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식자들이 말하기를, "최항이 얕은 지혜로 국가의 큰일을 그르쳤으니, 몽골은 반드시 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이 과연 와서 주군을 도륙하였으니, 그들이 지난 곳은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고려사》
고려의 관료. 무신정권의 제7대 집권자.
초명은 '만전'(萬全)으로 아버지 최우로부터 항(沆)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의 권력을 독차지해 강도에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최항은 8년 동안 집권했으며 무신정권 안정기의 마지막 집권자이다. 갈수록 엉망진창이 돼 가던 국가를 위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본인 사후 후계자 최의가 다락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무오정변) 고종의 붕어와 맞물려 정국이 급변해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2.1. 후계자 정쟁
최항(만전)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 천민 서련방으로, 최우는 적자가 없었으나 서련방을 총애하며 그 사이에 두 아들, 만종과 만전을 두었다. 당시 고려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적자(嫡子)가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다. 만전은 서출인 데다 차남이었기 때문에, 최우는 처음에 사위인 김약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후계구도를 안정화하기 위한 최우의 지시로 만전은 형 만종과 함께 송광사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였고 이후 쌍봉사의 주지를 맡았다. 그는 문도(門徒)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동시에, 금·비단과 곡식을 대량으로 축적하는 데 몰두했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 50여만 석에 이르는 쌀을 고리로 빌려주고, 수확기마다 가혹한 추심을 벌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곡식을 남기지 못해 조세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문도들은 각지의 사찰에 분산되어 '관인(官人)'이라 자칭하고 권세를 내세워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일부는 달단(몽골)식 복장을 하고 역마를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주현의 관리를 업신여기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만종과 만전의 제자를 자칭하며 폭력을 행사해도 지방 관청에서는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
한편, 최우는 만전의 정치적 책략과 누이인 최씨의 무고로 인해 원래 후계자로 삼았던 김약선을 숙청했고, 이로 인해 후계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후 고종 35년(1248),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관직에 진출시켰고, 그는 좌우위상장군, 호부상서, 추밀원지주사 등을 거쳐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최우는 그에게 가병 500명을 붙여주는 한편, 대제학 임익에게 글을, 시랑 권위에게 예법을 배우게 하여 정무에 대비하게 했다. 이로써 최항은 아버지 최우의 뒤를 이어 최씨 무신정권의 제3대 집권자로 부상하였다.
2.2. 정권 계승
1249년 11월, 아버지 최우가 사망하자 최항은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 동·서북면 병마사 등 관직을 겸임하며 교정별감에 올라, 할아버지 최충헌과 아버지 최우에 이어 최씨 정권의 제3대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상복을 벗고 아버지의 애첩이었던 기생 연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한 개혁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무당과 잡기들을 개경 성 밖으로 내쫓고, 지방에서의 토산물 진상과 선박세를 면제했으며, 탐관오리로 지탄받던 교정별감의 수획원을 폐지하고 그 역할을 안찰사에게 맡겼다. 또한 백성들을 수탈한 혐의로 선지사용별감 나득황, 하공서, 이경, 최보후 등을 파직하는 조치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들을 다시 기용하면서 백성들의 실망과 반발을 샀고, 최항은 점차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사택을 크게 확장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면서 민심을 잃기 시작했다.
2.3. 반대파 숙청
고종의 명으로 재상에 임명되자, 최항은 이미 사망한 어머니 서련방을 추존하여 정안택주에 봉했다. 이후 고종이 과거 최우의 식읍이었던 진주 지역에서 녹전, 세포, 요역, 공납 등을 받을 수 있게 조치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한때 장봉택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견자산 진양부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했다고 전하는만큼 초기 위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항은 처음에 대신 최온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병약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고려군 총사령관 조충의 아들 조계순의 딸과 재혼하였다. 조계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자, 고종은 견룡, 중금도지, 순검백감, 내시, 다방 등의 궁중 관원들에게 최항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어좌의 가마와 등불, 황금 장식과 장고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여러 왕족과 신하들도 금을 바치며 혼인을 축하했다.
또한 최충헌과 최우의 초상화를 각각 창복사와 선원사로 옮길 때에는, 참상별감과 참외별감을 비롯한 문무 관리들이 인도하여 따랐으며, 그 의식은 태조 왕건의 어진을 옮기는 의식에 비견될 만큼 성대했다고 한다.
최항은 승려 시절, 보주부사였던 조염우와 도강감무였던 박장원과 원한이 깊었는데, 집권 후 이들을 외도로 귀양 보냈다. 이후 시어사 이선이 경상도 안찰사로 임명되자, 이선은 평소 친분이 있던 조염우와 박장원을 불러 잔치를 열었고, 현령 권신유도 함께했다. 그러나 어떤 승려가 "이선이 권신유와 함께 조염우 등이 반란을 모의한다." 하고 고변하자, 최항은 사실관계를 조사하지도 않고 이들 네 사람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이게 하였다.
1250년, 정적인 송국첨을 우산기상시에 임명했으며, 평소 마찰을 빚던 김지대를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강화도에 중성을 쌓은 공로로 고종은 그를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진양후에 봉하려 했으나, 이를 공손히 사양하였다.
어느 날 달이 상상성(上相星)이라는 별자리를 침범하자, 사천대(司天臺)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달이 상상성을 침범한 것은 점서(占書)에서는 '임금님께 우환이 있을 징조이다. 상상성이 없어지면 난신(亂臣)이 나타나 신하가 임금을 대신한다.'라고 합니다."
당시 고종은 몽골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제포궁(梯浦宮)으로 행차할 예정이었고, 사천대는 이를 우려해 왕이 외출을 삼가고 신중히 행동하도록 경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에 대해 최항은 불쾌감을 드러냈고, 어사대를 통해 사천대가 별의 변화를 함부로 보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탄핵했다. 이 일로 판대사 최윤단과 태사승 오안구 등이 파면되었다.
1251년, 최항은 계모 대씨가 정권 경쟁자였던 김약선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김미를 지지하자 이를 원망하였다. 이에 그는 대씨에게 부여된 '택주' 작호를 박탈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어 야별초 장교 황보준창을 시켜,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동생인 오승적을 처형하려 했다.
최항은 오승적에게 돌을 묶어 바다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 처형을 맡은 도방 군사 중 한 명이 최항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탓에 돌을 느슨하게 묶었다. 이로 인해 오승적은 바다에 빠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강도에서 탈출해 금강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어머니 대씨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대씨 집안의 노비가 이 사실을 밀성에서 누설하였고, 이를 보고받은 밀성 부사 이서의 보고를 통해 최항에게 알려졌다. 이에 격분한 최항은 오승적을 다시 붙잡아 강에 던져 죽였고,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황보준창 등 관련자 6명을 처형했다. 대씨는 해도(섬)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강제로 독약을 먹여 사사되었으며, 대씨의 일가족과 노비 등 약 70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한편 지추밀 민희와 추밀원부사 김경손 등이 민심을 얻자 이를 시기하여, 두 사람을 해도(海道)로 귀양 보냈다. 이후 김경손은 송길유 대장군을 보내 귀양지에서 바닷물에 빠뜨려 처형했다. 이밖에도 좌승선 최훤,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부친 최우의 시첩 13명을 "방자하다"는 이유로 귀양 보냈으며, 남도로 유배한 인물들 가운데는 참지정사 정안 등 다수 인사를 별다른 사유 없이 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다.
또한 부친 최우의 남동서이자 전(前) 추밀원부사였던 주숙은 일찍이 최항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후한 대우를 받으며 자문을 제공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최항이 견자산(見子山)으로 이사하면서 주숙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자, 양측 사이에 의심과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결국 최항은 낭장 임경을 보내 주숙을 섬으로 귀양 보내는 길에 무참히 구타하게 한 뒤, 웅천에서 바다에 빠뜨려 살해했다.
특히 주숙이 귀양지에서 사망하기 전, 장군 김효정이 왕에게 정권을 회복시켜주고자 모의했다는 소문이 돌자, 최항은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김효정 역시 귀양 보낸 뒤 살해했다. 이어 주숙의 사위인 장군 최종필과 나주부사 이윤 등도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귀양 보냈다. 이때 고종이 다시 한번 최항을 후(候)로 책봉하고 부(府)을 세우도록 명령하였으나 다시 한번 사양했다.
2.4. 몽골의 침입과 항전
1251년, 최항이 반대파를 숙청하던 무렵, 몽골에서는 제4대 칸인 몽케 칸이 즉위하였다. 이에 몽골 조정은 고려에 출륙(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것), 개경 환도, 고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252년, 최항은 사신 이현을 몽골로 보내면서, 그에게 금년 6월에 출륙하겠다고 칸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현은 몽골에 도착해 몽케 칸에게 최항의 지시대로 출륙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에 몽골은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이현을 몽골에 억류한 채, 도케와 아투 등의 사신을 고려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고종이 약속대로 육지로 나오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보내겠다고 경고하였다.
몽골에서 고려 국왕의 출륙을 강하게 요구해오자, 최항은 겉으로는 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승천부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골 사신 도케와 함께 온 이현의 서장관 장일이 이 사실을 은밀히 고종에게 전했고, 고종이 이에 대해 추궁하자, 최항은 "강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라며 몽골 사신의 접견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에 조정의 공경들 또한 최항의 뜻에 따랐다
결국 고종은 그의 조언을 따라 국왕 대신 신안공 왕전을 육지로 보내 몽골 사신을 접견하게 했다. 이 일로 몽골 사신 도케와 아투는 왕이 직접 나오지 않은 데 대해 분노하며, 고려가 칸의 명을 어겼다고 보고하고 귀국하였다.
1253년, 고종이 최항을 문하시중·판리부·어사대사의 삼중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고종은 최항을 후(侯)에 책봉하였다. 한편 최항이 대궐 서쪽에 구요당(九老堂)을 지짓자 고종이 이를 직접 친람하며, 친시 20인, 구사 20인, 진배파령 20인 등에게 처음으로 관직을 내렸고, 감독관이었던 상장군 박성재의 아들에게도 진배파령 벼슬을 제수하였다. 또한 공장들에게도 그 품등에 따라 포상을 내렸다.
이 무렵, 몽골은 고려에 천도를 촉구하며 왕실의 출륙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예케 장군과 아무칸, 홍복원 등이 이끄는 몽골군은 제5차 침입을 단행하였고, 육지의 주요 지역은 차례로 함락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고려 조정에는 태자나 안경공을 몽골에 출영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최항과 그 측근들이 나서 “출영하면 인질로 삼아 항복을 강요할 것”이라는 강하게 반대한 탓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254년 초 충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이 패배하고, 예케가 병을 얻어 철수 조짐을 보이자, 고려는 안경공 창을 인질로 몽골에 출영시켜 협상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계엄령이 해제되자, 출륙을 주장하며 몽골과의 협상에 앞장섰던 이현은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고, 그의 아들들은 바다에 던져 죽임을 당했으며, 사위와 처는 유배되었다. 조방언, 정신단 등 관련 인물들 역시 유배되었다.
1254년 음력 7월, 성질이 냉혹하고 잔인하기로 이름난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6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북계병마사의 급보를 받은 최항은 곧바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도 안찰사와 3도 순문사에게 명하여 각지의 백성들을 산성이나 해도(海島)로 대피시키도록 하였다.
몽골군은 계속 남하하며 고려 조정에 국왕의 출륙(出陸)과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 내에서는 태자나 안경공 창을 출영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최항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대신 사신을 거듭 보내며 외교 협상으로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고려는 '철수하면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몽골을 회유하였으나, 몽골은 '요구를 먼저 이행해야 철수하겠다.'고 맞서면서 양측 간 외교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 본토는 몽골군의 공격으로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충주성과 상주산성에서의 방어군이 승리를 거두며 전세가 반전되었고, 이를 계기로 몽골과의 강화 교섭이 성사되었다. 같은 해, 고려가 몽골에 항복했던 수령들을 처벌하고, 친몽파였던 이현을 처형한 사실이 알려지자, 몽골은 이를 구실 삼아 다시 출륙을 요구하였다. 이에 최항을 비롯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 조정 대신들은 모두 출영을 거부하였고, 결국 국왕 고종만이 일시적으로 출륙하여 형식적인 협상을 진행한 뒤 복귀하였다.
이처럼 외세의 위협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도, 최항은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고, 재상들과 추밀원 대신들과 함께 격구를 유유히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는 왕족과 재상, 추밀, 승선, 문무 4품 이상 관원들을 초대하여 대접하였으며, 이를 두고 정세에 무관심하다는 비판과 함께, 태연함 속의 정치적 시위라는 해석도 뒤따랐다.
1255년, 고종은 최항에게 식읍을 추가로 하사하였고, 공적이 있는 박성재 이하 공장들에도 포상을 내렸으나, 최항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중서령 감수국사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과거 급제자 곽왕부 등이 방문하자 누각에 올라 그에게 화주(花酒)를 하사하며 격식 있게 맞이하였다.
그해 말, 자랄타이를 다시 대장으로 하고 예수타이와 보포타이를 부장으로 한 몽골군이 제7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이번에도 고려 출신 귀순자 홍복원, 왕족 출신 귀화인 영녕공 왕준이 몽골군과 함께하였다. 이에 대해, 몽골에 파견되었던 고려 사신 김수강은 몽케 칸을 설득하여 '철수하면 출륙과 국왕의 입조를 실행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몽케 칸이 이를 수락하면서 1255년 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2.5. 말년과 최후
1256년, 몽골군이 철수하자 고종은 최항에게 전란 수습에 공이 있다고 치하하며 '제중강민공신'(濟衆康民功臣)의 호를 하사했다. 이때 전(前) 서해도 소복별감 송극현으로부터 낭실(廊室)의 곡물 309곡(斛)을 뇌물로 받고 어사로 임명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과 백성들은 그를 조롱하며 '낭실어사'라고 불렀다.
같은 시기, 전(前) 학록 정성이 상소를 올려 '하동의 감무 노성이 지역 사람인 이규, 이창과 의형제를 맺고, 부사 설인검, 남해현령 정고, 과거에 급제한 유여해, 승려 명취 등과 함께 모여 국정을 비방하고 있다.'고 고발하자 최항은 노성, 이규, 이창 등을 참수하고, 설인검, 정도 등을 해도에 유배시켰는데 사람들이 정성을 일컬어 식인자라 비난했다.
1257년 4월 2일, 최항은 중서령 감수국사의 지위에 있었으나 병이 깊어져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고종은 그의 공을 기리며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별 조치를 내렸고, 최항은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느낀 것인지 병든 몸을 이끌고 후원 소정에 올라 사세구를 지은 후 침석에 돌아와 곧 죽었다. 향년 48세였다.
복사꽃 향기는 수천 집을 감쌌는데
비단 휘장 향취는 10리에 빗겼구나.
난데없는 미친 바람 좋은 자리에 불어와
붉은 꽃잎 마구 몰아 긴 강을 지나가네.
桃花香裏幾千家,
錦幄氤氳十里斜.
無賴狂風吹好事,
亂驅紅雨過長河.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갈 때 쓴 사세구. 부친 최우의 영향을 받아서 꽤나 감성적이고 멋진 시를 남겼다. 《고려사》 <최항 열전> 중 발췌.
사후에는 시호 '광정공', 작위 '진평군 개국공'으로 추증되었다. 본처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던 시절, 매형인 송서의 여종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최의를 후계자로 삼았다. 최항은 말년에 그에게 권력 전반을 넘겨주었으며, 이후 최의는 무신정권의 제4대 집권자로서 고려 정국을 이어갔다.
2.6. 사후
1257년 8월 26일, 최항은 강화도 진강현, 즉 오늘날의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진강산 일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258년, 김준이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항의 서자이자 후계자였던 최의가 살해되면서, 최씨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후 조정은 최항에게 내려졌던 공신전과 각종 관작, 재산 일체를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의 생전의 권세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훗날 그의 흔적은 고려 예술의 정수를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1963년,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인근 야산에서 최항의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서 출토된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형 주전자는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주전자는 도굴꾼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이후 경매 과정을 거쳐 다행히 국내로 환수되었다.
2.7. <최항 묘지명>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최항 묘지명>이 발견됐다. 현재 <최항 묘지명>은 삼성의 호암미술관에 있다. 묘지명 상단 기록상 최항의 최종 관직은,
공신호: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특진(特進)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직: 수태사(守太師)
직위: 중서령(中書令) - 상장군(上將軍) - 감수국사(監修國史) - 판이부어사대사(判吏部御史臺事)
태자삼사: 태자태사(太子太師)
훈위: 상주국(上柱國)
작위: 우봉군 개국공(牛峯郡 開國公)
식읍: 3,000호
식실봉: 1,000호
시호: 광정공(光正公) 이다.
정말 어마어마하다.
<최항 묘지명>엔 특이하게 작위가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묘지명 상단에는 '우봉군 개국공'(牛峯郡 開國公)으로 되어 있다. 정작 묘지명의 마지막엔 고종이 '진평군 개국공'(晋平郡 開國公)으로 추봉했다고 한다.
묘지명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기록과 얼추 비슷하다. 다만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고려사》엔 '제중강민공신'(濟衆康民功臣)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본인 묘지명엔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으로 나온다.
《고려사》엔 최항의 시호 '광정공'(光正公)이 나오지 않는다. 고종이 추봉한 작위의 약칭 '진평공'(晋平公)만 나온다.
묘지명엔 최항이 쌓은 강도중성(江都中城)을 '황도중성'(皇都中城)이라고 표현했다.
묘지명엔 할아버지 최충헌, 아버지 최우, 장인 사홍기를 설명할 때 모두 '황'(皇) 자를 앞에 붙혔다.
묘지명은 최항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훙'은 제후왕의 죽음에만 쓰는 단어인데 이걸 최항한테 쓴 것이다. 당시 최항의 강력한 권세를 느낄 수 있다. 조부인 <최충헌 묘지명>에도 최충헌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고려사》엔 '졸'(卒)보다도 낮은 '사'(死)라고 하여 두 사람을 비난했다.
묘지명에 자기 아버지 진양공 최우의 죽음을 '졸'(卒)로 표현했다. 《고려사》엔 '사'(死)라고 하여 어떤 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묘지명엔 당시 몽골을 '적'(狄), '몽사'(蒙使)라고 부르며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묘지명엔 최항이 외궐(外闕)을 지어 몽사(蒙使)를 받았다고 한다. 이 외궐은 고려궁지에 지은 제포관, 제포궁이나, 강도 밖 개경 승천부에 지은 승천궐(昇天闕) 중 하나일 수 있다.
3. 평가
최항의 집권은 그 자체로 격렬한 진통을 동반했다. 부친 최우 역시 생전에 동생 최향과 권력 다툼을 벌인 바 있었지만, 최항이 겪은 갈등은 훨씬 더 치열하고 복잡했다. 정권 계승까지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었던 최우와 달리 최항은 승려 ‘만전’ 시절의 불법 행위가 이미 일찍이 드러나면서 관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정권 출범 초기부터 기반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최우가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최항은 정통성 측면에서도 뚜렷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김약선은 고려 제20대 국왕 신종 대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김봉모의 손자이자, 평장사 김태서의 아들로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다. 반면 최항은 천민 출신의 기생 서련방에게서 태어나, 신분을 중시하던 고려 사회에서 결정적인 결격 사유를 지녔다. 어떤 측면에서는 고려 신분제의 경직성과 한계를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정통성의 약점을 안고 집권한 최항은 정권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강경한 정국 운영에 나섰다. 정적으로 알려졌던 송국첨을 우산기상시에 기용하는 한편, 1251년부터는 반대 세력을 대거 숙청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일시적인 효과에 그쳤고, 오히려 무신정권 내부의 불신과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항은 연이은 숙청과 대외 강경책을 통해 개인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신정권 전체의 기반은 점차 취약해졌다. 결국 그가 사망한 후, 아들 최의가 권력을 계승했으나 무너진 권력 기반 위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최의는 김준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에 의해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축출되었는데 그 계기를 사실상 최항이 만들어놓은 것에 가깝다.
무신정권 후반부의 이 같은 취약성은 단지 정권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여몽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사회 전반의 피로감과 불만이 누적되었고, ‘강화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자’는 여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최항은 이를 억누르며 무리한 조치들을 연이어 강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도 입보책'의 부적절한 시행이다. 이는 애초에 해안 지역의 주민들을 몽골군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섬으로 이주시켰던 정책이었으나, 최항은 이를 부적절하게 확대 시행하면서 내륙인 청주 주민들까지 섬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저항하는 자들의 재산을 파괴하는 등의 폭압적 조치를 단행했다.
이 무렵부터 지방관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는 고려인들의 사례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중앙권력의 통제력 약화와 함께, 무신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1257년, 집권 8년 만에 최항이 사망하면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은 매우 뚜렷했다. 그것은 무신정권의 근본적 취약성과 내부 분열, 그리고 외적 위기 속 무능한 대응이 만들어낸 총체적 붕괴의 예고편이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