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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이자겸(李資謙)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36 목록 댓글 0

1. 개요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이 마침내 이자겸을 체포하고 한 말. 사람들은 감격해 만세를 외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려 중기의 권신. 대표적인 외척 세도가 집안인 인천 이씨 출신으로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뜨린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十八子는 이자겸의 성씨인 李의 파자이다.

2. 생애

2.1. 득세 이전

이 당시 이자겸은 세력이 약한 외척이었다.

인천 이씨의 시조는 가야계 신라인이며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로 가문의 세가 강해진 건 이자겸의 할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이자연(李子淵) 때부터이다.

할아버지 이자연은 현종 때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문종 때 크게 활약해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가는 쾌거를 이룬다. 이자겸의 고모 셋이 왕과 혼인한 것이다.

이자겸의 여자 사촌 중 셋이 선종과 혼인해 헌종과도 외척 관계를 만든다.

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는 이자연의 6남이어서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다. 아들로 이자겸, 이자량이 있으며 딸로 순종의 후궁 장경궁주가 있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 장경궁주의 형제로서 관직에 쉽게 올라갔지만 장경궁주가 간통 혐의로 폐출당하면서 그 역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만다.

게다가 헌종의 병환으로 인해 보위가 휘청거렸고 선종의 비이자 이자겸의 사촌인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가 이자겸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려고 계림공 왕희와 대립하던 중 선수를 친 계림공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는 바람에 조정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드디어 그의 위세가 회복되는데 숙종의 아들 예종이 이자겸의 먼 친척과 이자겸의 딸을 왕후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딸 자정문경왕태후가 왕태자를 낳고 그가 왕(인종)이 되자 이자겸은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된다. 이후 참지정사,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2.2. 하늘을 찌르는 세도

이자겸은 1114년(예종 9) 12월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서경유수사가 되었고, 1116년(예종 11) 6월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가 되었다. 1118년(예종 13) 3월 문하시중 이위가 치사하면서 당시 부총리급인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였던 이자겸은 판상서이부사를 겸직함으로써 실질적인 수상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섰고, 이러한 지위는 이자겸이 몰락하는 1126년(인종 4) 5월까지 지속된다.

예종 사후에 자신의 외손자인 연소한 태자(훗날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府)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라 칭해 요속을 두었다. 고려에서 부는 왕자나 왕비만 두는 것인데, 이 단계에서 이미 일반적인 신하의 지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하겠다. 1122년(인종 즉위년) 5월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가 되었고, 동년 10월 한양공에 책봉되었다. 1124년(인종 2) 7월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이 되었는데, 특히 영문하상서도성사는 그 이전에는 기록을 볼 수 없는 사실상 이자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상국급 관직이다. 혼자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최고 관직을 독식한 것이다.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서 소성후(邵城侯), 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올렸다. 조선은 당시에는 주로 서경, 즉 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오등작 제도에 따라 서경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분봉 작위.

여기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후로 삼게 하여 왕의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했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재산을 부정 축재하는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인종의 이모가 된다. 아무리 고려 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3촌 간의 혼인은 고려 초에도 흔하지 않았던 만큼 당연히 반대가 어마무시했지만 이자겸 본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다. 한편 일곱 아들들도 이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3남 이지언과 4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 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5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6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7남 의장은 수좌에 오르게 되었다. 거기에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군부의 핵심 인사로 떠오른 척준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의 6남 이지원을 척준경의 사위로 맞게 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의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반역열전 이자겸 편

《고려사》반역열전 이자겸 편의 일부 글이다. 이자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열중했고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개경의 백성들이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겸은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는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고 조선국공이 되어 지위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이 외에도 세도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군주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과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정했을 정도다. 김부식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을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으며 전문(箋文) 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예종 때에 식읍을 하사받았는데, 조정의 허락도 없이 자기 식읍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사사로이 송나라에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 논란을 일으켰다. 외교 활동을 독자적으로 꾀한 것 자체가 국왕을 국왕으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

당시 국력이 급성장한 금나라(여진족)에서 고려에게 자신들에 대한 사대를 요구하자 이자겸은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거란족)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사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척준경도 동조했는데 단순히 이자겸의 주장에 묻어갔을 가능성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보다는 사대가 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2.3. 이자겸의 난과 최후

1126년 2월 25일에 인종에 의해 일어난 친위 쿠데타로 내전이 벌어졌고, 이자겸은 패하면서 12월 5일에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가 7개월 만에 사망했다.

3. 의문

주동자로 지목된 이자겸이 고작 유배로만 끝난 것을 들어 그가 정말 반역을 꾀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의 뜻을 품은 건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인데 항간에 십팔자위왕이라는 참설이 퍼지자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자겸 척살 시도가 실패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못 이기고 이자겸에게 순순히 선양할 생각이었지만 이자겸이 자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십팔자위왕'의 소문이 나오며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뺏으려 했고(라는 식의 기록이 적히고) 얼마 안 가서 이자겸은 연경궁 사태로 유배되게 된다. 실상 하술할 독살 시도 기록을 제외하면 이자겸의 난에서 이자겸은 딱히 한 게 없고 인종의 친위 쿠데타 1차 시도가 실패했다가 2차 시도 끝에 성공한 것에 불과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은 그의 딸인 인종비가 독극물이 든 떡을 까마귀에게 먹였더니 까마귀가 죽었다는 기록과 독이 든 그릇을 엎질렀다는 기록밖에 없다. 인종을 중흥택에 이어 연경궁에 감금한 이자겸은 자신의 넷째 딸인 인종의 후궁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 한다. 처음에는 독이 든 떡을 진상했으나 넷째 딸이 몰래 인종에게 알렸고 인종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는데 보란듯이 떡을 먹은 까마귀는 쓰러졌다. 2번째로는 넷째 딸을 직접 시켜 독이 든 술을 올렸는데 딸은 술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며 술을 바닥에 흘려버려서 결국 2번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이 두 일화 역시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자겸의 딸마저도 아버지의 거사 참여를 거부한 일화는 이자겸의 민심 장악이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사실 이자겸의 입장에서 정말로 찬탈할 생각이었다면 애매하게 독살을 시도할 게 아니라 건장한 하인 몇 명을 보내면 땡이었고, 척준경과 틀어질 때까지만 해도 당시 이자겸의 행적을 보면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냥 이대로 살자"라는 식으로 왕을 상대로 간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양반이 척준경이 치러가기 직전도 아니고 척준경에게 다 털리고 벌받을 때가 되어서야 난데없이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말이 나오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무엇보다 실제로 쿠데타를 준비한다기에는 준비가 너무 늦은 시점이라서 의문점이 많다. 결국 확실한 건 모종의 이유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고 인종이 척준경을 이자겸 처리하는데 썼다는 것 정도이다. 이자겸은 1126년 3월~5월 20일까지는 완전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2달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척준경과의 연합이 깨져버린 게 가장 크다. 연합이 깨진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이 이자겸-척준경 연합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와 너희 등은 모두 왕신(王臣)이다. 이제 땔감을 지고 궁을 태우려 하는 짓은 신자(臣子)의 의(義)가 아니다."

일례로 이자겸이 난을 일으킬 당시에 홍입공(洪立功)이라는 무신이 있었는데, 원래 직위는 유한경이라는 장군 밑에 소속된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유한경은 이자겸파였고 이자겸은 홍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승진시켜 준 뒤 척준경에게 보냈다. 척준경이 개경 궁궐을 불지르려 할 때 홍입공을 보내 땔감을 가져오게 시켰다. 홍입공은 조용히 이를 따랐으나 나성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의 군졸에게 위의 말을 했다. 이 말에 설득된 홍입공의 군졸들은 땔감을 버리고 선의문을 통해 들어가 인종에게 갔고, 홍입공은 인종을 만나자 대열을 갖춰 절을 했다. 누군지 의아해한 인종에게 홍입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기뻐한 인종은 그들에게 자신의 숙위를 맡겼다. 이 일화는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종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일화일 수도 있다. 허나 동시에 이자겸파 내에서도 궁에다 불을 지르는 건 심했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고려의 상징과 같은 본궐을 연소시킨 건 당대나 지금이나 욕을 먹을 일이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기어코 본궐에다가 불을 질러 다 태워먹었는데 본궐이 커서 인종이 피신한 산호정까지 불이 닥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인종이 죽을 뻔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컸기에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시하려 했지만 둘은 불안해했고, 양자간에 서로 탓을 돌리려 들었다. 당황한 척준경은 분노해서 두문불출했고 하야까지 선언했다. 그러자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와 이지보가 찾아와 척준경과 아버지를 화해시키려 했다.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척준경이 이지미와 이지보의 수하에게.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

그러나 척준경은 위의 말을 하며 도리어 난의 주동자를 이자겸으로 몰아갔다. 아마 궁에다 불을 지른 건으로 자기 혼자만 욕을 먹을대로 먹으니 억울한 감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이자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척준경은 이자겸과 완전히 틀어졌다.

4. 여담

이자겸이 전라남도 영광으로 유배를 간 뒤 유배지에서 비굴하지 말자는 각오로 염장한 참조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런 한자 식의 어원설이 대체로 그렇듯 신빙성이 높지는 않으나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이자겸계 외의 인천 이씨는 연좌되지 않아서 인천 이씨는 몰락하지 않았고 고려 후기에 권문세족이 됐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이징옥이 일으킨 이징옥의 난 이후 인천 이씨는 세가 줄어들었는데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약 68,000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줄어든 수이다. 같은 조사에서 김해 김씨가 4,125,000명이 보고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조선 후기 이후에 시작된 족보 세탁 바람이 불었던 시기에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조선 시대 전체에서 문과 급제가 9명밖에 안 돼서 양반 가문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역사" 만화에서는 권력을 휘어잡은 이자겸이 지나가면서 손짓을 한번 하자 날아가던 새들이 비 오듯 우수수 떨어지고, 동네 똥개들도 짖다가도 높으신 분인 걸 알고 설설 기며 모시는 모습으로 그 하늘 높은 권세를 묘사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져 있는데, 관직을 상징하는 감투를 아들들에게 사이좋게 나눠 가지라면서 휙휙 던져주고, 아들들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감투를 차지한다. 7남 의장이 의기양양하게 수좌를 맡으면서 불교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되자 그걸 본 스님들이 "이러다가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판국"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다.

송나라의 관리였던 서긍(徐兢)이 사신단을 따라 고려를 방문해서 견문록인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이자겸에 대하여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서긍의 묘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흔히 사악한 권신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모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신이 매력적이라니 의외일 수 있지만 사실 권력을 누린 간신들은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들에게 매력을 끌지 않으면 군주나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서 권력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듣기 안 좋은 소리를 해서 정적을 끌고 다니는 비호감 성향의 호전적인 인물은 오히려 유학에서 말하는 충신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고려 시대의 네임드 인물이지만 의외로 사극에는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풍운천하에서 나올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

문공인-문공유 형제와는 정적이었지만 의외로 문공인의 장인인 해주 최씨의 최사추를 통해서 서로 인척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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