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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척준경(拓俊京)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8|조회수45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시대의 무관

국사 시간에 비중이 그다지 높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현대에는 척씨가 없어 이름을 한번 보면 잘 잊히지 않는 편이다. 척준경은 무력이 워낙 두드러져 당대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지휘관이자 소방수였다. 반역자로 축출되어 굳이 윤색해 줄 동기가 없고, 가문도 척준경 생전에 이미 영락해서 그 전공의 신빙성이 꽤나 높다. 역덕들 사이에선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정치나 세상을 파악하는 식견은 어두운 편이었고 권신되기를 꿈꾸던 이자겸에게 영입되어 함께 움직이다가,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세력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먼저 다가온 이자겸을 제외하면 중앙에 어떤 연줄도 없었던 데다, 나중에 내부적인 갈등으로 그 이자겸과도 갈라서고 뒤늦게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타이밍이 늦어 결국 말년은 유배 생활로 마감하게 된 인물이다.

현대에는 이자겸의 반란 같은 고려 역사보다 오히려 전투에서 뛰어났다는 가십이나 일화가 더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며 '아무튼 매우 강력한 대단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고 왕권을 위협했던 권신이었던 데다, 반란에까지 가담한 전적이 있었으니 전투에서의 공적이 어찌했건 간에 인물로서의 평이 박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 들어서 척준경의 '재발굴'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고 흥미거리로 떠올려진 데에는 고려 시대의 이러한 평가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 역시 약간은 작용했다.

2. 역임 관작

공신호: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래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직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참지정사, 평장사까지 오른 보기 드문 출세를 한다.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으나 본인이 실각하고 이자겸과 똑같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 실각의 주역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다.

척준경 사후 직위 회복

직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사후에 생전 직위가 추복되었다. 문하시랑평장사는 생전 직위인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를 약칭한 것이다.

1146년(인종 24) 2월 17일 인종의 병이 척준경의 원한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에 따라 그의 관직을 추복(追復)하고 자손을 소환하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달 28일 인종은 훙서하였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가 계림공이던 시절, 이때 왕희의 저택은 계림부라 하였는데 척준경은 이 계림부의 종자로 들어간다.

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추밀원 별가(別駕)가 되었다.

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무명에 불과한 소졸이 사령관에게 바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냈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 오자 또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 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의 전공으로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가 된다.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 녹사는 정8품의 문신 관직, 참군사는 휘하에 병력을 두지 않은 임시군인이다.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다.

3.2.2. 제2차 여진 정벌

별무반 대원수 윤관과 친해진 척준경은 천우위에서 중군(中軍) 소속 녹사로 보직을 바꾸어 참전했다.

3.2.2.1.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다. 이때 윤관은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다.

이때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여럿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 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3.2.2.2. 가한목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이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 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군 10여 명을 해치우며 결사적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물러가는 여진족을 추격해 36명의 머리를 베었다. 날이 저물자 영주성으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3.2.2.3. 영주성 전투

이후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뒤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왔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아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전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3.2.2.4. 공험진 전투

2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 주었다.

3.2.2.5. 웅주성 전투(1차)

동년 2월 알새는 수만에 달하는 대병을 동원하여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80여 명의 적병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고, 병거 50여 량과 중거 200여 량, 군마 40필 등을 노획하는 등 한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며 도움을 요청했고, 척준경은 이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데...

3.2.2.6. 길주 전투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한 뒤 그들을 이끌고 통태진·야등포·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조리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하고 웅주성을 구해냈다. 이것이 1차 웅주성 전투. 이 전공으로 상서성의 정6품 관직 공부원외랑에 제수되었다.

3.2.2.7.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토멸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 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함주군)·영주(英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원)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9성 원정 후반부는 종심이 얇고 기병대를 동원한 측면타격에 극히 취약한 함흥~경흥 회랑이 수시로 끊어지며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척준경과 왕자지는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이때마다 급한 불 끄는 역할을 도맡았다.

3.3. 말년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하면서 1117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고, 곧바로 지어사대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119년에는 동북면병마사가 되었고, 1122년에는 위위경(衛尉卿), 직문하성(直門下省) 직위에 오른다. 아마도 1117년부터 얻은 직책들을 보면 대부분 고위 문관직인데 애초에 척준경이 문관으로 벼슬 생활을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벼슬을 고위 문관으로 꾸준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이자겸을 따라 대금사대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척준경이 대금사대를 반대했다는 뜻이 아니라 조정의 합의에 의한 공론이지 반대를 억누른 독단이 아니었다는 의미. 실제로는 백관 회의를 통해 의논하는 과정을 거쳤고 김부식을 비롯한 조정 중신 다수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사신을 보내 강화하는 것이 좋을지, 군대를 양성하여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지 태묘에 신탁을 묻는 절차까지 거쳤다.

이자겸의 출세는 선대 이자연의 출세 과정을 완벽하게 답습한다. 이자연은 신라 왕통을 이은 경주 김씨 가문의 일원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인위의 사위였고, 처삼촌이 피난했다 돌아가는 현종을 극진해 대접해 딸 셋을 시집보낸 김은부였다. 이자연이나 인주 이씨의 범위보다 인주 이씨가 속해 있는 경주 김씨와 안산 김씨 전체의 위세가 컸다.

이자겸 본인은 예종대에 벼락 출세했는데 그 원인은 고려 중기 문벌의 대표. 임금이 먼저 자신에게 절하지 않아도 된다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세를 지닌 해주 최씨 가문의 수장 최사추가 그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양측적 친족관계로 촘촘하게 이어진 고려의 문벌 사회에선 사위가 장인 집안에 들어가 살며 장인 가문의 후광을 입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으니 최사추는 제 가문이나 딸에게 거스르지 못 할 한미한 집안의 사내 하나를 키워줬을 뿐이다. 일례로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후비로 삼고 예종 4년에 태자를 출산하자 즉시 왕비로 책봉과 최사추에 대한 봉작을 마친 반면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겸은 10년 더 지나 예종 16년이 되어 봉작을 받았다. 예종이 이자겸을 빠르게 올려준 것도 딩시 이자겸 본인의 권력보다는 인주 이씨 대신 해주 최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 네트워크의 조율자 겸 메신저로서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했던 인종과 문벌 가문 사이를 중재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균형자로 삼으려는 의도가 컸다.

다만 이자겸 본인은 자꾸 딴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메신저 역할을 넘는 권세를 노렸으며, 이 과정에서 척준경의 공적과 지위 역시 이자겸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한 역할을 했다. 이자겸은 병부에서 척준경을 밀어주며 그와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인종 2년 이자겸이 판병부사가 되고 인종 4년 2월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이 병부상서가 되었으며 동년 4월 척준경이 판병부사가 되었다. 특히 별다른 공적도 없고 지위도 낮았던 척준신의 벼락 병부상서 임명은 강한 논란과 질시를 불러왔음에도 강행했다.

물론 그럼에도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는 실패해서 인종의 측근인 최사전이 "이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단지 척준경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척준경을 얻으면 병권이 내속할 것이니 이자겸은 다만 고립된 한 사람일 따름이다."라고 단언할 정도로 취약한 기반이었다.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돈관계도, 이자겸의 무조건적인 후광에 힘입으려는 것보다 척준경 본인의 필요 역시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척준경은 고려시대 권력구조를 이루는 문벌 가문들의 질서와 완전히 동떨어진 하급 향리 가문 태생의 무장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물러난 윤관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잡고 있던 인맥마저 끊어져서 갈 데가 없었다. 낙동강 오리알 되게 생긴 처지에 먼저 친한 척하며 다가오는 이자겸과 연결되어 보신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조정에 안착하며 그의 출신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위 관직을 넘볼 수 있게 된다. 1123년에 이부상서와 참지정사를 겸하게 되었고, 1124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다.

3.3.1. 이자겸의 난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는다. 또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한다.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 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오늘이 끝나가고 있소. 적이 밤을 틈타 도망칠까 두려우니 궁문을 불태운 뒤 들어가 탐색하는 것이 어떻소?"

척준경, 분노에 빠진 상태로. 고려사 이자겸 열전.

궁성에 불을 지른 척준경이 백여기를 이끌고 수춘궁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렀을 때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이는 함정으로 척준경이 들어서자 전(前) 금위별감(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들고 기습한다. 척준경은 물러나 문 밖으로 나오는 이들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상세하게 기록된 반란 기록을 보면 척준경 빼면 군부에 믿을만한 기반이 부족한 이자겸은 소수의 숙위병과 아들을 통해 동원한 승병 300여 명을 동원했고, 인종 측도 소수의 근위 병력만 갖춘 채 궁을 요새삼아 대치했다. 전근대 사서는 교전에 동원된 병력을 생략하고 지휘관만 기록하는 경우가 왕왕 있음을 감안하면 위의 기습 시도도 내시를 시켜 내응하는 것처럼 하고는 수는 적으나 정예도가 높은 근위병들을 동원해 선두에 들어오는 척준경을 노렸다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 ~ 1135),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 ~ 1126)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 1126)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 ~ 1126), 장군(將軍) 고석(高碩, ? ~ 1126)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그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 ~ 1126)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결과적으로 인종의 지시를 받고 척준신과 척순을 죽인 군부 인사들은 거의 다 살해당했다.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가만히 있을 인종이 아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 ? ~ 1135)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 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난을 성공시킨 지 3개월 후인 1126년(인종 4년)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 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127년(인종 5년) 3월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인종도 내심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끝내 전라남도 신안의 암태도로 유배를 보냈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다. 전자의 경우 서경 천도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 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척준경이 밟아가던 승진 코스가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대체로 승진코스로 삼았던 문관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척준경이 후대 무신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당장 이고와 이의방은 정권을 잡자마자 위위경이 되었고, 게다가 이의방은 전중감에 좌승선, 지병부사까지 했고 딸을 황실에 시집보냈으며, 정중부는 참지정사와 중서시랑평장사와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물론 정중부는 혼자 집권한 이후에는 사실상 올라갈 직책이 없었기에 자신이 문하시중을 찍지만 애초에 이 문하시중도 척준경이 사양했다. 그 이후에도 이의민은 형부상서, 공부상서, 수사공, 좌복야,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를 했고 최충헌은 좌승선, 지예부사, 지어사대사, 태자첨사, 지주사, 이부상서, 병부상서, 지이부사, 추밀원사, 어사대부, 수태부,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태자태사 등을 했다. 물론 이의민, 최충헌도 문하시중에 오른다. 그 외에 한 때 이의민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조원정도 공부상서, 추밀원부사까지 했고 이의민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두경승 역시 공부상서, 호부상서, 추밀원부사, 수태위, 참지정사, 판이부사, 수국사, 평장사, 문하시중을 했다.

그래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그를 고향 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에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된다. 심지어 1144년(인종 22년)에는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또한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의 벼슬을 주라는 황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수십 일 만에 등창으로 인해 사망했다.

4. 평가

척준경은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이다.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시기 여진 정벌에 참여해 크게 활약했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과 양규, 후기의 김경손, 원충갑, 김방경 그리고 말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다.

특이한 점은 척준경은 본인의 용맹을 앞세워 불리한 전황을 뒤집은 사례가 무척 많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 매체에선 무력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받을 때가 많다. 개인의 용맹을 내세워 전황을 바꾼 사례가 척준경 이외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척준경은 확실히 그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하며 양상도 다양하여 돋보이는 면이 있다. 물론 전황을 장수 개인의 용맹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만큼 이러한 기록이 없거나 적다고 해서 장수로서 딱히 저평가 받을 부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척준경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유독 자주 찾아왔고, 그때마다 본인의 능력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특출난 용맹 때문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척준경은 현장전투원 이상으로 일정 규모의 야전 지휘관으로서도 확실히 뛰어난 면모를 보였었다. 사령관 직급에서 전역을 이끈 경험은 없기에 전략적인 대국을 읽고 지휘하는 방면으로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의 역할이었던 야전 부대 지휘관으로선 탁월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척준경은 전략예비대로서 윤관 등 지휘부가 실책을 저지를 때마다 자신의 용맹으로 수습함은 물론이고 금제국 건국을 앞둔 최전성기 여진군을 야전에서 격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데뷔전인 정주성 전투부터가 패퇴하는 아군 후방에서 일부 병력을 재빨리 수습하고 반격해 아군이 와해되는 사태를 저지한 다음 적의 역습 시도까지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고, 영주성에선 윤관을 비롯한 제장들 모두가 적의 규모에 압도되어 농성에 매달릴 때 홀로 농성시 닥칠 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공세적 방어를 주장해 직접 성공시켰으며, 웅주성 구원전에선 단기로 성을 빠져나가 국경까지 내달려 새로 인솔한 부대로 통태진·야등포·길주 사이의 여진군을 모두 격파해가며 성을 구원했다. 전황이 지지부진해진 원정 후반에는 여진의 유격 전술에 맞서는 기동타격대장으로 전공을 쌓았다. 척준경의 전술적 역량은 당시 고려군 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할 수 있다.

여진 정벌에서 걸출한 전공을 세운 척준경은 높은 관직에 올랐고 이후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사돈 관계를 맺고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척준경은 전장에서와는 달리 정계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졌다.

척준경에겐 권세는 있었으나 뚜렷한 정치적 목적이나 계획이라고 할 부분이 없었다. 이자겸과 사돈을 맺고 권세를 부려 친인척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는 등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한편으론 정치판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낙향한 적도 있는 등 확고하게 권력에 목적을 두지도 않았다.

게다가 성격 역시 전형적인 무부(武夫)에 가까워 정계에는 맞지 않았다. 척준경은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강했다. 예를 들어 아들과 동생을 잃자 이에 분노해 충동적으로 궁궐을 불태우는 죄를 저지르고, 이후에는 이를 내심 후회하다가 시종들 간의 말다툼 때문에 대노하여 이자겸과 틀어지는 등 척준경은 신중하게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과 인종 사이에서 휘둘리다가 유배를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척준경은 전장에선 충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용맹함과 괜찮은 전술적 판단력도 갖춘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정계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뒤늦게 근왕파로 전향한 덕에 이자겸과는 달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그 자손들도 당장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인 일이다. 후일 인종은 죄가 중하지만 공도 기록할 만하다며 척준경의 자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윤관의 밑에서 세운 공적과 이자겸의 밑에서 차지하고 있던 권력을 곱씹어 보면 허무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이리보면 척준경의 인생은 재산도, 가문도, 인맥도 없는 한미한 지방 출신이 가진 재주만으로 중앙에 진출해 영달을 꿈꾸다 갈팡질팡 끝에 좌절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관, 이자겸, 인종 모두 그의 손을 잡아주었으나 한 명은 뭘 해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둘은 이용만 했다. 문과 무라는 차이는 있으나 권력자의 개가 되어 가문의 한계를 넘었다는 점에서 뒷날의 이규보와 유사하며 이의방, 이고, 정중부, 이의민, 조원정, 김준 등 무인 출신으로서 문벌에 균열을 내고 정상을 넘본 이들의 선배격.

5. 기타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고려사절요》, 1126년 6월 미상(음)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임원애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왕비 자리에서만 내쳤을 뿐 대우는 후하게 해줬다. 그도 그럴게 두 딸 중 한 명은 별반 기록이 없지만 다른 딸은 시종일관 인종의 편을 들며 인종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줬기 때문이다.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는데 행정 업무 외에도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했다.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后妃)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 게 자연스러웠다. 태조의 아들 중 3명이 모두 왕위에 올랐고, 현종의 아들 중에서도 3명이 왕이 되었으며 문종의 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3명이 왕이 되었다. 단, 꿈 이야기 중 후비의 경우에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그녀의 친정인 장흥 임씨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일찍이 이자겸과 충돌한 가문이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원후는 이자겸과 대립하다가 밀려서 개성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이자겸을 척준경의 손으로 축출한 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공예태후를 왕비로 들이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척준경이 임씨를 왕비로 들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 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 걸고 구출한 일화, 전투 중에 말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 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의 척준경, 금의 사묘아리, 송의 한세충. 만인지적의 용장 3명이 동시기를 살다 갔으며 시기상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전장에서 부딪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딪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다 보니 이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역덕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온다.

윤관과의 관계나 이후의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이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 강유와 비슷한데 척준경과 강유 모두 유능한 상관 밑에서 공을 세웠고 그 상관이 죽자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도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권신이 되어 반역 열전에 올랐지만 강유는 유선을 보필하며 30년 동안 북벌을 이끌고 자신의 모든 것을 촉한을 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심지어 강유는 죽어서도 촉에서는 충신으로 추앙받았는지 사후 약 30년 뒤 그 지역에 성한이 건국되는데 당시 촉의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제갈량을 그리워하며 강유가 촉한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만 강유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기에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유는 배신자다.

개인 무력과 전공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뛰어나지만, 권력욕이 매우 크고, 이자겸에 포섭되어 고려 황실에 반역을 했으며, 이자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이후 정사를 농단하는 전횡을 저지른 인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전혀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척준경 당시에 살았던 고려의 매우 강직한 관리였던 김자의는 척준경이 재상이 된 후 탄핵을 받아 남쪽으로 귀양을 간 것을 슬퍼해서 이를 시로 읊었다.

‘용과 호랑이 같은 웅대한 모습, 철석같은 마음, 장차 충의로써 임금을 도우려 하였네. 다만 새를 다 잡으면 활은 창고로 들어갈 뿐이니, 한신(韓信)이 유방(劉邦)을 배신한 것은 아니라네.’

김자의는 이 시에서 척준경이 죄없이 인종에 의해 토사구팽 식의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그의 시가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인 문인 명사 중 한 사람인 이인로의 '파한집'에 실려 고려의 지식인들이 척준경이 죄가 없이 인종에 의해 억울하게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다.

또 당시 고려의 민중들도 김자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고려사 세가

인종 24년(1146) 병인년 • 2월 병진일의 기사가 있다.

고려사 세가 인종 24년(1146) 병인년 • 2월

병진일. 무당들이, 척준경(拓俊京)의 원혼(怨魂)이 저주를 내렸다고 말하므로 척준경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다가 벼슬을 주었다.

그가 정말로 반역자에 간신인지, 아니면 죄없이 인종에 의해 억울하게 토사구팽을 당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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