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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류정현(柳廷顯)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18 목록 댓글 0

1. 개요

류정현(柳廷顯) 또는 유정현은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으로 문화 류씨 정숙공파의 파조이다. 문화 류씨는 여말선초에 상당한 영달을 누린 가문으로,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75성관의 거가대족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가 정도전의 일파라는 이유로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한 류만수는 그의 사촌이고, 태종 때 우의정에 오른 류량(柳亮) 역시 류정현의 일족이다.

2. 생애

고려 원 간섭기 중찬(中贊)을 지낸 류경의 자손이며, 아버지는 류진(柳鎭)이다. 고려 말 음보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조선이 건국되고 정몽주 잔당을 숙청하는 과정에 관직을 회수당하고 태조가 즉위하자마자 귀양을 갔다가 자식 둘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1393년(태조 2) 관직을 돌려받았다. 1394년(태조 3) 상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가 각 도의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參贊), 찬성(贊成) 등을 거쳐 1416년 좌의정이 되었고 같은 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새로운 세자를 세우려 할 때 충녕대군을 세우라고 주장하라는 태종의 언질을 받고 박은과 함께 '어진 이'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상왕이었던 태종이 추진한 대마도 정벌 당시 삼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이종무를 휘하에 두고 대마도 정벌을 총지휘했다.

태종이 심온을 숙청할 당시 옥사를 책임지고 박은과 함께 심온을 주도적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심온의 가족까지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관노로 만든다. 하지만 태종 사후 세종에 의해 재상급 관직을 거치면서 궤장까지 하사받았다. 세종의 원수와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임을 맡긴 이유는 그가 건국 초 조선에서 제일가는 재정관리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시서(京市署) 도제조에 임명되어 하루종일 시전에 죽치고 앉아 물물거래를 단속하며 백성이 자살할 정도로 각박하게 법을 집행했으며[8],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해 방만한 예산 운영을 개선하느라 필수 비품마저 구하기 힘들 정도로 예산을 줄였다. 이외에 개인의 토지와 노비의 소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시하고 관리의 녹봉도 화폐로 주자고 주장했으며 강물이 어는 겨울에는 조운을 육로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며 공신전이나 다름없는 별사전(別賜田)의 상속 금지를 제안해 관철하는 등 혁신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기반 공사가 많은 국초에 재정이 많이 필요한 토목 공사를 주도하며 비용을 상당히 줄였다. 70세가 넘자 꾸준히 치사(致仕)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72세에 은퇴한지 4일만에 죽었다.

3. 기타

사직을 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때문에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게 세종의 복수라는 드립을 치는 역덕들도 있으나, 재상이 70세가 넘으면 주기적으로 사직을 청하는 것은 조선시대 정치판의 관례였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세종이 류정현을 끝까지 중용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능력있는 실무형 관료인데다가, 이원계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실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태종, 세종 모두에게 약점이 잡혀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절대적으로 국왕 편에서 강경하게 일을 했고, 이 때문에 다른 신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국왕 입장에서는 매우 유용한 존재다.

사기식 분류법을 따르면 아주 전형적인 혹리(酷吏)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결같았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의 사노가 그에게 돈을 빌린 일이 있었는데 납기일을 어기자 그 집으로 쳐들어가 가마솥을 압류해 왔으며,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어차피 콩을 수백 석씩 먹기만 하는 동물이니 섬에 귀양보낼 것을 주장했고, 북방의 군인들은 어차피 수조권을 받으니 중앙에서 주는 급료를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성 외관직의 하급 관료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국가에서 지급하던 점심을 없애 세종을 경악하게 하기도 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조차 콩 한 톨 주지 않는 인색함을 보여 당시 백성들에게 "당장 굶어 죽어도 영상의 재물을 빌리지 않겠다"는 원성을 들었다. 그래서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그를 한나라 무제 대의 상인 출신 재정관료로 생활 필수품인 소금과 철의 전매를 주장해 재정을 늘렸지만 백성을 수탈했다는 비판을 들은 상홍양(桑弘羊)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다.

생전에는 본인이 그토록 미신이라 디스해서 궐내에서 불경조차 못 외게 해 놓고서는 죽을 때가 되자 지옥가는 것이 두려워졌는지, 수륙재를 5천 섬이나 되는 거액의 재산을 들여 시행하라고 아들들에게 간청해서 세종 본인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나 재상으로서 이렇게 인심 잃을 짓을 많이 했음에도, 깐깐한 법치주의자라 불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뇌물 시비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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