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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김경손(金慶孫)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20 목록 댓글 0

1. 개요

여몽전쟁 때 대활약한 고려의 명장이자 만고의 호국 영웅. 고려 초기의 유금필, 고려 거란 전쟁기의 양규, 강감찬, 여진족과 대결하던 시기의 척준경, 무신정권 시절 대정 김취려, 김윤후, 서북면병마사 겸 상장군 박서나 이후 김방경, 고려 말의 최영, 이성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용장(勇將) 중 1명이다.

2. 생애

평장사(平章事) 김태서(金台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태서가 전주 김씨의 시조이기는 하지만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면 평가가 좋지는 않은데 관직을 차지하고 있으나 글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인 김약선이 최우의 총애를 받자 탐욕스러움을 자제하지 못해 다른 이들의 땅을 마구 빼앗아 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문에서 김경손의 성품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함이 나왔다는 것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운래(金雲來).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오색의 구름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가졌다고 하는데 어릴 때 이름인 '운래'(雲來)는 이 태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본관은 경주지만 전주 김씨가 된다. 1254년에 김경손의 부친 김태서와 일가들이 전주로 이주하면서 전주를 비로소 관향으로 삼기 때문에 생전에는 전주 김씨가 아니었다. 전주군(全州君) 김태서를 전주 김씨 시조로 보기도 하고 김태서 부친 완산군(完山君) 김봉모를 전주 김씨 시조로 보기도 한다. 완산군(完山君) 김봉모, 전주군(全州君) 김태서로 대를 이어 전주와 계속 연결된 걸로 보아 전주에 어떤 연고가 있었던 듯하다.

음관(蔭官)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이 그의 형이다. 아들로는 도첨의중찬을 역임한 김혼이 있고, 조카로는 김미, 순경태후 등이 있다.

高宗十八年 爲靜州分道將軍 蒙古兵渡鴨綠江 屠鐵州 侵及靜州。

고종 18년(1231년) 정주(靜州)(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을 1차로 점령하고 철주(鐵州)를 짓밟아 도륙한 뒤 정주, 귀주성 부근까지 침범해 왔다.

《고려사》

몽골의 1차 침입이 있던 해인 1231년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군인 정주에서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근무했다. 몽골군의 선발대가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문을 나와 힘껏 싸워 몽골 장수 수 명을 베며 몽골군을 일격에 격퇴시켰는데 이때 아무도 안 죽었다. 하지만 본대가 침입하자 정주의 모든 사람들이 숨거나 도망가버렸고 김경손이 성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단 12명의 병사들과 함께 정주성을 탈출해 7일간 몽골군과 조우하지 않고 이동했다. 이때 불타는 정주성 안에서 숨어있다 나와서 배가 고프면 날고기(不火食,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어가며 버텼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인근 귀주(龜州)(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일어난 곳)로 이동하여 상장군 겸 서북면 병마사 박서와 함께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외로운 성에서 약한 군졸로 천하의 사납고 날랜 강성한 오랑캐를 막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였다. 우리 동방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작지 않은 것이다."

《동사강목》

그 덕에 1232년 몽골의 1차 침입(제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임명되었으며 최씨 일가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그의 형 김약선이 최우의 정식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패하고 돌아왔어도 칼바람은 안 맞았을 것이다. 역사 유튜버 임용한교수가 이 점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데 그냥 도망쳐 왔어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웠기 때문에 그렇다.

김경손의 아버지가 말로는 유학자이신데 돈과 아첨을 잘하는 분이셨어요. 보통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분은 대체로 비겁하잖아요? 형은 김약선인데 이 양반도 군인이에요. 최씨 집안의 돌격 대장이었던 사람이어서 최우의 사위가 됩니다. 최우가 김약선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냐면 자기 아들 최항을 내치고 사위를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의 동생이면 출세는 맡아놓은 당상이잖아요. 그런데 (김경손은) 최전방의 별볼일 없는 작은 성의 장군으로 왔어요. 여기까지야 경력관리 하러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내내 이야기 했듯이 12명 데리고 돌격하고, 목숨을 건 전투를 한 거죠. 우리가 보통 인식하기론 이 정도 빽이 있으면 몸을 사릴 텐데, 정말 헝그리한 장군처럼 싸운 겁니다.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 전쟁 中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몽골군과 대적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몽골의 3차 칩입 도중 전라남도 담양의 이연년 형제가 일으킨 반란이 세가 커져 광주까지 넘어가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를 대장군 겸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에 임명해 파견했는데 그때 딸려보낸 군사는 고작 30명뿐이었다. 나주에 도착한 뒤 나주 군현의 사람들을 모아 금성산신(錦城山神)에게 제사지내고 향리들을 선별해 30명의 별초를 뽑은 후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이니 다른 고을처럼 적에게 항복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백제 부흥 운동을 명분으로 일어난 이연년 형제의 난을 고려 황실의 어향(御鄕)임을 명분으로 삼아 진압했다.《고려사》에는 이연년이 김경손을 붙잡기 위해 부하들에게 긴 창이나 화살 대신 짧은 무기만 쓰도록 했고 그 틈을 타 김경손이 돌격해 이연년 형제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뒀다고 쓰여 있다. 진압의 공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하였다.

1245년 최우의 숙청이 시작되었을 당시 어떤 사람이 그를 모함했으나 거짓으로 밝혀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직되었다. 1249년 김약선의 아들이자 김경손의 조카인 김미(金敉)는 최항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경손에게 밀지를 보내 최항을 제거할 것을 상의 및 모의하였으나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김경손이 최항에게 이를 밀고하여 김미가 삭방출가하고 유배당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미 항목 참조.)

하지만 1249년 사망한 최우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최항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숙청을 시작하였고 숙청 명단에 포함된 김경손은 백령도로 귀양을 갔다. 원래 최항은 그 어미가 폐출된 서련방의 기생(창기) 출신으로써 천한 신분(천출)이었기 때문에 최우가 애초에 삭발출가시키고 승려로 만들었고 대신 사위인 김약선을 후계자로 정식 공인했으나 최항은 누이인 김약선의 부인과 공모하여 김약선을 모함 및 무고해 살해하고 자신이 김준, 송길유, 박송비, 이공주, 최양백 등 가신들의 추대를 받으면서 후계자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김약선의 동생 김경손은 눈에 뾰족한 가시같은 최항의 숙청 대상 1호격이 되었다.

1251년 자신의 계모였던 대씨가 반란을 일으켰던 외조카 김미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에 분노한 최항은 그녀와 김미 일파를 처벌하며 자신의 의붓 형제였던 오승적을 죽이기 위해 바다에 빠뜨려 버린다. 그러나 그는 도방에서 최항을 싫어하는 사람이 발에 돌을 허술하게 묶어 바다에 던져진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강도(江都)를 빠져나와 금강산으로 도망쳤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밀지를 보내는데 밀성에 있던 종의 밀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결국 그를 돌로 꽁꽁 묶고 허술하게 묶은 군인과 함께 다시 강에 빠뜨려 죽이는데 그 과정에서 김경손 역시 그의 인척이 된다는 명분으로 최항이 대장군 송길유를 보내 독주(毒酒)를 먹이고 배소의 바닷물에 빠뜨려 처형시켰다. 그의 죽음을 《고려사》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慶孫累立大功 朝野倚重 遽爲奸賊所害 人皆痛惜。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조야에서 그를 의지하고 높이 받들었는데, 갑자기 간악한 도적에 의해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였다."

3. 기타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한 위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손들 중에는 나라를 망쳐 조상님 얼굴에 먹칠을 한 썩을 놈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김동인과 김일성이 있다.

常處室 必著皂衫如對賓 怒則鬚髮輒竪。

방에 있을 때도 반드시 조삼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예를 차렸으며 화가 날 때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섰다.

《고려사》 김경손 열전

김경손은 외모가 빼어났고 머리 위에 용 발톱처럼 튀어나온 뼈가 있었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성품은 장중하고 온유했으며 지혜와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빼어났으나 한 번 화가 나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히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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