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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정중부(鄭仲夫)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40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무신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연 인물로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며 그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무관이 되기 이전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공학금군(控鶴禁軍) 소속 장병

공학군은 국왕의 친위대로 이름은 당나라 천자의 친위대 이름을 가져 온 것이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사람이었다. 비범한 외모를 지닌 거구의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는 용모가 우람했으며, 눈동자는 네모졌고 이마가 넓었다. 또한 얼굴 빛은 백옥 같고 수염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이의민보다 키가 더 큰 7척이 넘는 거구로서 위풍이 늠름했다고 한다.《고려사》에서는 그의 외모를 기록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중부가 군문에 몸을 담그면서 출세하게 된 계기도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의 덕이 컸다. 처음에 정중부가 살던 고을에서 정중부를 군적에 올려놓고는 그의 팔을 매어 수도인 개경으로 보냈는데 재상인 최홍재가 군사들을 가리다가 그의 풍채를 보고 비범하여 여겨 팔을 맨 것을 풀어주고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시켰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정중부가 키도 엄청나게 크고 용모도 잘생긴 편이라 왕의 위엄을 발하는 자리에 세우기는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정중부는 이처럼 매우 멋있는 용모 덕분에 공학군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2.2. 초급 장교 시절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견룡대정(牽龍隊正)

견룡군 소속 대정이며, 대정은 부사관급 직위다. 견룡군은 공학군과 함께 국왕의 친위대 중 하나다.

교위(校尉): 교위 역시 낮은 직위로 아마 견룡군 소속이었을 것이다.

정중부는 이후 인종 때 초급 장교 정도의 직책인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때 정중부에게 있어서는 평생토록 가슴 속에 원한을 심어준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사》에는 섣달그믐날(제석: 除夕),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을 때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 자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장기자랑은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귀신 쫓는 춤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에 따라 왕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내시, 다방, 견룡] 등이 함께 춤을 추며 놀았는데, 그 와중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를 만만히 보고는 그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김돈중이 1144년 과거에 급제했고, 인종이 2년 후인 1146년에 붕어했으니 대략 이 시기 사이의 일로 추측된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주먹을 날리며 김돈중을 크게 욕보였다. 물론 정중부도 그의 정체가 알고 보니 김돈중이었음을 알고 순간 당황했고, 김돈중을 포함한 여러 문신들도 정중부에게 감히 무신 주제에 문신들을 업신여긴다면서 화를 냈다. 여기까지는 젊은 관료들이 만취하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더 커졌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아들이 정중부에게 두들겨 맞은 것을 알고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꾸짖기는커녕 노발대발하며 본인 가문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왕에게 정중부를 똑같이 매질해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군주였던 인종은 대학자이자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를 허락하기는 했으나, 정중부도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그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비록 정중부는 임금의 총애 덕분에 처벌은 면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김부식 부자는 물론 문신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전근대에서 남성의 수염은 자존심과 관계된 문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후 정중부는 다시 승진을 거듭하여 인종의 아들 의종 즉위 초(1146년 즈음)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어사대에서 왕의 명령으로 수창궁 북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그런데 정중부와 산원인 사직재(史直哉)가 이를 마음대로 열고 드나들자 1147년 12월에는 어사대에서 정중부를 탄핵하여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의종은 허락하지 않고 넘어갔다.

1170년대 정중부의 관직

직위: 상장군(上將軍) 혹은 대장군(大將軍)

2군 6위 중 최고위 무관직으로 상장군은 정3품, 대장군은 종3품 직위이다.

정중부는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 즈음에는 지위가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다혈질적인 성격에 막가파스런 경향이 있었던 듯하나 인종과 의종 부자가 모두 정중부를 좋아하며 특별히 우대해 줬으며 무신들의 존경을 받은 것을 보면 사람을 끄는 리더십만큼은 뛰어났던 인물로 보인다. 사실 정중부는 젊은 시절부터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호위하는 직책을 지냈기 때문에 포지션으로 치자면 내시들과 더불어 국왕의 최측근 포지션에 가까웠다. 여기에 그의 매우 위풍당당한 외모가 플러스 요인이 되어 유독 군주들이 정중부에게 큰 호감을 보였던 듯싶다.

2.3. 무신들의 불만

이후로도 문신들은 계속 무신들을 얕봤고 멸시하고 괄시하고 깔봤는데, 특히 좌부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가 왕의 총애만 믿고 무관들을 업신여기자 더욱더 분노했다.

한편 임금 의종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점점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하게 놀러만 다니며 불교‧음양설‧선풍(仙風) 등 통치와는 연관이 먼 것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의종이 강대한 개경 문신들의 힘에 짓눌려서 현실도피적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그 전부터 의종은 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예술가 기질을 자주 보였다.

하여튼 의종은 놀러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 탓에 1164년에도 인지제(仁智齊)라는 곳에 놀러갔다. 그런데 법천사의 승려 각예가 대접하겠다고 해서 의종은 달령원(獺嶺院)까지 또다시 가서 술 대접을 받았으며, 1166년에는 왕이 성수원(聖壽院)에서 각예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의종은 각예와 죽이 잘 맞았던 모양으로, 이때 의종은 여러 학사들과 놀러다니며 끝없이 시를 짓고 화창했는데, 정중부를 포함한 호위 부대 소속이었던 여러 무신들은 먼 길을 질질 끌려다니며 피곤하게 호위나 서게 되었다. 이에 들러리가 된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서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왕이랑 문신은 시나 지으면서 재밌게 먹고 노는 반면 무신들은 거기에 끼지도 먹지도 못하니 불만이 저절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1170년 8월에는 왕이 연복정에서 출발에 흥왕사에 놀러갔고, 이때 결국 무신들이 폭발했다.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거사를 권하자 정중부가 답했다.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하지만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의종도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모양인지 보현원으로 출발하려던 오문(五門)에서 갑자기 멈추고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수박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줄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난다. 이때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조기에 빠져나왔는데,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을 모욕하며 손찌검을 날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뢰는 "명색이 대장군씩이나 된다는 놈이 어떻게 새파랗게 젊은 것들도 감당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이소응은 노쇠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따지면 체력적으로는 최고조인 젊은 무관들을 당해낼 수 없음은 당연지사였다.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새파랗게 어린 문관들 앞에서 수박희로 재롱이나 떨어야 했다는 점을 보면 당시 무신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알 수가 있다. 또한 뺨을 때릴 때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정중부는 진노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한뢰에게 이렇게 외쳤다.

"한뢰 네 이놈! 네가 비록 문관이라고는 하나 이소응 대장군은 너보다 연세도 많고 종3품으로 벼슬도 훨씬 높은거늘 종3품이나 되는 대장군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이때 정중부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당시 대장군은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종3품 품계이며, 한뢰의 직책 기거주는 종5품으로 이후의 사관에 가까운 직책이므로 대장군인 이소응이 한참 상급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든 무신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젊은 문신에게 맞는다는 것은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문신들이 이렇게 오만하고 건방지게 나왔던 것은 무신들의 권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볼 여지도 많다. 의종의 입장에서는 무신을 키우고, 무신의 불만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수박 대회를 연 것이었지만 갑자기 문신 한 명이 판을 파투낸 것이다. 한 마디로 한뢰는 눈치도 없었고 센스도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와 그 과정에서 생긴 차별 의식 및 문신들의 오만이 정변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부터 문신들을 편애했던 의종의 행동 자체가 무신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며, 이소응이 뺨을 맞았을 때는 제재하지도 않고 한바탕 크게 웃기만 했을 뿐인데, 젊은 관리도 아니고 한 나라의 왕이란자가 이렇게 무식하게 행동한 것이며, 칼로 깔끔하게 죽은 한뢰에 비해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척추가 꺾여 반으로 접히고 시체는 강가에 버려진 의종의 최후를 상기한다면 왕의 문제가 가장 심각함을 상기할 수 있다.

2.4. 무신정변

무신난 시작 후 정중부의 관직: 수사공(守司空)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인다.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직위: 복야(僕射)

정2품 직위. 복야는 좌복야와 우복야가 있으며 상서성의 장관이다.

이소응이 뺨을 맞은 자리에서 이고는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잠자코 기다리라고 했으며, 날이 저물 때쯤 왕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했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소집시켰다. 그리고는 왕이 문으로 들어가고 문신들만 나오자 무신들은 그 자리에서 임종식과 이복기부터 가장 먼저 살해하고 침입했다. 한뢰는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기도 하고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처음에는 왕 앞에서 자제하던 이고가 칼을 빼들자 나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개경에 들어가서 사졸들을 다 풀어 문신 수십여 명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일파는 원래 자신들의 원수는 문신 몇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문신과 찬동하지 않는 무신들까지도 죄다 죽였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집까지도 모조리 허물 정도였으니 얼마나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개경에 있었던 김돈중은 감악산으로 황급히 도주했지만, 이후 시종의 밀고로 인해 자신의 동생과 함께 같이 잡혀 죽은 것으로 볼 때 인망이 없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의종은 정중부에게 그만 하라고 만류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 일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이미 분노 게이지가 마치 하늘을 뚫을 정도로 상당히 분기탱천해 있던 무신들에게는 이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후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이 사건이 '보현원의 난', '무신의 난', '정중부의 난' 등으로 칭하기도 하는 무신정변이며, 고려시대의 역사를 전•후기로 크게 가르는 무신정권의 시작이 바로 이 사건이다.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 묵은 원한을 이때 풀게 된 것으로, 이때 정중부의 나이는 60대 중반의 고령이었다.

명종 옹립 후 받은 관직

직위: 참지정사(參知政事)-고려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평장사 계열 직위 중 네번째 직위

중서시랑문하평장사(中書侍郞門下平章事)-평장사 계열 직위 중 두번째 직위

9월에 군주 의종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쫓아 유폐하고, 태자 역시 진도현에 유배보내며 태손을 살해한 뒤 의종의 친동생 익양공 왕호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 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평장(門下平章)을 추가해 승진하여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도 오른다. 10월에 이고, 이의방과 함께 벽상공신으로서 공신각 위에 초상이 그려졌다. 그리고 서해도 군현을 자신의 고향 해주에 편입시켰다.

김보당의 난 제압을 위한 행영 군단

정중부의 직위: 고려 서북면의 군단장. 서북면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받음.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고려 서북면의 군단장. 서북면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받음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행영'은 임시 군단을 의미한다. 즉 임시로 편성된 군단의 병마사란 뜻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 행영의 편제 중 중군을 지휘하는 병마판사

1172년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겸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에 임명되었으며, 김보당의 난이 발생함과 동시에 장순석, 유인준 등이 거제도의 의종을 데려와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군 이의민, 산원 박존위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 하면서 또 다른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김보당의 난을 진압했다.

정중부의 마지막 관직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의 최고위 관직. 실권을 가진 직위 중 제일 높다.

1174년 12월에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며칠 만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2.5. 갑오정변: 이의방의 몰락과 집권

이의방이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역이용하여 1174년 12월, 아들인 정균이 부하를 시켜 이의방을 암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갑오정변), 정균이 조위총의 난에 대한 처리를 할 때쯤인 11월 임자일에 어떤 이가 중방에 문관들이 남적들과 변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는 허위보고를 하자 도교승 김윤승 등 7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병부상서인 이윤수를 거제현령으로 강직시켰다.

또한 이때, 보제사(普濟寺)를 중수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여 낙성식에 명종이 참여하기를 청원했지만 해당 관원들의 간언에 따라 가지 않았다. 비밀히 승록사(僧錄司)를 시켜서 임금의 거동을 청하고 갖은 성찬을 차렸으나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관원들이 대신하여 갔다고 한다.

정중부는 권세있는 직위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는데 12월에 낭중인 장충의가 그의 뜻을 맞추어, '왕이 재상에게 궤장(几杖)을 주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라고 하자 왕이 궤장을 하사하도록 만들어 국사를 일체 자신에게 고하여 결재를 받았다. 때로는 중방(重房)에 앉아서 남의 죄에 대하여 발언했으며, 백관은 그의 집에 가서 축하를 드렸다 할 정도로 권세가 높았다.

무관들이 문관들의 임시직을 빼앗아 독차지하려는 것을 대장군 홍중방이 반대하다가 하급 무관들에게 암살당할 뻔했는데, 이의방 세력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졌으나 하급 무관들의 반발이 아직 남아있으며, 그 주모자와 일당을 잡아서 귀양보냈다는 것은 이의방 세력과 달리 정중부 세력은 온건파인 만큼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하는 것이야 이미 변화의 대세였지만, 문관들의 임시직까지 빼앗는 것은 지나치다는 홍중방의 의견은 중방에서도 내심 찬성했던 듯 보인다. 이는 홍중방의 대사 중 중방에서 그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알다시피 중방은 친정중부 세력이었다. 이의방파의 반발 때문에 말을 못하던 중방의 고위 무신들이 정중부 정권에서 실세로 올라선 후에는 문신들과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의방이 죽을 당시, 2차 토벌군의 지휘자는 기탁성, 진준, 경진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란 당시 정중부와 같은 노장파로 분류되는 이들이었기에 토벌군은 별 동요함이 없었다 한다.

2.6. 권력 다툼과 기해정변

1176년 8월 당시 정중부의 직책은 문하시중이었다. 그때 각 영의 군사가 익명으로 방을 내걸고 이르기를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희롱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한다고 했다. 또한 남적들을 치려면 그들을 제거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해직을 청하면서 여러 날 동안 출사하지 않았다.

9월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 등이 정중부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시도했으나 이를 알아채고, 그들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추방했다. 1178년 7월에 기두 녹상이 대장군 장박인, 전 장군 조존부 등이 모의하여 정중부를 죽이려고 한 사실을 고하자 이들을 조사했지만 죄상이 없었으며, 또한 기두 80명이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장박인의 탈옥을 꾀했다는 사실을 기두가 고했지만 이들도 죄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유배했다.

이후 1178년 정중부는 사직을 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을 이어받은 정균과 송유인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엔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정균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려 명종의 자제인 공주를 자신의 둘째 아내로 삼으려 했고,]정중부가 문하시중으로서 관직에 있을 동안은 오랫동안 눌려있었지만 정중부가 물러나자 정2품의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 송유인은 당시 조정의 영수였던 한문준과 문극겸을 탄핵하는 등의 행동으로 대신들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무엇보다 정중부와 문신들과의 중계를 담당하던 송유인이 문신들의 대표격인 문극겸, 한문준과 틈이 벌어지면서 문신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 치명타였다.

이때 보면 장인인 정중부로부터 송유인이 정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권세를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정균이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것은 매부에게 밀리고 있기에 매부를 누를 수 있을 보다 확고한 권력을 취하려는 술수였던 듯하다. 혹은 이때 정균이 모든 권력을 송유인에게 밀려서 잃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궁녀들을 가지고 놀고, 공주까지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던 것을 보면 아닌 듯 싶다. 적어도 명종을 우습게 여기며 누를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1179년 9월에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정균의 행태에 분노한 26세의 청년 장군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기습했고, 아들, 사위와 함께 살해당한 후 모두 효수됨으로서 정중부의 가문은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다.(기해정변)

3. 기타

《고려사》에는 <반역 열전>에 실려있고, 오늘날에도 무신정변을 주도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초장부터 대놓고 반역자 취급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지만 의외로 당시 무신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망높던 인물이었던 듯하다. 애당초 이의방이나 이고 등이 정중부를 끌어들였던 이유가 하급 장교인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곤란하다고 여기고 이른바 자신들을 대표해 줄 얼굴마담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무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무척 컸다는 말이 된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신정권 초기 이의방이 권세하던 시절을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해서 설명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물론 정중부가 대외적으로 대표자라고는 하지만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의방, 이고가 처음에 내정한 인물은 대장군인 우학유이고 우학유가 "죽어도 따를 수 없다."며 거절한 걸 보면 이의방, 이고가 이미 실세로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학유가 그렇게 강경하게 거절한 이유는 우학유의 부친 우방재가 "문관들이 화를 당하면 그 화가 우리(무관들)에게 미친다."며 평소 이를 경계했기 때문. 《고려사》의 <경대승 열전>을 찾아 보면 이의민과 같은 용장이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경주로 낙향해 있는 와중에도 일부 무신들은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켜 그간 문신들에게 억눌렸던 설움을 풀어 주었는데 경대승 같은 새파란 어린 놈이 그 분을 해쳤으니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대승이 도방을 만든 것도 이러한 일부 무신들의 자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 때문이었고 역시 《고려사》에 보면 몰래 첩자들을 내보내어 항상 정황을 살폈다고 한다.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당시 무신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뜻이며 경대승이 죽기 얼마 전에 꿈에서 정중부를 봤다는 것도 이러한 긴장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벌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애초에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올라갔고 그 곳에서 눈에 띄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민과 김준 때문에 묻히는 감이 큰 편.

고려의 무관 출신 중 보기 드물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 직을 기록해 본 인물이다. 정중부는 난을 일으키기 전 무관의 최고위 직위인 상장군(혹은 대장군)이었고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에는 문관의 최고위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해봄으로써 문·무관 최고위직을 모두 해본 인물이다.

키 217cm가 넘는, 현대 기준으로도,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거한이었다. 기원전에 태어난 공자의 경우도 키가 2m가 훨씬 넘은 것으로 기록에 나오고, 또 이것은 유골 검사로 확인한 케이스로 서양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경우도 키가 196cm, 한국사에도 정중부 이전에 태어난 진평왕도 기록상 과장되었을 확률이 있지만 키가 253cm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생각하면 전근대 사회에서 키가 2m 이상인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또 정중부의 경우, 정상적인 현군이었던 진평왕과는 다르게 고려사에서 반역자로 매도된 인물이기 때문에 고려왕조나 고려사를 제작한 조선왕조에서 반역자인 정중부의 키와 용모를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미화해 줄 이유가 전혀 없다.

조선 중기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든 사건인 정여립의 난의 주동자로 알려진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태몽에서 정중부가 나와 "너희 집에 머물다 가야겠다"라는 말을 했다는 야사가 《연려실기술》에 존재하나 이는 정여립을 폄하하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무신정변 관련자들 중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에도 당시 무신들을 대표하여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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