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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류희분(柳希奮)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4|조회수14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외척

청소북의 영수, 광해군 때의 권신, 광해군의 처남, 문양부원군 류자신의 적3남, 문성군부인 류씨의 오빠이다. 작위는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으로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과 함께 3창(三昌)으로 불렸다.

2. 생애

1564년(명종 19년), 문양부원군 류자신과 봉원부부인 정씨 사이에서 적3남으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년)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였다.

음서로 등용되어 임진왜란에 정6품 익위사 익찬(翊衛司 翊贊)에 임명되어 세자를 호위했다. 종6품 현감(縣監)으로 재직할 때 1597년(선조 30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정6품 예조 좌랑(禮曹 佐郞)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년)에 수찬(修撰)으로 옮겨 류성룡을 탄핵하다가 되려 파직당하였다.

1601년(선조 34년)에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고 이듬해 응교(應敎) 겸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로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된 역대 실록(歷代 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 사서(司書), 직강(直講)을 거쳐 1603년(선조 36년)에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제수되고 이듬해 응교(應敎),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등을 역임했다. 1607년(선조 40년)에 사성(司成)을 거쳐 이듬해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1608년, 처남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종2품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류희분이 광해군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에는 류희분이 속한 소북파가 조정의 실세였다. 이이첨을 견제하기 위해 광해군에게 청해 이이첨을 의주부윤으로 발령나게 하였고 이이첨이 허균을 심문도 안 하고 죽이자 비판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주위에 “허균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데 내가 평생 역적을 잡은 몸이 아니더냐?”라고 항변하니 다시 "이이첨이 평생동안 역적을 잡아 나라에 충성했다고 자랑하던데 그런 사람이 역적 처리를 그따위로 할 수 있습니까?"라며 이이첨을 또 비판하였다.

류영경을 비롯한 탁소북 일파를 탄핵·숙청한 후 박승종과 함께 청소북에 속하여 외척으로서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두루 역임하고 익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

1617년(광해군 9년)에 세자시강원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거쳐 정2품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진되었는데 당시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이첨과 계속 대립하긴 했지만, 후금에 대한 외교노선은 이이첨과 똑같아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반대하며 강경론을 주장하는 등 후금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신하들과 인조가 광해군의 측근들을 처벌하는 과정해서 폐모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여러 조정 관료들이 류희분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으로 동생 류희발과 함께 참형되었다. 여기에는 또다른 일화가 있는데, 인조가 능양군시절 동생 능창군을 살리고자 백방으로 노력할때에 류희분의 애첩이 한도끝도없이 뇌물을 요구하므로 모든 가산을 팔아서 뇌물을 줬으나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다 받아처먹기만 하고 능창군은 죽었으니, 인조에게 류희분은 반드시 쳐죽여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후 숙종 3년(1677년)에 손자 류시선이 류희분의 복권을 청하였으나 끝내 신원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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