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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경대승(慶大升)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제3대 집권자이나, 다른 집권자들과는 제법 이질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과 관직 진출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당시 지역에서 유서 깊은 군반 가문이었다. 부친인 경진은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였던 정중부의 편에 서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그 시절 경대승은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서 집안의 살림살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본디 무신 가문들 중에서도 잘 나가는 집안이었고, 정중부의 편에 서기까지 했으니 경대승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다고는 하나, 15세의 나이에 음서로 국왕 직속 친위대인 견룡군의 교위가 된 것은 가문의 뒷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유인의 아들인 송군수와 함께 견룡군에 속해 있다가, 명종 4년인 1174년에 이르러 견룡군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된다.

가문의 덕을 보아 출세길에 오르긴 했으나, 경대승 본인은 정중부의 곁에 선 아버지 경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경진은 청주 사람들의 전답을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우기로 유명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 청주 사심관의 직위를 계승한 경대승은 아버지가 탈취했던 모든 전답을 청주 백성들에게 돌려주어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고, 백성들은 입을 모아 경대승을 칭송하였다. 다만 이때 자신과 경씨 가문이 원래 지녔던 전답까지 국가에 모조리 환속해버려서, 항상 1식에 2찬으로 생활하였고, 내내 생활고로 고생하게 된다. 사후 가산을 정리해 보니 집 한 채, 쌀 몇 섬, 말 먹이뿐이었다고.

1178년, 청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청주 주민으로 수도 개경에 호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이동한 사람들과 청주 토착민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격한 몸싸움으로 번져 1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청주의 사심관으로서 대장군 박순필과 함께 파견되어 있던 경대승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다.

2.2. 정중부 제거와 집권

고려 의장기 문양 고려시대의 정변

1179년 9월에 3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궐에 난입해 당시 실권자이던 정중부, 정균, 송유인, 송군수, 이경백, 문공려 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 때였다. 이후 그의 족형인 장군 손석의 부추김으로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들인 오광척, 김광영, 송득수, 기세정, 지유 석화, 습련 등을 붙잡아 처형시켰다.

당시 임금인 명종을 비롯한 문신들은 폭정을 일삼던 정중부와 그 일당을 척살한 경대승에게 축하연을 열었는데 경대승은 모든 문신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라고 대놓고 일갈하였다. 이에 선왕 의종을 죽인 이의민이 경계해서 병사를 두어 경비할 정도로 당시 겨우 26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니 확실히 풍모는 대단했던 듯하다. 이후 쫄아버린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그의 사후에야 명종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들게 된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 일 때문에 경대승이 명종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하는데 사실 선왕 의종은 정당하게 계승한 왕위를 무신정변으로 빼앗긴 것이고, 명종은 그러한 정변 세력에게 옹립되었기에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명종이 비록 인종의 아들이긴 했지만 태자로서 계승한 왕위와 무력으로 신하들이 옹립한 왕위에서 명분이 어느 쪽이 밀릴지는 자명한 것.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이 의종에 대해 '선왕'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이의민의 숙청을 외친 건, 현재의 임금인 명종의 약한 정통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180년 12월에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 김광립 등이 교만을 부리며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고 방약무인한 행동을 보이자 그들을 죽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경쟁자를 미리 죽인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선왕을 시해한 자라 일침을 놓았던 이의민 역시 살해하려 했으나 이의민의 동지이자 경대승의 친우였던 두경승의 밀고로 이의민은 달아났다.

허승, 김광립 등을 죽이자 경대승은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재상 이하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축하하니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최고 실세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으며 집권 이후 군부도 사직하여 집에서 소소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대궐로 나가 왕에게 의견을 밝혔는데 그때마다 명종은 그의 의견에 무조건 따랐다고 전한다.

경대승은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쳐 많은 문인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했지만 그렇다고 무신 세력을 대놓고 탄압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때쯤이면 이미 문벌귀족들과 고위 무신들 간의 혼인 동맹이 맺어지고 있는 때였다. 특히나 정중부는 문벌귀족들의 말살을 원하지 않았던 인물로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문벌귀족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구 날뛰는 이의방과 이고를 제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중부 정권에서도 문신들이 무신들보다 더 많은 숫자를 자랑했고, 당연히 더 많은 관직들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정중부부터가 조정 영수가 되는 방식으로 결탁한 문벌귀족들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훗날 최충헌이 비슷하게 보여준다. 즉, 문벌귀족들부터가 이미 저 당시에는 정중부와 함께 전횡을 일삼은 동지들이었고, 무신들과도 혼인동맹으로 연결된 상태였다. 당장 정균은 본처를 버리고 상서 김이영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하는 등 정중부부터가 문신과 사돈관계를 맺은 상태였으며 정중부의 또 다른 사위인 왕규도 문신이었다. 심지어 무신들의 기관인 중방이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문신들이 무관직을 겸하며 중방 회의에 참석할 정도였다. 허나 거사 과정에서 정적들이 많아지고 독살 위협 등에 시달려서인지 의심이 많아져 문객들을 보내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 뭔가 낌새가 보이면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는 등 여러 번의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1181년 3월에는 전(前) 대정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자 영사동정 대공기의 밀고를 듣고 왕에게 고하여 체포했다. 이후 석화, 별장 박화, 주부 이돈실 등도 사건에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이돈실 등은 귀양보내고, 석화는 남해 현령, 박화는 하산도 구당사로 좌천시켰다.

2.3. 도방(都房)

경대승 집권기의 특이할만한 점이 있다면 도방이라는 경대승의 사병 집단일 것이다. 이전 무신 집권자들의 기록에도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 등의 기록이 있어 사병을 다뤘을 가능성은 있으나 경대승과는 규모나 조직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은 정적들이 많아지자 이에 백수십 명의 장사들을 뽑아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를 맡게 했다. 도방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싸움과 무기술에 능했으며, 이들은 '경대승을 화장실까지 호위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아버지인 경진이 착취한 토지를 반환하며 경씨 가문이 지녔던 토지까지 함께 반환해 버려서 결과적으로 경대승은 가난한 편이었다.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따져보면 집 한 채, 쌀 몇 섬, 말 먹이뿐이라서 100명이라는 인원을 먹여 살릴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기에 장사들은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하였고, 군적이 아니기 때문에 군인전도 받지 못하여 생존을 위해 점차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경대승의 권력과 도방의 무력을 이용한 일종의 상납을 강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도방 인원을 가두면 법관이 찾아가 석방시켰으며, 이로 인해 도방 장사들은 거리낌없는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하지만 경대승의 입장에서는 도방을 해체하자니 당장 암살 위협이 다가오고, 도방을 냅두자니 유지 비용 조달에 문제가 생겨 약탈을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어 부담이 되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는데 경대승의 상여가 나갈 때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의 상당수가 통곡했다는 점, 특히 도방이 집권자나 부유층을 살해하는 등에 전문이었던 점을 들어 이들이 일반 백성보다는 권력층을 털었을 거란 의견도 있다. 실제 '상납'을 받으려면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일반 백성을 쪼기보다는 돈을 많이 가진 부유층을 터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대목.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를 반영해 도방을 마치 탐관오리 잡는 의적 활빈당 같은 이미지로 묘사해놨다. 물론 부유층을 털어도 약탈은 약탈이고 이들이 털었던 부유층이 전부 부도덕한 이들이었단 보장도 없는 만큼 이 때문인지 도방을 한국 조폭의 뿌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도방이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받는 와중에도 경대승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경대승 개인에 대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점은 특이한 점. 앞서 말했듯 그 자신의 뛰어난 카리스마 덕분일 수도 있고, 도방 사람들이 같이 숙식하는 친밀한 대장을 버리지 않은 의리의 사나이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내부에 파가 갈리고 분란이 생겨 싸움질도 일삼았다고 한다.

도방은 경대승 사후 해체되었으나 최충헌 집권 이후 더 강대하게 재건되었다. 최우 시기 내•외도방으로 확대되었고 최항 시기도 마찬가지였다가 김준 시기 때 축소되었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도방도 결국 해체되었다.

2.4. 요절과 도방의 몰락

경대승은 집권 4년차인 1183년에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사인에 대해서는 주로 정신적 문제가 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설이 많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이의민 세력이나 혹은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설도 제기하지만 일단 고려사에는 정중부의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서는 경대승의 장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경대승의 상여가 나가니 백성들 중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어 그 울음소리가 왕도를 진동시키더라."

이 단편적인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경대승이 비록 고위급 무장들에게는 반감을 샀을지 몰라도 적어도 백성들 사이에서만큼은 인망이 높았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경대승 사후 그의 사병 집단이었던 도방은 해산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도방 우두머리였던 김자격이 무슨 일인지 도방 사람들을 반역 모의로 무고해 버리면서 몰락하고 만다. 결국 왕명을 받은 대장군 정존실, 오숙 등에 의해 죄를 받았고, 도방 인원 대부분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거나 나머지는 유배를 떠났다.

경대승의 요절은 그가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많은 정적들로 인해 신변의 위협으로 받은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경대승은 무인임에도 경인년 이전으로 되돌리기를 원했고, 다시 조정을 문신들 위주로 바꾸기 위해 무신들을 숙청하거나 무신들의 권력 기관인 중방의 권한을 줄이면서까지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쳤지만 정작 무신들에게 옹립된 명종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상기된 도방의 가혹할 정도의 몰락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는 측면도 일부 있는데, 경대승에 반대하던 세력 입장에서는 도방의 씨를 확실히 말려두지 않는다면 후환이 상당히 두려웠을 것이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무신 집권기 실권자들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경대승보다 나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백성들 중에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경대승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선 신망을 제법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선동 능력 등을 보여주는 일화가 상당한 걸 보면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은 있었던 듯. 물론 이는 후대 문신들이 문신을 우대한 경대승을 더 쳐줘서 호평한 점도 있겠지만 이런 평을 빼고 팩트만 보더라도 최충헌까지의 무신 집권자들을 보면 이의방과 정중부는 의종 폐위, 이의민은 의종 시해, 최충헌은 명종과 희종 폐위와 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경대승만은 무신 정권기에 집권한 최고 권력자 중 유일하게 국왕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경대승은 집권 당시 젊은이였기에 혈기도 넘치면서 융통성도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사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천문에 밝고, 사람됨이 강직하여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섞지 않았으며, 남을 꾸짖음에 말을 가리지 않았다.'

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애꿎은 정적을 만든 측면도 있었을 법하다. 대표적으로 정통성이 없다시피 한 명종 앞에서 선왕을 운운한 것 역시 명종 입장에서는 조선 세조 앞에서 단종의 정통성이 어쩌구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명종은 무신 집단인 중방 세력들에 의해 옹립된 임금이었기에 중방의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지만 경대승은 중방의 정중부 등을 싫어하여 거사를 일으켜 그들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애초에 명종과 양립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다. 물론 다르게 보자면 그렇게 적이 많은 와중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자택에서 칩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경쟁자나 적들이 무서워 지방으로 도망치듯 떠났을 정도라는 것이니 일신의 카리스마만큼은 굉장했던 모양.

도방 관련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경대승의 삶은 전쟁마냥 정치에서도 개인만 잘났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님을 반면교사를 통해 일깨워주게 된다. 다만 확실히 경대승이 도방의 폐해, 정치력 부재 등 단점도 명확한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무신 집권자 중 가장 온건적이고, 본인이 무인임에도 진영논리에 휩쓸리지 않아, 아닌건 아니라고 보면서 조정에서 중방과 무신들의 힘을 크게 빼놓은 점은 나름 평가할 만하다. 중방의 힘을 빼놓아서 후대 무신 집권자들이 견제받지 않고 더 활개를 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경대승 사후 중방은 다시 힘을 키웠기 때문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경대승에게 적지 않은 중견 장교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 전보다 힘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어쨌든 경대승 사후 집권하는 이의민은 오히려 이미 숙청당한 경대승 세력보단 중방의 견제를 더 신경써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고려사》는 경대승을 <반역 열전>에 넣지 않았고, 《고려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도

'경대승이 무신정권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문신들이 그를 의지했다'

고 상당히 좋게 평가했다. 《동사강목》에서도 경대승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크게 슬퍼했다'고 호평했으며, 경대승의 죽음을 '졸'(卒)이라 하여 '선비의 죽음'으로 표현해 우대해 주었다.

경대승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의 <열전>이 무신란 이후 집권한 무인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고려사》<반역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 이전이나 이후의 무인집권자들 모두가 <반역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경대승만은 일반 <열전>에 올라있는 것이다. 경대승의 전기를 일반 <열전>에 수록한 것은 《고려사》의 찬자였다. 그런데 동 찬자의 그와 같은 편찬 방침에는 경대승 당대의 인물들, 특히 문신들의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참고되었을 것이다. 경대승 당대 문신들의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그를 《고려사》<반역전>에서 제외시켰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당시의 문신들은 그를 이의방·정중부 등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했음이 분명하다.

3.2. 부정적 평가

경대승이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무신정권의 막장 집권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도 오점 역시 꽤 남겼다.

《제왕운기》엔 저자 이승휴의 경대승 평가가 남아있는데, 그는 문하시중 최홍윤의 경대승 관련 시를 '매우 옳다'(其語信然)고 하면서 경대승의 이의민 제거 실패를 비판했다.

기는 세상을 덮고 힘은 산을 뽑으니, / 氣蓋世兮力拔山

주발과 진평의 공업에도 뒤지지 않는다. / 安劉功業勃平間

오늘날 삼한의 한을 남겨 놓은 건, / 至今留得三韓恨

호랑이가 그물 안에 있는데 맘대로 놓았기 때문이라네. / 虎入羅中任放還

- 《제왕운기》 <권하> 中

다만 이에 대해선 경대승을 옹호하는 시각도 있긴 한데, 생각해 보면 경대승은 고려사의 선배 무신이랄 수 있는 척준경과 입장이 제법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단순히 무력에서의 비교가 아니라,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흔히들 말하는 주인을 잘못 만난 명검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의미. 위의 이승휴의 평가처럼 고려사의 안정을 위해선 경대승이 이의민을 제거해야 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이를 경대승 혼자만의 문제로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진짜 문제는 최종 결정권자인 명종이었기 때문. 만약 명종의 명이고 뭐고 없이 임의로 이의민을 처결한다? 당장은 속 시원하고 그럴듯 해보이지만, 명종 입장에선 자기 명도 없는데 지들끼리 죽고 죽이는 행태에 또 의심을 사기 딱 좋은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명종이 정말 암군이라는 것이고, 이 부분에서도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인데, 경대승을 믿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정치적으로 이용조차도 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어쨌든 상황을 그 지경으로 방치했으니 책임이 당연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경대승 집권과 사후 시기는 명종이 실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정변 세력 거두는 이의민 제외 다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의민은 경대승에게 쫄아서 동경(경주)으로 낙향했다. 말이 고향이지 의종 살해의 현장을 제 발로, 벼슬도 없이, 황도에 중방 세력이 고립되는 그림을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2. 명종이 경대승에게 사적으로 악감정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생각해 보면 둘 다 좋을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바로 경대승을 동경(경주) 유수로 보내는 것. 경대승의 명분과 자신에 대한 충성심 시험에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동경에서 이의민과 이이제이 시키는 것이니 명종도 좋고, 경대승도 위의 충성심과 명분에 대한 증명 그리고 도방의 약탈 건과 손석 관련 건 등 약점이 있었으니 타협할 기회이기도 했으며, 동경 유수라는 정식 직책을 가지게 되면 도방 장사들 약탈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이 되는 것이니 역시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3. 경대승과 이의민 둘이 동경에서 싸우는 동안, 황도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재편되었을 것이다. 명종, 두경승, 중방 세력. 두경승은 명종이 가장 신뢰하던 인물이었고 기록으로도 괜찮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명종 + 두경승 <-> 중방. 이 구도였을 것이다. 1에서 말했듯 이의민이 떠났기에 중방은 조원정, 이광정 등이 있었다지만 두경승 하나면 정리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러하지 않았고 이는 경대승이 아닌 명종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는 것.

3.2.1. 정치력 부재

사실 경대승은 간신배들을 없애버리겠다는 혈기 하나만을 내세워 젊은 나이에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거사가 성공한 이후부턴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라는 일종의 복고주의 외에는 딱히 어떤 정치적 비전이나 소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던 큰 정책은 무신정변 이후 극도로 세가 약화돼 있던 문신들을 우대해 주는 정책 등 몇 개뿐이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 경대승은 평생 조정에 출사한 바가 없었고, 집권하자마자 곧바로 군부에서도 사직하고 떠나버렸으며 이후 고작 4년 여 간의 집권기 동안도 딱히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고 몇 차례 왕에게 찾아가 간언을 했다는 기록만 남았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애초에 정치적인 소신이 담백했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인 권력욕이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본인의 역할은 왕과 문신들이 나라를 잘 이끌게 토대를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했을 수도 있다는 것. 또 다르게 보면, 요절해서 명확히 알 길은 없지만 경대승 역시 장기집권했다면 나이를 먹으면서 학식도 쌓고 본인 만의 정치적 비전을 보여줬을지도 모르는 일.

사실 무신정변을 통해 고려 제1의 정치 기구로 부상할 만큼 권위가 높아진 중방을 제대로 구슬리지 못한 것 역시 경대승 입장에선 심각한 패착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중방은 무신정변에 참가하거나 동조한 고위급 무신들의 합좌기구라서 권위 뿐 아니라 군사 관련 실권도 여기를 통해 나오다 보니 함부로 중방을 건드렸다간 순식간에 다굴 당해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무신정변의 3두 중 이고가 이의방에게 살해당해 살얼음처럼 유지되던 균형이 깨져버린 상황에서도 이의방이나 정중부가 중방을 차마 깔아 뭉개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어떨 땐 중방이 이들의 권력을 견제할만큼 입김이 강하기도 했는데, 이는 무신정변의 주도 세력이 이의방과 이고로 대표되는 군부 내 신진 세력이었고, 여기에 원로인 정중부를 얼굴 마담으로 끌어들인 구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의방과 이고 역시 군부 내 원로들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고, 이들 원로들은 중방이라는 형태로 애송이인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일단은 자기들 중 리더격이기는 해도 동료에 불과한 정중부를 적절히 견제했던 것이다. 또한 정중부도 자신의 지지 세력인 중방을 그만큼 대우해 주고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정중부 집권시엔 무인시대에서도 중방과 정중부의 대립이 별로 나오지 않고, 정중부가 문하시중에 올라 조정의 영수가 되었음에도 정중부가 알아서 조정이 아닌 중방을 존중하며 중방에서 결정을 내리자는 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경대승이 정중부와 그 일파를 싸그리 제거한 후 집권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방의 수장과 원로를 모두 죽여 중방은 경대승을 적대시하게 되었으니, 정치 현실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경대승 사후 이의민 집권 전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 중방의 중요 인사였던 조원정은 명종이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기를 들며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것이 실패하여 처형되었는데, 당시 조원정이 중방에서 차지하던 위치를 감안해 본다면 탄핵 같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 이 당시 중방의 힘이 무척 약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전 중방을 이끌던 자들에 비해 인물 자체의 부실함도 있긴 했겠지만 말이다.

경대승이 주도한 중방 무력화 정책에 맞서 무장들의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경대승은 이를 타개하고자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함께 문신들을 적극 등용하고 또한 친위대인 도방을 설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자신은 일평생 출사를 안 하고 청렴 결백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친위대인 도방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심각한 부패를 가져왔다. 이쯤 되면 중방 무신들의 부패를 가지고 경대승이 지적하여 거병한 명분도 자연스레 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애초에 경대승이 복귀시키려 한 무신정권 이전의 문벌귀족들 역시 상당수는 부패하기 매한 가지였고, 무신정권 이후 문신들은 무신들과의 통혼을 통해 목숨줄을 연명해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대승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정중부 가문 덕에 뒷배를 채웠던 상당수 탐관오리들을 제대로 척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특히 공포정치 속에서도 경대승은 조원정은 물론이고 최세보, 이광정, 정세유, 석린, 이영진, 그리고 본인이 척결하겠다고 다짐한 이의민도 결국 제거하지 못했다. 덕분에 경대승 사후에도 조정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지속되었고, 특히 석린은 명종에게 대드는 짓도 저지르며 고려 왕실의 권위까지 대폭 깎아먹었다. 다만 이건 경대승의 입지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조원정, 정세유 등 무신들은 난신이기 이전에 고려군 내에서 명망이 높은 장군들이었기 때문에 정중부 세력을 망설임 없이 없앤 경대승조차 함부로 건드리기가 쉽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군부 내 반란이 우려되어 정중부 일가만 몰락시킨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될 정도. 그리고 이들은 훗날 경대승의 사례를 상당 부분 참조한 최충헌에 의해 대부분 제거된다. 또한 조원정, 석린, 정세유 등은 이의민 집권기에 대부분 제거되거나 유배되는데 이들은 군부 내에서 명망이 높고 문신들과 친분이 높은 문장필, 두경승 등과 문극겸 등이 탄핵하고 나서야 제거 또는 유배된다. 또한 조원정과 석린은 반란까지 일으켰다가 같은 무신이던 권절평, 고안우, 백임지, 박순필 등에 의해 실패하고 그때 처형된다.

3.2.2. 사병의 부활

도방 이전 무신들의 사병들은 대체로 용사, 장사 혹은 무뢰배 등으로 불리는 등 고용인들의 목적에 의해 임시적으로 모인 비공식적인 집단이거나 집에서 부리는 노비들을 무장시켜 동원하거나 금군들이나 관군들을 동원하는 등의 아마추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경대승의 도방은 체계적으로 전투 훈련을 받아 오로지 경대승의 호위만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앞의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신라 말기 진골들간의 왕위 쟁탈전에서 동원된 사병 집단들과 그 성격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경대승의 호위만을 담당하지는 않고 첩보 및 반대파 제거에도 동원되었다.

경대승의 도방 조직은 창설에 대한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불법적 군 내 사조직이었으며, 그 숫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였던 것으로 보이나 전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경대승은 후대의 최충헌이 이름도 바꾸지 않고 도방을 재창설, 최우 대에는 확장 및 재편되어 삼별초라는 정규군의 전투력을 뛰어넘는 사병 집단이 탄생하는데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했다는 책임을 피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도방은 이후 4대 60년간 이어지는 최씨 정권의 핵심 권력 기반이 되었고, 삼별초는 정규군의 질적 하락 및 지휘 체계의 문제를 불러와 대몽항쟁에서 정규군이 제대로 된 방어 전략 대신 임기응변으로만 대응하다 각개격파당하는 결과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는 경대승의 책임도 분명히 있는 부분이다.

특히 사병은 이들이 중앙 정부가 아닌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주군과 그 집안에게만 충성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집단인데 중앙 정부가 사병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나버린 신라 말기 상황을 보면 그 위험성이 입증된다. 특히 경대승처럼 지방도 아닌 수도에 버젓이 불법적 군사 사조직을 창설했다는 점은 명종 입장에서 보면 대놓고 어그로라 불쾌함을 넘어 위협을 느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경대승은 국가의 중요 정책이 있을 때는 어김없이 궁에 출입하여 명종에게 자신의 생각을 간했다고 하는데, 경대승 본인이야 충정으로 그랬다고 할 것이고 실제로도 그럴 개연성은 있으나, 명종 입장에서 보고말고를 떠나 제3자가 보기에도 이건 관직도 박차고 나간 자가 본인의 사병 집단을 믿고 왕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들 100여 명의 적은 숫자로 만월대 공격은 무리겠으나 왕궁 밖에서 사는 대신들에 대한 위협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며 어디까지나 당시만 해도 이들의 창설 목적은 경대승의 호위였겠지만, 이후 약탈로 변질되는 마당에 명종과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정적 제거를 위해 창설했다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경대승 사후 이 도방 조직원들이 명종이 보낸 중앙군에 의해 박살난 것도 명종의 경대승에 대한 감정도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따르지 않는 불법적인 군사 사조직이 수도에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이 경대승과 도방에 대해 느낀 위협은 경대승 사후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키고 두경승에게 이의민과 맞먹는 권한을 주어 서로 견제하는 연립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는데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경대승이 주장하던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를 대놓고 지지하거나 동조하던 상황이라서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 본인의 입장에서는 조정의 대신들을 도저히 국정 파트너로 삼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 사병 집단의 성격을 넘어 도방 조직원 개개인의 일탈도 문제였다.

3.2.3. 도방의 폐해

당시 개경에 강도떼들이 마구 설치며 자신들을 경대승의 도방이라 일컬었다. 해당 관청에서 체포해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그때마다 석방하니 이로 말미암아 강도들이 약탈을 거리낌없이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경대승의 문객(門客)이 양가의 자제를 대로상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가에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경대승이 극력 힘써준 바람에 방면되었다.

《고려사》 <경대승 열전>.

도방은 처음에는 경대승의 신변 보호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경대승의 호위에 그치지 않고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형벌을 내리거나 숙청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당시 개경(開京)에는 스스로 도방의 구성원이라고 칭하는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관부에서 이들을 체포하면 경대승이 석방해 주었으므로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도방> 항목

경대승 자신의 청렴함은 앞서의 예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 딱히 의심할 바가 없지만, 경대승이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에 그의 호위 부대였던 도방은 파가 갈려 분란이 일어나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경대승은 이들이 막 나갈 수 있게 뒤를 봐주기도 했다.

경대승의 본관인 청주 경씨는 경대승의 아비인 경진이 시조인 신흥가문으로서 무신정변으로 인해 급격하게 재산을 불린 여타의 다른 무신 가문들처럼 의외로 가문 자체의 재산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대승은 아비 경진이 불법적으로 불린 재산을 대부분 반환하고 나머지 일부를 도방 운영에 사용했는데 이러니 자금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후대의 최충헌이 재창설한 도방 및 최우의 삼별초 군대가 최소한 민간에 대한 약탈 문제는 없었다는 점에서 경대승의 경우, 그나마 있던 집과 전답을 모조리 처분했음에도 고작 100여 명의 사병을 먹여살리지 못해 이들이 민간 약탈이라는 파행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자금난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경대승은 도방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중부를 죽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의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중방마저 무력화 시켜 버리면서 무신정권에 호의적이었던 고위급 장교들에게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버렸기 때문이다. 기록에도 경대승에 대한 암살 시도가 줄을 이었다고 나와있는데, 결국 경대승은 집권기 중 도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화장실에 갈 때조차 도방 병력들이 그를 호위했을 정도로 본인 신변에 대한 노이로제가 걸려버렸다고 판단된다.

게다가 사실 도방은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닌 경대승 개인 사병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정당성 또한 부족했는데, 이런 도방의 형태는 후일 최충헌이 그대로 따라하여 삼별초 같은 사병 집단을 보유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굳이 순기능을 찾자면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을 방해하던 중방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는 정도이겠다.

3.2.4. 공포정치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듣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

- 《고려사》 <경대승 열전>

경대승은 자신의 얕은 입지를 불안히 여겼는지 여론에 항상 신경썼다. 덕분에 《고려사》를 보면 경대승이 명백한 죄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언비어를 듣기만 해도 혹해서 잡아다 국문을 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다른 무신들과 마찬가지로 인명을 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으로 덕분에 집권기 대비하여 옥사한 인물은 무인 집권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편.

왕이 선지(宣旨)를 내리길: 사형 선고를 받은 자를 제외한 범죄자는 형을 정지하고 거주지에서 연금되도록 하였다. 경대승이 누차 재판을 벌여 옥사를 일으켜 형벌이 가혹해졌다. 이를 왕이 측은히 여겨 명을 내린 것이다. 이 명을 듣고 중외가 모두 기뻐하였다.

- 《고려사》 <명종 세가> 중 발췌. 재위 9년(1179년) 11월.

즉, 무신정권의 지배층 중에 상대적으로 문인(文人) 친화적 정책을 펼치고 국왕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지, 경대승도 딱히 인명을 존중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이 모습은 어느 정도까진 감안해야 하는 게, 당시 경대승은 중방의 무력화를 주도한 탓에 다수의 무인들에게 배척받고, 심지어 암살 위협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의민을 처리하지 못한 것도 무인들 사이에서의 지지를 받지 못해 정치적인 입지가 좁아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 게다가 고려시대는 현대처럼 만민평등이나 인권의 개념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혼돈과 살육이 넘치던 무신정권기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례로 고려 경종 시절에는 복수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이 시행되다가 경종이 폐지시킨 적도 있었다.

허나 시대상이나 가혹한 사례 몇몇을 들어 "그러므로 경대승은 잘못이 없다"고 비약하는 것도 잘못된 논리일 것이다. 둘 다 엄연히 잘못된 정치행위이고, 복수법의 경우는 시행 후 폐단이 심각해지자 경종이 후회하며 바로잡았지만, 경대승은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또 경종은 엄연히 지도자인 국왕이었기 때문에 폐단을 바로잡을 정통성 있는 권력이 있었던 반면, 경대승은 실질적 집권자였다 하더라도 형식상으론 엄연히 일개 무장이었고 집권 이후엔 그것조차도 사임한 야인이었기에 두 인물 간 신분의 차이는 있었다지만, 애초에 권력을 쥐어 천하 정점에 선 자가 권세만 잡고 조직은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람은 계속 죽였다는 것부터가 꽤나 기형적이다.

즉, 집권기 시절 경대승은 조정에 나가지는 않고 집에서 큰 일이 있을 때만 지시를 했으며 문신 우대 정책에 중방 소속 무신들이 반발하자 이들을 주구장창 잡아들여 옥사, 송사를 일으켜 댔다. 그러나 이 무신들은 경대승이 볼 때나 반역자들이었지, 엄연히 정부의 관료들이었다. 그런데 경대승은 관료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정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대지도 않고은 채 무단으로 정부 관료와 사람들을 잡아들여 당시 사회를 경직시켰다.

3.2.5. 정부 조직 체계 무시

(경대승이) 사사(死士) 백수십 인을 모아 자기 문하에 머물게 해 키워 대비하니, 도방(都房)이라 하였다. 긴 베게와 이불을 만들고 명하여 번갈아 가 숙직하고 혹 같이 자며 성의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승의) 결재를 거쳤다.

- 《고려사》 <경대승 열전> 中

경대승이 공격한 중방은 본디 2군 6위 소속의 여덟 대장군과 여덟 상장군, 총 16명이 모이는 군부 회의였다. 즉 중방은 엄연한 유서 깊은 정부 조직이었으나, 무신정권이 시작되자 변질되어 거대화한 것이다.

그런 중방을 급습한 경대승은 어떠한 정부 조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명종이 임명하려 한 모든 직위를 글을 모른다며 거부했지만 정작 권세는 내려놓지 않았다. 무신들의 합법 회의 기구인 중방을 파토냈으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합법 기구를 내놓던가 아님 정중부, 이의방 마냥 중서문하성의 재상직이라도 먹어 정부 조직을 통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정부조직을 관리할 생각이 없으면 권력이라도 포기해야 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국가기관에 속해 있지 않은데 권력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국가원수인 명종, 정부 조직인 2성 6부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명목상 무직 백수인 자가 자기 집구석에서 큰 국가대사를 결재했던 것이다. 최충헌의 교정도감, 최우의 정방은 바로 이 경대승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베껴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경대승 이전의 집권자들은 모두 중서문하성 및 상서성의 관직을 차지했다. 경대승 이후의 집권자들도 2성 6부, 어사대 등 정부 조직의 관직을 겸하고 사조직을 운영했다. 즉 경대승만 유일하게 합법적 권력 행사 수단을 차지하지 않고, 초월적으로 놀았다.

(허승 김광립 등이 어울리자) 대승은 의심스러워 하여 승을 집으로 불러 베었다. 길에서 광립을 보자 즉시 죽였다.

병으로 스스로을 호위하게 하고선 주청하길: "승 등이 태도를 불량히 하니 신을 죽이려 했을 뿐 아니라 불순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이 급해 미리 주청하지 못하고 주살했습니다."

왕은 근신들에게 명하여 위로하게 하고 재상 이하는 그의 집에 가거나 글을 써서 보내 축하했다.

- 《고려사》 <경대승 열전> 中

경대승이 내세운 문신 우대, 선왕 시해범 비난 등의 명분은 좋다지만, 그런 개혁 기질을 가지고선 정작 하는 일이 반란 의심이 가는 자는 죽이고, 주문(奏文)을 올려 명종의 후결제나 받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경대승의 위세에 눌린 정부 관료들은 그를 위안하고 경하했으니 명종 입장에선 빡칠 법도..

경대승은 분명히 문신, 민간의 지지를 받고 중방을 싫어했다. 하지만 정작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으며, 권세를 놓지 않았지만 정부를 주도하지도 않고 개인 사조직만 운영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에 훗날 최충헌의 교정도감, 최우의 정방, 서방, 삼별초 등 많은 무신 집권자들의 사조직이 정당화되었으며, 이들은 정부까지 휘어잡고 왕가를 겁박했다.

4. 여담

경대승의 청주 경씨 일족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딱히 치죄를 받지 않아 잘 먹고 잘 살다가 조선 중기에 가세가 점점 기울어 본적인 충청도 쪽으로 이주하여 충주 지방 근처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다만 가문의 시조가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임에도 현재 종파인 '청안공파'의 후손들은 경대승의 직계가 아니다.

경대승의 대중적 인지도는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정중부, 최충헌 정도를 빼면 다른 무신정권기 집권자들과 비슷하게 꽤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엔 KBS 드라마 <무인시대> 등으로 경대승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면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측면은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경대승의 가묘(家廟)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 문하시중인 최홍윤이 경대승 묘에 들러 시를 짓고 갔다고 한다.

작품의 소재로 쓰기에도 크게 나쁘지 않은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는데, 20대에 최고 권력자가 된 청년 장군, 간신배를 제거하고 조정을 다시 군왕과 문신들에게 돌려주려 했던 모습, 도방 인물들과의 의리, 군신 간의 갈등과 요절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다른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 열전>에 실려 있는 반면 유독 경대승만은 <반역 열전>에 실려 있지 않으며 <제신 열전>에 실려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경대승이 권력을 차지한 후에도 이전의 집권자들처럼 관작을 받지 않고 나가버린 것, 개인의 재산 축적을 거부한 것,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문신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경대승은 무인 집권자 중 유일하게 국왕 폐위나 시해와 무관하다. 경대승이 역대 무신 집권자들 중 온화적이었기에 그가 오래 살았다면 고려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상기했듯 경대승 역시 상대적일뿐 조정의 의사 결정에 간섭했고 공포 정치, 도방의 횡포 방치, 정치적 지향점 부재 등 한계점 역시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또 의도치 않게 이후 최씨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반면교사가 되어준 케이스라는 점 역시 생각보다 큰 해악. 무신 정권의 계보에서 최충헌은 이의민의 계승자라기보다는 경대승의 계승자 내지는 IF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즉, 경대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 최씨 정권이 장기집권할 가능성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무신정권 특성을 고려하면 최씨가 제거되더라도 또 다른 무신이 난장판을 피웠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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