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려의인물

이제현(李齊賢)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51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본관은 경주.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차남으로 경주 이씨(慶州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 등 7명의 왕을 섬기며, 고려 최고 관직인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우정승(右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하며 4차례 집정(執政)하였고, 5차례 공신(功臣)에 책록되었고, 김해후(金海侯),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생애

1301년(충렬왕 27) 15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같은 해 문과에도 합격하였는데, 이제현은 "이것은 소소한 재주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경적(經籍)을 더욱 근면히 토론하였고 매우 넓고 깊으며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므로 부친인 이진(李瑱)이 기뻐하면서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려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지공거였던 권부(權溥)의 눈에 띄어 1302년(충렬왕 28) 권부의 딸과 혼인하였고, 1303년(충렬왕 29) 17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관직의 길에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권씨와 사별하고 박거실의 딸과 재혼했고, 이후 박씨마저 사별해 서중린의 딸과 3번째로 혼인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갔다.

1309년(충선왕 1)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고, 이후 1312년(충선왕 4)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고, 동년 당시 상왕(上王)이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으로 건너가 만권당(萬卷堂)에 머무르면서 당대의 학자들이었던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우집(虞集), 요수(姚燧) 등과 교류하였고 나날이 학문이 증진하였다. 이에 원나라 학자들의 칭찬과 찬탄이 끊이지 않았다. 1316년(충숙왕 3) 충선왕을 대신해 쓰촨성의 명산인 아미산을 유람하였고, 1317년(충숙왕 4)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있을 때 원나라에 파견되어 충선왕의 생일을 축하하였으며, 1318년(충숙왕 5) 충선왕이 절강성의 보타사에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은 이제현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옮겨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칭호를 하사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함으로써 강남[燕吳]에서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였으며, 원 황제에게 주청하여 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되자 사면을 청하였고 결국 감숙성의 도스마(朶思麻, 타사마)로 유배지를 옮기게 하였다. 1323년(충숙왕 10) 류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의 권신(權臣)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으로 편입시키고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통치를 받게 하려고 획책한 소위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발생했으나 도첨의사사(都僉議司使) 이제현과 원나라 통사사인(通事舍人) 왕관(王觀)의 상서(上書)로 무산됐다.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까지 다녀왔고, 이때 겪은 경험이 만권당에서 맺은 교우와 마찬가지로 이제현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324년(충숙왕 11)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325년(충숙왕 12)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에 책록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1330년(충숙왕 17) 다시 정당문학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충숙왕 후5)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올랐다.

1339년(충혜왕 복위) 8월 조적(曺頔)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옹립하고자 일으킨 반란인 소위 조적의 난이 발생하였고, 충혜왕은 이를 직접 진압했으나 동년 11월 반란 세력과 함께 원나라에 압송되어 원나라 형부(刑部)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제현은 원나라까지 충혜왕을 수종하였고 1340년(충혜왕 1) 3월 왕이 석방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려로 귀국한 후 군소배(群小輩)들이 더욱 날뛰자 이제현은 은거하고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고려시대 3대 문학비평서로 평가받는 역옹패설(보물 제1893호)을 저술하게 되었다. 1342년(충혜왕 후3)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수종공신(隨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1344년(충목왕 즉위) 충목왕이 즉위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데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충목왕 사후 원나라에 있던 왕기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346년(충목왕 2)경에 부원군에 봉해졌다.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으로 봉해진 듯하다.

1351년(충정왕 3) 10월 원나라 순제는 충정왕을 폐위하고 왕기(王祺, 공민왕)를 고려 국왕으로 봉했다.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공민왕은 그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진사대부들의 수장격인 이제현을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다.

1351년(공민왕 즉위) 11월 정식으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임명된 이제현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이문(理問) 배전(裴佺)과 박수명(朴守命)을 정동행성에 하옥하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로,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를 각산(角山)으로 유배 보냈으며,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한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좌천시켰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어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이제현의 조치가 적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신뢰하고 안도하였다. 동년 12월 공민왕이 귀국하여 정식으로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공민왕의 귀국 후 원나라에서 왕을 수행했던 조일신(趙日新)이 그 공을 내세우며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이제현을 시기하였다. 이에 이제현은 거듭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치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해주었다. 다시 세 번 더 사직을 청하여 드디어 치사(致仕)하였는데 덕분에 1352년(공민왕 1) 조일신의 난 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조일신이 처형된 후 공민왕은 이제현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삼아 정국을 수습하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1353년(공민왕 2) 정월 우정승을 사임한 후 동년 5월 김해군(金海君)으로서 다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선발하였다.

1354년(공민왕 3) 12월 다시 우정승이 되었고, 1355년(공민왕 4) 다시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에 봉해졌다. 1356년(공민왕 5) 정월 초하루 침원(寢園)의 봄 제향에서 태위(太尉)가 되어 종헌(終獻)을 맡았다. 동년 우정승에서 사임하였다.

1356년(공민왕 5) 11월 기철(奇轍)을 숙청하는 반원 운동이 벌어지자 김해후(金海侯)로 봉해지고 문하시중에 임명되어 사태를 수습하다가 1357년(공민왕 6) 치사하였다. 이때 본직으로서 치사를 간청였는데 국제(國制)에 군(君)으로 봉해져 은퇴하면 본직으로 은퇴하는 것과 녹봉에 차이가 있었다. 이제현은 이미 늙었으면서도 오히려 후한 녹봉을 받는 것이 의리상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다시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1362년(공민왕 12)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7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이제현은 별세하였다. 동년 10월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하(先塋下)에 장사 지냈고, 1376년(우왕 2) 10월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묘지명

이제현의 문하인 이색(李穡)이 찬(撰)한 묘지명을 보면, 그 선계(先系)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이알평(李謁平)을 비롯하여 그 후손인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부터 차례대로 나열하고 있다. 신라 관제에서 소판은 오직 진골이라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거명의 아들을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이라고 적고 있다. 병부령은 신라 법흥왕 때 둔 것으로 대아찬~각간이 맡았고 재상(宰相)을 겸직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제현 묘지명은 문헌으로만 전해졌으나, 지난 2007년에 황해북도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길이 1.68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에 달하는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었다. 송도사범대학 전용철 교수는 "이 묘지석은 고려말 조선초의 우수한 금석문 유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묘지석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한 걸작"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묘지석의 글은 고려시기 이름난 문장가이며 학자인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모두 34줄에 2,745자나 된다"면서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기 때문에 특히 14세기 고려사 연구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현 묘지석에는 전서체로 문충공이씨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해서체로 시조 신라 좌명대신 이알평 및 원대손 소판공 이거명, 병부령 이금현, 삼한공신 이금서를 비롯한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려시대 사료 DB, 관련 방송, 관련 기사)

문충공이씨묘지명

(文忠公李氏墓誌銘)

지정(至正) 27년 정미년(공민왕 16, 1367) 가을 7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鷄林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익재(益齋)선생 이공(李公)이 자택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1세이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10월에 관리가 의전을 갖춰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병진년(우왕 2, 1376)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칭(偁)을 낳고, 칭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인 득견(得堅)을 낳았다. 상의가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된 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으로 시호가 문정(文定)인 진(瑱)을 낳았다. 문정이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년(충렬왕 13, 1287)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글을 지을 줄 알면서 이미 작자(作者)의 기상을 보였다. 15세 되던 대덕(大德) 신축년(충렬왕 27, 1301) 상시(常侍) 정선(鄭僐)이 성균관(成均館)에서 시험을 주관했는데, 응시자 모두가 각기 재능을 자부하면서 서로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다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 기운을 잃고 움츠러들면서 감히 앞을 다투지 못했다. 공이 그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해 국재(菊齋) 권부(權溥)와 열헌(悅軒) 조간(趙簡)이 예위(禮闈 : 禮部가 주관한 최종 시험)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공이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권공이 자기의 딸을 공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자그마한 기예를 시험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아, 나의 덕을 크게 쌓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하고는, 고전(古典)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한편, 이를 다시 절충해서 정당한 결론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문정공(文定公 : 부친 이진)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이 어쩌면 우리 가문을 더욱 성대하게 해 주시려는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계묘년(충렬왕 29, 1303)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다. 무신년(충렬왕 34, 1308)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뽑혀 들어오니,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미루고 양보만 할 뿐 감히 글을 논하지 못하였다. 그 해 겨울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경술년(충선왕 2, 1310) 선부산랑(選部散郞)으로 옮겨진 뒤, 신해년(충선왕 3, 1311)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옮겼다.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 4, 1312)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선발되어 부월(斧鉞)을 쥐었던 옛 사람의 풍도를 드날렸다.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승진했다가, 겨울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다. 계축년(충선왕 5, 1313) 내부부령(內府副令)이 되었다. 풍저창은 두곡(斗斛)의 일을 감독하고, 내부(內府)는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을 따지는 곳이었다. 공이 전혀 난색(難色)을 표하지 않자, 사람들이 “이공은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는 불기(不器)의 군자라고 할 만하다” 고 일컬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하여, 무종과 인종 두 조정에 걸쳐서 비할 데 없는 은총과 예우를 받았다. 충선왕은 마침내 원나라에 청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자신은 태위(太尉)로 원나라 수도의 저택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연구로 낙을 삼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학하는 인사들은 모두가 천하에서 뽑혀 온 명사(名士)들인데, 우리 부중(府中)에 그만한 인물이 없다니 이것은 우리의 수치이다” 하고서 공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때가 바로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정월이었다. 당시 원나라 요목암(姚牧菴 : 요수(姚燧)), 염자정(閻子靜 : 염복(閻復)), 원복초(元復初 : 원명선(元明善)), 조자앙(趙子昻 : 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충선왕의 집에 와서 노닐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날이 갈수록 학문이 진보하여, 제공(諸公)이 칭찬하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을묘년(충숙왕 2, 1315) 선부의랑(選部議郞)으로 옮겼고, 가을에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임명되었는데, 의랑은 그대로 겸임하였다. 병진년(충숙왕 3, 1316) 황제의 명령을 받아 서촉(西蜀)지방에 갔다. 가는 곳마다 읊은 시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널리 전해졌다. 이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정사년(충숙왕 4, 1317)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충숙왕 6, 1319) 충선왕은 황제의 명으로 향(香)을 내려주기 위해 강남(江南)지방에 갔을 때, 누대(樓臺)와 풍물(風物)을 보고 흥치가 우러나면 시를 읊어 회포를 풀곤 하였다. 그때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런 곳에는 우리 이생(李生)이 없으면 안 된다” 하였다. 경신년(충숙왕 7, 1320)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지공거(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많이 뽑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 34세였다. 친어버이와 처부모와 좌주(座主) 세 분 등 모두가 건강한 가운데 공이 술잔을 올려 축수(祝壽)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이 해에 상주(上奏)하여 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었다. 지치(至治) 임술년(충숙왕 9, 1322) 겨울 경사(京師 : 원나라 수도)로 돌아갔다.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서번(西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듬해 공이 왕을 찾아뵈었는데, 가는 도중에 읊은 시마다 충분(忠憤)의 감정이 애연히 서려 있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광정대부(匡靖大夫)의 품계와 밀직사사(密直司事)의 관직이 가해졌다. 을축년(충숙왕 12, 1325) 공신(功臣)의 호가 추성양절(推誠亮節)로 바뀌어 내려지고,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차 옮겼다. 병인년(충숙왕 13, 1326) 삼사사(三司使)로 옮겨졌다.

천력(天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충혜왕(忠惠王)이 나라를 대리(代理)로 다스릴 때 다시 정당문학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그 뒤 지원(至元)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봄 2월 충숙왕(忠肅王)이 돌아갔다. 그 해 가을 정승 조적(曺頔)이 백관(百官)을 협박하면서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의 곁에 있는 간악한 소인들을 쫓아내겠다” 고 선언하였다. 사실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암암리에 즉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에 충혜왕이 정예 기병(騎兵)을 이끌고 공격해서 그를 죽였으나, 연경(燕京)에 있는 그의 도당(徒黨)이 매우 많아 기필코 충혜왕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였다.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는 우리 임금님의 아들만을 알 뿐이다”라고 하였다. 충혜왕을 따라 경사(京師 : 원나라 수도)에 들어가 말 대신 글로 적어 올려 일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게 하였다. 그 공(功)이 1등(等)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귀국한 뒤 뭇 소인들이 더욱 날뛰었다. 공은 물러나 자취를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은채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1344) 겨울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을 부원군(府院君)으로 올리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고, 서연(書筵)에서 공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하였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1351) 겨울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였으나 아직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우정승(右政丞)에 임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직무를 대리로 처리하게 하였다. 몇 개월 동안 왕이 나라를 비워 두고 있었으나, 공이 적절하게 조치한 덕분에 사람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임진년(공민왕 1, 1352)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공이 있는 것을 시기하자, 공이 이를 알아채고는 세 번이나 표문(表文)을 올려 정승 자리를 고사(固辭)하였다. 그 해 겨울 10월 조일신이 여러 불평분자들을 끌어 모아 한밤중에 궁궐로 침입한 뒤에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치고 군사들을 풀어 주살(誅殺)을 자행하였다. 공은 이때 자리를 사퇴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일신을 복주(伏誅)하고 나서 공을 다시 우정승으로 기용하였다. 계사년(공민왕 3, 1353) 정월에 그만두었다. 그 해 5월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갑오년(공민왕 4, 1354) 12월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 또 사직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70세로 김해후(金海侯)에 봉해졌다. 12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정유년(공민왕 6, 1357) 5월 본직(本職)으로 은퇴할 것을 청하자, 이를 따랐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君)에 봉해진 상태로 벼슬에서 은퇴할 경우에는 봉록(俸祿)을 더 많이 받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이미 노쇠한 몸인데도 후한 봉록을 받는 것이 의리상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직으로 은퇴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히 예우하는 도리가 못 된다는 조정의 공론이 있어, 임인년(공민왕 11, 1362) 다시 공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할 때부터 명성이 한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조정에 몸담은 이후로는 오로지 문서에 관한 일을 받들어 행하였으며,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에서 외지제고(外知制誥)를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속관(屬官)을 거쳐 양부(兩府)와 봉군(封君)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 직책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오직 충정왕(忠定王)이 재위(在位)했던 3년 동안만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공이 일찍이 중국에 표문을 올려 현릉의 즉위를 청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타고난 중후한 자질을 학문으로 잘 인도해서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한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의논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모두가 찬란하게 빛나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처음에 공이 사서(史書)를 읽을 적에도 반드시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본받아서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엄하게 포폄(褒貶)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본기(本紀)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정통이 못 되는 주나라를 가져다가, 일월(日月)과 같은 당나라에 이어 붙였는가(那將周餘分 續我唐日月)” 하였다.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고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공은 남이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이를 칭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선배들이 후세에 남긴 일에 대해서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은 따라가기 어렵다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공은 평소에 다급하게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속된 화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하여 술자리를 벌일 때에도 고금(古今)의 역사를 토론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래서 최졸옹(崔拙翁 : 최해(崔瀣))이 공을 보고 탄식하면서 “선비가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익재로부터 이를 확인하였다” 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은 가능한 한 예전부터 내려오는 법도를 준수하려 하였고, 새로 바꿔서 개혁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공은 일찍이 “나의 뜻이야 어찌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마는, 나의 재주는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공의 자손이 잇따라 기씨(奇氏)의 가문과 인척(姻戚) 관계를 맺자, 공은 가득 차서 넘쳐흐르는 걱정이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기씨가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자, 현릉이 내외의 지제고(知制誥)에게 시를 지어서 축하하도록 명하는 한편, 공에게도 그 일을 서술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 글을 짓지 않았다.

공은 자신의 호를 익재(益齋)라고 하였다. 신돈(辛旽)이 패망하고 난 뒤에 현릉이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가 없다. 익재가 일찍이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공은 나이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고 일컬었으며,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익재라고 호칭하였으니, 공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저술한 문집 몇 권이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인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 종부부령(奉常大夫 宗簿副令)이고,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 寶文閣直提學 知製敎)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사복시사(正順大夫 判司僕寺事)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정대부 전농정(中正大夫 典農正)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銀靑光祿大夫 簽書樞密院事 翰林院太學士)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해졌다.

둘째 부인인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는 선수서경등처만호부 부만호 중현대부 사복정(宣授西京等處萬戶府 副萬戶 中顯大夫 司僕正)인 거실(居實)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 개성윤(奉翊大夫 開城尹)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전농시사(正順大夫 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 송무(宋懋)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혜비(惠妃 : 공민왕의 왕비)인데 지금은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셋째 부인인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는 통직랑 지서주사(通直郞 知瑞州事)인 중린(仲麟)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 三司右尹)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전의부정(奉善大夫 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2녀가 있는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종부(宗簿 : 서종)는 밀직사 겸 가찰대부(密直使 兼 監察大夫) 홍유(洪侑)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匡靖大夫 政堂文學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上護軍)이다. 장녀는 통헌대부 판위위시사(通憲大夫 判衛尉寺事) 조무(趙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현대부 순흥부사(中顯大夫 順興府使) 이원적(李元䙗)에게 출가하였다. 또 (서종은)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내유(乃猷)로 조계종(曹溪宗) 광도사(廣度寺)의 주지(住持)이다.

총랑(摠郞 : 달존)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 여흥군사(朝奉郞 驪興郡事)이다.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인데,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 자선대부(翰林學士 資善大夫)가 되었으므로, 공에게 태상경(太常卿)이 추증되고, 훈호(勳號)와 품계(品階)와 작위(爵位)가 갖추어 내려졌다.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 小府尹)이다. 딸은 봉익대부 개성윤 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奉翊大夫 開城尹 光祿大夫 同知樞密院事)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하였다.

개성(開城 : 창로)은 중대광 청성군(重大匡 淸城君)으로 시호가 평간(平簡)인 공의(公義)의 딸 한씨(韓氏)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춘추검열(春秋檢閱) 원서(元序)에게 출가하였다. 창로의 계실(繼室)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 判典客寺事) 김묘(金昴)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고, 다음 곤(袞)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어리다.

사복(司僕 : 사위 임덕수)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 軍器少尹)이고,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中郞將)이며, 장녀는 통직랑 기거랑 지제교(通直郞 起居郞 知製敎) 신혼(申渾)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 친어군 대호군(中正大夫 親御軍 大護軍)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소부윤(奉善大夫 少府尹) 황간(黃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전농정(典農正 : 사위 이계손)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척(隲)은 낭장(郎將)이고, 다음 양(亮)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딸은 통헌대부 판선공시사(通憲大夫 判繕工寺事) 안익(安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전농(判典農 : 사위 박동생)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 軍器少尹)이고, 다음 위(緯)는 별장(別將)이고,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어리다.

전교(典校 : 사위 송무)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좌윤(左尹 : 김남우)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증손(曾孫)은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조위위(趙衛尉 : 조무, 서종의 사위)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이순흥(李順興 : 이원적, 서종의 사위)은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여흥(驪興 : 이덕림, 달존의 장남)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신(伸)은 승봉랑 공조서영(承奉郞 供造署令)이고, 다음은 밀(密)이다. 장녀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正順大夫 判衛尉司事) 이승원(李承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선덕랑 통례문지후(宣德郞 通禮門祗侯) 곽유례(郭游禮)에게 출가하였다.

밀직(密直 : 이수림, 달존의 차남)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숭의(崇義)이고,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녹사(典客錄事)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소부(小府 : 이학림, 달존의 3남)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어리고, 장녀는 사헌지평(司憲持平) 김만구(金萬具)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기개성(奇開城 : 기인걸, 달존의 사위)은 1남을 낳았다. 이름은 신(愼)이다.

순의(純義 : 임덕수의 장남)는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순례(純禮 : 임덕수의 차남)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자(滋)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신혼(申渾 : 임덕수의 사위)은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호(浩)는 대전지유중랑장(大殿指諭中郞將)이고, 장녀는 낭장(郎將) 황윤기(黃允奇)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 박영충, 임덕수의 사위)은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別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소부(黃小府 : 황간, 임덕수의 사위)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약노(藥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 : 이계손의 아들)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고,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천지의 정기가 한데 모여 걸출한 우리 공 태어났고

규벽(奎璧)이 밝게 비치면서 우리 공 문장을 일으켰네.

천하에 이름 떨치면서 몸은 해동(海東)에 거했나니

도덕(道德)의 우두머리시오 문장(文章)의 종장이셨어라.

태산북두[北斗泰山]로 일컬어진 창려(昌黎)의 한자(韓子)요

광풍제월(光風霽月)로 존경받은 용릉(舂陵)의 무숙(茂叔)이었다고 할까.

국정[國鈞]을 네 차례나 책임지면서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

상서로움은 기린과 봉황이요. 신령스러움은 시귀(蓍龜)였다오.

기우는 사직(社稷)을 붙들어 일으키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 주신 분.

이제는 종묘[閟宮]에 배향이 되셨나니 애영(哀榮)아! 그대 자손들이여.

충효(忠孝)의 정신을 본받아 따를지니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공께서 무덤[九原]에서 살피고 계시리니.

1375년(우왕 1), 이색(李穡) 찬(撰)

4. 가계

이제현은 경주 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며, 경주 이씨의 중조(中祖)로 대접받는다.

조부 : 이핵(李翮) -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조모 : 김해 김씨

아버지 : 이진(李瑱, 1244~1321) - 검교첨의정승, 임해군

어머니 : 진한국대부인 박씨, 박인육(朴仁育)의 딸

형 : 이관(李琯) - 이암공파] 파조

형수 : 합천 이씨, 이신손(李信孫)의 딸

초배 : 길창국부인 권씨(權氏, 1288~1332), 권부(權溥)의 딸 - 3남 4녀

장남 : 이서종(李瑞種) - 종부시부령 증 문하시랑

자부 : 풍산 홍씨, 홍유(洪侑)의 딸

손자 : 이보림(李寶林) - 정당문학, 계림군

손녀 : 경주 이씨, 조무(趙茂)에게 출가

손녀 : 경주 이씨, 이원적(李元樀)에게 출가

손자 : 이실림(李實林)

자부 : 김씨(金氏)

손자 : 이원익(李元益) - 대사성

차남 : 이달존(李達尊, 1313~1340) -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자부 : 남포 백씨, 백이정(白頤正)의 딸

손자 : 이덕림(李德林, 1330~?) - 회군공신, 판서

손자 : 이수림(李壽林, 1332∼?) - 동지밀직사사

손자 : 이학림(李學林, 1334~?) - 소부윤

손녀 : 경주 이씨,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

3남 : ?(요절)

장녀 : 경주 이씨,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

외손녀 : 풍천 임씨, 신혼(申渾)에게 출가

외손녀 : 풍천 임씨,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

외손녀 : 풍천 임씨, 황간(黃侃)에게 출가

외손자 : 임순의(任純義) - 판사

외손자 : 임순례(任純禮) - 낭장

차녀 : 경주 이씨,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

외손자 : 이척(李隲) - 삼사좌사

외손자 : 이량(李亮) - 판전의감사

3녀 : 의화택주 이씨,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

4녀 : 경주 이씨(요절)

계배 : 수춘국부인 박씨, 박거실(朴居實)의 딸 - 1남 3녀

4남 : 이창로(李彰路) - 개성윤

자부 : 청주 한씨, 한공의(韓公義)의 차녀

5녀 : 경주 이씨,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

외손자 : 박경(朴經) - 판사

외손자 : 박위(朴緯) - 목사

외손자 : 박수문(朴殊文) - 정랑

6녀 : 경주 이씨, 송무(宋懋)에게 출가

외손자: 송면(宋勉) - 군수

7녀 : 혜비 이씨(惠妃李氏)

삼배 : 서원군부인 서씨, 서중린(徐仲麟)의 딸

8녀 : 경주 이씨,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

외손자 : 김유(金維) - 낭장

외손자 : 김집(金緝) - 현감

외손자 : 김직(金織)

외손자 : 김효복(金孝福)

외손자 : 김효로(金孝老) - 중랑장

9녀 : 경주 이씨,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

측실

10녀 : 경주 이씨,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

11녀 : 경주 이씨

제 : 이지정(李之正) - 호군공파 파조

제부 : ?

5. 기타

유학에 있어서 안향 - 6군자(이진, 권부, 백이정, 우탁, 이조년, 신천) - 이제현 - 이색 - 정몽주로 이어지는 고려 성리학 계보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고, 성리학의 수용 및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조에서 편찬된 <고려사>에 유교에 대해서 공론만 떠드는 수준밖에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성리학의 틀에 매몰된 다소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한 후 "원나라에 와있는 인물들 모두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데 지금 나의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수치이다."라고 한탄하면서 원나라로 불러들인 인물이 이제현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러한 비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조선조 명상(名相) 류성룡(柳成龍)이 '이제현은 덕(德)·공(功)·언(言)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 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儒家)적 인물이다.'라고까지 평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현은 만권당(萬卷堂)에서 요수(姚燧),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등 당대 최고의 문인·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적 역량이 더욱 깊어졌다.

사람을 감정하여 식별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하는 안향(安珦)이 이제현을 평한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이제현과 이이(李異)는 1301년 과거에 함께 급제하였고 둘 다 유명하였는데, 이제현은 15세에 국자감시, 문과를 모두 합격하였고, 이이도 어린 나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안향이 불러 시를 짓게 하고는 말하기를, “이제현은 반드시 귀하게 되고도 장수할 것이고,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제현은 수상직인 도첨의정승, 우정승,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5차례 공신에 봉해졌으며 81세를 향수했으나, 이이는 부친인 이혼(李混, 1252~1312)보다 일찍 사망하였다.

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서 이를 바탕으로 사학(史學)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익재난고>와 <역옹패설>이 있다. 그 밖에도 전해지지 않는 저서로는 백문보, 이충달과 함께 편찬했다는 <사략(史略)>이 있는데 이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에 입각해서 저술한 고려사 편년체 통사 사서로 판단되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들어 있는 이제현의 논찬을 통해 어느 정도 특징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은 사리화(沙里花)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시로도 유명하다.

黃 雀 何 方 來 去 飛황 작 하 방 래 거 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一 年 農 事 不 曾 知일 년 농 사 부 증 지

한 해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鰥 翁 獨 自 耕 耘 了환 옹 독 자 경 운 료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耗 盡 田 中 禾 黍 爲모 진 전 중 화 서 위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고려사에 있는 그의 열전을 보면 그가 충선왕과 나누었던 대화나 각종 상소들이 자세하게 올라와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제현을 실제로 본 원나라 사람들이 평하길 '이제현은 훤칠한 키에 우람한 덩치를 가졌다. 그런데 그런 몸뚱이보다 간이 더 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대 후반 정권을 장악한 신돈(辛旽)이 지공거(知貢擧) 문제로 이제현의 문생들을 참소하였는데, 이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제현과 그 주변 인물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악의적으로 한 말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제현은 지공거로서 최용갑(崔龍甲), 백문보(白文寶), 이곡(李穀), 윤택(尹澤), 안보(安輔), 이색(李穡), 정추(鄭樞), 권중화(權仲和) 등을 선발하였고, 이제현의 문생들은 모두 고려 말 정치·사상을 서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인물들이다.

이제현이 신돈을 비판하였던 일도 <고려사>에 전하는데 공민왕에게 "신돈의 골상이 옛날의 흉악한 자들과 같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충언을 올렸다고 한다. 이에 원한을 품은 신돈은 이제현을 헐뜯었지만 연로한 탓에 별다른 처벌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신돈을 반역 혐의로 처형시킨 뒤 공민왕은 미리 앞을 내다본 이제현의 식견에 감탄했다고 한다.

토지 제도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로 연구한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 자신도 문관임에도 이제까지 고려 문관들의 탁상공론의 원흉을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 제도로 꼽았으며 문관과거제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공민왕의 2비 혜비 이씨가 이제현의 딸로 공민왕이 시해당한 뒤에 공민왕의 5비인 신비 염씨와 함께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후비들은 공민왕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제현의 차녀는 공조전서 문창공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을 갔는데 아들(이제현의 외손자)이 연안 이씨 통례문부사공파중의 소윤공파 파조인 삼사좌사 이척(李隲)이다.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 때 유모가 졸고 있는 사이에 우물에 빠질 뻔한 적이 있는데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의 호통소리에 잠에서 깬 유모에 의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유모가 사당에서 이제현의 초상을 보고 꿈 속의 노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시와 음악, 그림에도 능통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