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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최우(崔瑀)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49 목록 댓글 0

1. 개요

최이는 잔치와 음악을 좋아하여,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는데 절도가 없었다. 어떤 때는 자기 집에서 3품 이상들에게 잔치를 베풀거나 어떤 때는 재추 및 문무 4품 이상들에게 잔치를 열었는데, 종일 노래를 부르고 풍악을 울렸으며, 어떤 때는 한밤중에 파하기도 했다. 한번 재추와 여러 장군 등 46명을 불러놓고 잔치를 열었는데, 술이 취하자 어사중승 장군 임재(林宰)가 술잔을 잡고 광대 춤을 추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이를 추한 짓이라고 하였다. 또 양부 및 여러 장군들과 잔치를 열고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악공들에게 당악을 연주시켰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쳤으므로 최이가 두려워서 음악을 중지하였다.

《고려사》

고려의 무신으로, 무신정권의 제6대 집권자이자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 이름은 '우'(瑀)로 후에 '이'(怡)로 개명했으며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를 통틀어 집권자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집권했다.

2. 생애

2.1. 정권 계승

1219년 아버지 최충헌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를 고종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공사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었으며 가난한 선비를 등용했다. 친동생 최향과 지윤심, 최준문, 류송절, 김덕명 등 최향의 측근들, 아버지에게 아첨하며 백성을 괴롭힌 관리를 유배 및 파면시켰다. 1221년 진양후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했으며 몽골의 사신 저가(這可) 등이 오자 돌려보낸 후 남쪽 지방 주군의 정용군, 보승군 등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의주, 화주, 철관 등에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1222년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집권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1223년 황라성을 수축하면서 성 밖으로 겹쳐서 쌓은 개경 나성의 도랑을 수리하기 위해 자신들의 군사를 동원했고, 13층 탑과 화병을 만들어 흥왕사에 두는 등 각종 비용을 지출했다. 상장군 최유공, 추밀부사 오수기, 장군 김계봉, 낭장 고수겸 등이 문신들을 모두 학살하기 위해 모의하자 오수기를 백령진장으로 강등시켰다가 사람을 보내어 살해했다.

또한 최유공을 거제현령, 김계봉을 명주부사로 삼았으며 고수겸을 해도로 유배보냈다. 1224년에 최유공이 김계봉, 대장군 이극인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최유공, 이극인, 김계봉, 산원, 박희도, 이공윤 등을 죽였다. 또한 그 일당 50여 인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추밀부사 김중구, 상장군 함연수, 상장군 이무공, 대장군 박문비가 관련되었음을 알아내면서 이들도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1225년에 자택에 도방을 설치하여 '정방'(政房)으로 불렸다. 정방으로 인사권을 장악하고, 문사 등을 뽑아 소속시키면서 이를 '필자적'(비칙치)이라 했는데 고종은 허락만 할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고, 노비의 아들인 안석정을 어사증승으로 삼았다. 또한 전 유마장교를 어전을 호위하는 자로 임명했으며 경상도 안찰사인 권응경이 왜인의 형상을 그린 그림을 바쳤다.

1226년 종기를 앓아서 2품관 양부부터 7품관 연리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여 제사를 설치할 정도였다. 임정의 처가 독을 빨아내는 고약을 발라서 효험이 있자 고종이 임정을 공부낭중으로 제수하여 위로받았다고 하며 이때 '광벽익대공신'호가 되었다.

1227년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객 중 유명한 선비나 유학자들을 포섭하고, 도방을 확대하여 사병을 증강시켰다. 이때 삼계현 사람인 최산보(주연지)가 소를 도둑질하여 현관이 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개경에서 점술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보고, 최우가 최산보를 칭찬하면서 신임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최산보를 함부로 건들 수 없었으며 앞다투어 뇌물을 주었다.

그러나 최산보가 '고종은 왕을 잃을 상'이라고 말하자 비밀리에 장군 김희제에게 이 얘기를 하여 김희제가 이 얘기를 한 적이 있냐고 묻는 식으로 최산보에게 얘기하도록 한다. 어느 날 최우는 최산보가 상장군 노지정, 대장군 금휘, 대장군 김희제와 함께 폐주 희종(제21대)을 복위시키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듣는다.

최산보를 남해, 노지정과 금휘 등을 여러 곳에 유배시켰으며 최산보의 가산을 몰수하다가 희종이 최산보에게 준 글을 얻었다. 장군 조시저를 보내서 희종을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옮겼고, 최산보를 바다에 빠뜨려 죽였으며,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 또한 최산보의 제자 도일을 붙잡아 자백시킨 후 노지정, 금휘, 중랑장 아윤위(牙允偉), 별장 신작정, 김희제와 아들 3명 등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그들의 처자와 형제들을 먼 곳으로 나누어 유배보냈다.

자연도에서 유배된 문대순이 근읍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낭장 이괴를 보내 문대순 등 5인을 잡아죽였다. 그리고 남경 사람으로 도적인 인 걸이 개성으로 들어가자 기병 10여 명을 보내어 잡아 죽였다.

1228년에는 '오대진국공신'이 되었으며 서도에서 모반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병마사를 보냈지만 찾지 못하여 이를 알린 자를 압송했는데 이 때문에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를 알린 자에게 각종 물품을 주면서 제위의 산원에 임명하여 교위방에 소속시켰다. 또한 급제 박인이 일본에 화친을 하자 각종 물품을 주어 포상했다.

자혜원을 지으려고 하는 중이 강음현에서 나무를 베려다가 감무 박봉시가 이를 금지하면서 몰수하자 대장군 대집성을 통해 부탁하여 편지를 보내 청하였다. 이를 듣고 교정소를 통해 다른 곳으로 알렸지만 박봉시가 이를 따르지 않자 대집성의 부탁으로 박봉시를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임피현령인 전승우가 상장군 김현보의 논밭에 있는 조를 모두 거두어 밭을 백성에게 주었고, 김현보가 안찰사 최종유에게 다시 그 조를 징수하려고 했지만 전승우가 법사를 통해 이 둘을 탄핵하자 그 편지를 빼앗고 이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고 국학박사 김정립, 국학박사 백양필 등이 학록 염수장, 직학 경유 등이 시정을 비방한다고 하자 이들을 가구옥에 가뒀다가 염수장을 신초도, 경유를 거제도에 유배보냈다.

1229년에는 이웃집 100여 채를 빼앗은 다음 헐어서 격구장을 만들고 56일 동안 잔치를 벌였으며, 격구를 장려하여 이를 열었는데 격구에 능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면서 격구장에 있는 다락 3간을 증축했다. 그리고 곡식이 크게 가물었다고 하여 5도에 사자를 보내어 손실을 검사하게 했다.

1231년 나라에서 고종의 어련(임금의 가마)을 끌고 다닐 도구를 구하기 위해 남송의 상인에게 물소 뿔을 사오게 했지만 그때 남송에서는 고려에서 물소 뿔로 활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금지했다. 하지만 남송 상인이 최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산 채로 물소를 바치자 남송 상인에게 인삼과 포를 주면서 사사로이 어련을 만들어 고종에게 바쳤다.

2.2.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관련 문서 아이콘 관련 문서: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1231년은 기나긴 여몽전쟁이 시작되는 해였다. 몽골의 제2대 오고타이 칸은 사신 저고여(착고여)가 국경, 즉 고려의 압록강변에서 피살당한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권황제 잘라이르 살리타이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도록 했고(제1차 침입), 개경이 포위당하자 위협을 느낀 최우는 재추회의를 열어 강화도 천도를 논의했다. 이에 조정 신하의 대부분이 반대하자 본보기로 자신의 사병인 삼별초중 야별초의 지유인 김세충을 죽이고 수도를 강도로 천도했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 때문에 분노한 몽골에서는 1232년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을 파견하여 홍복원을 대동해서 제2차 침입을 개시했으며, 살리타이가 용인에서 벌어진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에게 사살당한 것을 계기로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최우는 성을 쌓아 몽골군에 대비했고 그 공으로 진양후로 책봉되자 대대적으로 개인 사저를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서북면의 여러 성에 머물러 있는 다루가치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내시 윤복창이 북계에 있는 다루가치들의 무장을 해제하려다가 다루가치에게 선주에서 사살당했던 것이 그것이다.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또다시 다루가치 제거를 계획했지만 몽골군이 보복할까 두려웠던 백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자 개경과 충주, 경주 등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회유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회유책을 사용한 충주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보내어 강경 진압을 단행했다.

짐(朕)이 보니 옛부터 이성(異姓)으로 후(侯)가 된 자는 종실의 예(宗室之例)로 봉해진 것이 아니다. 반드시 운명을 타고나 세상에 걸출함을 보이고 공을 쌓고 덕망이 높아야 책봉되었다. 그렇기에 세상엔 그들이 적은 것이다.

나라가 있고난 후, 공을 쌓고 덕망이 높은 자가 경(卿)말고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니 짐이 경에게 모토(茅土)를 분봉해주고 싶어 소봉의 명(疏封之命)을 내렸으나 경이 겸양하여 명령을 돌려 보냈도다.

일국의 모두에게 내가 책봉을 하지 않으려 하는게 아니라 경이 거부했다는 것을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짐의 뜻을 알려 백성을 안정시킬 수 없으니 모두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은 심지어 여일인(予一人)을 옹립해 정책을 정하고 보좌의 책임을 다하니 짐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공로이다.

짐승의 풍습을 가진 자들이 찾아왔을 때 적을 알고 제도를 바꾸니 지기가 마치 신(神)과 같도다. 민(民)을 통솔해 천도하여 사직을 완전히 보존하여 반역이 일어나도 조강(朝綱)을 부활시키니 이는 삼한의 공로(三韓之功)다.

천하가 모두 미워하는 자는 달단통군(達旦統軍) 살리타이(撒里打)이다. 경의 기묘한 계산으로 화살 한 발로 죽여버리니 만국(萬國)이 다같이 기뻐했도다. 아(噫)! 짐에게도, 삼한에게도, 천하에게도 이런 기묘하고 위대하고 비범한 공렬은 고금에도 구할 수 없다. 내가 만일 경의 겸양의 뜻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삼한 뿐 아니라 천하가 짐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이미 원대한 이치에 따라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라 했는데도 겸양하니 착하도다. 스스로 공을 세워 당당히 자신의 힘으로 받는 것이 세상에 없는 덕이로다. 세습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으로 받는다면 전례와 같고 천년의 미담(千載美談)이 될 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좋은 때를 놓치면 안되니 중외의 마음(中外之心)을 보낸다. 지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공부상서(工部尙書) 최종준(崔宗峻)을 봉책사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병부상서(兵部尙書) 상장군(上將軍) 김숙용(金叔龍)을 봉책부사로 지절과 예의를 갖추어 보내니, 널(爾) 진양후(晉陽侯)로 책봉한다.

경의 덕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글을 보내니 가문의 보배에 화려함을 더하라. 관료를 배정해 연꽃과도 같은 부(府)를 크게 설치해 제후의 집을 연이어 빛나게 해라. 겸하여 별록에 기록하여 보낸 하사품을 받도록 하라.

- 《동국이상국집》 제33권 中. 최우를 진양후로 봉하는 고종의 칙서(勅)이다. 이규보가 칙령을 받들어 썼다.

1234년에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공으로 후에 봉하지만 칙서에 맞을 예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으며, 여러 주군에서 다투어 선물을 보내자 진양후에 봉해졌다. 1월에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관아 및 공공건물을 건축하여 왕도의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사병인 도방과 국가 상비군 4,000명을 동원하여 자신의 사택을 지었다.

또한 2,000명을 동원하여 고종이 거처할 궁궐을 지으면서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서산에서 백성들을 징발했다. 후작이 된 뒤, 가지게 된 관저는 진양부인데, 자신의 관저가 완성된 이후에도 여러 기화•요초들을 옮겨와 심었으며 운반하는 섬의 주민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죽을 때까지 틈틈이 자신의 사저를 조영하여 확장 공사를 했다.

1235년에 교위인 조보수가 고종형인 대장군 송백공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자 송백공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이고 조보수를 낭장으로 삼았다.

진양이 최우의 식읍이 되었기 때문에 고종이 창별감 왕중선의 벼슬을 박탈하려고 하자 왕중선을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대사성 송국첨, 간의 홍균 등을 보내서 안남의 지세를 살피고 개천을 파서 바다에 통하려고 하다가 불가능하므로 중지했으며, 울릉도에 백성들을 옮겼다.

이때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을 몽골이 추궁하자 최우는 이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자 1235년부터 탕우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3차 침입을 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공격했다. 1238년에 영녕공 왕준을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하게 되었으나, 이후에 최우는 전횡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몽골군의 침공이 없었던 1243년에는 국자감을 수축하고 쌀 300곡을 양현고에 시주로 바쳤으며, 또한 장학에 힘쓰면서 사재를 털어 《재조대장경》을 완성하게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고 성대한 잔치나 연회만 계속 벌였다.

1244년에 낭장 신착을 안찰사로 삼았는데, 정신 이선이 이를 탄핵하자 이선을 연주부사로 강등시켰으며, 대경 임경순의 아들인 임환이 글씨를 잘 쓰자 아들로 삼고, 성을 '최'로 고쳐서 장군에 제수했다. 사사로이 짠 노란 비단으로 강안전 후벽의 장지문을 장식하면서 임환에게 <무일편>을 쓰게 했으며, 고종으로부터 매우 많은 상을 받았다.

2.3. 말년

1245년 4월 8일에 연등회를 벌이면서 5월에는 종실과 사공 이상의 관원들에게 대접하는 잔치를 벌여 음악을 담당하는 관아인 팔방상에게 백금을 3근씩 주었으며, 음악 관원들과 중서, 추밀원의 기생, 재주꾼 등에게 금백을 주었다고 한다.

1246년에는 고종과 3품 이상의 관원들을 대접하는 잔치를 벌였으며, 또 일찍이 여러 관원과 여러 장군들을 대접했다가 음악 관원들에게 음악을 하도록 지시했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이를 중지했다.

1247년 제3대 귀위크 칸의 명령으로 아무칸이 이끄는 몽골군 선발대가 홍복원을 대동하여 제4차 침입을 단행했는데 황해도 연안의 염주란 곳에 주둔하여 강화도에 있는 고려군을 위협하면서 동주, 춘주, 양근, 양주 등을 공격했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면전을 피하고 몽골군을 물러가게 하려고 했는데 고려의 사신이 파견된 이후인 1248년 3월에 몽골에서 귀위크 칸이 병사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최우는 일찍이 적자가 없었고 폐출된 기생인 창기 출신 서련방(瑞連房)을 통해 얼자(천출)인 만종과 만전을 낳았다. 원래는 사위인 김약선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해두고는 두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전라도 송광사에 보내 머리를 깎게 하고(삭발 출가) 만종을 단속사, 만전을 쌍봉사에 거주하게 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무뢰승을 모아 문도로 삼으면서 재물 불리기에만 일삼아 경상도의 쌀을 함부로 징수했으며 그들의 문도들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자 보다 못한 형부상서 박훤이 이를 고하였고,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이를 글로 올렸다. 이에 최우는 박훤의 조언에 따라 만종, 만전을 소환하여 순문 안찰사를 시키고 그 문도들을 모두 가두도록 하면서 어사 오찬, 행수 주영규 등을 쌍봉사, 단속사에 보내 전곡을 내서 그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하지만 만종과 만전은 개경으로 와서 누이인 송서의 처와 함께 아버지인 최우에게 자신들을 핍박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호소하자 이를 후회하면서 박훤이 부자를 이간한다는 죄목으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고, 송국첨을 동경 부유수로 강등시켰으며, 만전을 환속시키면서 이름을 '최항'이라 고쳤다. 그런데 김약선의 처인 최우의 딸이 종과 간통을 하다가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버지 최우에게 무고하였고, 딸의 말을 믿은 최우는 사위 김약선을 제거하고 최항을 후계자로 삼았다. 만종은 그 후에도 계속 중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249년 11월에 병사하여 최우는 강종(제22대)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아들인 최항이 뒤를 이었다.

2.4. 사후

최우의 무덤은 어딨는지 알 수 없으나 강화도 고려산 일대에 안장되었다고 추측된다. 그가 죽은 지 13년 후인 1262년에 '천도공신'으로 공신당 벽상에 도형되었다고 한다.

1258년(고종 재위 45년)에 해양후 김준이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 이후,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작위와 공신 등의 관작은 모두 취소되었다. 그리하여 강종의 배향공신에서도 탈락되었다.

3. 평가

"오늘 같은 날이 다시 있겠는가!"

復有如今日者乎

1246년 임금을 위해 큰 잔치를 열고 만족하며 외친 말

자기 이름자도 못 쓰는 이들이 수두룩했던 기존의 무신들과 달리 식자층 아버지 최충헌의 영향으로 공부를 많이 하여 교양 수준이 높았고, 글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는 덕분에 문신들의 호감을 받았다. 최우 역시 아버지인 최충헌과 같이 문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듯했으나 결국 이것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자택에 서방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사대부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최우가 새로운 정치적 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무신 세력들은 최우에게 반감을 나타내었고, 최우는 이를 철저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규군을 믿지 못하겠다고 판단하여 단순한 경호대에 불과했던 '별초'를 재편하여 야별초를 창설하는데 야별초의 크기가 비대해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 재편성하였고,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 중 탈출한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창설하여 이에 편입시킨 것이 삼별초였다. 그러나 최씨 가문의 경호대 수준이었던 야별초가 최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삼별초로 변해 정예화되자 고려군은 심각한 질적 저하를 맞게 되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에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는데 최씨 정권 친위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삼별초와 고려 정규군의 명령 체계는 다를 수밖에 없었고, 정규군의 명령을 삼별초가 따르지 않든가, 삼별초의 명령을 정규군이 따르지 않는 등의 내부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덕분에 여몽전쟁 시기의 고려군은 이전의 여요전쟁과 여진정벌에서 보였던 야전에서 대규모로 격돌하는 등의 전투는커녕 제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 몽골군한테 각개 격파 당했다. 당시 고려군이 문벌귀족들이 설친 덕분에 전투력이 막장이 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최충헌 생전에 김취려의 지휘로 고려로 침입한 거란의 잔당을 야전에서 격파하는 등 고려군은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프로들이었다. 몽골과의 전쟁이 격렬해졌으나 고려 정규군이 사실상 붕괴해버렸고, 이후 삼별초 이외에는 몽골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무신정권이 끝나자(경오정변) 삼별초가 숙청을 두려워해 봉기를 일으킨 것도, 몽골과 연합했다고는 하나 고려 진압군이 그렇게 삼별초를 몰아댔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삼별초가 정작 최씨 정권기에는 오로지 강화도에만 짱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무력 집단이었기에 강화도 수비에만 투입했으며, 정작 삼별초 장교들이 "우리도 나가 싸우겠다!"라고 외치자 겨우 수십~수백 단위의 소부대만 보내 유격전을 치르는가 하면 그나마도 몽골의 공세가 계속되어 강화도의 보급로가 위협받자 조금씩 내보낸 것에 불과했다. 훗날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그때서야 삼별초가 육지로 나가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쯤 되면 수천 명 단위의 야전을 벌이기도 했다.

개경을 버린 강화도 천도가 결정타였는데 도성이 위급해서 피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강화도에서 자신의 저택을 조성하여 이름을 '진양부'라고 지어 자신만의 정부 기관을 만들어 버리는 등 장기적으로 섬 생활을 하려고 했다. 게다가 몽골의 계속된 사대 요구와 출륙을 끝까지 거부했는데 당연히 이는 몽골을 빡치게 만들어 침공의 명분을 제대로 주었다. 몽골군은 고려 본토를 개발살내며 미쳐 날뛰었고, 본토의 정규군들과 민병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조정과의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보급도 못 받다보니 몽골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붕괴되어 갔다.

특히 고려 전체가 박살이 나버린 몽골군의 제3차 침공 이후에는 자포자기했는지 나라가 작살이 난 상황에서도 파렴치하게 연회를 벌이는 등 전쟁을 끝낼 별다른 비전도 없었으며, 그 와중에도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신변 호위만 강화하고 안주하는 등 왕의 천도마저도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특히 몽골의 사대 요구를 받아들이고 항쟁을 포기하자는 의견은 탄압하고 막았는데 한마디로 나라와 백성이 망하든지 말든지 본인과 우봉 최씨 가문만 무사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러니 대몽 항쟁에 지친 민중과 지배층들한테 최우는 철저하게 증오를 받았으며, 고종 역시 전쟁에 염증이 나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쟁을 끝내려고 했지만 최우의 반대와 협박으로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최우를 증오했으나 힘이 없다보니 울화만 삭혀야 했다. 최우는 비전없이 강화도에 처박혀 버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아 권력 기반도 불안하여 상황이 암울하게 느껴 틈만 나면 사찰에 시주하거나 대장경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팔만대장경》 같은 경우는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고려 백성들의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측면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거란의 침입을 이기는 데 기여했다고 굳게 믿던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에 법력을 발휘하기는커녕 허무하게 불타는 것을 본 불교를 믿던 당시의 고려 민중 및 지배층의 심리적 쇼크는 상당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안정을 생각하는 대신 여몽전쟁이라는 희대의 국난 속에서도 자신의 권력 유지만을 생각하던 간신배였으며, 말년에는 아들인 최항에게 권력을 물려주어 대를 잇게 하여 아버지인 최충헌의 전철을 밟았던 인물이었다.

4. 기타

아버지가 '은문상국'(恩門相國)이었던 것처럼 본인은 '청하상국'(淸河相國)이라는 상국명으로 불렸다.

생전에 진주의 공작 최충헌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진주의 후작으로 봉해졌다. 사후에는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3부자가 모두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최충헌은 '경성'(景成), 최우 본인은 '광렬'(匡烈), 아들 최항은 '광정'(光正)이었다. 최이(최우)는 아버지도 못한 배향공신이 되는 명예까지 차지했으며, 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지만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그의 존재도 흑역사로 처리되어 태묘에서 신위가 빠졌다.

글을 매우 잘 썼다고 하는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신라의 김생, 고려의 유신, 탄연과 함께 신품 4현(神品四賢)으로 꼽혔다고 한다.

집권 초기의 최우는 선불교에 매료되어, 수선사의 혜심을 몸소 찾아가거나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간화선을 지도받았다. 강화 천도 이후인 1234년 혜심의 입적 이후로 최우는 더욱 타락했으며, 제조대장경을 완성하는 등의 물질적인 불사는 했지만 초발심은 잃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중기에 도굴꾼 야마모토에게 최이의 무덤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도굴된 고려청자는 수집가 스즈키 다케오에게 당시 기와집 1채 값이던 돈 1,000원에 팔렸다. 이후 대구의 치과의사 신창재에게 4,000원에 팔렸고 자금 압박을 받은 신창재는 서울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를 찾아가서 6,000원에 팔았다. 감탄을 연발하며 바라보던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실제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이것을 빙빙 돌리면 1,000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천학매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에다 사이이치로가 엄청난 유물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은 조선총독부는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10,000원을 주겠으니 팔라고 했는데 거절한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후환이 두려워 얼른 팔아치우기 위해 수집가들에게 연판을 돌렸다. 이 소식을 들은 1935년 봄 간송 전형필은 당시 기와집 20채 값이던 20,000원에 사들인다고 했으나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형필은 한 푼도 깎지 않고 이것을 사들였고, 오사카에 있던 대소장가 무라카미가 이 소문을 듣고 현해탄을 건너 찾아왔다. 나이가 50세가 넘은 일본인 무라카미는 30세의 조선인 전형필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줄 테니 팔라고 청했다. 이에 전형필은 이것보다 더 좋은 청자를 준다면 시세대로 주고, 동시에 20,000원에 그대로 팔겠다고 하니 무라카미는 이것보다 좋은 청자는 찾을 수가 없다며 웃으며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68호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이다.

조선왕조에 의해 쓰여진 고려시대 정사(正史)들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들에 적힌 그의 전횡들과 횡포와는 달리 이규보를 비롯해 김구(金坵), 최자(崔滋), 이수(李需), 유승단(兪升旦), 조문발(趙文拔) 등의 당대의 문인들은 한결같이 그를 위대한 정치가로 찬양했고, 그 글들이 조선왕조의 인정을 받아 조선 성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삼국시대~조선시대까지의 역대 우리나라의 공문서, 여행기, 시처럼 여러 명문 등을 수록한 조선왕조의 공식 문서 모음집인 '동문선'에 여러 편이 실렸다. 조선왕조가 고려사 등의 고려시대 정사들에서 최씨 무신정권 집권자들을 반역자에 간신배로 가차없이 매도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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