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 중기의 장군이자 정치인. 전라도 전주 만경현 출신으로 만경 두씨(杜陵 杜氏)의 중시조이다.
고려 예종 때에 중서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두방(杜邦)의 아들이며, 두경승의 장인은 상장군 문유보(文儒寶)이다.
2. 생애
무신정변 당시 두경승은 왕실 친위대 견룡군의 하급 장교인 대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이때 수도 내에서 장졸들이 약탈을 벌였지만 두경승만은 홀로 자리를 지키며 군인의 본분을 다하자 그 휘하의 부대도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명종 즉위 이후 산원으로 옮겼고 이후 이의방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내순검군지유로 삼았다. 그런데 하루는 퇴근하여 갑자기 옷을 바꿔입고 북산 바위 틈에 숨어버렸는데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숙직을 하다가 어슴푸레 꿈꾸는 것 같았는데 몇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해서 무서운 나머지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도망갔는데 잠시 후 수만 명이 나를 쫓아오기에 여기까지 도망해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사람들은 “경인년(1170)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재앙을 내린 것”이라고 평했다. 두경승이 다시 복귀하자 이의방은 기뻐하며 그를 낭장으로 승진시켰다.
김보당의 난 때는 이의방의 종형 이춘부와 함께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춘부가 포악하여 고을 수령들을 많이 죽였으나 두경승이 이춘부를 설득하여 이미 적의 기세가 꺾였으니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되 반역의 증거가 명백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했다고 한다. 덕분에 반란을 수월하게 수습한 이춘부는 두경승을 높이 평가했다.
1174년 9월 무신정권에 항거한 조위총의 난이 벌어졌다. 당시 장군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였던 두경승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중에 서경의 군사들을 만나 그들을 패퇴시켰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평안도 무주 객관에 머무는데 적군의 습격을 받자 군사들이 당황하여 혼란에 빠질 뻔한 상황에서 두경승이 객관 대문을 활짝 열고 적군을 활로 쏴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당황하여 패주했다.
돌아온 두경승은 북부 전선으로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서 출전하여 의주, 고산, 덕주, 무주, 대동강 일대에서 조위총의 반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명종이 지주사 이광정을 황해도 평주로 보내 두경승을 맞이하게 했다. 명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두경승의 공을 치하하며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로 임명하고, 두경승은 다시 전장으로 향하였으니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마치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적을 연파했다.
마침내 서경에 이르러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하고 진입하여, 통양문(通陽門)으로 진입한 윤인첨과 함께 서경을 무너뜨렸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겸 처치사(處置使)로 임명되어 조위총의 남은 잔당들도 진압했으니 이렇듯 전장에서 큰 공이 있어 대장군을 거쳐서 상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이후 지어사대사도 겸한다.
경대승과 이의민 집권기에도 승진 행진을 멈추지 않아 공부와 호부의 상서 직책을 맡았고 추밀원부사를 거쳐 수태위, 참지정사, 권판병부사, 판리부사 수국사로 승진을 거듭하였으며 재상의 지위인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마침내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해진다. 1196년에는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에 제수되고 얼마뒤엔 중서령으로 제수되었다. 이때 옛 제도에 3품 이상은 매번 승진할 때마다 관례상 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리고, 왕은 조서(詔書)를 내려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후에야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고 관직에 올라갔는데, 두경승이 혼잣말로 말하기를, “속으로는 사양하고 싶지 않으면서 남의 붓을 빌어 겉으로 사양하는 척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다.”라고 솔직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경대승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며 이의민 집권기 때는 이의민과 대립하였지만 이의민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는 등 무신정권에서 소외되지는 않았다. 무예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아서 이의민의 괴력에 대적할 수 있기도 했으니 명종이 이의민을 견제하는 카드로 두경승을 중용하며 일부러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의민은 두경승과 주먹다짐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1196년 4월 최충헌이 미타산에서 이의민을 암살한 후 1196년 8월 왕과 태자가 행차하는데 태자 일행의 수레가 구경꾼들과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때 누군가가 왕의 어가에 변고가 생겼다고 외치자 호종하는 관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두경승만이 태연히 왕과 태자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사실 이 소란은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꾸민 일이었으며 최충헌은 이 사건 이후 두경승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히는데 이미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에게 두경승은 앞날에 방해가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1197년 9월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킴과 동시에 개경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상의할 일이 있다며 두경승을 불러들인 뒤 그를 붙잡아 그대로 자연도(紫燕島)로 유배보냈다. 1197년 11월 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울분으로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는 설부터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최충헌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고, 노비가 그가 가진 금을 노리고 독살했다는 설도 있는 등 사인은 불분명하다. KBS 《무인시대》에서는 비장미를 한층 더하기 위하여 자결한 것으로 묘사했다. 사망 후 영종도에 묻혔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
3. 기타
이의방을 거쳐 최충헌 초기까지 성격이 제각기 다른 집권자들 아래에 있었음에도 말년에 최충헌에게 숙청된 것 말고는 좌천되는 일 1번 없이 꾸준히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정확하게는 이의방 정권 후반기와 정중부 정권 초기 때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영향이고 경대승 정권 당시는 경대승과 친우 관계였으며 이의민 정권 당시는 이의민과 대적하기는 했으나 무신정권을 부정하지는 않고 이의민과 대립된 포지션인 까닭에 여러 가지가 섞여서 이의민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본인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능력에 더해 인간 관계도 넓었기에 그렇게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충헌에게 사실상 참패하였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학식이 부족했다거나 이의민의 라이벌로 민폐를 끼쳤다는 기록이 있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고려사》같은 사료에서는 다른 무신정권 권력자들과 달리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편. 그래서 경대승을 제외한 무신정권 권력자들이 대개 《고려사》 〈반역 열전〉에 기록된 반면 경대승과 두경승은《고려사》제신 열전〉에 기재되었다.
활 솜씨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임기응변이 전세를 뒤집어놓았다는 기록도 있는 등 군인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가식이 적었다는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인덕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일화에 따르면 라이벌인 이의민과 기싸움을 하는 도중 기선 제압을 위해 이의민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다오."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진동시키자 두경승은 "그렇소?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자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구려."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 방에 뚫어버리는 것으로 훈훈하게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뚫어버린 장소는 고려의 중요 회의 기구였던 중서문하성. 그 정도가 극심하여 두 사람이 만나 눈을 마주치면 주위 사람들은 휘말릴까봐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당시에 다음과 같은 시도 돌았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의 행태가 얼마나 사람들을 질색하게 했는지 알 만하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