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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묘청(妙淸)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23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승려

2. 생애

2.1. 서경 천도 운동

서경 전투는 곧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에서 발췌

서경 출신으로 인종 때 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때는 북방의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하는 시기였는데 묘청은 강성한 금나라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으로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묘청은 대외적 명분 외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묘청이 살아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충돌했다.

묘청은 인종이 천도에 동의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했다. 묘청이 주청하여 1129년에 대화궁(大華宮)이 완공되자 인종과 함께 보러 갔다. 묘청은 그때 김부식과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다가 저 산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별이 매우 낮게 떠 있었는데 묘청은 저걸 보고 남극성이라며 상서로운 징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냥 높이 매달아 놓은 등불이었다.

위와 같은 꾀가 들통나자 인종은 서서히 서경 천도에 회의감을 느낀다. 한때는 솔깃해서 서경에 자주 행차하고 임원역(林原驛) 근처에 대화궁을 지었지만, 그 대화궁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벼락이 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김부식은 “그토록 좋은 곳이라면 무엇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냐?”라며 까댔다. 유학자로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김부식이 이런 말을 했으니 서경 길지설을 비꼬는 의미이다.

급기야 묘청은 1132년에 무리수를 둔다. 기록에 따르면 묘청은 대동강 근처에 기름 먹인 떡을 준비하고, 인종을 대동강 가로 모시고 나오면서 대동강에 도착할 때에 맞춰 사람들로 하여금 기름떡을 대동강의 적절한 위치에 던져 가라앉혔다고 한다. 강 바닥에 가라앉은 기름떡에서 나온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며 햇살을 받고 반짝이자 묘청은 인종에게 '대동강에 잠든 용이 침을 토해 대동강 물에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서기가 비치니 서경은 천기가 가득한 땅이라고 허위 광고를 한 것이다. 언뜻 봐도 허술해보이는 대동강 용의 침을 반대 세력이 의심하여 강물을 살짝 떠보았고, 물에서 기름기가 느껴져 잠수부를 시켜 강 바닥을 보니 기름떡이 발견되어 들통났다.

고려사를 보면 뭔가 어리버리한 인상도 준다. 서경 중흥사에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가 묘청에게 "네가 임금께 서경에 행차하시기를 청한 건 재앙을 진정시키기 위함인데 왜 이런 재난이 발생한 것이냐?"이라고 묻자 묘청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다가 한참 뒤 주먹을 쥐고 얼굴을 들고 "만약 주상께서 개경에 계셨으면 재난이 이보다 컸을텐데 다행히 서경에 오셔서 재앙이 밖에서 일어났으니 주상의 몸이 편안했던 것이다!"라고 말했고 묘청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이런데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고 호응했다.

그리고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하다가 금암역(金巖驛)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서 행차가 길을 잃어 늪에 빠지기도 하고 나무나 돌부리에 부딪혔으며 그날 밤에는 진눈깨비까지 내리고 추워지는 바람에 말과 낙타의 피해가 컸다. 이를 본 묘청은 '내가 이 날에 바람과 비가 있을 줄 알고 비와 바람의 신에게 주상께서 길에 있으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더니 이미 승낙해 놓고 이처럼 약속을 어기니 실로 가증스럽다!'라며 하늘을 탓했다고 한다.

2.2. 묘청의 난

1135년부터 1136년까지 고려의 서경(西京)에서 이어진 반란. 승려인 지누각원사(知漏刻院事) 묘청이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을 요구하며 서경에서 일으킨 쿠데타였다.

반란의 출발점이 묘청이라서 ‘묘청의 난’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실상은 같은 반란군 수뇌부인 조광이 반란이 일어난 지 고작 17일 만에 내부 분쟁으로 묘청과 유참을 참수하여 죽여버린 뒤에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서 1년 이상 이어 나갔기 때문에 ‘조광의 난’에 가까웠다. 다만 조광도 묘청이 내세운 반란 명분과 세력을 그대로 승계한 데다가 조광 자신이 딱히 유명하지 않다 보니 전부 포괄해서 묘청의 난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3. 평가

단재 신채호가 매우 높게 산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신채호는 묘청이 주도한 북벌론을 자주적이라며 높게 평가하면서도 묘청에 대해서는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북벌론의 주요 인물인 윤언이와 정지상을 높게 평가했고 둘 중에서도 서경 천도를 지지한 정지상이 아닌 반대쪽이었던 윤언이를 더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는 실제로는 혹평이었는데 조선사 연구초에서 광망(狂妄)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그가 섣불리 난을 일으켰다가 윤언이, 정지상 등 자주 정신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제거당하게 만들었고 이게 조선 사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한 것이다.

현대 사학자들의 평가는 정지상의 광대, 요승에 가깝다. 서경파 인물인 정지상이 서경 천도를 밀어붙이기 위해서 성인의 이미지를 덧붙여 내세운 얼굴마담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 묘청의 난 자체가 묘청의 이름만을 빌렸을 뿐 사실상 서경의 난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묘청은 난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으며 그럼에도 서경 반란군은 와해되지 않고 해를 넘겨 지속되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반란 자체가 묘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묘청의 사망과 함께 난이 쉽게 끝났을 것이다. 물론 묘청 본인도 자신이 광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리야 없었겠지만 서경 천도의 가능성만 믿고서 밀어붙였는데 결국 인종이 천도를 거부하자 분노한 나머지 폭주해버린 것이라는 견해다. 다른 서경파 인물들은 묘청이 폭주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던데다가 누구보다도 묘청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앞장서서 진언했다. 서경천도운동 당시 찬성파는 한 일파가 아니었고 한 풀 꺾였던 서경 세력, 친왕 세력, 신흥 관료 등이 기득권층인 개경의 문벌귀족과 대립한다는 하나의 목적으로만 뭉쳤던 잡탕이었다. 서경 세력 내의 과격파인 묘청이 폭주를 했으니 다른 분파들은 저런 괴승과 엮여서 사형당하기 싫었던만큼 묘청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고자 애썼던 것이었다. 사실 인종도 주동자만 주살하고 나머지는 살려주라고 일렀기 때문에 이들에게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김부식 등 개경파 인물들에게 선참후계(先斬後啓) 식으로 처단당했다.

4. 여담

북한의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대한민국에 비해서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김부식과 개경 귀족들에게 사대주의 프레임을 씌우고 서경 세력에게 자주적이고 주체적이라는 프레임을 가져다 붙이는 식. 북한 수도인 평양시로 천도를 주장했기에 더욱 강조한다.

일부 위인전 등에서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자체를 신채호의 북벌론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자주민족의 자주심을 키우기 위한 움직임으로 미화될 때가 종종 있는 편이다. 다만 그만큼 선정에 대한 논란은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역사에 부상하기 이전의 경력에 대해 "묘청은 서경승(西京僧)이다." 라고만 설명하고 다른 기록이 없어서, 외모, 출신, 본명, 인종을 만나기 전의 행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 "천문관원(日者) 백수한이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묘청은 음양가의 비술을 들먹이며 뭇 사람을 현혹했다" 하는 등의 묘사를 봐서는 도참, 예언 등의 활동을 한 승려로 추측된다.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수도와 궁궐을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 초기 대통령실 이전에서 오마주를 하여 천공스승의 얼굴로 묘사되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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