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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이의방(李義方)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무신(武臣)

100년 동안 이어질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첫 번째 집권자이다.

2. 생애

2.1. 무신정변을 주도하다

본관과 출신지 모두 전주인 전주 이씨 출신이다.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정사들에서 정중부, 이의민, 두경승, 경대승 등의 다른 무신집권자들과는 달리 용모나 무예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나, 밑에서 언급되듯이 무신 정변 당시 의종을 호위하는 근위대 대장에 해당되는 견룡행수(牽龍行首)의 지위에 있었고, 또 이의민과 두경승의 상관이기도 해서 나름대로 무예가 뛰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은 할 수 있다.

그의 동생인 이린은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6대조이다. 이의방이 몰락한 후 후대에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걸렸는지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의방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족보에 의하면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그의 15대 후손이며, 아버지는 대장군 직위를 가졌던 이용부(李勇夫)이고, 어머니는 정승 이형(李珩)의 딸 이씨로 부계는 무신 집안이고, 모계는 문신 집안이었다. 숙부 이단신(李端信)은 문하시중, 사촌 이작산(李作山)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형으로는 이준의, 동생으로는 이린과 이거, 여동생이 있었다.

정변 당시의 직위: 견룡행수(牽龍行首)-친위대인 견룡군의 친위대장 직위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당시 이의방은 근위대의 대장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 직위에 있었다. 견룡군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호위하는 친위 부대로서 로마 제국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의 예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근위 부대의 경우, 왕실에서 정변을 일으키기 최적의 위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는 그런 견룡군의 실병(實兵) 지휘 즉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견룡군은 직제상 2군(二軍)에 속했으나 왕의 직속 친위 부대로서, 견룡행수는 2군(二軍) 즉 응양군, 용호군의 상장군, 대장군이 아닌 임금에게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유사시에는 왕의 허락하에 타 부대에 대한 지휘권도 행사할 수 있을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의방은 이고, 채원 등과 함께 하급 장교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정중부 등 고위 장군들이 온건적인 노선을 취할 때,

"문신의 관을 쓴 놈들은 한낱 서리(胥吏)일지라도 죽여서 씨를 남겨 두지 마라!"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

《고려사》 <정중부 열전>

면서 문신들을 철저히 색출한 뒤 싸그리 쓸어버리는 냉혹한 면모를 보인다.

정변 후 의종에게 받은 직위: 응양군(鷹揚軍) - 용호군(龍虎軍) 중랑장(中郞將)

의종은 곧 이의방에게 응양군과 용호군의 직위를 동시에 주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의 형 이준의는 승선(承宣) 직위에 봉해져 형제가 무관과 문관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환궁 후에는 장군 직위에 제수되었으나 결국 의종을 폐위하고 거제도에 유폐시켰다. 효령태자 왕기도 폐한 후 유배보내고 태손을 죽였다.

정변 후 명종에게 받은 직위: 벽상공신(壁上功臣)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려진 신하는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 한다. 초상화는 공신당의 벽 위에다 붙혔기 때문에 이의방 때부터 벽상공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이후 두 명칭이 합쳐져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대장군(大將軍) - 전중감(殿中監) 兼 집주(執奏)

대장군은 두 번째로 높은 무관직, 전중감은 궁궐 내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위, 집주는 신하가 왕에게 올린 문서를 감독하는 직위.

9월에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옹립한 후, 대장군 兼 전중감에 올라 정권을 장악해 최초의 무신 집권자가 되었다.

10월에는 외가 쪽 고향인 금구를 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정중부, 이고와 함께 벽상공신(璧上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171년 1월에는 자신을 살해하려고 대장군 한순과 장군이었던 한공, 신대예, 사직재, 차중규 등이 모의하자 차중규를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의종의 사저 3채를 이의방, 정중부, 이고가 나누어 가졌다. 이의방은 천동댁(泉洞宅), 정중부는 관북댁(館北宅), 이고는 곽정동댁(藿井洞宅)을 각각 나누어 가졌다.

이의방이 중방에 기녀들을 데려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렸으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2.2. 정권 장악

흥위위(興威衛) 섭대장군(攝大將軍) - 위위경(衛尉卿) - 지병부사(知兵部事)

흥위위 섭대장군은 2군 6위 중 6위인 흥위위 소속의 섭대장군이다. 섭대장군의 섭은 오늘날의 (진)과 비슷하며 녹봉 대우는 한 단계 아래인 장군과 같다. 지병부사는 지금의 국방부 차관급 직위이다.

좌승선(左承宣)

위 직위에서 승진. 선지(宣旨)를 조정에 알리거나, 조정의 의견을 왕에게 올릴 때 검사하는 직위다.

1171년 1월에 모반을 도모하던 이고를 죽였고 직후인 4월에 다시 모반을 도모한 채원마저 제거하며 위위경, 지병부사에 올라서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이고와 채원의 반역이 연달아 일어났던 것을 본다면 둘 다 이의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천하 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의방은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급 무신들을 끌어들이는 유화책을 펼치며 정국을 이끌어 나가려 했다. 애당초 하급 무관 출신으로 서열상 재상의 직위로 직행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이의방이 자신의 상관들이었던 중방의 대장군들과 상장군들을 끌어들이기 애매했기 때문에 중방의 권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갔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이때 중방의 수장이며, 원로 무신들의 리더인 정중부와 연합해 중방의 지지를 얻어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에는 이고, 채원이 연이어 제거되자 이의방 형제를 의심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던 정중부를 이의방이 술을 들고 찾아가 대화를 나누니 부자 관계를 맺고 서로 연합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방의 수장이었기에 중방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하급 무관들의 지지가 필요한 정중부와는 반대로 하급 무관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본인도 하급 무관 출신이다보니 중방의 지지가 필요한 이의방이 처한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2.3. 의종 시해와 계속되는 전횡

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과 살아남은 일부 문신들이 의종 복위를 내세우고 한달 후 난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의방은 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10월에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시해하고 남아있는 문신들을 참살하면서 대대적인 역풍 크리를 맞게 된다. 이로 인해 조정 여론 등이 악화되었고, 개경 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이 연달아 터지며 이의방 정권에 위기가 찾아온다.

1174년 1월에 귀법사의 승려 100명이 성 북문을 침입하자 이에 반격을 가해 그들을 모조리 죽여 진압했고,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홍화사 등 여러 절의 승려들 2,000명이 모여서 성문을 공격하자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승려들을 죽이면서 절들까지 모두 전소시켜 버린 것도 모자라 절의 재산들도 다 압수했다. 귀법사는 광종(제4대), 홍호사는 선종(제13대)이 각각 창건했던 절들이다. 이 절들은 개성 부근에 위치한 근왕 사찰들로서 근왕의 의도로 이의방을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말리는 형 이준의와 말다툼하다가 이준의가 이의방이 저지른 악행들을 말하며 질책하자 격분하여 이준의를 죽이려고 했지만, 문극겸과 정중부의 만류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이때 이준의를 죽이려다가 그가 달아나서 실패하자 화를 참지 못했는지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졌다고 한다. 사실 정중부 역시 이준의를 체포해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의 부인이 굳이 다른 집의 형제 싸움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며 만류했고, 정중부 본인도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서 이준의는 무사히 넘어갔다. 이 살벌한 형제 싸움은 나중에 둘이 조용히 화해해서 해결했다고 한다.

2.4. 처참한 말로

이렇게 정적들을 없애며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중부의 연합으로 중방에게까지 지지를 받아내면서 정치적으로 세가 커진 이의방은 아예 좌승선에 오른 후, 태자비를 쫓아내고 자신의 딸을 왕태자비로 왕태자와 정략 결혼까지 시키는 행보를 걸었다. 하지만 명문가라 해도 문관 출신도 아니고, 하급 무관 출신인 이의방이 태자비를 쫓아낸 것도 모자라 딸을 태자비로 들인 것은 도가 넘은 처사였기에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특히 이의방을 경계하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은 이의방의 계속된 전횡으로 말미암아 더는 묵과하지 않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1174년 북계 40개 성이 가담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으로 향하던 도원수 윤인첨이 대패하고, 동북면으로 향하던 도지휘사 최균이 죽자, 다시 동북면으로는 두경승을 보내어 진압했으나,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턱밑까지 도착한다. 대노한 이의방은 내통을 의심하여 서경 사람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덕재 등 100여명을 북문 앞으로 불러 모은 후 이들을 모두 참살하고, 이들의 수급을 저자에 효수하였다. 이후 이의방 자신이 직접 출정해 예성강을 넘어 최숙을 선발대로 보내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이르렀으나, 조위총의 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공성전을 펼치며 추위로 인해 전황이 어려워지자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삼아 귀환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재출정을 준비하던 1174년 12월 18일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과 그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 등(僧宗旵等)에 의해 살해된다. 결국 조위총의 난이 한창인 어수선한 정국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때 이의방은 정중부 세력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아무런 호위도 거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고, 딸 또한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 태자비에서 폐출당했다. 무신들은 처음에는 문신들이 승군을 사주하여 일어난 일로 여기고, 문신으로서 원정군 지휘관인 윤인첨을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가 설득하여 겨우 막았다. 이후에도 직속 부하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도 이의방의 복수를 하려다 발각되어 모두 붙잡혀 귀양가게 된다. 반면에 정중부는 문하시중에 임명되며 동시에 무신 집정에 오른다. 이의방의 죽음을 계기로 그 동안 이의방의 무력에 눌려 있던 중방의 원로 무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하며, 정중부는 그들을 중용하면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문신들을 우대하여 문신들과의 관계도 비로소 원만해진다.

3. 여담

일설에는 <십팔자위왕>의 도참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고자 했는데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이의방이 척살당한 후 동생인 이린은 전주로 내려가 전주 이씨 가문을 존속시켰고, 이린의 6세손인 이성계가 탄생해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면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벽상공신(璧上功臣)에 정중부, 이고와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니 이들 3명이 무신정변의 주동자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정권의 첫번째 집권자로 본다. 이고가 부각되던 시기가 잠시 있었으나 그 기간이 짧은데다 이고가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이고, 이의방, 정중부 3명이 서로 눈치보며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무신정변 당시부터 집권 이후에도 정중부가 더 높은 자리에 있었고 대외적으로 무신들을 대표하는 위치였다. 이의방과 이고는 처음에 무신정변의 대표로 우학유를 내정하였으나 우학유가 완강하게 거절하자 정중부에게 제의하고 정중부는 이를 받아들인다. 둘은 성향 차이도 확연한데 정중부를 비롯한 노장파 무신들은 온건파로 분류되는데 반해 이의방 등의 소장파들은 문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강경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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