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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윤관(尹瓘)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59 목록 댓글 0

1. 개요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한 글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고려의 관료. 동북 9성 개척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무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초기의 서희, 강감찬이나 조선의 김종서, 권율 등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다. 이들과 비슷하게 군사적 업적 때문에 무관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린 케이스. 고려는 예종과 공양왕 때를 제외하고는 무관을 과거 제도를 통해 뽑지 않았다. 따라서 전시에는 문신이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무신들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문관들은 병법에 능해야 했고 반대로 무관들은 실전 무술이 뛰어나야 했다. 단, 윤관은 여진 정벌 당시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란 문반, 무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비상설직을 받았다.

2. 경력

공신호: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후에 전쟁 실패의 이유를 들어 박탈된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의 장관, 판상서이부사는 상서이부의 감독관. 지군국중사는 임시직으로 보이며 대원수인 윤관의 결정권을 확고히 해주기 위해 내린 것으로 보인다.

3. 생애

고조부: 윤신달(尹辛達)

증조부: 미상

조부: 윤선지(尹先之)

부친: 윤집형(尹執衡)

부인: 경원군부인(慶源郡夫人) 이씨(李氏)

자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식(尹彦植)

윤언이(尹彦頤)

윤언민(尹彦旼)

윤언영(尹彦榮)

윤대원(尹大原)

윤씨(尹氏)[출가]

윤씨(尹氏)[출가]

파평대부인 윤씨(坡平▨大夫人 尹氏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이고 아버지 윤집형이 '검교소부도감'이라는 직책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집안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다만 검교소부도감이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므로 집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윤관의 외가 또한 알려져 있지 않고, 파평 윤씨 일가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확고하게 자리잡음은 윤관 이후의 일이거니와, 당장 윤관의 출생연도부터가 미상이다.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의 즉위를 요나라에 알린 이후 출세길이 트여 여러 내직을 거쳤다.

1104년 여진족이 강력하게 성장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북방에 진출했으나 패배해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이에 숙종에게 고려군의 문제점을 진언하고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이라는 부대를 만들어 양성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천리장성 밖에서도 근처에 자리잡은 여진족들에 관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리장성 밖 여진족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만주에 위치한 여진 족장인 '완안오아속'에 의해 여진족 통일 작업이 펼쳐졌다. 그러면서 여진족이 천리장성을 위협하자 간접 지배가 아닌 군사적 점령을 통한 직접 지배를 고려한 것. 고구려 계승 의식에 따른 고토 수복이라는 명분과 오랜 전성기를 거치며 늘어난 인구 수에 따른 토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해 훈련을 시키며 침략을 준비하던 중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한다. 예종은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윤관으로 하여금 1107년 17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오늘날의 함경도 일대로 출진해 그 지역의 여진족을 격파하고 일대에 동북 9성을 쌓게 하였다. 9성은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의 9성인데 구체적인 위치를 두고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다. 특히 윤관이 고려와 여진족의 국경을 표시한 비석을 세웠다는 선춘령의 위치가 가장 논란이 된다. 함흥평야설, 두만강 유역설, 두만강 이북설, 함경도 일원설 등이 있는데 조선 시대에도 국경 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에는 윤관이 20만 대군을 앞세워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땅을 손쉽게 점령해 9성도 어려움 없이 세웠다. 이 공으로 예종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개경에 가서 큰 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진족 족장들을 속여 잔치에 부른 다음 모두 술에 취해 있을 때 몰살시킨 탓으로 여진족 전체에게 미움과 불신을 샀다. 그래서 얼마 안 가 여진족이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동북 9성은 점령을 넘어 과연 유지할 수 있는지부터 의심스러운 난관에 봉착했다.

사실 윤관의 전략은 9성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병목 지형으로 막혔다는 정보를 믿고 짠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회로가 여럿 있어서 9성이 모두 여진족의 공세에 노출된 셈이었다. 전쟁 전 지세와 판세 분석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9성끼리의 거리도 너무 멀어 서로 연계가 안 되어서 적에게 둘러싸이면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인근 여진 부족을 무리하게 학살하고 전쟁 전 대전략을 잘못 짠 탓에 우호세력이 될 수 있는 부족들까지도 모두 적이 되었다. 이러한 수비상의 문제점과 재정 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구시대적 역사 해석에서는 윤관의 공을 시기한 조정 대신들의 모함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나, 9성의 수비에 큰 문제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당시 여진족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주축으로 그들을 오늘날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는데, 특히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말이 좋아서 동북 9성 진출이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잘 살던 고향이 외세에게 침략당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35개 마을을 불태우고 4940명을 학살했다고 하니 여진족 입장에서 고려는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였다. 게다가 윤관은 포로를 풀어준다는 미끼를 풀고 잔치를 열고는 초대한 여진족 추장 400명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 원수로 여기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유목민족에게는 초대한 손님을 가족처럼 환대하는 풍습이 있는데 대놓고 엿을 먹여 버렸다. 그러니 석성의 여진족들은 싸움에 졌음에도 항복도 하지 않고 바위에 몸을 던져 자살할 정도였다. 고려군에 원한을 품은 여진족들은 완안부에 복수를 요청했고 완안부의 아골타는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갈라전(고려가 장악한 여진 지역의 명칭)만 잃겠습니까? 모든 부족이 우리의 곁을 다 떠날 겁니다!"라고 주장하여 주변 세력을 끌어모아 죽을 각오로 저항했다. 결국 고려는 아홉 성 중 두 성을 잃었고 여진족과 회전을 벌여 대패했다.

여진이 동북 9성에 대한 반환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2성은 함락된 상황이었고 고려는 한국사에서 역대급 손꼽히는 패전인 갈라수 전투를 맞이한 상태였는데 갈라수 전투에서 오연총이 이끄는 5~7만 남짓한 고려 대군이 회전에서 여진족들에게 대패했다. 여진족은 9성의 곳곳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한때 길주성은 여진족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윤관과 오연총의 구원군은 여진족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밤 사이에 고려군이 토벽을 쌓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고려의 방어능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여진족은 장기전을 계획한 반면 고려는 갈라수 전투 참패 이후 전쟁 수행 역량이 거덜난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때 여진족이 승리는 했어도 9성 전부를 함락시킨 상황도 아니었고 고려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고려는 여진족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따라서 여진족은 강화를 시도하여 9성 지역을 받은 것이다. 이는 귀주 대첩 이후 고려가 거란족에게 취한 자세와 비슷하다. 여진족 역시 갈라수 전투 이후에는 처참한 소모전으로 여력을 모조리 갈아넣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도 다 죽자는 치킨게임보다는 외교적 화친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금나라가 요나라와는 달리 對고려 외교를 온건일변도로 간 것도 동북 9성에서 겪은 처참한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보면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해답일 터이다. 고려, 여진이 전쟁으로 국력과 인명을 끔찍하게 소모했으므로 동북 9성을 돌려주고 외교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9성을 돌려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여진족이 금나라라는 신흥 제국을 건설했을 정도이니 분명히 당시의 여진족은 강했다. 어찌 보면 고려의 침략 시도가 여진족에게 완안부라는 구심점을 만들어주고 단합을 도모해 준 꼴이다. 고려가 금나라 건국의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뒤 윤관은 패전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됐다. 예종의 비호로 다시 최고 재상직인 '수태보 문하시중'으로 복직했으나 얼마 못 가 11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다가 '문숙(文肅)'으로 바뀌었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고려사 윤관 열전을 보면 그에 대한 기록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출생연도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1040년이라고 한다. 또한 여진 정벌에 참전한 사령관들은 부원수 오연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60대의 노인들이었는데, 그나마 오연총도 당시 50대였기 때문에 당대의 기준으로도 꽤나 나이 많은 노장이었거니와 패배도 많았다. 윤관 열전에도 여진 정벌 기사는 사령관 윤관이 붙잡히자 척준경이 구해주었다는 무용담이 많다. 그만큼 전투에서 윤관의 활약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명장이라고 보기는 모자란 감이 있다.

그러나 국왕 숙종의 명을 받들어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한 별무반 양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강력한 부족체제를 중심으로 강대국인 요와 송을 연달아 털어먹을 정도로 날쌘 기병군단을 보유한 완안부의 여진을 상대로, 고려군의 총지휘관으로서 많은 피해를 감수하긴 했어도 어떻게든 9성을 지켜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여진의 병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고려가 20만 대군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여진이 소유한 기병대의 위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출하점 전투에서는 금의 시조 완안아골타가 이끄는 군대 4천여 명이 요의 천조제가 친정한 10만 군대를 박살내었다. 그만큼 여진의 기병 군단은 강했고, 이를 견뎌낸 고려도 상당한 나라였다. 척준경을 발굴해낸 것도 윤관인데, 척준경이 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이를 듣고 구해준 인물이 윤관이다. 그래서 척준경은 윤관 휘하에서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분투했고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행적을 보면 뛰어난 장군이라기보다는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지도력과 굳은 의지가 장기인 '뚝심형 리더'의 인상이 더 강해 보인다. 말하자면 '프로젝트 기획자'형 스타일. 고려사 말미에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전장에서도 경서를 휴대했고, 어진 이와 착한 것을 좋아함이 당대 최고였다." 하고 그를 호평했다. 그리고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 역시 그를 매우 신뢰해 같이 여진 정벌을 주도하고 그것이 실패했음에도 비호해 줬다. 예종은 이것이 자신의 책임이지 어찌 윤관의 책임이겠냐며 그의 처벌을 무마시키고자 했지만 윤관을 경계하던 관료들의 강력한 요구로 그를 파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윤관을 복귀시킬 때 예종은 오히려 더 높은 품계인 문하시중에 제수하며 그를 대우하고자 했다.

윤관은 북방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말년에 출세했어도 그것을 누려보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아들 윤언이와 손자 윤인첨도 재상직에 올랐다. 윤인첨이 활동하던 시기는 무신정권 시대여서 무신들의 간섭과 위협 때문에 고생 좀 했다. 참고로 윤인첨은 조위총의 난 때 진압군의 총 지휘관이기도 했다. 윤관 이후 파평 윤씨는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가문발로 컸다기보다는 무난하게 높은 가문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최상위권으로 드높인 유형에 가깝다.

4.2. 비판

역덕후 사이에서 윤관은 꽤 박한 평가를 받는데, 여진 정벌 과정과 결과를 재평가하면서 윤관 및 고려군이 저지른 실책들도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좋게 말해서 스타일적으로 기획자나 리더라고 봐줄 수 있지 도저히 윤관을 좋은 기획자라고는 평해줄 수 없다는 것이 역덕 커뮤니티의 중론이다. 진정한 명장은 싸우기 전에 이기는 판을 구축해놓고 싸운다고들 하는데, 윤관은 오히려 지는 판을 만들어놓고 전쟁터에 들어갔다. 지리분석을 엉망으로 해 동북 9성이 서로 지리적 연대를 맺지 못하고 적진 한복판에서 제각기 따로 노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사전계획을 그르쳐 방어선의 형성이 심대하게 취약해진 것이다.

이 전쟁 이후 친 고려파 여진족은 사실상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완안부를 비롯해 여진족들이 고려에 공물을 바쳐오면서 형식적 제후국 관계를 이어갔으므로 겉으론 별 차이가 없었지만 안으로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완안부 여진족과 대립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여진족들은 사실상 고려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악한 상태였다. 특히 11대 문종 재위 시절 동안 여진족의 추장과 부족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주, 기미주,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켜달라는 요청이 폭증하여 실제 11개 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전쟁 초기에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일거에 9성을 점거한 작전에서 윤관이 보여준 전략적 안목은 상당히 처참했다. 뒷통수와 양민 학살, 밑도 끝도 없는 적대행위로 일관된 것이 윤관의 점령지역 관리책이었다. 하다못해 현지 정세에 어두워 실책을 거듭한다는 현대의 미군도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부분이다. 그 미군도 점령지에서 동맹세력을 만들고 싸운다.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부족을 아군으로 돌려 적 규모를 줄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지리정보나 현지정세 같은 정보를 획득하고 전장에서 병력으로 써먹는 등 효용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진의 풍습을 모를 리도 없는 바로 옆 나라인 고려에서 근본 없는 학살투성이 현지정책을 실시해버렸다. 영토획득이라는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어 대국을 그르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보와 지원을 제공하고 고려에 우호적이던 친고려 여진부족들을 잔치를 구실로 부르고선 뒷통수를 쳐서 지도부를 싹 쓸어버린 것은 동북 9성 전역에서 윤관의 대표적 실책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동북의 여진 부족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러운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윤관의 동기는 이해한다 해도 학살이라는 수단과 그 결과가 최악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국경 인근 여진 부족들이 완안부 영향을 받는 의심스러운 불온세력이며, 그 중 일부가 간혹 배신이나 간첩질, 보급 약탈 등의 산발적 피해를 입힐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 해도 전면전의 리스크보다 내버려두는 비용이 저렴하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한 채 싸움에서 전과를 내고 위압하여 회유하는 것도 외교적 타협안일 수 있다. 성가시고 모호한 스탠스라 해서 죽여버리는 행동은 단세포적 해결책일 수 있는 것. 애초에 같은 나라 신하나 지방 호족도 무조건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니라 복잡하고 모호한 심리로 애매하게 소속되기 일쑤이다. 이는 당장 고려 개국 시기 태조 왕건과 지방 호족간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쓰는 말도 다른 이민족의 땅을 침공해 얻는 일이 쉬울 리가 없으며 골치 아픈 사정을 감수해야 함은 어쩔 수 없다. 그 혼란스러운 현지 사정을 극복하는 게 대군을 맡은 총사령관의 군정 역량이다. 군대의 사령관이 되면 단지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이순신 같은 명장처럼 민정과 현지인 민심 관리에도 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관의 성급한 학살 탓에 우호세력으로 휘하에 쓸 수 있었거나 최소한 중립으로 돌릴 수 있었던 부족들이 죄다 완안부에 붙어버려서 적의 수만 왕창 불려준 셈이다. 동북 9성 개척 당시에는 완안부조차 고려의 17만 대군에 질려 싸움을 망설일 지경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고려 코앞에 붙어 있는 동북의 여러 여진부족들은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관의 지나친 학살 조치들 때문에 여진은 굴복하느니 죽는 게 낫다고 고려에 결사항전할 결의를 다졌다.

고려군의 사령관이 불렀다고 오는 추장이라면 최소한 고려를 믿는 이들이었다. 고려의 눈치를 보고 대화와 타협이 통하는 상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윤관은 고려에 적대하는 부족이 아니라 고려에 입조하려 하고 고려의 힘에 위압감을 느끼는 부족을 대거 죽여버린 꼴이다.

물론 고려에 우호적이라 한들 민족이 다르니 이득과 힘의 강약을 셈하며 줄을 타는 모호한 관계인 건 어쩔 수 없다. 당연히 완안부 영향권과도 연이 닿아 서로 연통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국경 여진 부족들이 죄다 배신 확정의 완안부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 상에서 여진족은 민족이 유사하다 하여 서로 연대감을 가진 단일 문화권 세력인 적이 별로 없었다. 제각기 할거한 채 서로 갖가지 이유로 갈등하기 바쁜, 무수히 이합집산하는 독립된 집단에 가깝다. 여진 부족들이 고려만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부족간에도 사소한 원한으로 서로를 배신하고 복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윤관이 죽인 여진족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양쪽의 눈치를 보며 여기저기 끈을 대면서도 당장 밀려오는 고려의 대군에 더 위압된 상태의, 내적으로 갈등하며 이해타산을 따지는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학살당한 여진 부족들이 애초에 고려에 배신하기로 맘먹고 완안부의 영향권에 소속되어 자발적 충성을 바쳤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완안씨가 같은 여진족이라 고려보다 특별히 더 친근하게 여길 리도 없다. 그저 이득이 되면 연결하고 수틀리면 적대하던 전형적인 여진 부족 간의 관계임에도, 윤관이 뒤가 없는 극단적 학살을 자행하니 선택지가 없어 살아남기 위해 완안부의 밑에 들어갔을 공산이 더 높은 셈이다.

즉, 학살로 인해 최소한 고려가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 눈치보며 알아서 고려에 복종할 세력이 싸그리 적진으로 투신해버린 모양새이기도 하다. 결국 친고려, 중립, 반고려 세력 중 친고려와 중립파의 뒤통수를 친 순간부터 여진족은 앉아서 몰살당하든가 아니면 싸우든가 하는 양자택일에 놓였다. 흔히 명장들이 그러하듯이 회유정책으로 여진족을 살살 흔들면서 내분을 유도하고 아군을 늘려 여기저기 박아가며 싸웠다면 유리한 전황으로 이끌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윤관은 인근 여진부족들을 학살하고 배신하여 여진족들을 모조리 적으로 만들었고 동북 9성은 스스로 만든 적들에게 포위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윤관은 군대 지휘력도 낮게 평가받을 만한 사료가 많다. 윤관 하의 고려군은 수차례 전멸 위기를 맞았고 갈라수 전투에서 칠천량 해전급의 대참패를 겪기도 했다. 고려의 야전군이 싹 소멸되는 수준의 한국사 역대급 참패였다. 갈라수 전투 참패는 동북 9성 유지 실패의 제1원인이기도 하다.

국사책에서 동북 9성 반환 부분은 정신승리 사관으로 "먹으려면 못 먹을 것도 없었지만 내부에 먹물들이 발목을 잡아대고 여진족이 졸라대서 쓸모없는 땅 돌려줬다"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두루뭉술하게 써 있다. 간혹 비판적인 스탠스의 기록도 여진이 게릴라전을 벌여대서 물러났다 수준이다. 그러나 실상은 고려의 국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도저히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갈라수 전투에서는 게릴라는커녕, 고려 주력군이 회전에서 정면으로 싸워서 깨졌다. 상식적으로 오랜 세월 조련한 17만 정예 대군을 동원해 수만의 피를 흘려 얻은 영토를 미쳤다고 공짜로 퍼주겠는가.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털어 국력을 몰빵했지만 날려먹고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다.

거기에 동북 9성 진출 실패는 고려가 영토 확장에 실패했다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갈라수 전투 승리라는 대업을 성취한 완안부에게 엄청난 위상과 명분을 준 것이다. 역사적으로 침략자에 맞서 싸워 고향을 지키며 승리한 지도자들은 막대한 정치적 자산을 갖게 된다. 갈라수 전투 승리 이후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뭉치게 되었고 이것은 금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윤관의 섣부르고 미숙한 침공이 금나라를 반쯤 만들어줬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면모 때문에 역덕후 사이에서 윤관은 트롤러 취급으로까지 평가가 떨어진 인물이다. 척준경의 인간을 벗어난 신들린 무공과 지는 싸움을 이기게 해주는 항우급의 싸움 실력이 아니었으면 목이 진작에 떨어졌을 위인으로 보는 급이다. 다만 이런 부분은 대중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

4.3. 반론

전쟁 초기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해버린 점, 지리 분석이 뒤떨어졌다는 점을 들어 윤관이 희대의 트롤러라 다름없다는 평가가 계속 제기되었다. 다만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 혹은 결과론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 전쟁 초반에 여진족 추장들을 몰살시켰다는 점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몰살당한 여진족 추장들은 이미 고려에서 믿을 수 없는 족속으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靺鞨)에서 떨어져 나온 종족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뒤에는 취락을 이루어 산천에 흩어져 살아 그때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중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삭주(朔州 : 지금의 평안도 의주 부근) 부근 지역의 거주민들은 간혹 귀부해와서 신민 노릇을 하다가도 곧 배반하곤 했다. 영가(盈歌)와 오아속(烏雅束)이 이어 추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게 되자 그 기세가 점차 강포해졌다.

ㅡ 『고려사』 윤관 열전

당시 윤관이 몰살시킨 여진족 추장들은 정평군 일대에 있던 여진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했다고 대놓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여진족 추장들을 모아올 때 허정과 나불을 석방한다는 핑계를 대고 불러들였는데 허정과 나불은 고려를 공격할 계획을 꾸미다 체포된 여진족 추장들이었다. 이들을 석방한다고 했을 때 모였던 여진족 추장들 중엔 단순히 허정과 나불과 친분만 있다거나 고려 조정의 명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려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허정과 나불이 고려 공격을 계획할 때 찬동했던 여진족 추장들도 많이 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여진족 추장 몰살은 단순히 당장의 이익을 노리고 벌인 것이 아니라 통수를 칠 여지가 있는 여진족들을 제거하여 후방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정평군은 윤관이 여진 정벌을 진행할 때 단순한 후방만 되는 곳이 아닌 본토에서 점령지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될 수 있는 곳이라 행여나 정주 일대 여진족들이 변심해서 교란 작전을 벌이면 윤관 입장에선 대단히 골치가 아파지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미 통수를 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최소한 중립을 계속 유지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던 지라 차라리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판단이 당대엔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윤관 열전에도 나와 있듯이 윤관이 여진 정벌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이미 병목만 차지하면 여진을 평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상황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이야기인 걸 알지만 그 당시의 정보 수준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져도 이상한 게 없었을 상황이었다. 함경도 일대는 발해 멸망 이후 사실상 200여 년 동안 한반도 왕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지금이야 구글 어스로도 함경도 일대가 어떤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거 없다. 저걸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 수준으로 생각하면 그렇잖아도 배신쟁이인 여진족들을 굳이 길잡이 삼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윤관의 여진족 추장 학살로 여진족 부족들이 대거 완안부에 붙었다고 서술되었는데 사실 윤관의 여진 정벌 이전에도 갈라전 여진족 부족들 대다수가 완안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갑진일. 동여진(東女眞)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자를 입조시켜 왔다. 고려의 의원(醫員)으로 완안부(完顔部)에 거주하는 자가 있었는데 병을 잘 치료하였다. 당시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원더러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자신이 사람을 시켜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사람이 과연 완쾌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의원을 국경까지 보내주었는데 의원이 왕에게,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여진의 부족이 날로 강성해지고 군세가 갈수록 기세를 떨친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그때부터 흑수 여진과 사자를 교환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계속 사자가 끊이지 않았다.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한 후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오자 우리도 사람을 보내 축하하였다. 이에 영가가 자기 사촌 동생인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하니, 왕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숙종 8년(1103) 계미년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기 4년 전에 고려는 흑수, 즉 갈라전 일대에 있는 여진족들에게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 완안부에 포섭되는 것을 막으려 했었다. 하지만 영가의 사촌동생 사갈이 고려로 답례를 하러 갔다 오는 길에 고려가 여진족들이 완안부에 복속되는 걸 방해하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영가는 석적환을 갈라전 일대에 보내 갈라전 일대 여진족들의 귀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이는 1104년 2월 정주 일대에서 임간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대패하고 정주 선덕관성이 약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윤관이 임간을 대신해 여진족을 물리치려 했으나 윤관도 패배했고 고려는 결국 1104년 6월에 여진이 사절단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자 받아들이고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냄으로써 마무리지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려로서는 예전처럼 여진족을 상대로 적극적인 회유책을 쓰기가 어려웠다.

결국 윤관이 여진족 추장들을 몰살시켰던 것은 단순히 단기적인 안목으로 저지른 실책이라 보긴 어려운 것이란 주장이다.

4.4. 여진족 추장 학살의 문제 결론

결국 비판과 반론의 주 요지는 여진족 추장들을 학살해 이후 구도를 망가뜨렸다는 점에 있는데, 사실 숙종 시기 때 고려에 입조 귀부한 여진족들이 급증한 것은 완안부의 성장을 경계하고 두려워서 피난 내지는 보호를 받으려고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숙종 시기에 고려가 완안부에게 패하면서 천리장성 밖 기미주나 입조한 여진족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형식상 완안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윤관은 그런 동여진 추장들을 입조하지 않은 추장들과 함께 가리지 않고 술자리에서 모조리 제거했다.

즉, 이 시점에서 윤관에 대한 비판과 반론은 둘 다 맞는 말이 된다. 윤관 입장에선 저들 중 일부는 등 돌린 것이 맞고, 본래 친 고려파였으나 완안부에도 줄을 댄 것도 맞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고려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하지 않아서 적에 해당하니 배신의 위험은 있다는 것은 맞았다. 애초에 여진족이 고려에 절실히 충성할 이유는 없고 애매모호하게 간을 보는 태도가 당연한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나 1차 전쟁 이전, 여요전쟁 이후 늘어난 고려의 영향력과 기미주를 본다면 저들이 친고려파로 오랫동안 고려에 귀부 내지는 최소 영향을 받아온 것은 명확하여 완안부가 밀리면 다시 고려에 붙을 가능성도 큰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서 반론 측이 여진 부족들이 반드시 배신할 수밖에 없는 것마냥 후대 고려의 사료적 인식을 과잉 투영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한계가 있다. 고려의 영향력 상실로 완안부에 여진 부족들이 귀부한 결과나 그 이전에 유목민 특유의 산발적 약탈이나 소요사태를 일으킨 사례를 결과론적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재반론이 가능한 것.

완안부조차 당시엔 패권 확정 전 단계라 고려의 대군을 두려워했으며, 하물며 인근 여진 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판 항목에서 상술했듯 무수히 할거하는 여진은 단일체가 아니다. 그저 제각기 뜻이 다르고 난립하는 호족의 독립 상태에 불과하지, 무슨 삼국지 게임마냥 일시에 완안에 충성하는 통일국가가 된 것이 아닌 것이다.

고려에 대한 배신 뿐 아니라 여진 부족간 내분과 복수, 수백 명 단위 부족원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문제는 조선 시대까지 몇백 년간 여진 민족에 지속된 결함이었다. 그런 여진 부족들이 고려 뿐만 아니라 완안부와도 소통하며 형식적으로 따랐다 한들 그것이 최종적 배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반론 측은 '완안부 영향권 = 고려에 적대' 라는 후대적 단순화를 하고 있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반론이 비판하던 결과론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사용하는 문제가 있다.

이 지점에서 여진족 제거는 비판거리가 될 만하나, 윤관의 작전 목적 자체가 17만 대군으로 신속히 제거 및 점령 후 대규모 사민으로 방어 요충지를 지켜 땅을 넓히기라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17만이나 되는 대군의 원정은 나라에 큰 부담이 될 만한 엄청난 규모의 국책 사업이었고 작전의 성격상 신속함과 주요 방어 거점을 사수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만큼 내부의 적이나 숨어든 세작들로 인해 작전이 누설되거나 전투 중 성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우려는 더 클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17만 대군이면 따로 여진족의 원조가 없어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해도 이상하진 않을 병력이긴 했고 실제로도 초기 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여진족의 강역을 점거하였으니 온전히 틀린 판단도 아니었긴 하다. 여진족 포섭 없이도 고려 대군이 강하니 문제없다는 일종의 오만이 싹틀 근거는 있었던 것.

거기다 저들은 상황이 어떠했든 간에 이전까지 배신 행위를 빈번히 해왔으며 어차피 땅을 점령하고 나면 고려인들이 오는 만큼, 성공했을 시 친고려 여진족들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제거하는 것이 더 나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윤관 입장에서는 저들 중 고려에 붙었거나 붙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도 반론의 항목에 나온 대로 그 위험성도 알아 그냥 한 번에 지웠다고 해석해도 윤관의 동기 이해에 큰 무리는 없다.

물론 정작 동북 9성 환원 과정과 오연총, 김한충 열전에서도 알다시피 동북 9성 사이의 샛길로 방어는 쉽지 않아 윤관의 방어요충지만 사수하면 문제 없다는 전략 전제 자체가 구멍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여진족 몰살은 그들의 유래 없는 단합을 불러오는 악수가 되었다.

그 문제에 더해, 배신을 빌미로 여진족의 지리 정보나 지원을 경시하는 고려의 사정을 납득해 버리는 반론 측의 주장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정적 지리적 오판과 전장에 대한 무지 및 방심으로 동북 9성 전역의 수습에 완전히 실패하였음에도 위험하고 배신을 일삼는 여진족을 우군으로 두느니 제거하는 게 안전하다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애초에 반론은 그 인근 여진 부족의 배신 위협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고 있다. 마치 로마 제정의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의 군단 전멸 대참사 같은 건을 상정하는 모양새인데, 고려의 대군에 위압당해 겁에 질린 여진 부족들이 지리적으로 바싹 붙은 고려의 보복을 염려하는 와중에 그런 뒷감당 안 되는 짓을 벌일 가능성도 희박하지 않은가. 여진 부족이 고려 대군을 모조리 살해할 능력도 없는 판국이다. 일부 고려 부대에 기습을 성공해 보아야 후속 고려군에 본거지가 불타고 부족민들이 학살당하며 터전을 잃을 뿐이니 여진 부족들은 고려 대군의 눈치를 보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론에서 지적한 여진을 못 믿을 사례이자 고려가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옹호하는 사료를 따져보아도 학살이 필연이란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게 비판측의 요지이다. 반론에서 지적한 허정과 나불의 배신 및 고려 공격계획 같은 사례라 해보아야 무슨 세력을 불린 홍타이지의 조선 침공같은 국가적 위기 레벨이 되지 못한다. 완안부의 주력도 아니고 고려에 대한 우호와 경계를 오가며 눈치보는 인근 세력, 연합 없이 각기 갈등하며 따로 노는 각 부족이 그 정도 전력을 가질 리 없는 노릇이다.

임간이 공로에 눈이 팔린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 갔다가 도리어 패배하고 태반의 군사를 잃었다. 여진은 승세를 타고 정주(定州)의 선덕관성(宣德關城)에 난입해 수많은 인명과 재물을 죽이고 노략질해...

ㅡ 『고려사』 윤관 열전

이처럼 그 본질은 위 사료에서 언급된 것 같은 국경 군대 기습 및 약탈 후 이탈 같은 식에 불과하다. 비록 그 피해가 참담해 보이지만 수십만의 목숨을 관장하는 대군의 사령관은 거시적 안목에서 사안을 평가하는 것이 필수 덕목이다. 결국 국경의 빈틈과 고립된 야전부대를 노린 유목민의 전형적 국지전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 대군이 본격적으로 진주하며 이전과 달리 국경의 기세가 강성해지고, 언제든 부족 본거지에 보복할 수 있게 되어 영향력을 발휘해 압박할 때의 위협거리는 못 되는 것이다.

국경 지대 국지전의 판단 기준을, 세종의 여진 정벌이나 윤관의 여진 정벌 급의 대규모 전역에 개입시키니 오류가 일어나는 것. 국경 경비 부대야 부족의 기습이나 약탈에 당할 수 있지만, 국가의 주력군이 진군하면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 정도의 리스크는 고위급 인질 확보와 보복 위협으로도 충분히 관리 가능한 것이 역사적 사례였다. 윤관보다 훨씬 적대적인 부족들 한가운데로 들어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서도, 카이사르는 셀 수 없는 무수한 배반과 산발적 게릴라전을 겪었지만 모호한 스탠스에 언제 배신할 지 모를 갈리아 부족을 무턱대고 학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간 전쟁의 종결은커녕 끝없는 살육과 소모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배신을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로 규정하고, 에두이처럼 중대한 배신을 감행한 부족이나 레미처럼 충성하되 간혹 모호하게 몸을 사린 부족에게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고 충성하면 더 큰 이득을 주겠다는 여지를 두었다. 원정군의 규모에 비하면 배신의 손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냉정하게 판단한 것이다. 그런 카이사르가 가장 경계한 것은, 베르킨게토릭스 반란 사태와 같은 갈리아 대병력의 결집이었다. 그 리스크에 비하면 배신을 감내하더라도 적을 분열시키고 회유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이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돌궐 관리 등에서도 이런 전략은 마찬가지였다. 상대 부족들이 배신을 일삼을지라도 군사적 보복 뿐 아니라, 회유와 분열 유도, 인질 요구 및 포섭, 우호 사절과 협상의 병행은 필수적 방책이었다. 상대가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영토에 침공해 들어갔으니, 적개심을 사는 게 당연하고 배신이 빗발치는 게 당연한 흐름인 것이다. 대군의 운용에서 병력손실은 상수이며 적지로 들어간 장군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전쟁을 이길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에서 아무도 안 죽을 방도는 없고, 학살하여 배신으로 아군이 죽을 위협을 애초에 없앤다는 식의 해결책은 비현실적이다. 적지에서 소요세력의 기습이나 약탈은 필연적 사건이며 관리 대상이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거할 영역이 되지는 못한다.

아군이 고립되거나 다수가 죽지 않게끔 정찰병을 성실히 흩뿌리며 대군을 유기적으로 잘 연계하는 것만으로도 기습이나 게릴라전의 손실을 일정 수준 이하로 통제할 수 있다. 게릴라전이나 기습의 한계는 뚜렷하며 유격전 한 방에 대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식의 기대는 허망한 것으로 삼국지연의식 판타지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거나 적을 견제하며 사소한 피해를 입히고 귀찮게 구는 수준에서 머물 때가 많은 것.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인근 부대와 연계하는 대군이 유리하고 소수의 유격대가 기세를 부리다 돌출되어 포위당하기 쉬운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배신으로 국경 마을이나 일부 부대가 손실을 입으면, 그때 해당 부족을 적으로 규정하여 보복하고 본보기를 삼아 인근 부족이 아군을 배반하지 못하게 협박해도 그만인 문제다.

원래 유목민인 여진은 인근 세력과 약탈과 분쟁이 잦았다. 고려보다 훨씬 중앙집권적인 조선 상대로도 마적질 수준의 약탈과 수백 명 규모의 국지전, 산발적 살인, 국경 소요를 일으키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같은 여진 부족 간에도 배신과 습격, 원한으로 인한 복수와 사소한 분쟁은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고려 역시 개국 이후로 그런 국경 소요나 군사적 손실을 무수히 겪어 왔고, 그 까닭으로 여진의 약탈이나 배신에 넌더리를 치는 사료가 작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도 그 리스크를 버텨오며, 여진의 산발적 귀부–국지적 배신–재귀부를 상수로 감당하여 여진족을 관리해온 것이 고려였다.

그런데 그 국경 소요나 약탈, 보급로 견제 급의 리스크를 가지고, 17만대군을 투입한 대전략의 중요 위협으로 삼아 학살을 선택한 것은 본말전도라는 비판이 자연히 따르게 되는 부분이다. 일부의 산발적 게릴라나 보급 손실로 끝나고 소수 부족에 대한 보복으로 해결될 문제가, 여진 전체의 전면적 저항이 되어 후방이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9성 연결로 전체가 사정없이 휩쓸리는 꼴이 되어버렸지 않는가. 결국 우호적이던 인근 부족은 공연히 죽이고 적에 가담시키며 정작 제거해야 할 고려에 적대적인 부족만 멀쩡히 남긴 모양새다.

그러니 학살은 작전의 거시적 성패를 고려한 결론이라 보기 어려우며 전쟁의 본질적 위협 고려보다 동북에 뿌리내린 여진 제거의 이득을 노린 태도로 느껴지기 쉬운 대목이다. 오히려 배신 위협을 거론한 것치곤 군사적 안전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전쟁에서의 불필요한 손실을 감수했다. 군사적 불이익을 감수하고선, 여진 제거를 통한 영토 관리의 이점이라는 전쟁 외적 논리에서 이득을 구했던 셈이다. 그러니 빈번히 고려인의 안위를 해치는 여진에 대한 성가신 인식 및 적개심, 어차피 당연히 이길 전쟁인데 귀찮은 오랑캐 이번 기회에 치워버리자는 욕망, 인근 부족 뒤통수의 대가를 경시하는 오만이 학살에 개입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윤관이 전쟁을 잘 하여 이겼으면 문제가 안 될 부분이기는 하다. 그럼 학살은 전쟁에 이긴 데 더하여 국경을 어지럽히며 약탈을 일삼는 소요세력을 일소하고 안정적 국경까지 형성하는 일석이조의 방책이 되었을 것이다. 정작 이기질 못했으니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것.

무엇보다도 학살 문제 외적으로도 이미 지리적 오판으로 지는 판을 짜놓았는데, 학살로 전쟁에 질 수밖에 없는 악재를 더욱 양산한 것이 문제다. 그 과정에서 윤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며 영토도 얻고 여진까지 청소한다는 지나친 목표를 얻으려 했던 셈이다. 윤관의 사령관 그릇으로는 대규모 전쟁에 더해 학살로 인한 반발 및 적의 연합까지 동시에 감당할 역량이라고는 보기 힘들고, 정 학살을 하고 싶으면 전쟁에서 이겨 영토를 얻은 뒤 후순위로 진행하는 게 순서가 맞지 않냐는 지적 또한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윤관의 여진족 추장 살해는 전쟁 중 지원 병력 및 정찰병, 길잡이로서 친 고려파 여진족을 활용할 가능성 및 중립화의 이득을 소멸시키고 영구적으로 등돌리게 했다는 부분이 비판거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17만 대군을 이용한 작전의 성격상, 여진을 포괄하거나 구별할 시 일어날 문제와 손해득실을 염려하여 제거하는 것이 고려 입장에서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여진을 회유하고 관용 정책을 펴느니 싹 쓸어버릴 힘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선택이 근본적으로 크나큰 오판이었으며, 여진 부족의 배신 리스크는 과대평가하고 학살의 손실은 적게, 이득은 지나치게 크게 여겼다는 것이 현대적 비판 시각이다.

여진 포섭으로 인한 이득은 미미한 것으로 보아 젖혀둔다 치자. 그러나 학살로 인한 불이익, 고려에 대한 원한 탓에 자연스레 이뤄질 여진의 단결 및 연합을 완전히 간과한 오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1만이 모인다면 중원을 뒤집는다는 것이 여진 기병에 대한 후대의 평인데 말이다.

 

결론적으로 여진 제거라는 방침은 작전의 기본 골자였던 동북9성 위치 선정과 학살로 일어날 여진의 단합과 전면적 반항을 오판했기에 만들어진 결과 중 하나이니 유능하다곤 볼 수 없고 무능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척준경을 기용하여 안목만은 괜찮았다고 볼 수 있지 않냐는 평가도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은 무능한데 부하가 유능해서 행운을 누린 역사적 사례는 수도 없이 많으니 말이다.

5. 기타

윤관의 후손들 중 여성들 상당수가 훗날 조선 왕조의 왕비가 되었다. 이것만 외워도 세조~명종까지의 역사가 다 나오는 후덜덜한 집안.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가 갈라졌다. 그 10대손이 그 유명한 폐비 윤씨(윤관 11대손). 넷째 윤언이의 먼 후손이 문정왕후(14대손)와 윤원형이고, 그 외 후손으로 세조비이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10대손),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을 낳은 정현왕후(12대손), 중종의 비로 인종을 낳았고, 윤임의 동생인 장경왕후(13대손)가 있었다. 8대손 윤척에서 정희왕후와 정현왕후의 집안이 갈라지고, 정희왕후의 아버지인 윤번(9대손)으로부터 윤임은 4대손, 윤원형 5대손이니까 윤임은 윤원형의 9촌 아저씨뻘이 된다.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량, 윤원로와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의 딸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가 되었다. 숙빈 윤씨에게 문정왕후는 친고모이고, 장경왕후는 10촌 할머니뻘이 된다. 희비 윤씨도 윤관의 후손이다. 넷째 윤언이의 5대손 윤보의 첫째 아들 윤계종의 딸이 희비 윤씨이다. 희비의 아들 충정왕에게는 외9대조 할아버지가 된다. 윤계종의 동생 윤안숙이 바로 조선시대 왕비들과 후궁들의 조상이 된다. 한편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국모인 순정효황후도 파평 윤씨 출신으로 윤관의 후손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순정효황후는 파평 윤씨가 아니라 해평 윤씨로 윤관의 후손이 아니다.

사돈의 유래가 윤관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윤관은 아들을 부하 장군인 부원수 오연총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술통을 들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많이 와서 강이 불어서 건너지 못했다. 결국 윤관과 오연총은 등걸나무에 앉아 상대편을 마주보고 서로 가져온 술을 상대방에게 권하는 제스처를 취한 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마셨다. 이때부터 등걸나무의 사와 손을 모으다는 돈수를 붙인 사돈수라는 말이 생겼고 여기에서 사돈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우리말 단어 모두를 한자어 기원에서 찾으려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견강부회에서 비롯된 민간어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산 정약용마저 이런 견강부회를 저질렀다.

윤관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데 이 자리를 두고 청송 심씨와 400년을 끈 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직후 윤관의 무덤은 관리되지 않아 버려진 상태였는데 당시의 대신이었던 영의정 심지원이 이곳에다가 자기 씨족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윤관의 씨족인 파평 윤씨 일족은 100년 후 심지원의 묘를 일부 파내는 방식으로 항의하였는데, 심씨도 지지 않고 윤씨 일족의 처벌을 요구하며 사태가 커졌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모두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라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에 영조는 '양쪽 무덤을 그대로 두라'는 식으로 중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씨 가문에서 심씨 가문의 묘지를 파헤치려고 하자 심씨 가문의 사람들이 윤씨 가문의 사람들을 패서 내쫓았다. 이 일에 대해 서로 잇따라 격고하여 아뢰자 영조는 양가의 대표였던 윤희복(尹熙復)·심정최(沈廷最)에게 형을 가하고 멀리 귀양을 보냈다. 임금이 중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을 멈추지 않아 왕의 권위까지 무시한 죄로 간주한 모양이다. 조선시대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분쟁)은 왕도 말릴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음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조선시대에 산송이 늘어났던 이유는 조상을 공경하였던 유교 사상과 묏자리에 따라 자손이 부귀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풍수지리설이 결합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안 묘역에 자기네 묘역을 조성하거나 심하면 아예 파내고 자기 조상을 모시기까지 하였다. 이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가, 2006년이 되어서야 청송 심씨가 심씨 일족의 묘를 이장하고 파평 윤씨는 필요한 토지 2500여 평을 제공하는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윤관이 여진족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강을 건널 때 잉어 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강을 건너게 도왔다는 설화가 있다. 윤관의 시조가 잉어가 변신한 미소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연관된 설화가 생긴 듯하다. 그 때문에 파평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왕비의 조상인 것과는 별개로 신숭겸, 김방경과 더불어 윤관도 후손을 잘 뒀다. 임진왜란 시기 다대포진성에서 군사 8백 명으로 만 명이 넘는 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전사한 윤흥신/윤흥제 형제(윤임의 아들들이자 장경왕후의 조카들)가 바로 윤관의 후손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1979년에 건립되었는데, 서소문공원이 천주교 성지 공원으로 재개발되면서 을지로6가에 위치한 훈련원공원(訓鍊院公園)으로 이전했다. 그 외 상무대에도 윤관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충청북도에 거주하는 파평 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정. 눈이 달마대사처럼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지라 얼굴이 대단히 비범하다. 함경도에 있는 사당의 것을 옮겨 그린 것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치 민간신앙 속 장군들을 묘사한 느낌도 들어서 윤관 역시 신격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유신을 존경해서 윤관 열전에 실려있는 영주 관청 벽 비문에 의하면 "김유신이 6월에 강물을 얼게 해 삼군을 건너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일 뿐이다. 나 또한 어찌 그렇게 못할 사람이겠는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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