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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김윤후(金允候)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14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승려이자 여몽전쟁의 전쟁 영웅. 처인성 전투 당시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전사시킨 승병장

2. 생애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생을 기록한 고려사에는 출신지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출가해서 승려가 되고 백현원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백현원이 지역의 명칭인지, 사찰의 명칭인지, 가족 관계는 어떠한지, 어떻게 승려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을 세운 장수치고는 기록이 부실한 편. 승려인데 법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살리타의 대대적인 남하를 막으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처인 부곡은 단순한 토성으로 군량이 있다는 것 외에는 전술적 의미가 거의 없었지만 김윤후의 화살이 살리타의 머리를 꿰뚫으며 결국 몽골군이 퇴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포상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지만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

라고 사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섭랑장(攝郞將)에 임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승려의 지위를 버리고 무신의 길을 걷는다. 21년 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시작되었는데 몽골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던 충주성에 도달하였고 70일간의 혈투가 진행되었다.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고 격려하며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이끌어 냈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김윤후의 공도 인정받아 감문위 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임명되었다.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의 항쟁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노비, 승려, 백성들의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1232년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 고을 수령과 군 지휘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돌아온 충주군 지휘관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들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운다. 분노한 노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되고 만다. 이러니 1253년 충주에 있던 노비와 백성들이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정권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지,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던 셈. 김윤후는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끝내 성을 지켜낸 것이다. 몽골과의 항쟁 중에 양민은 물론이고 노비들이나 천민까지 몽골군에 맞서 싸웠던 것은 처인성만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정규군보다 더 잘 싸웠다.

다만, 승전 후 김윤후가 임명된 감문위는 2군 6위 중 전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부대였다. 개성의 성문을 지키는 부대로 부대 편제도 1령(약 1,000명)에 불과하고 전투에 나서기 힘든 늙은 병사들이 주로 배속받았는데 실권과는 거리가 먼 한직. 오늘날로 따지면 향토동원 사단장과 같은 직책이다. 전장에서는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내쫓겼거나 본인이 몸을 피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1259년 동북면(함경도) 병마사가 되기도 했으나 이때 동북면은 몽골 땅(쌍성총관부)이라 의미가 없었다. 원종 때인 1262년 추밀원 부사, 1263년 수사공우복야까지 올랐고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윤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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