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면천 박씨의 시조. 고려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가. 드라마 태조 왕건으로 형성된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통일 전쟁 이후의 행적이 더 중요한 인물
2. 생애
본래 혜성군(槥城郡)의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18세의 나이에 태봉의 국왕 궁예의 호위관으로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918년에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태봉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면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공을 여러 차례 세우면서 승진을 거듭했고 무엇보다 그 출중한 전공을 바탕으로 왕건의 신임을 받았다. 한편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던 전우들인 4기장, 유금필, 김락 등이 모두 전사나 자연사 등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자 자연스럽게 그의 군에서의 위치는 독보적으로 상승했다.
왕건이 어찌나 박술희를 신뢰했는지 장남인 왕무를 정윤(正胤)으로 삼았을 때 그의 출신과 지지 배경이 한미한 것을 염려해 박술희에게 태자의 후견인 자리를 맡겼을 정도였다. 왕건이 붕어했을 때는 '군국대사'(軍國大事)라는 주요 직책을 맡기고 직접 《훈요 10조》를 남겼을 정도였으니 박술희를 향한 왕건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왕건 나름의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나주 출신으로 외가의 뒷배경이 약했던 정윤 왕무를 보호해 주려는 의도가 가장 컸고,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박술희 같은 신흥 세력이 잘 헤아려 줄 것이라 생각해 박술희를 정윤 왕무의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다. 박술희는 호족의 자제라 기득권 출신이긴 했으나 가문의 힘은 대호족들에 비하면 미약했고 때문에 출세 과정에서 가문의 힘을 크게 빌리지 않고 밑에서부터 잔다리를 밟아가면서 본인의 실력을 배경으로 출세한 인물이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서 당시 강력하던 황해도와 충청도 호족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일단 이들 모두가 사병의 힘만으로는 중앙군에게 상대가 안 되었으니 그럴 듯한 생각이긴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왕건의 패착이 되고 말았는데 기반이 약한 태자를 보호하려면 오히려 박술희보다 기반이 안정적이고 강한 인물을 붙여줬어야 했다. 박술희 자신도 군권 외에는 정치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막강한 중앙군은 혜종의 "보호자"로만 기능할 수 있었지 혜종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하여, 왕건의 선택은 그의 사후 복잡한 왕위 계승 싸움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물론, 왕건은 사심관 제도, 역분전제, 기인제도, 호족들과의 혼인 제도, 통일 이후 지방의 주, 부, 군, 현 등의 지방 제도의 정비 등의 중앙집권화 정책들을 추진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일정한 성과들을 내었다. 창업군주이자 초대 임금인 왕건 개인의 카리스마와 더불어 이런 정책들의 실시로 인해 왕건 재위 기간 도중에는 호족들의 발호가 그렇게 문제되진 않았지만, 왕건의 중앙집권화 정책들로는 신라말과 고려초의 호족들의 발호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건의 붕어 이후, 혜종~정종 때까지 왕족들과 호족들의 대대적인 발호로 인해 고려는 매우 심각한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되었다.
박술희는 왕건의 사후에도 왕건의 유지를 받들어 왕건의 후계자인 혜종을 붕어하는 순간까지 보필했지만, 혜종의 다른 측근인 왕규측과 반목이 심했고, 끝내 왕규의 무리에게 모함을 받아 갑곶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결국 유배지에서 왕규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하지만 945년 비슷한 시기에 왕규도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고 박술희 사후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기 때문에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권을 노리던 정종이 박술희를 유배보낸 뒤 처형을 빌미로 그를 암살해버리고는 책임을 왕규에게 떠넘긴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사후에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즉 반역자가 되어버린 혹은 몰려버린 왕규하고는 달리 박술희는 끝까지 혜종의 충신으로 남았고 명예는 박탈되지 않았다.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코스트코 뒤편 무지랭이 약수터 올라가는 길목에 무덤이 있는데 가묘인 관계로 시 문화재나 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아 정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한다. 최근에는 길목을 닦고 어지럽게 흩어진 고사목을 치운 듯하다.
3. 여담
3.1. 식성
述熙性勇敢, 嗜啗肉, 雖蟾蜍螻蟻, 皆食之.
박술희는 성질이 용감하고 과감하여 육식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비록 두꺼비, 땅강아지, 개미일지라도 마다치 않고 먹었다.
《고려사》에 서술된 박술희의 식성
역사 서적에도 기록될 정도로 특이한 박술희의 기이한 식성은 영국의 외과의사이자 박물학자인 프랭크 버클랜드 , 영국의 탐험가 겸 작가인 베어 그릴스 에 버금갈 정도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박술희는 육식을 좋아하여 고기를 먹는 것을 즐겼는데 소, 돼지, 먹장어, 뱀 , 개구리, 두꺼비, 개미 도 즐겨먹은 사실이 전해진다. 동료는 박술희가 괴상한 요리들을 먹을 때마다 늘 기겁하며 놀라워하였다. 하지만 박술희는 동료가 뭐라고 하든 이렇게 맛있는 것을 왜 마다하느냐며 그저 맛있게 먹을 뿐이었는데 동료에게 권한 적도 많지만 다들 거절하고는 먹지 않았다. 박술희의 식성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상류층이 아닌 이상 아사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집어먹어야 했던 후삼국 시대부터 통일 후 고려 시대 기준으로도 유별난 식성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서민들은 굶주림에 익숙한 데다, 아사하는 일들도 많았던 시대에 뱀이나 개미를 먹는 게 유별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면 아사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상기했듯 박술희는 호족 출신인 데다 태봉-고려 정권을 거치면서 공을 세운 인물인 만큼 입에 풀칠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을 텐데 일부러 즐겨먹었다는 점이다.《태조 왕건》에서도 뱀을 먹는 모습과 함께 나레이션으로 설명해 줬지만 법적 문제도 있고 담당 배우의 개인적인 거부감도 고려해 뱀을 사냥하여 먹을 수는 없으므로 배우 김학철은 뱀을 대신하여 맛과 형태가 비슷한 아나고를 먹었다. 제 24회 에서는 박술희는 고기라고 생긴 것은 무엇이든 먹는다 포식 한번 하게 생겼다며 닭고기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장면이 등장하여 박술희의 식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반대로 최재성은 2002년작 KBS 드라마《제국의 아침》에서 사냥한 노루의 피를 마시는 장면을 그대로 연기하는데 노루를 사냥하는 것은 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