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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반야(般若)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14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후궁

제32대 우왕의 생모로 기록되어 있다. 신돈의 시녀 출신이다.

2. 생애

원래 신돈의 시녀였으나 공민왕이 반해 가까이 했다고 한다. 혹은 노국대장공주와 닮은 여인을 보고 가까이 하였는데 그녀가 반야(般若)였다고도 한다.

조선 건국 세력은 반야는 사실은 신돈의 첩으로 신돈의 아이를 임신한 채 공민왕에게 상납됐으며 따라서 우왕은 신씨라며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모른다.[2]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이런 시각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우, 신창으로 기술한 뒤 〈반역 열전〉에 넣었다.

반야는 아들을 출산할 때부터 신돈의 집에서 몸을 풀고 아들과 기거했는데,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한 후 우를 왕궁으로 데려왔다. 공민왕은 아직 신분이 불안했던 우를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입적시켜 왕자로 올렸다. 공교롭게 이듬해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은 10세에 즉위했다. 반야는 이때

"내 배 아파 낳은 주상을 어찌 한씨의 소생이라느냐?"

라며 따졌는데, 즉시 하옥돼 '임진강에 던져졌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서는 우왕의 생모가 순정왕후 한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려사》에 반야가 만삭이었을 때 신돈이 반야를 승려 능우(能祐)의 속세 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능우가 순정왕후 한씨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야가 출산한 아이는 능우의 어머니가 기르다가 1년 뒤 죽었고, 그와 닮은 아이를 데려와 반야의 아들인 척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일설로 적혀 있다.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 한씨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야의 아들과 닮아서 능우의 어머니가 데려와 길렀다는 그 아이가 능우의 친척인 순정왕후 한씨의 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바꿔치기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반야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이가 우왕으로 즉위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심지어 우창비왕설을 강경하게 반대하는 학파에서는 반야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가 조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다만, 본디 신하의 사노비였다가 입궐한 경우가 고려 말기에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으므로[3], 그녀의 인적사항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고려의 법률에 따르면 노비의 자식은 어머니의 소유주에 귀속되기 때문에 어머니가 신돈의 시녀인 우왕은 왕만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신돈의 노비가 될 처지였다.

3. 평가

노국대장공주를 닮았다는 이유로 공민왕의 승은을 입어 그의 유일한 아들을 낳으면서 엄청난 신분상승을 한 것처럼 보이나 정작 노비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아들의 모후로 공표되어 왕후로 추숭되고 정작 자신은 태후나 왕후는커녕 왕의 친모로도 인정받지 못한 여러모로 불쌍한 여인이기도 한다. 게다가 신돈의 시녀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아들 우왕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이성계측 세력에 의해 이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손자인 창왕까지 신돈의 후손으로 몰려 부왕과 함께 폐위되어 유배되고 거기서 죽임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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