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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박서(朴犀)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17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의 무신으로 여몽전쟁 때 귀주성 전투에서 성을 굳건히 지켜낸 명장이다.

2. 생애

본관이 죽주(죽산,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자 죽주 사람으로 1231년(고종 19년)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몽골의 살리타이가 철주를 함락하고 귀주를 공격하자 김중온, 김경손, 송문주, 정주, 삭주, 위주의 수령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에 집결한 후에 몽골군과 싸웠으며 몽골군이 박문창을 사로잡은 뒤에 그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자 박문창을 처형했다. 몽골군이 귀주를 공격할 때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하자 적절한 대응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았고 이는 다음과 같다.

몽골군이 누차, 거대한 평상을 만든 후에 땅굴로 공격 → 성벽에 구멍을 파서 쇳물을 불태우고 썩은 이엉을 태워 평상을 불태움.

대포차 15문으로 공격 → 포차로 돌을 날림

사람기름으로 불을 지름 → 진흙을 물에 섞어 던짐

풀더미로 불을 지름 → 물을 준비해뒀다가 물을 뿌림

몽골군이 퇴각했다가 여러 곳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공격해서 또다시 적절한 대응으로 몽골군을 여러 차례 막았고 이는 다음과 같다.

포차 30문으로 성곽 50간을 부숨 → 성벽을 수리하고 쇠줄로 막은 뒤에 몽골군을 공격

대포차로 공격 → 포차를 날려 대응

살리타이가 지의심, 강우창 등을 보내 항복 권유를 했지만 이를 거부했으며 또다시 사람을 보내왔음에도 거절했으며 아예 한 술 더떠 항복을 권유하고자 찾아온 자들을 자기 목숨을 보존하겠다고 백성을 오랑캐에게 팔았다며 그 자리에서 참수해 목만을 살리타이에게 돌려보내며 항전 의사를 표명했다..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에 대우포로 대응했고 고종이 최임수, 민희 등을 보내 강화한 사실을 알리자 항복했다. <고려사> 박서 열전에 따르면 귀주성 전투가 한창일 당시 몽골군의 어느 나이 든 장수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고 한다.

吾結髮從軍 歷觀天下城池攻戰之狀 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 城中諸將 他日必皆爲將相。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훗날 몽골 사신이 와서 박서가 항복하지 않은 것을 들어 그를 죽이려 하자 최우가 박서에게 "나라에 대한 경의 충성은 아무데도 견줄 수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잘 생각해 처신하라."고 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죽주로 돌아갔으며 후에 관직으로 돌아와 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름을 박문성(朴文成)으로 개명했는데, 고려사 선거지에 의하면 충선왕 즉위년(1298)에 충선왕이 이런 교서를 내린다.

辛卯年, 龜州宣諭使朴文成·金仲溫·金慶孫, 癸巳年, 南路捉賊李子晟·宣諭使鄭義·朴錄全, 甲午年, 西京兵馬使閔曦, 丁酉年, 南路逆賊處置使金慶孫, 皆於內外孫中, 許初職錄用.

신묘년(고종 18년, 1231) 귀주선유사(龜州宣諭使) 박문성(朴文成)·김중온(金仲溫)·김경손(金慶孫)과, 계사년(고종 20년) 남로(南路)에서 적을 물리친 이자성(李子晟)과 선유사 정의(鄭義)·박녹전(朴錄全)과, 갑오년(고종 21년)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민희(閔曦)와 정유년(고종 24년) 남로역적처치사(南路逆賊處置使) 김경손(金慶孫)도 모두 그 친·외손 가운데 1명에게 첫 벼슬을 줄 것이다.

고려사 지: 선거지

여기서 김중온, 김경손은 귀주성 전투에서 박서와 함께 싸운 장수고, 귀주성 전투도 신묘년인 1231년에 있었으니 충선왕의 교서에 언급된 박문성은 박서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자주 바꾼 사례가 종종 발견되는데, 박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박문성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사를 찾아보면 이후 박문성이 승진하는 기사를 더 찾아볼 수 있는데, 고종 21년(1234) 1월에 우산기상시, 고종 23년(1236) 12월 지문하성사로 임명되었다. 우산기상시는 정3품, 지문하성사는 종2품으로 재상급 직위에 해당한다. 특히 박서가 최우의 권유로 관직에서 물러난 게 1232년이었는데, 1234년 1월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된 기사를 보면 의외로 조정으로 복귀한 게 빨랐던 셈이다.

고려사 세가에서의 박서(박문성)에 대한 언급은 이게 끝이고, 문하평장사에 임명된 것은 고려사 박서 열전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박서의 사돈인 김중귀(金仲龜, 1176~1242)의 묘지명에 의하면 '김중귀의 셋째 딸이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 박문성의 아들인 금오위장령별장 박이온(朴怡溫)과 혼인했다'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어서 박서가 이름을 박문성으로 개명하고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승진했다는 것은 교차검증이 된다. 다만 정확한 몰년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236년까지는 확실히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되며, 2년 정도 낙향해 있던 시기 외에는 최우 정권에서 꽤 잘 나갔던 인물이다.

3. 기타

일설에는 무학대사가 그의 5세손이라고 하지만 진위가 불분명하다. 죽산 박씨 족보에도 무학대사가 그의 후손이라고 나와있지 않다.

전쟁기념관에서는 2010년 8월에 호국의 인물로 선정했다.

소설《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에서는 박서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박문성으로 개명했다고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상술되었듯 고려사와 김중귀묘지명으로 교차검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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