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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최의(崔竩)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21 목록 댓글 0

1. 개요

최의는 나이가 어린데다 우매하여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지 않았다. 그가 믿고 친하였던 사람은 유능·최양백 같은 무리들로서, 모두 용렬하고 경박하였다. 그의 외삼촌인 거성원발(巨成元拔) 및 심경은 안으로는 참소나 하고, 밖으로는 위세를 부리면서 끝없이 재물을 탐내었다. 또 그 해에 기근이 들었는데도 곡식을 풀어 구휼하거나 빌려주지 않아서, 인심을 크게 잃었다.

《고려사》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제8대 집권자로 62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다.

2. 생애

부친 진평공 최항이 승려 ‘만전’으로 있었을 당시 매형 송서의 여종과 정분을 통해 낳은 서자였다. 천출이었으나 용모가 아름다웠고 두 손에는 은은한 금빛이 돌았으며 성품은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고 전해진다. 최항은 경림과 예기를 시켜 아들 최의에게 시문과 서법을 가르치게 했고 권위와 임익에게는 정사와 정세, 정세신에게는 예법을 배우게 했다. 1255년 최의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어 붉은 가죽 띠를 하사받았다. 1257년 4월 아버지 최항이 사망하자 최의는 야별초, 신의군, 서방 3번, 도방 36번 등의 군사 조직의 지지를 받아 차장군에 오른 뒤 곧 교정별감이 되어 최씨 무신정권의 제4대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죽은 당일 최항의 첩과 간통하는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서에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이 아버지 최항보다 더한 패륜이었다고 평가한다. 최의는 자신이 여종의 소생이라는 출신 배경에 대해 민감해 했으며 그에 대한 험담이나 참소를 모두 위협으로 받아들여 말한 자들을 죽였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 최항이 폐출된 기생 서련방의 자식이었다는 사실까지 연결되어 최씨 정권의 출신성과 정통성에 대한 비방이 확산되자 이에 대한 과도한 보복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 초기에 민심을 얻고자 여러 가지 구휼 정책과 재정 기여를 시행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창고의 곡식을 풀어 여러 영부(營府)에 각각 30곡씩 배급하였으며 자신의 집에 있던 쌀 2,570석을 내장택(內藏宅)에 바쳤고 베, 비단, 철, 꿀 등 생필품을 대부시(大府寺)에 헌납하여 국가 재정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왕실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았는데 연안택과 정평궁을 왕부에 반환하는 등 사적인 공간을 공공에 돌려주는 행보를 보였으며 농사가 흉작을 겪자 모내기용 모종을 하사해 권무대정, 근장좌우위, 신호위, 교위 이하 군부와 일반 마을 사람들을 함께 구제하였다. 고종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하여 최의를 추밀원부사, 판이병부사, 어사대사 등에 임명하고자 했으나 최의는 이를 사양하였다. 대신 고종은 최의를 우부승선 직위를 제수하였다. 한편 외교적으로도 변화의 조짐이 있었는데 이 시기 민칭(閔稱)이라는 인물이 몽골에서 탈출해 고려로 망명하면서 “몽골의 대신들이 이후로는 동쪽(고려)을 정벌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으며 이에 최의는 기뻐하며 민칭을 산원(散員)으로 임명하였다. 여러모로 집권 시작까지는 나쁘지 않았던 셈.

그러나 부친 최항과 마찬가지로 조정 대신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고려 사회는 여전히 여몽전쟁이라는 외풍 속에 놓여 있었다. 최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57년 몽골군의 총사령관 자랄타이가 이끄는 제8차 침입이 발생했다. 이는 최의에게 외적 위기 상황 속에서 권위와 통제력을 시험받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고려 조정이 제안한 ‘선 철군 후 입조’ 조건을 몽골 측이 수용하면서 자랄타이 군은 철수하였고 이를 계기로 최의는 실질적인 권력 장악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철군 이후 최의는 이전과 달리 전횡적인 통치를 본격화했다. 1258년 1월 그는 장군 변식, 낭장 반홍민, 산원 정한규 등을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로 임명하여 물자를 징발하게 했으나 이들은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고 이에 대한 민심의 원성이 높아졌다. 비슷한 시기 경상도 수로방호별감으로 재직 중이던 송길유가 백성들을 강제로 섬으로 이주시킨 뒤 집을 불태우고 토지와 재산을 수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고발한 안찰사 송언상의 탄핵 상소로 실상이 드러나자 과거 그를 천거했던 김준이 변호에 나섰다. 그러나 최의는 외숙부 거성원발의 조언에 따라 송길유를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보내고 김준과 그의 인척인 류경, 류능까지 함께 꾸짖었다. 송길유 유배 사건은 최의와 김준 사이의 정치적 균열을 낳았고 김준은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후 최의는 자신을 지지했던 기존의 측근들마저 멀리하면서 정권 기반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1258년 2월 최의는 권력 기반의 불안정성과 출신에 대한 트라우마를 보완하려는 듯 노비 출신 인물들을 고위직에 중용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공주, 최양백 등을 별장으로 삼고 섭장수를 교위, 김충을 대정으로 임명하였는데 특히 이공주는 면천되지 않은 상태의 노비 신분에서 낭장으로까지 승진하며 고려 역사상 노비 출신으로 관직에 제수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 역시 부작용을 낳았는데 최의는 류능, 선인렬, 최양백 등 소수 측근에게 국정을 전담시켰고 간언하는 선비들은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들의 참소를 그대로 믿고 무고한 이들을 제거하면서 전횡과 정치적 편향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특히 도방 친위군 대장이었던 최양백을 총애하면서 선대 최항 정권의 유력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소외시켜 무신정권 내부의 권력 분열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258년 3월, 기근이 극심했음에도 최의는 곡식을 대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다. 송길유 유배 사건 이후 선대 최항의 측근이었던 류경, 류능, 김준, 김충 등은 최의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상황은 점차 격화되었다. 마침내 3월 28일, 이들은 거사를 결의하고 최의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중랑장 이주가 이 소문을 접하고 견룡행수 최문본, 산원 유태, 교위 박선, 대정 유보 등에게 비밀리에 경고하였다. 한편으로는 김준의 아들 김대재가 이 정보를 장인인 최양백에게 누설했고 최양백은 역모에 가담하는 척하며 오히려 이를 최의에게 알렸다. 최의는 측근 유능과 대책을 논의한 후 역모 주동자인 김준을 선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야별초 지유 한종궤에게 편지를 보내 새벽에 군사를 소집하게 했다. 여기서 최의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데 역모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즉각 진압군을 편성해서 김준 세력을 제거해야했는데 진압 계획을 내일로 미루었다. 이것이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렀는데 김대재의 처가 이 사실을 다시 김준에게 알리는 바람에 계획이 누설되었고 김준과 류경은 자신들의 진압 계획을 듣고 거사 시점을 앞당겨 지금 즉시 최의에 대한 기습 공격에 나섰다. 이른바 무오정변에서 김준과 류경이 이끄는 신의군과 야별초는 무장을 갖추기도 전에 최의의 세력을 기습하였다. 여기서 김준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무오정변 당일 안개가 자욱해서 최의의 가병들이 김준 세력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하늘마저 최의를 버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최의의 외숙부이자 무장이었던 거성원발은 최의를 구출하기 위해 가병을 지휘하며 고군분투하였다. 그는 좁은 문을 막고 수십 명의 삼별초 병사들을 상대하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이마에 중상을 입고 패퇴하였다. 거성원발은 부상을 입은 채 담을 넘어 갯벌까지 도망쳤으나 끝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최의는 도주 중 몸이 비대해 담을 넘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었으나 곧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62년간 고려를 지배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하였다. 류경과 김준은 최의를 제거한 후 진양부에서 그의 측근들인 유능, 선인렬, 최양백 등을 모두 제거하였고 고종에게 나아가 복정을 선언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들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최씨 정권은 대몽 항쟁의 무리한 지속, 사치, 부패, 폭정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샀고 정변 당시 민심은 최씨 정권의 붕괴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무오정변 이후 우봉 최씨 일족 대부분이 숙청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영향으로 현재 대한민국 내 우봉 최씨는 인구가 극히 적다. 이는 최충헌의 부친 최원호를 시조로 하여 정권 장악 과정에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가 벌인 골육상쟁으로 방계 혈통조차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 최의 사망 이후에도 무신정권은 10여 년간 존속했지만 이는 김준과 소수 공신들의 권력 유지에 불과했으며 최씨 정권의 몰락은 단순한 가문 교체를 넘어 무신정권 자체의 붕괴를 예고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3. 기타

외모가 준수했으나 식탐이 심해 매우 비만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체중이 과하여 위급 상황에서 담을 넘지 못하고 외숙부 거성원발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다락방에 몸을 숨긴 끝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친 최항의 권력을 물려받아 호사로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무신정권의 정점에 올랐으나 이미 정권의 기반은 취약해진 상태였다. 고려 조정과 민심 모두 더 이상 최씨 정권을 지탱할 의지가 없었고, 최의 개인의 통치력 또한 그것을 극복하기에 부족했다. 결국 집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변으로 실각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고려사>에서 하나의 정치적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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