여 훗날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거란군은 수도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양규의 진짜 맹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2.2. 대활약과 최후

전력이 계속 갉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에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서경이 거란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백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천 명의 군사를 수습했다.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 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막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의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중간기지인 곽주로 진격하여 야밤에 6천 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하고 성을 탈환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곽주성을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통해 무너뜨렸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순식간에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이후 붙잡혀 있었던 고려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군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군의 손에 떨어졌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을 것이다. 한편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 때(12월 16일) 큰 별똥별이 곽주에 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우연한 천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운석이 곽주의 성곽에 떨어져서 피해를 줬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다. 이 경우 공성측 병력이 수성측 병력의 1/3에 불과함에도 불가사의하게 공성에 성공한 점, 양규가 탈환한 곽주성을 요새화하지 않고 내부 주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점, 이후의 여요전쟁에 곽주성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이 이해될 수 있다. 즉, 곽주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며 양규가 손쉽게 탈환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여 양규가 성을 지키지 않고 떠났으며, 이후 거란군도 곽주성을 다시 사용하지 않은 점 모두가 설명된다. 거란군은 후퇴할 때까지도 제대로 된 후방기지가 없었는데 텅 빈 곽주성을 안 쓸리가 없다. 또한 당시로서는 천재지변에 속하는 운석 낙하는 병사들에게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져서 사기가 꺾이거나 적의 급습에 크게 당황할 여지도 있다.

탁사정이 동북면 정예병을 데리고 튀면서 뒤통수를 쳐서 정예병도 없던 서경도 함락하지 못했던 거란군은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하자 다급해졌는지 개경으로 진격한다. 거란군은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없었기에 서경도 방치한 채 그대로 진격했고, 이에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고, 1011년 1월 1일, 요성종이 수도 개경에 입성했다. 그러나 요성종 휘하의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 하공진이 '고려 왕은 이미 남쪽 수천 리 밖으로 피한지 오래다.'라고 과장하자 추격을 포기하고 개경을 불태우며 곧 철수를 개시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중랑장 보량과 귀주 별장 김숙흥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이 20만 명을 남겨둔 무로대를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냈다.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만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무로대의 거란군을 습격하여 2천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천 5백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천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이 날 하루 동안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천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 후미를 공략했다. 계속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는 동시에 고려인 천여 명을 구출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3차에 걸친 전투를 벌여 천여 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고려인 포로 천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즉, 양규의 목적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 출혈을 강요하는 동시에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었고, 이는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이윽고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이 당시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부대로 퇴각하는 거란의 20만 본대를 계속해서 공격해 연전연승했는데 거란군의 입장에서는 강조의 30만 대군 중 3만이 죽고 27만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그 군세가 다시 모인 것마냥 두려웠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려군들이 이곳 저곳에서 찌르는데 부딪힐 때마다 거란군이 수천씩 죽어나가니까 말이다.

이런 양규의 공적은 임경업이 병자호란 때, 요퇴(要魋)를 공격한 것에 비견되어 폄하될 우려가 있는데, 비록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한 것은 동일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임경업은 이미 화의가 다 끝난 상태에서 무단으로 공격한 것이었고, 양규는 엄연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전 의사가 있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단순히 철수 중인 적을 쳤다고 폄하된다면 살수대첩이나 귀주 대첩 역시 철수하는 수나라군과 거란군을 공격한 것이며, 노량해전도 철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양규의 게릴라전은 언제 요성종이 친정하는 거란 본대와 맞닥뜨려 전멸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그리고 하술하겠지만 양규는 실제로 거란 본대와 맞닥뜨려 전멸하는 것으로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는지 몸소 입증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수급을 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고 말았다. 거란 황제의 최정예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요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양규와 김숙흥은 이 마지막 싸움에서 고슴도치와 같이 화살을 맞은 채로 전사했다고 한다. (애전 전투)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방금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서 빼앗은 포로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들을 안치하기 위해 군현을 새로 설치했을 정도였다.

고려의 무인으로서 극한의 분투를 벌였던 양규 휘하의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결사적인 맹공에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데다가 큰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을 지경이었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흥화진의 정성이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당시 반쯤 건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요성종이 건너고 후미 부대가 아직 건너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성을 비롯한 고려군이 기습하자 지칠대로 지친 요 성종의 직속군조차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강을 건너느라 빠져 죽었을 것이다.

양규는 원군도 없이 얼마되지 않은 병력으로 1개월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수많은 적군을 참살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거란군에게 무려 400km에 달하는 고립을 강요했고, 초반에 통주의 주력군이 패배한 여파로 파죽지세의 기세인 거란군에게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고려의 친조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으로 대충 마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탐냈던 노른자위 강동 6주를 어영부영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무수한 노동력의 손실과 추가적인 배상 등에 시달리면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들의 희생으로 고려는 비록 국토가 초토화되긴 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하는 등 추가적인 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2.3. 사후

(중략) 그 전공으로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처인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손수 다음과 같은 교서를 지어 홍씨에게 내려주었다.

“그대 남편은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또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과 같은 절개를 지니고서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그 충정은 비할 데가 없었으며, 밤낮으로 노고를 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하였고, 원수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성과 진이 온전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씩씩해졌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전사하였도다. 빼어난 전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공에 따라 벼슬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을 간절히 하여 더욱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대에게 해마다 벼와 곡식 1백 석을 종신토록 내려줄 것이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문종이 즉위하여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에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야 할 것이니,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문종이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하다」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1019년(고려 현종 10)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가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양규가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뒷날 11대 문종(현종의 3남)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이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시대가 되면 양규에 대한 기록은 많이 줄어들지만,

읍성(邑城)은 견고하지 아니하며, 산성(山城)은 무너지고, 내지(內地)의 익군(翼軍)은 모두 연변(沿邊)에 소속하고, 변향(邊鄕)의 나머지 백성들은 드문드문 초야(草野)에 흩어져 있는데, 만약 현종(顯宗) 때 거란병(契丹兵)이나 고종(高宗) 때 몽고인(蒙古人)과 같이 대거 내침(內侵)하면 부인(婦人)과 어린아이들은 어디에다 두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양규(楊規)와 같은 자가 군사를 잘 쓰고 박서(朴犀)와 같은 자가 성(城)을 잘 지켰는데, 장차 그러한 손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10월 10일 경진 24번째 기사.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읍성·산성의 수축과 객관의 설치, 어염의 생산을 상서하다

문종 때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성곽 보수에 대한 상소를 올릴 때 군사를 잘 부린 고려의 장군으로 예시를 들고 있다.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하기를 문선왕(文宣王)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

세조 대에서는 양성지가 무묘 건립을 주장할 때 무묘에 배향될 무장 중에 양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신들의 반대로 무묘는 결국 세워지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양규가 언급된 실록의 임금들인 문종과 세조는 둘 다 조선의 군사 확충에 기여했던 임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실록 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천군 편에 의하면 선천에 삼충사(三忠祠)라는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고려 때 있었는데 뒷날 전란으로 없어졌다가 인조 때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당에는 양규, 김숙흥, 그리고 당시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다는 통주도부서 유백부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정조 때 나온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의 명장들의 일대기를 모은 전기인 <해동명장전>에도 양규의 전기가 들어가 있다.

이렇듯 양규는 조선시대에도 옛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조선 사람들에게까지 계속 기억되었던 것이다.

2.4. 후손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겠지만 고려사에 1040년 안북대도호부사로 부임 될때 뜻과 지략이 많고 군사에 능하니 변경에 우려스러운 일이 생길 경우 그를 대신하여 보낼 인물이 없어 당장은 외직 보임이 불가하다는 최충의 간언이 있는 걸로 보아 아들 양대춘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4년(1109) 음력 2월에는 양규의 증손자 양제보(楊齊寶)가 등장한다. 별무반 신기군(神騎軍) 직장(直長)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예종에게 은합(銀榼)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전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별무반 신기군 소속이었으면 고려의 여진 정벌에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23년 6월에 인종 대에 가발병마판관(加發兵馬判官)으로 일하던 양제보는 여진 병선 30척이 국경을 침범한다는 잘못된 소식이 들려올 때에 파견되어 경주까지 갔으나 적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한, 1135~1136년에는 시랑이 되어 대동강을 지키는 후군으로 주둔하였다.

3. 평가

양규는 당대 고려의 지휘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야전에서의 활약인데, 마치 현대의 특수전을 연상시키듯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인질을 구출하는 등 게릴라전에 능했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흥화진 전투를 지휘하고 곽주성을 탈환하는 등 수성전과 공성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비록 활약한 시기가 짧아 기록이 많진 않지만 그 행적을 고려하면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양규가 세운 전공의 영향력 역시 큰데, 양규의 활약 이전에는 고려의 야전군 태반이 강조가 지휘한 통주 전투에서 일순간에 궤멸당한 상황이었다. 거란군 주력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양규가 그 배후에서 이런 맹활약을 펼치지 않았다면 서경의 항전과 현종의 파천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위기에서 기라성같은 활약을 펼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전투에서 보여준 충직함이나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모습, 잡혀간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는 모습 등 전공뿐만 아니라 인격이나 행동 측면에서도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조선 시대에는 양성지가 무성묘를 만들기 위해 배향한 인물 중 하나로 양규를 언급하기도 했으며, 애전 전투가 일어난 지역에는 양규와 김숙흥, 유백부를 모시는 삼충사라는 사당이 지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양규는 서희, 강감찬과 함께 여요전쟁의 주역 중 하나였다. 다만 현대에는 다른 둘에 비해 유독 양규는 인지도가 떨어졌었다. 서희는 외교 담판 한 번으로 적을 물러나게 만든 인상적인 활약 때문에 유명하고, 강감찬은 3차례에 걸친 여요전쟁을 귀주대첩이란 거대한 승리로 마무리하는 역할이었다. 반면에 양규가 활약한 제2차 여요전쟁은 이목을 끄는 결정적인 전투는 없었고 나중에 거란이 또 쳐들어오니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 갈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여요전쟁이 서희와 강감찬 2명 빼고는 인지도가 낮은 시대이다.

또한, 서희는 본관과 묘소가 있는 곳이 이천이고, 강감찬은 서울특별시 관악구(금주 낙성대) 출신이다. 이천시는 서희를 대표 인물로 내세우고 관악구는 강감찬의 출신지로 초명과 시호를 쓰는 등 강감찬을 기리며 널리 알리고 있지만, 양규는 출신지가 오늘날 북한 지역인 황해도 안악군 출신일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써는 추측에 불과하며, 주된 활동지역과 전사한 곳도 모두 북한 지역이라서 비교적 관심을 못 받아온 탓인지 역사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으면 이 인물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으며,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도 학창시절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였음에도 양규를 잘 몰랐다고 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