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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인물

이인임(李仁任)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09|조회수54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시대 공민왕(제31대), 우왕(제32대) 때의 권문세족, 군인, 권신, 간신. 여말선초와 원명교체기 때의 대원(對元) 외교 및 대명(對明) 외교, 요동정벌 모두에 크게 엮여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본관은 성주 이씨. 본관이 성주이고, 이인임의 증조부이자 성주 이씨 중시조격 인물인 이장경(李長庚) 대까지 경산부 즉, 성주에 거주했으며, 이인임의 묘가 유배가서 사망한 당시 경산부에 속한 고령군에 있어서 고령군에서는 지역 출신 인물로 홍보하기도 하나 역사에 이인임의 출신지에 관한 기록은 없고, 제25대 충렬왕 때 청백리이자 명성을 떨치며 가문을 세운 그의 조부 이조년(李兆年) 대부터 수도 개경에서 자리잡고 활동한 것으로 보아 이인임의 출생지는 개경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부계의 근거지를 고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성주 출신으로도 볼 수 있다. 비록 벼슬 생활은 과거가 아닌 음서로 시작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 감각이 뛰어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처음 맡은 벼슬인 전객시승(典客寺丞)은 조상 대대로 고려의 유력한 호족 가문이었던 성주 이씨의 입지와 조부 이조년의 명성에 비해 높은 벼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은 금방 스스로의 힘으로 좌부승선(左副承宣)으로 승진한다. 군주의 측근으로 다가간 것이다.

2.2. 패기의 개혁가

이후 홍건적의 제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등 공신이 되었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면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때 파견된 이인임의 직책은 서경존무사였고, 당시 총책임자는 수문하시중 이암(李嵒)이었는데 이암이 서경 앞까지 가서 군대의 지휘를 못하던 상황에서 이인임의 숙부인 이승경(李承慶)이 대신 파견되었고, 이인임도 함께 명성이 높아졌다.

이때 숙부인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감찰어사를 하며 거듭 승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고려에 귀국한 거물로 원나라에 가지 않고 2년간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맞아 인재가 없어 지고 있었던 공민왕은 군무에 익숙한 그에게 부탁해 급히 고려 벼슬을 주고 군대를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인임은 이때 숙부 이승경을 잃었으나 황상, 한방신, 안우경, 이순, 최영, 변안열, 이성계, 임견미 등과 함께 '경성수복공신' 중 1등 공신이 되었고, 명단 순위는 무려 이성계보다도 한참 위일 정도였다. 이 과정 중에 고려에서는 김용(金鏞)이 주도한 흥왕사의 변(1363)이 일어나 공민왕이 암살당할 뻔 하기도 했으며 공민왕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잠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충신 이승경의 조카였으며,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참여하여 공을 세우던 이인임은 젊어서는 분명 신임받을 수밖에 없는 신하였다.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 이인임보다 일찍이 더 돋보였던 사람은 실은 형인 이인복(李仁復)이었다. 이인복은 동생 이인임이 총명하나 부덕함을 보고 나라와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했었다고 한다. 이인복은 백이정에게 배워 주자학에 밝았으며 음서로 등용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문과 급제, 원나라 제과 급제 등 문신으로서는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는 번듯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인복은 공민왕을 보좌해 근거리에서 반원(反元) · 자주(自主) 정책 및 왕권 강화 정책을 이끌었을 정도로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당연히 벼슬로도 승승장구했으며 조일신의 난을 진압한 뒤에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 성산군에까지 봉해지고 공민왕 대에도 간관을 거쳐 찬성사 겸 공신에 책록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이색과 더불어 공민왕의 집무실에 출입할 때 공민왕은 매번 그 둘을 자신의 신하들이 아니라 귀한 손님들을 맞듯이 극진히 모셔 먼저 자신의 집무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후 귀한 향을 피우고 난 후 그 둘을 들어오게 해 그 둘과 함께 정사를 돌볼 정도로 공민왕의 지극한 공경을 받을 정도였다. 이렇게 공민왕의 극진한 총애와 공경을 받은 그는 이력부터 사상까지 동생인 이인임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보가 비교되었다. 공민왕의 극진한 총애와는 별개로, 이인복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도록 간언하다가 일시 파직되는 등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의 진정한 개혁보수였다. 결국 신돈의 개혁에 찬동하는 이인임, 이인민, 이인립 등 동생들과는 갈등하게 된다.

2.3. 군주의 최측근

이인임은 공민왕 5년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공민왕 12년 덕흥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공민왕이 신돈을 가까이했을 때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신돈의 개혁정책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이춘부, 이인임 등을 정치 일선에 내세워 토지개혁, 노비개혁을 혁신할 때 이인임은 최일선에서 소송과 전제개혁을 담당했다. 당시 고려의 최대 폐단은 토지 소유권의 불안정, 과다한 지세, 양민의 강제 노비화였다. 이때만 해도 이인임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를 풀어주는 일에 나서고 있었으니 훗날 우왕 시대에 온 고려의 땅을 긁어모은 행보와는 사뭇 대조되는 일이다. 이때 이인임이 도왔던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고, 당연히 권문세족의 장남이자 명신인 이인복은 동생과 크게 반목하게 되었다. 이인복이 이인임을 두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한 것은 사실 이인임이 젊은 마인드로 개혁정치에 참여했을 무렵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곁에서 북원과의 단교, 행주 기씨 일파 숙청, 요동 정벌 등을 추진했으며, 신돈과 함께 이색에게 톡톡히 혜택을 주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신진사대부 육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당 시기 책략의 기조는 모두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이어져 있었다.

고려의 군주는 친모가 원나라에서 어떤 입지의 공주이냐에 따라 그 대우가 크게 갈렸는데, 예컨대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의 몸에서 난 충선왕(제26대)은 원나라 내에서도 중요한 황실 인척으로 대우받았고, 대대로 고려 국왕보다도 심왕이 원나라 내에서는 더 정치적인 입지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선왕 충숙왕(제27대)의 3남인 데다가 고려인 출신 제4비인 공원왕후 홍씨의 아들이었다. 당장 동복형인 충혜왕(제28대)의 사례만 보더라도 30세 나이에 끌려가 죽기까지 원나라의 손에 의해 압송, 투옥, 폐위, 복위, 폐위, 귀양, 의문의 죽음까지 온갖 일을 두루 겪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락을 믿고 병신정변 등 위험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갔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 질서를 부수는 데 동참할 개혁적인 성향의 신하들이 필요했다.

공민왕이 군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심지어 개혁정치까지 해나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으며, 이 당시의 결단은 어느 것이든 모두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따라서 이제현, 신돈, 류탁, 이색, 이인임 등으로 이어지는 인재 기용 방식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시험의 일환이자 일종의 도박이었다. 공민왕은 유학자, 승려 등 개혁성향의 인물들에게 번갈아 칼자루를 쥐어주면서 시험하기를 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 출신임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이인임도 공민왕의 선택을 받았다.

또한 이인임은 공민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반대했던 류탁의 처벌을 둘러싸고 군주와 신하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이색을 국문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옥에 갇힌 사대부들의 유종 이색을 국문하는 대신 이색의 진심을 군주에게 잘 전달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색과는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그는 신돈이 일본 사신을 소홀하게 대접하자 개인 비용으로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고 예리한 수완 또한 갖춘 자였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성계, 임견미 등과 잠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며, 결국 좌시중을 거쳐 수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공민왕 생전 그는 공민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려하는 순간에는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 동녕부를 토벌했고, 신돈의 개혁정치 시절에는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는데 앞장서는 등 공민왕의 위험한 결단에도 늘 목숨을 내놓고 함께 했는데, 심지어 영전 건축 등 공민왕의 독선적이고 다소 그릇된 결단에도 반대하기보다는 찬성했다. 이 행보는 나라의 충신보다는 한 사람의 심복다운 것이었고, 국가의 신하라기보다는 단지 왕의 사람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으므로 당연히 공민왕이 없어진 후, 이인임의 행보는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2.4. 공민왕의 죽음과 흑화

결국 공민왕 시해 이후 이인임은 권신으로 변모한다. 공민왕으로부터 어린 우왕을 부탁받았음을 내세우며, 공민왕 사후 시해사건을 밝혀내고 공원왕후 홍씨와 경복흥(慶復興)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 과정이 석연찮다는 견해도 있다. 이인임이 홍륜(洪倫)과 같은 명문세가 출신 자제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이다. 익비 한씨가 홍륜이 아니라 정말 공민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신돈과 연관된 모니노와 후견인인 이인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으므로,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철저히 야사로서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당시 고려 조정엔 쟁쟁한 명사가 많았고, 익비 한씨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즉위할 당시 우왕은 10세였기 때문에 공원왕후 홍씨가 섭정을 맡았지만 공원왕후는 공민왕의 유지라는 강력한 명분을 가진 이인임을 물리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공원왕후가 1380년에 사망한 후로는 우왕이 1386년에 이인임이 사직하기 전까지 거의 이인임에게 정권을 맡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우왕은 거의 10년 가까이 사실상 이인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한 명의 신하가 10년 이상 섭정 행위로 국무를 관장하고, 심지어 왕의 양부로 대접되었다는 것은 한국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이다.

이인임이 이런 전략을 사용한 것은, 공민왕 즉위시의 전례 때문이었다. 강릉대군이 공민왕으로 즉위하던 당시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이제현(李齊賢)의 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60대였던 성리학자 이제현을 섭정승으로 두려는 뜻을 보였다. 이제현을 권단정동성사로 두며 섭정으로 내세운 것은 지위가 약한 상태에서 공민왕이 자연스럽게 국정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제현은 당시 도첨의정승으로 오르며 국정을 총괄하였고, 후엔 김해후로 봉해진 바 있으며, 앞서 언급한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다. 다만 이제현은 압도적인 지위까지 오르지만 공민왕의 뜻으로 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인임은 공민왕 때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우왕의 즉위기에 비슷한 행보로 섭정을 시작하였으며,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으로 봉해지기까지 도당을 장악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이제현의 사례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절대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종국엔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왕 시기에 이인임은 명, 원과의 외교문제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인임이 우왕의 즉위를 북원의 중서성에 보고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북원과의 외교가 꼬이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일부 세력이 북원에 가서 고려 국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이다. 직후 북원은 제2대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손자인 제3대 심왕 왕토크토아부카(王脫脫不花)를 고려 국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선포해 왔다. 심왕이 어떤 자리인가, 대대로 고려 본국을 괴롭히며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활용되어 온 것이 바로 그 심왕이었다. 다만 북원은 만약 공민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꼭 왕토크토아부카를 고려 국왕으로 책봉할 필요는 없다고 양보책을 내놓았다. 아무리 북원과 단교하고 친명을 시작했다곤 하나, 이로 인해 북원이 고려의 왕을 둘로 만드는 상황이 온다면 고려 왕의 지위는 크게 위협받을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원나라가 쇠퇴기를 맞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건재했으며, 이제 막 등극한 10세의 우왕을 데리고 죽기로 맞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친명의 효과를 보고 있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이때의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매년 말 100필, 금 100근, 은 10,000냥, 세포 10,000필 등을 요구하며 강짜를 부릴 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결국 이인임은 변절의 신호를 보낸다. 도당의 의견이 북원에 우왕의 즉위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수렴되고 만 것이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우왕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백관의 서명을 받아 우왕의 즉위를 북원에도 알리겠다는 이인임, 경복흥, 최영 등 보수파와 군부의 의견은 정도전 등 친명파들의 극력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친명파들은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조차 반대하였고, 곧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나섰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박상용, 권근,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은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때 신진사대부는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이인임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인임과 정면충돌한 정몽주의 정치적 행동은 철저한 좌절로 끝나고 만다. 박상충 등이 옥고를 겪은 뒤 귀양 도중 장독이 올라 죽고 그외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21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특히 이때 최영은 전록생과 박상충을 참혹하게 곤장치며 문초하였다. 당시 이인임이 말하기를

"이 자들을 죽일 것은 없다"

라고 했으며, 이어 그들을 귀양보냈던 바 모두 도중에서 죽었다.

이후 이인임은 반대파를 계속해서 숙청해나갔다. 전천길의 고발을 이유로 흥왕사의 변때 출세한 무장 양백연과 그 당여들을 숙청했고, 우왕이 15세 전후로 믿고 아끼던 유모 장씨를 중심으로 하여 측근세력을 육성하고, 지윤을 후원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 또한 숙청했다. 이인임은 우왕의 유모 장씨, 장씨와 통정하던 지윤 등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채고, 최영을 비롯 경복흥과 조정 중신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좌절시켰다. 지윤과 그 일족은 물론 유모 장씨까지 모조리 처형되었고, 이후 우왕은 정서적으로 의존할 곳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우왕도 공원왕후 홍씨의 말을 듣고 경연을 여는 등 친정할 때 바른 치세를 하려고 노력할 기미를 보였으나, 이후로는 완전히 포기해버려서 공원왕후의 사망 이후에는 오직 이인임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우왕은 이인임의 고종사촌 이림의 딸과 혼인한 뒤 그녀(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창왕을 낳았고, 종종 이인임의 사저에 들러 연회를 즐겼으며 이인임을 아버지, 이인임의 처를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했다. 결국 우왕은 신하인 이인임을 양아버지처럼 여겨 사실상 통치를 맡긴 걸 넘어 사적인 부분으로도 의지하는 등 왕으로서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게 된다.

2.5. 권력의 정점에 서다

권력을 쥔 이인임은 최영을 비롯한 군부를 능란하게 조종하고, 왕실 인사들과 경복흥 등의 외척들을 견제, 약화시켜면서 독재적인 정치를 펼쳤다. 이인임 집권 기간 동안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인 지윤의 딸과 장남의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후 이인임은 견제할 사람이 없는 권신의 삶을 유지하였고, 측근들의 위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하인 임견미 등은 전국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봉건영주 수준의 토지와 노비를 보유했다. 이로 인해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임견미는 짐승에 비견될 정도로 잔혹하고 악랄했으며, 이인임은 직접 '그는 질투가 심하고 음흉한 성품이다' 하면서도 끝까지 말재주를 아껴 가까운 심복으로 두었다.

또한 이인임은 명나라에 불안감을 느끼고, 북원과 이중으로 통교하려 했다. 이로 인해 내부에서 친명사대를 외치는 신진사대부들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유배보내고, 염흥방은 자기 파로 회유하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고는 비었으나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왜구 침탈에도 군대는 제대로 통솔되지 않은 채 원나라의 제도와 재정 부족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사병화가 지속, 심화되고 있었다. 왜구는 최영과 이성계 등 장수들의 활약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나라는 이미 병들어 있었다.

2.6. 권신의 말년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그의 빈 자리는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대신 자리하였다. 이들 또한 이인임 못지않은, 혹은 그를 능가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 뿐 아니라 심지어 관료들의 토지까지 강탈하고 다녔는데, 이때 땅 주인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두들겨 팼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른바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던 와중인 1388년 1월,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래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주던 최영이 마침내 폭발하여 이성계와 결탁, 이인임의 일파들을 일거에 숙청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진피화라고 부르는데, 이인임은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최영의 역습에 대경실색한 이인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영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최영은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최영의 서릿발 같은 처벌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일족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던 와중에도 이인임은 증조부 이장경 대까지 대대로 살던 경산부로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다. 이미 사직한 후였던 이인임에게 경산부로 내려가는 일은 크게 형벌이 될 만한 처분은 아니었다. 전근대에 이렇게 강력한 권신은 자기 고향에도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향으로 유배보내는 건 그냥 고향에서의 편안한 가택연금 정도를 뜻했다. 이때 최영이 사사로운 정에 못이겨 이인임을 살려준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당시 최영이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

라고 건의해 결국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아서 별다른 처벌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위화도 회군(1388. 5) 직후. 조민수가 갓 즉위한 창왕에게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도록 건의했으나 그때 이인임은 6월에 이미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국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이인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이 죽이지 못하니 하늘이 대신해서 죽였다"

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창왕은 이인임의 부고를 듣고

"평생 영예속에 살았으니 그대는 유감이 없겠지만 난 이제 누굴 의지하면 좋은가?"

라는 유약하고 한심한 내용으로 점철된 애도의 교지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교지를 보고 비웃었다.

이인임은 살아 생전 최영을 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땐 사실상 동축이며 여러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영과 이인임은 정치면에서는 제법 의견이 맞았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는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독자적으로 최영을 죽이고자 했었는데 이인임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최영을 미리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결국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셈이다. 이는 귀족사회였던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고려해야 한다. 고려는 소위 문벌귀족시대부터 귀족과 왕의 업적이 구분되기 어렵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귀족의 권력이 강했다. 그 근간은 건국자인 왕건부터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서 왕위에 오른 권력자였으며 이후에도 거란, 여진, 몽골과 대규모 전쟁을 겪으며 왕이 귀족들을 견제, 처리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손을 빌려야하는 상황인 탓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초기에는 호족연립정권으로서 각지의 호족은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렸을 정도로 파워가 강했으나, 광종의 숙청 등을 거친 뒤 중기에 들어서는 유력한 호족은 모두 중앙귀족으로서 관료제에 포섭되고, 비록 실질적인 왕권 자체는 모자란 측면이 있어도 해동천자로서의 권위 자체는 존중되면서 적어도 정국이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며, 사병제 또한 혁파되어 정규군을 중심으로 정리가 완료된다. 하지만 여몽전쟁으로 정규군이 그대로 붕괴되면서 각 지역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알아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각지에선 유력자를 중심으로 사병이 다시 발생하게 되며, 원나라가 공식적으로 간섭하게 된 뒤로는 아예 직접적으로 고려 정부가 제도를 정비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결국 전근대에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했던 당나라의 행정제도인 3성6부제를 바탕으로 현지화에 성공했던 고려의 관료제는 그냥 붕괴해버린다. 이 시기의 기사를 보면 관료제도 이해가 힘들 정도로 용어가 혼란스럽고, 공식적인 시스템이 아닌 국왕과의 사적인 커넥션(ex: 신돈) 혹은 사적인 기반으로 힘을 얻은 권신을 중심으로 정국이 돌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며, 군사부문 또한 중앙군은 실종되고 그저 유력한 소수의 장수들이 각자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혹은 아예 자신들의 사병을 그대로 끌고와서 그냥 정규군으로 스킨만 갈아 끼운(...) 부대를 거느리고 군공을 올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즉 이 시기의 고려군은 그냥 극초기 후삼국시대의 호족들의 사병연합체나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퇴화했는데, 아무리 원나라와의 커넥션도 있었던 권문세가가 강성했다고 하지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사병을 다시 키운 지방의 호족은 소위 반란을 일으킬 영향력이나 세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해 있었고, 이인임이 아무리 중앙정부의 권신이었다고 해도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제도 자체가 크게 문란해져 있던 상황에서 그들을 장악할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군부에서 엄청난 군공과 능력을 보여주며 고려에서 군사로 대항할 이가 없었던 최영의 손을 잡아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실제로 최영이 이인임을 버리고 또 다른 군벌인 이성계와 연합하자 이인임은 그들을 억제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다. 사실 이성계야말로 위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호족이었는데, 그의 영지였던 동북면은 중앙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거기서 키운 사병은 정부의 말을 무시하고 이성계에게만 충성하였기에 쿠데타까지도 성공한다.

말년의 이인임은 유배갔던 성주군에서 조부 이조년처럼 시조를 쓰며 여생을 보냈는데 주로 노년의 소박한 삶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형인 이인복이《고금록》, 《금경록》, 《초은집》등을 남긴 것과 달리 이인임의 시는 대개 소실되었으며 <노년우음>(老年寓吟)이라는 한 편만이 남았다.

[老年寓吟(노년우음) / 노년에 우거하면서 읊은 시]

宦海浮沈二十年(환해부침이십년) / 벼슬길 부침 20년

長江嗚咽不平嗚(장강오인불평오) / 긴 강의 불평을 안고 울먹이네.

殘花杜宇聲中落(잔화두우성중낙) / 쇠잔한 꽃은 두견새 울음에 떨어지고

芳草王孫巨後生(방초왕손거후생) / 왕손이 간 뒤의 방초는 살아있더라.

金馬玉堂非我願(금마옥당비아원) / 금마와 옥당은 나의 원하는 것 아니고

靑山綠水有誰爭(청산녹수유수쟁) / 청산과 푸른 물은 누가 다투고 있나

倘罷天荒作國禎(당파천황작국정) / 아마 하늘이 받침대를 파하게 했을 것이니라.

또한 이인임은 말년, 최영에 의해 경산부로 유배된 후까지 공민왕으로부터 선물받은 시를 보존했는데 다음과 같다.

[贈 勝巖公(증 승암공)]

瑞明行白玉(서명행백옥) / 단정하고 밝음이 백옥같으며

純粹似精金(순수사정금) / 순수함이 마치 잘 다듬어 놓은 금과 같더라

太和陽春樹(태화양춘수) / 크게 화한 기운은 봄날의 뻗어가는 나무와 같으니

猗古復見今(의고복견금) /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제 보게 되도다.

내용은 이인임의 단정한 성품을 칭찬하는 것으로, 젊은 날의 충정심은 모두 잊고 타락한 채 간악한 권신으로 살아가다 잊혀진 이인임의 말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일생 동안 온갖 영화를 누리던 이인임의 최후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초라했다.

죽기 전 말년인 창왕 시절, 윤소종과 권근이 재탄핵했으나 미지근한 결과밖에 내지 못했고, 공양왕 즉위 이후 오사충 등이 다시금 이인임을 부관참시하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며 가산을 적몰할 것 등을 청했으나 묘는 여전히 터 좋은 자리에 멀쩡히 남았고, 왕은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것 하나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연못도 조선 태조 3년 이인임의 직첩을 되돌려 줄 때 메워졌다.

2.7. 종계변무 사건

위화도 회군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성계와는 정적 관계이던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에 건너가 이성계를 무고했다.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이며, 공양왕과 이성계가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를 반대하던 이색, 조민수, 이림, 변안열 등 고려의 재상 19인이 살해 또는 유배될 것이라면서 이를 토벌해 주기를 요청했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오히려 이성계 일파가 조선 개국에 반대할 만한 사람을 모조리 역모죄로 몰아 가두고 죽이는 것에 이용되었다. 이를 윤이·이초의 옥사라고 한다.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말을 해버린 것이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태조 3년이 되어서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했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변명의 글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했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태종 때 다시 한 번 주청문을 보내는데 또 한 번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력회전》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는 근 200년 가까이 끊임없이 이를 고쳐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고 명나라는 안 된다고 거절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 이를 종계변무 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이 완전히 해결을 보게 된 건 제14대 선조 대인 158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도 《명 태조실록》은 태조 홍무제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 함부로 못 고치니 끝내는 《대명회전》만 고친 것이다. 200년간이나 골머리를 썩여 온 문제라 선조는 개정판을 명나라에서 가져오라고 명했고 마침내 1588년 개정된 《대명회전》이 조선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사신단은 전원 공신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 때 《대청회전》을 편찬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고 이후에도 다른 기록이 발견되어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자그마치 제25대 철종 때 일이었다.

3. 기타

친척으로 유명한 문장가였던 도은 이숭인이 있었으며, 친조카로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인 흥안군 이제, 역시 친조카로 조선 개국 후 성산군에 봉해지고 대제학, 영의정에 이른 이직, 조카사위로는 하륜의 경우처럼 친척들을 통해 신진사대부 집안이나 이성계 집안과도 통혼하는 등 신흥 세력과 연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권문세족-신진사대부 이분법은 학계에서는 완전히 파훼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성주 이씨는 원래 지방의 대형 호족으로 중앙 정계에는 고려 말 이장경 대에 떠오른 집안이었으나 고려가 길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명성은 이어가지 못한다. 후손들이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인임의 후손은 조선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주 이씨는 다시 지방의 토착 세력으로 돌아갔으며 한참 동안 조선에서는 일부러 벼슬을 하지 않거나 조선에서 벼슬을 할 경우 성산 이씨로 성씨를 갈아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인임의 조카인 이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하여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돕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형제 간 가족간에도 각각 의견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할아버지대에서 갈라진 친척으로는 요동총관인 이성량과 그의 아들 이여송이 있다.

이인임은 이성계를 무척 경계했는데 평소에 최영에게도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사람이다"라며 그는 틀려먹었다고 끊임없이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성계를 아꼈던 최영은 이인임이 자신과 이성계를 이간질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한 귀로 흘러버렸지만 뒷날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때 이르러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노회한 정객답게 사람보는 눈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인임은 일반적인 권문세족들과는 달리 문•무 모두에 식견이 있었고 정치적 능력도 우수한 인물이었다. 공민왕 시해 직후의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 말의 혼란기에 장기간 실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나라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무능한 데다 인격에 결함까지 있었던 우왕과 결합하여 고려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인임이 저지른 부정부패로 인한 결과가 고려를 쇠락시켰고, 그 때문에 역성혁명이 일어나 조선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사극에서 나오고, 실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인임의 집권 당시 생긴 피해 손해가 어마어마해서 이인임이 만든 부패와 손실만 아니었으면 요동 정벌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고려말, 백성과 나라를 최악의 도탄에 빠드린 인물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의 우왕 시절 악행들이 사실과 다르게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들도 의외로 많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이인임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논문인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 을 발표한 저명한 원로 역사학자인 고혜령씨는 해당 논문에서 조선왕조는 우왕을 거짓 임금으로 조작했기 때문에 우왕을 옹립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이인임도 사실과 다르게 부정적으로 고려사 등의 사료들에서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고, 또 '종계변무' 사건으로 이인임에게 피해를 입게 되자 화풀이 대상으로도 사실과 다르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흔히 세간에서 인식되는 고려 우왕기에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최영과의 연합으로 정권을 유지해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해 1388년 무진피화때 몰락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 실제 이인임과 같은 시대, 같은 조정에서 활동해 그를 늘 보아왔던 이색은 자신의 문집인 '목은집'에서 이인임을 명재상으로 칭송하는 시들을 여러 편 남겼고 또 조선시대에 조선시대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실학자인 순암 안정복은 그의 문집인 순암집에서 그의 스승이자 정약용과 더불어 가장 저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인임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안정복은 조선시대를 제외한 고조선~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체계화해서 쓴 역사 저서인 동사강목을 쓴 사람으로 동사강목을 쓰면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고려시대 정사(正史)들을 읽고 참조하지 않았을리가 없는데도 스승인 이익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 것을 보면, 그 역시 이인임이 고려말, 백성과 나라를 최악의 도탄에 빠뜨린 간신이라는 조선왕조의 설명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최영은 이인임이 잘못도 있지만 공이 크다고 여러 번 말했으며 이색도 그를 칭송한 것을 볼 때 조선세력이 쓴 고려사의 일방적인 기록을 다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이인임이 정권을 끝까지 잡고 휘둘렀으면 고려 왕권은 약화될 지언정 이성계가 찬탈까지 시도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인임이 제거되고 난 뒤 최영마저 제거되자 고려의 멸망을 막을 친위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이인임은 게다가 조선 태조 시절에 복권이 된다. 그가 극악무도한 간신이기만 하면 그를 몰락시킨 이성계가 복권시켜 줄 리가 없다.

경상북도 성주군의 안산서원에 이인임의 초상화가 있다. 안산서원에는 성주 이씨가 배출한 명신들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어 이 중 10명의 초상화는 '성주이씨영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22명의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중 일부 초상화들을 분실해버렸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초상화는 총 10명의 초상화이다. 물론 현대에 그려진 이인임의 이 초상화는 문화재에서 제외된 그림이지만 분실된 초상화 중에 이인임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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