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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김준(金俊)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28 목록 댓글 0

1. 개요

김준은 한번은 왕을 자기 집에 초대하기 위해 이웃의 집을 철거하여 자신의 집을 넓히면서 한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밤낮으로 공사를 독촉하였다. 지붕의 높이가 여러 길이 되고 뜰의 넓이가 100보에 달하였다. 그러나 김준의 처는 오히려 불만을 가지고 말하기를, "장부의 눈구멍이 또한 이렇게 조그마한가?"라고 하였다. 당시 요사스러운 무당이 있었는데, 그녀가 김준의 집을 드나드니, 김준이 그녀의 말에 현혹되어 모든 국가의 일을 길흉을 점쳐 결정하였고, 항상 몽골 사신이 오더라도 영접한 적이 없었으며, 만약 사신이 그 일을 나무라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고려사》中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제9대 집권자.

초명은 김인준(金仁俊)으로 그의 동생으로는 김승준이 있었다. 무신정권 제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과 함께 천민 출신으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 생애

2.1. 최씨 정권의 측근 심복

그의 아버지인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가노였으나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 의탁했다. 김윤성의 아들인 그가 벼슬을 받아서 김씨 성을 사용하고, '김인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뒤에 '김준'으로 개명하게 된다. 박송비, 송길유 등이 최우에게 칭찬하여 그의 신임을 받아 전전승지(殿前承旨) 벼슬을 받았다고 하나 최우의 애첩인 안심(安心)과 간통하여 유배되었다.

수 년 만에 돌아와 최우가 최항을 후계자로 삼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최항이 정권을 이어받을 때 그는 직책이 정7품 별장이었다. 최항이 죽고 뒤를 이은 그의 서자 최의가 홀로 최양백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을 멀리하게 되자 마음 속으로 불평하면서 최의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1258년 1월 김준을 천거했던 대장군 송길유를 부정부패 혐의로 최의가 유배를 보내면서 김준을 꾸짖자 최의와 서로 미워하여 만나보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김준은 풍골(豊骨)이 늠름했으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다. 또 궁술과 무예에 능했으며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날마다 호협(豪俠)스러운 청년 자제들과 교류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제 집에는 재산이라곤 없었다. 하루는 어떤 술수(術數)를 하는 중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뒷날에 반드시 국권(國權)을 틀어 쥘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김준 열전>

1258년 3월 신의군 도령 낭장 박희실, 지유 낭장 이연소가 비밀리에 김준, 류경, 김충, 이공주, 박송비, 도령 낭장 임연, 대정 박천식, 별장 동정 차송우, 낭장 김홍취, 김대재, 김용재, 김식재 등과 논의하여 4월 8일 최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김대재가 장인인 최양백에게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이 계획을 얘기하는 바람에 계획이 누설되었으며, 김대재의 처 최씨가 아버지 최양백이 최의에게 얘기한 사실을 듣고, 남편인 김대재에게 얘기하여 김준이 이를 김대재에게 듣게 되면서 다시 박희실, 이연소 등에게 일이 누설되어 일을 지체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이에 지난번에 모의한 자들과 별장 백영정, 대정 서정과 이제, 지유 조문주와 오수산 등을 소집하여 최의를 따르는 자를 공격했다. 지유 서균한 등을 불러 모아서 삼별초를 사청에 모으고, 사람을 시켜

'영공(최의)이 죽었다.'

고 길에서 부르짖게 하자 듣는 자들이 모두 모였고, 류경, 박송비 등이 오자 대신으로 위세와 명망이 있는 자들을 추대하여 군중을 통솔하라고 얘기했다. 추밀원사 최온을 부르면서 박성재를 맞이하여 이들과 의논했으며 최양백을 부르면서 별초병을 통해 최양백의 입을 횃불로 지지면서 이를 베었다. 최의의 문졸을 시켜서 밤의 시간을 알리는 기구인 '경주'를 알리지 못하게 하면서 대오를 광장에서 나누었고, 관솔을 태워서 낮과 같이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안개가 끼었기 때문에 최의의 가병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야별초들이 최의의 집으로 쳐들어가 집 벽을 무너뜨렸고, 외숙부 거성원발의 구출을 받아 도망가려던 최의를 찾아내서 죽이면서 실권을 잡게 되었다(무오정변).

2.2. 무신정권의 집권자

4월에 최의가 백성을 구휼치 아니했다고 하여 곡식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인망으로 위로하여 고종(제23대)에게 청언하자 대장군이 되어 '위사공신'호(衛社功臣號)를 하사받았으며 우부승선이 되었다. 최의가 죽자 불만을 품은 권시, 권수균, 문황, 문광단, 문영단, 대정 최주, 녹사 유종식, 녹사 이수지, 교위 현군수 등이 7월에 김준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그들의 설득을 받던 김인문을 통해 사실을 전해받은 지유 백영정의 밀고로 알게 되자 유종식을 체포했으나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또다시 문황 등이 김준을 죽이려고 일을 꾸미다가 유종식이 체포되어 국문된 사실을 알아챈 현군수가 이를 고하여 알게 되자 문황, 최주, 문광단, 문영단, 이수지를 죽이면서 권수균 부자와 유종식을 유배시켰으며, 문황, 이수균의 가산을 김인문과 현군수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들에게 점을 쳐 준 맹승 백량을 바다에 던져 죽이고 집을 몰살시켰다. 아내의 삼촌이 되는 환자 김인선이 고종의 총애를 받자 그를 참직에 임명할 것을 힘써 청하여 고종이 이를 제수하고자 했으나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며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준이 정권을 잡은지 1개월 만에 몽골 제국군은 자랄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대한 항전은 이전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1260년 고려의 제24대 국왕으로 원종이 정식으로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 익양군 개국백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를 받았으나, 몽골 제국의 명령을 거절하는 등 여몽항쟁의 뜻을 보였는데 강화도를 떠나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삼별초의 난보다 10년 앞선 일이었다. 1261년 몽골이 원종을 불러 입조하게 하자 왕을 위하여 백고좌를 대관전에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니 왕이 그에게 '종자'의 작위를 하사하고,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게 했다. 1263년 '수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태자소사'가 되었으며, 이 해에 원종이 몽골에 행차하자 이를 감국하면서 왕이 머무는 집을 호위하고, 왕이 환국하자 후(侯)로 봉해지고 부(府)가 세워졌다.

하지만 김준은 정권을 잡고 나서 임금인 원종을 대놓고 무시하며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1265년 시중이 되고 해양후가 되었는데 충청도 안찰사인 변보에게 활 쏘는 사람을 모집할 것을 부탁했으나 그가 듣지 않자 왕께 아뢰어 그를 유배시키고 야별초 지유, 김혁정 등이 대신하게 했다. 4품 이상의 은을 차등있게 내게 하여 국고에 채우고, 부유한 백성의 금•은을 사게 하면서 법이 가혹하여 백성들이 근심하고 이를 원망하였다. 불교 팔관회의 풍악을 아뢰는 날에는 잔치를 벌이기도 했는데 백성의 괴로움이 심한지라 이를 정지했다. 자신의 가신인 고이와 별감 문성주가 의탁하면서 백성을 박탈하여 어떤 이가 익명서를 어사대에 붙여 이를 호소했지만 그만두고 묻지 않았다. 1268년 3월 몽골의 황제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사신을 보내어 김준과 그의 아들, 동생을 오게 하자 장군 차송우의 말을 듣고 사신을 죽이자고 원종에게 아뢰었으나 원종이 반대하며 이를 듣지 않았다. 이런 행태에 온건적인 노선을 취하는 원종은 그를 매우 싫어했으며 김준은 몽골이 입조하지 않은 것을 책망할까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공양했는데 11월에 용산 별감 이석이 선물을 두 배로 싣고 강에 정박하자 이를 빼앗아 야별초에게 나눠주자 원종이 이를 알게 되면서 원종은 그를 더욱 미워했다. 게다가 김준은 12월에 국자 학유인 홍유서가 몽골의 사신으로 동반하여 입조하자 김유와 함께 자신이 몰래 하는 일에 대해 고한 것을 신백천이라는 자에게 듣자 홍유서를 죽였다. 특히 김준은 가신들에게 전라도와 충청도를 관할하게 하여 취렴(醉斂)했으며 김준의 여러 아들이 이를 본받아 세도를 믿고 횡포를 부리니 원성이 매우 많았다. 또한 김준은 몽골 사신이 올 때마다 만약 힐난하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며 말했다. 나중에 가면 김준은 원종과 계속 대립하고 갈등하게 되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원종을 미워해 그를 폐위할 생각을 가져 부하인 장군 차송우 등과 동생 김충과 이를 의논했고, 이에 차송우 등은 김준의 말에 적극 찬동했으나 도병마녹사 엄수안과 김충이 안 될 일이라고 반대하면서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양아들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토지 문제로 싸운 것과 임연의 처가 노비를 죽인 것을 알고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자 임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원종은 김준의 횡포를 더는 참을 수가 없어 그가 총애하는 낭장 강윤소와 이를 상의했는데 강윤소는 왕이 김준을 증오하는 것과 임연이 김준과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는 원종에게 임연과 합세하여 김준을 제거하자고 건의했고, 원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강윤소는 임연을 찾아가 이를 말했고 임연도 합세하면서 거사하여 김준은 이들에게 참수되었다(무진정변). 이때 김준의 암살 과정은 드라마틱한데 임연이 대정을 만들어 선물로 속여 거사하기로 했고, 마침 원종이 몽골의 사신을 전송하러 신하들과 함께 나갔는데 김준과 그의 수하들은 그 자리에 전혀 참석하지 않아 거사를 미루었다. 이렇게 되자 원종은 계획이 중도에 누설될까 두려워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꾀를 내어 병이 났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중사(中使)를 여러 신사(神祠)와 사찰들에 나누어 보내 기도하게 했다.

다음날에도 김준이 등청하지 않자 원종의 환관인 김경(金鏡) 등이 왕명이라며 그를 불렀고, 김준은 이에 조정에 나왔다. 김충도 김준이 출근했다는 말을 듣고 또한 조당(朝堂)으로 나아갔다. 최은이 왕의 분부를 전한 후 김준을 인도해 편전 앞에까지 와서 왕이 몸이 편찮다는 핑계로 그를 정당(政堂)으로 끌어들였고, 이에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던 김상이 임연이 만들어놓은 몽둥이로 내려치자 김준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직후 목을 베었다. 이때 김준의 동생인 김충도 같이 살해되었다.

김준이 이때 죽은 연도가 집권 10년차인 1268년이었다. 사후, 김준의 처를 제외한 김준의 아들들은 원종이 보낸 임연과 군사들에게 몰살되었고, 부하들도 최공의, 김홍취, 이제, 손원경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김준의 도당이라 하여 처형되었다.

3. 평가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60여 년 최씨 정권이 허무하게 붕괴된 후 의외로 10년씩이나 장기 집권을 해냈다. 무신들의 집권 기간만 따지자면 1위 최우 30년, 2위 최충헌 23년, 3위 이의민 13년에 이어 4위에 해당되는 긴 기간이다. 하지만 김준의 권력은 선대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유는 그의 정권이 최의 살해 쿠데타(무오정변)에 동조한 소수의 공신 세력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 복고와 개경 환도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최의를 제거한 후 바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에 동참한 김준 일가의 가병(家兵) 지휘관들, 신의군 출신 무관들,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출신 무관들, 응양군 상장군 박성재(朴成梓)의 양해를 얻은 후에야 간신히 무신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무오정변의 실질적인 주동자가 김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출신인 류경(柳璥)은 군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8개월간 틀어쥐었다. 이후 류경 정권이 대몽 강화와 대몽 전쟁 지휘에 모두 실패한 데다가 류경이 정방을 장악하여 인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여러 방법으로 재산을 크게 모아 거부(巨富)로서 처신하자 그제서야 김준, 김승준(金承俊), 임연(林衍) 등 김준 세력들이 류경을 탄핵하였고, 이들의 탄핵안을 심사숙고하던 고종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결과 류경 정권이 1258년 11월 실각하고 비로소 김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준 정권은 앞선 최씨 세습정권과는 달리 무오정변을 통해 60여 년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공신들의 집단지도체제의 성향이 짙었고, 김준은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권력 강화를 목표로 동생 김충(金冲)을 비롯해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줄을 이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김준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소수의 공신들과 격렬한 충돌을 야기하여 무신정권이 공중분해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임연과 임유무 부자의 집권 기간을 합쳐봐야 채 3년(1268~1270)이 안 된다는 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라는 점과 무신정권의 붕괴라는 시각에서 김준 정권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4. 기타

2011년에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의 난파선 마도 3호선에서 김준에게 보내는 진상품과 이를 확인하는 죽간이 발견되어 생전 그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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