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할 때 반개혁 세력이 두려워 일을 그르칠까 무섭다고 하자 그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고려의 승려 출신 정치인
제31대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위해 등용한 인물로 개혁자라는 평가와 요승(妖僧)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개혁자라고 보는 쪽에서는 강제로 노비가 된 평민들을 노비에서 해방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책을 폈던 점을 강조하는 반면, 요승이라는 근거로는 과도한 권력 욕심, 최악의 처신, 불교 축제와 제사를 열기 위해 자주 일으킨 백성 수탈, 정도가 심한 부녀자 희롱과 겁탈 등이 제기되고 있다.
그를 등용했던 공민왕과 여러모로 유사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이전
영산현(靈山縣)에서 태어났다.《고려사》에서는 신돈의 법명, 출신지, 어머니의 신분만 적고 아버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고려사》에는 없지만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신예(辛裔)라는 인물이 신돈의 아버지 또는 형이라는 설이 있다.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는데 어린 나이로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되고 공민왕과 만나기 이전까지 뭘하고 살았는지는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말의 학자 이달충이 신돈을 비판하는 시를 지은 바가 있는데 그 시의 각주에 매골승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매골승'은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하는 승려'라는 뜻이므로, 신분이 미천한 신돈이 남들이 꺼리는 일로 생계를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명덕태후 홍씨가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했다.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웬 승려가 나타나 자객을 없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꿈 속에서 본 승려와 행색이 비슷하여 마침내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이때 그는 법명인 '변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
현존하는 기록에는 신돈이 어떻게 공민왕과 만났는지 설명이 매우 부실하다. 《고려사》나 야사에서는 단순히 신돈이 요승이라 공민왕을 미혹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일단 미천한 신분인 그가 임금에게 소개될 정도였다면 뭔가 그가 세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혼란한 고려 말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일종의 불교 운동을 일으켰고, 이에 상당한 추종 세력을 거느렸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사의 기록에 착안해서 신돈이 공민왕 시해 음모를 포착해 김원명을 통해 이를 알렸고, 공민왕과는 이를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환속을 한 뒤에는 육식을 상당히 즐긴 모양이다. 승려 시절에는 삐쩍 마른 몸에 눈빛이 형형해서 범상치 않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볼 때 그의 육식은 영양실조를 고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불교의 영향력이 커서 채식 위주 식사가 보편적이었던 당시 고려에서는 이런 신돈의 식습관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였던 듯하다. 혹은 이 역시 티베트 밀교적인 신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희한하게도 사냥개를 무서워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항간에는 신돈의 본모습이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아 그의 이미지 악화에 더욱 일조했다.
2.2. 정치 입문 이후
호칭: 사부(師傅), 첨의(僉議), 영상(領相)
문산계 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공신호: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직위: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판사(判事)
공민왕을 알현한 계기가 어찌되었든, 왕의 신임을 받게 된 신돈은 1365년 12월, '고려 개혁'의 핵심 인사로서 등용됐다.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 그야말로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집권 초창기에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었다. 신돈 본인이 기득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득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을 포함한 조정의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승려 출신이라서 훗날 신진사대부들에게 엄청 까였지만, 사실 신돈이 권문세족 등 기득권의 입지를 흔들고자 신진사대부를 기용했으며, 처음에는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신돈은 불가 출신이었지만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했으며 고려의 관학인 성균관도 부활시켜 신진사대부의 세력 강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신돈이 신진사대부들과 척을 지게 된 것은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사들을 숙청하고 난 이후였다.
그러나 신돈은 이런 '무명의 개혁가'를 담당하기에는 부패하고 탐욕하여 점차 신망을 잃었다. 대쪽같이 빈틈을 전혀 주지 않아도 수많은 적과 모함을 만들어내는 입지인데 신돈은 왕의 신임을 믿고 스스로 부정부패와 축재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가장 먼저 그를 불신했다.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류숙(柳淑)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죽였는데, 류숙은 본래 정사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그가 지은 시를 볼 때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류숙은 고려 말 학식이 매우 뛰어나 이제현, 홍언박, 이색 등과 더불어 공민왕 시절 손꼽히던 대학자였고, 고려 말에 초기 신진사대부의 주축이었다. 류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으며 정도전은 신돈을 가장 먼저 비판했다.
무관 측 핵심 인사였던 최영도 그를 싫어했으며 사실상 신돈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했기에 자신의 세력을 공고하게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적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는 위치였는데, 그 와중 정밀한 처세를 하긴커녕 부패하고 경솔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표적이 되었다.
2.3. 사망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신돈(辛旽)이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에 성과 이름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칭한 뒤 글을 적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졌다. 김속명이 이를 아뢰자 왕은 신돈의 일당인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정구한(鄭龜漢)·진윤검(陳允儉)·기중수(奇仲修) 등을 체포하여 주살할 것을 명하였다.
왕은 성품이 의심이 많고 잔인하여 비록 심복이 되는 대신(大臣)이더라도 그 권세가 왕성해지면 반드시 꺼리다가 처형하였다. 신돈은 스스로 권세가 매우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왕이 그를 꺼릴 것을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 2개의 능묘를 배알할 때 신돈은 그 일당을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킨 뒤 큰일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신돈은 그 일당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약속대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일당이 말하기를, “상(上)의 의식에 참여한 호위병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 차마 범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은 화를 내고 또한 욕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실로 겁쟁이에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여 공모하면서 다시 날을 잡아 일을 치르기로 하였다.
당시에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모두 신돈에게 붙자, 이인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흉악한 모의를 갖추어 알고는 몰래 장부에 그들을 기록하였으며, 일이 임박하자 갖추어서 변란을 아뢰고 곧 미복(微服) 차림으로 도망갔다. 왕은 처음에 이인이 무고하여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믿지 않았으나, 신돈 일당을 체포해서 국문하자 모두 증명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 보내었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선견지명을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근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바로 모니노(牟尼奴)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0년(1371) 7월 -반란을 도모한 신돈을 유배보내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숙청당하기 전에 왕을 시해하여 선수를 치려다가 자신의 밑에서 문객으로 지내던 선부의랑 이인의 고발로 실각당했고 역모죄로 유배를 떠났다. 이후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지 5년이 채 안 된 1371년, 수원에서 처형당했다. 사실 일련의 사태에는 왕을 제거하려던 반역행위(대역죄)도 심각했지만 축재와 부정부패도 문제가 많았다는 견해가 다수다.
신돈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흠결과 약점을 너무나 많이 노출했다. 무엇보다 왕의 총애로 권력을 얻게 된 이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인지하고 왕의 의중을 파악하며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명백한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돈도 이렇게 되는 걸 처음부터 경계했는지 공민왕과의 첫 만남 때
"대왕께서는 참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해서 공민왕으로부터 절대로 죄 주지 않겠다는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
라는 맹세문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맹세문은 쓸모가 없었는데,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할 때 이 맹세문을 어겼다며 그를 힐난했다.
처음에 왕이 신돈·이춘부(李春富) 등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박에게 맹서(盟書)를 주면서 신돈에게 보여주어 죄를 헤아리게 하며 말하기를,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
《고려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공민왕은 신돈의 부녀자 간통과 축재에 큰 배신감을 느낀 듯하며, 이로 인해 숙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최측근인 자제위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왕조 최후의 개혁 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이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으로 전락하며 가뜩이나 망조가 짙던 고려를 더욱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렸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에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기가 아끼는 여종이었던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반야에게서 '모니노'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와 '신창'이라고 부르며 《고려사》〈반역열전〉에 넣었다. 우왕은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위하여 계속 매도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 500년 내내 '신우'라고 불렀다. 조선이 망해 우왕과 창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는 혈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우창비왕설이 이성계 일파의 모함으로 여겨지고 있다.
3. 기타
일제강점기까지 신돈은 제정 러시아의 그리고리 라스푸틴마냥 정력의 상징쯤으로 취급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이다. 작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관계한 여인의 수효에 대하여..(중략)..스무 서너 살에 벌써 200명은 넘으리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서른 살 때는 벌써 괴승 신돈이를 멀리 눈 아래로 굽어 보았을 것입니다."
공민왕이 내린 작위는 '진평후'(眞平侯)인데 작호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과 똑같다.
공민왕이 '신돈'이라는 이름과 함께 준 호는 '청한거사'이다. 원효도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했고, 국조 보육도 '거사'라 칭했다.
전래에 따르면 봉황은 왕을 상징하는 영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돈은 봉황이 오동도의 무성한 오동나무 숲에서 무리지어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새로운 임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 안의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당시까지 전해오던 '오동도의 명성'을 지워버렸다. 신돈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전라도 출신의 전주 이씨인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말았으니 결국엔 오동나무가 없는 오동도가 된 지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