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혹은 쌍리(雙里)
대북의 영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다. 광창부원군이라는 봉호로 불렸으며 당대의 권신 '삼창(三昌)' 중 필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배경
1560년(명종 15) 충청도 충주목 지내면 대사동리(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1리 동리마을)에서 아버지 이우선(李友善)과 어머니 진주 류씨 류유일(柳惟一)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초기 최대 벌열 가문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으로 연산군 당시 김일손을 무오사화에 연루시켰다고 알려진 이극돈의 5대 손자이다. 그러나 이 가문은 연산군 대인 갑자사화로 멸문당했다. 억울하게도 이세좌(이극돈의 조카)가 폐비 윤씨 사사 집행을 봉행하는 역할을 성종에게 강요당했기에 그것이 화근이었다. 연산군이 축출된 뒤 그나마 정상이 참작되고 명종 이후로는 이세좌의 손자인 이준경이 재상을 지내는 등 어느 정도 가문의 위세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이첨이 활동할 당시의 광주 이씨는 그다지 큰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이첨도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이극돈의 후손이란 것 때문에 출세 전까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벼슬 좀 오르려다가도 두고두고 탄핵당해서 파직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가문의 뒷배경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뒤를 봐줄 스승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이첨은 순전히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재상까지 오를 만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온몸을 날려 불타는 창고에서 세조의 어진을 구해낸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학연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뒷배경이 없다는 것은 출세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른바 라인이 없다고 줄고생을 할지언정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연줄 시대였던 조선, 특히 이이첨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누구 누구 제자라는 타이틀이 없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약점으로 지적되는 시대였다. 비슷한 사례가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와 정여립이다. 실제로 이이첨은 승진 때마다 제대로 된 줄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이첨은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대북파의 정인홍과 기자헌을 접촉했고 그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2.2. 임진왜란기
임진왜란 때는 광릉의 능참봉으로서 광릉에 있는 세조능의 위패를 지키고 세조의 어진을 혼자 들고 나온 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임금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이첨의 이런 공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조의 영정은 봉선사로 옮겨졌는데 하필 이때 일본군이 들어와 봉선사를 불태웠다. 광릉 참봉이던 이이첨은 도망가는 승려들을 붙잡아 영정의 위치를 묻고는 홀로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끌어냈다.
이후 영정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90리를 걷는가 하면 2번이나 몰래 일본군 진영 한복판을 통과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의병 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평안북도 의주로 세조의 영정을 무사히 호송했다. 이때 남아난 초상화가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 그리고 이이첨이 찾아온 세조의 것이 전부다. 물론 후대에 태조의 것을 빼고는 모두 불타서 없어지지만 세조의 어진은 초본으로나마 남았으니 오늘날 세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이 사람 덕이라고 하겠다. 다만 이이첨의 공로 자체와는 별도로 선조실록의 경우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 세력이 자화자찬을 한 내용이 적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는 걸러서 받아들이는 게 좋다.
세조 어진 호송으로 조정의 눈에 들어 선조 30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시강원 사서, 지평,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선조 31년에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사간원 헌납, 지평,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선조 32년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외에도 당시 세자로 분조를 이끌며 각지를 위무하던 광해군과 함께 임진왜란 내내 위험한 지역을 누볐다. 그래서 광해군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이이첨은 초심을 잃지 않고 민생을 염려하던 모범적인 관리였다. 전쟁 이후에는 시강원 사서로 일하며 이때에도 젊은 광해군과 이해를 같이 해 더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정유재란에서 선조 사망까지의 간극 시기에 광해군의 가장 중요한 후원인인 정인홍은 경상남도에 머물렀고, 당시 조정 내에서 대북을 이끄는 리더는 이산해와 훗날 폐모론을 둘러싸고 대적하게 되는 기자헌이었다. 하지만 기자헌은 긴 세월 조정에 봉사하고 노구를 이끌어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정인홍만큼의 무게감은 없었다. 기자헌은 정인홍에 비해 역량이라든가 입김이 여실히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의심하고 양위 소동을 벌이기도 할 때 정인홍만큼 직설적인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에서도 기자헌의 약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이이첨한테 밀리게 됐다 .
2.3. 광해군기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은 궁궐 공사 문제에서 광해군과 기자헌에게 죽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광해군과 대북파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대북파 내부에서 영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차츰 차츰 넓혀나갔다.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를 당한 직후엔 국정을 주도했다. 이이첨은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의주부윤, 이조참의, 대사간, 병조참지, 부제학, 대사성 등을 하면서 권력을 점점 확장시켜 나갔다. 여기에는 광해군이 전면에 나서기 꺼리는 태도와 불안한 즉위 기반 때문에 반역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이이첨이 권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반역(무고) 사건 발생 → 서인과 남인의 처벌 반대 의사 표시 → 이이첨과 대북파들이 나가서 상소 → 광해군이 처벌을 반대 → 이이첨의 측근인 한찬남을 비롯한 대북 핵심들까지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이 처벌을 가함 → 이이첨과 한찬남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 처벌 강화.
이러한 이이첨의 공격 패턴이 봉산옥사와 칠서의 옥에서 꾸준히 반복되었기 때문에 이이첨의 도움으로 광해군과 대북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지만, 그만큼 이이첨과 대북파의 악명도 같이 가중되었고 기자헌 류몽인 정창연 같은 비이이첨 일파인 대북내 온건파들이 분당하여 중북으로 떨어져 나갔다. 류영경과 임해군, 영창대군과 인조의 동생 능창군도 광해군과 대북파의 공작으로 죽었고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를 비롯한 서인계와 남인계 정승들도 이렇게 쫓겨났다. 적어도 폐모살제에 대해서는 광해군이 이이첨에게 끌려다녔다는 말도 일리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서의 옥에 연루될까 두려워한 허균을 행동 대장으로 부리고, 그가 불안하게 행동하자 즉각 숙청한 것은 백미이다. 봉산옥사 이후로는 대사헌으로서 권력을 더 강화시켰고, 계축옥사 이후로는 예조판서 겸 대제학에 올라서 실세가 되었다. 한때 신경희의 옥으로 인해서 위기에 처했지만 이내 해주옥사로 위기를 반전시키면서 권력을 더 강화시켜 나갔고 동시에 폐모론 당시에는 판의금부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광해군 9년 이이첨은 류희분 박승종과 함께 장원서에 모여 서로 향을 피우고 시를 지으며 이이첨은 자신의 측근인 정조(鄭造)를 버리고 대북 중북 소북을 균등하게 등용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안건에 있어서는 광해군과 정면 대립하는 일도 많았다. 주로 후금에 대한 외교에서였는데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주창한 반면 이이첨은 "후금 사신 목을 베고 후금과 한판 싸워보자"고 맨날 선동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이이첨은 척화파였다. 광해군이 하도 열받아서 "니가 한번 붓으로 싸워보지 그래?" 라고 하니까 이이첨은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가 맹수 같은 오랑캐들에게 당하는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당당히 항변했다. 이러한 이이첨의 항변에 황당해한 건 광해군 뿐이었고, 소북의 류희분 등 유자들로 이루어진 조정은 오히려 감동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말년이 되자 이이첨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골치깨나 썩었다. 대북 세력 내에서 기자헌 류몽인 정창연등이 폐모론에 대해 반대하자 이이첨은 하극상을 벌이며 기자헌을 유배 보냈고 정창연 류몽인 등도 배척하였다. 이렇듯 이이첨 일파는 같은 대북인 정온 정창연 류몽인 기자헌에게 조차 적대적이었다. 그 결과 대북내 비이이첨 일파는 중북으로 분당하였고 조정 전체에서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이첨의 권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그 위치는 어중간했다. 기자헌을 유배보낸 직후에 이이첨은 대북파의 실질적 영수였으나 그보다 더 경륜 있던 정인홍의 관록을 넘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정인홍을 비롯한 여타 대북파 주도자들과 항상 타협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더 강경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이첨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정세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립 외교를 주장하는 광해군에게 동조하면 자신의 권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다만 정인홍은 워낙 이이첨을 무한신뢰했기에 오히려 이이첨에게 이용당하는 일도 많았는 데다가 광해군 즉위 말년이 되면 비이이첨 일파는 중북으로 나가 떨어졌고 한찬남 윤인 정조 같은 이이첨의 당여들이 대북의 핵심이 되어 대북을 주도했기에 대북은 싹다 이이첨 일파가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광해군의 외교 노선에 강경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폐모 이전 시절에 이이첨에게 보낸 신뢰를 점점 거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이전의 권력자들과 달리 보는 눈이 많은 앞에서 행동대장으로 움직여야 했다. 광해군 재위 후반에 들어가면 이이첨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기자헌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고, 허균까지 팀킬한 이이첨의 권력이 커지자 그 반동으로 당시 왕권이 다소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광해군은 말기에 이이첨을 견제하고 소용 임씨의 숙부 임취정에게 힘을 실어주고 폐모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유배 보내진 이원익 기자헌 남이공을 유배에서 풀어주고 균형 잡힌 인사를 추진하려 했다. 이이첨은 1621년을 기점으로 권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삼사에서도 이이첨의 세력이 물러나면서 이이첨은 유생들과 삼사에게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며 심지어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이첨의 딸이 시아버지인 박승종에게 울며불며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였다. 박승종은 이이첨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사돈지간이기는 했기에 유배를 보내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이첨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며느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이첨을 구하였고 광해군 역시 옛정 때문인지 생각을 바꾸어 이이첨을 옹호하면서 이이첨은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이 이이첨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광해군이 이이첨을 다시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에 대북은 광해군과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이첨은 고립되어가는 자신의 상황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류몽인 홍서봉 김상헌 장유 조위한 임숙영 김세렴 유근 이호민 같은 폐고(廢錮)되었던 자신의 정적들을 등용하기를 주장하는 한편 남인과 조정론을 주장하였다고 이에 남인내에서 한유상 오환 목장흠등이 이이첨에게 호응하였다고 한다.
광해군과 이이첨의 갈등을 틈타 서인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인조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반정 직전에 치명적인 기밀이 소북 출신 정승인 박승종과 박홍구한테 누설됐으나 광해군은 이를 접했음에도 이이첨의 농간이라 보며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역모 진압의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2.4. 최후
평생을 '광해군의 충신'이라 자처했으나 정작 광해군은 반정이 일어나자 안국신의 집에 달아나 그의 집사람인 정담수(鄭柟壽)에게 상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정담수가 돌아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고하자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라고 물을 정도로 그를 의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는 류희분이 광해군에게 "이첨의 세력이 너무도 높으니 그가 꺾임을 받지 않고 변란을 일으킬 계략을 가질듯합니다."라고 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이첨은 반정 당일에 식솔들을 데리고 광주 이보현을 넘다가 반정군에게 체포되었다. 광해군의 진정한 충신은 이이첨과 대북이 아닌 중북과 소북에서 나왔는데 폐모론에 반대하며 이이첨과 대립한 중북 류몽인과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출사를 거부하다가 숙청당했다. 반정군에 붙잡혀온 소북계열인 죽천 이덕형(李德泂)은 처음에는 절을 하기를 거절하다가 반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인조에게 절을 하며 광해군을 살려달라고 청했기에 그 의리를 인정받았다. 그를 독사나 전갈을 보듯 하며 집에서 '대'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집안의 대문 조차 "외문"이라고 불렀던 박승종은 의병을 일으켜서 반정 세력에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경기도를 돌다가 일이 틀렸음을 알고 음독 자결했다.
끌려온 이이첨은 반정 가담자 신경유의 누이가 자신의 아들인 이대엽의 아내, 즉 며느리였으므로 그녀를 보내 석방해 줄 것을 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같이 체포된 류희량에게 인조가 자신을 보면 반드시 무죄석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기괴할 정도로 근자감이 가득했다. 다음날 처형장에 끌려가게 되자 반정 주동자이자 1등 공신인 이귀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대전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아마 이이첨은 이귀와 어느 정도 인연이 있으니 자기를 살려달라고 빌 생각을 했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이귀는 "네가 이전에 모든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했던 것은 오늘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진정 너의 말과 같다고 할 경우 유폐의 화액을 겪으신 것이 과연 누가 한 짓이겠는가."(=이런 날에 변명하려고 그간 직접 하지 않고 쫄따구들 시켜서 행패를 부렸냐? 네놈이 아니었으면 대비께서 유폐는 왜 당했냐)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대답하지 못하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처형 직전에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라고 외쳤다. 어쨌든 청렴하게 살았던 걸 보면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심복이던 이위경이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 될 수 있으며 효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이후 이이첨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이첨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시신도 남지 못하였다.
이이첨의 집안은 인조반정으로 이이첨의 아들들도 함께 참형당해서 망했기 때문에 이이첨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 상술했듯이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이대엽은 그의 부인이 반정공신인 신경진의 누이였기에 신경진이 그를 구명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탄핵을 받았고 처형 사실이 확정되자 그 소식을 듣고 감옥에서 자결했다. 손자인 이영식(李英植)은 거제도에 정배되었다. 또 다른 손자인 이정식(李廷式)은 인조 6년에 공청도(충청도)에서 자수해 마찬가지로 정배에 처해졌다.
서인은 권력을 휘두른 이이첨과 류희분 같은 북인의 거두들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고 북인의 씨가 마르다시피 숙청했다. 서인들이 정권에 참여시켜준 남인들도 서인들에게 공조했다. 이이첨과 류희분 말고도 류몽인은 광해군을 복위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처형당했고 기자헌을 비롯한 다른 북인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세력들은 이괄의 난까지 거치며 모두 목숨을 잃었다.
무자비한 숙청에 북인들은 반발해서 박홍구, 임취정, 류효립 등을 주축으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는 한편,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웠지만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 박승종, 류몽인, 임취정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이공과 김신국 등 소북의 소수만 살아남아 정계에서 구색 수준으로 활동하다가 이후에 남인에게 흡수되면서 조정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 평가
“이이첨과 허균은 너희 나라의 귀한 신하인데, 이이첨은 가을바람에 울고 있는 계집의 상이며, 허균은 늙은 여우가 묶이어 있는 상이며, 그 밖의 재상도 모두 좋지 않으며, 여러 관원들 중에는 살기를 띠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너희 나라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느냐.”
명나라의 사신, <공사견문>
계축옥사 이후 허균이 이이첨 밑에서 일하던 시절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통역들에게 한 말로 이이첨과 허균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저 말이 나올 시점에 명나라부터가 이미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대북의 영수로서 강한 권력을 휘둘렀기에 서인 집권 이후 조선 말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다. 대북파 내에서도 팀킬과 하극상으로 악명이 높았고, 왕명조차 개길 정도로 권력을 독식해 휘둘렀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이다.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사상적으로 남명학파인 그가 정인홍, 기자헌과 함께 반대하여 남인, 서인 계열에게 큰 반발을 샀다. 이후 1621년(광해군 13년)부터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동한 것에 대한 사림의 상소와 유배, 탄핵 등이 계속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서인은 물론 스승이 비판당한 남인에게 근세에 이르기까지 비난을 당했다. 특히 이이첨의 주도 하에 대북이 작성한 선조 실록의 내용은 대북어천가에 서인과 남인을 다 싸잡아 까는 내용이었기에 빡친 서인과 남인들이 인조반정 이후 수정실록을 간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듯 타 당파와 노선을 맞춘 적도 많고,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며 고려시대 최충헌 등 다른 시기의 독불 장군형 권신에 비해 의외로 주변 눈치도 많이 봤다. 이이첨은 광해군 재위 후반에 접어들자 막대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반대 세력에게 철저하게 끌어내려진 인물임에도 탐욕적이라는 비난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택을 짓는데 선조의 목릉의 나무를 쓰고 개간지를 일부 사유화했다는 점이 지적되나 이 정도는 웬만큼 실권이 있던 인물이면 흔히들 하던 일이었고 시비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가택에는 사방에 책만 둘러져 있을 뿐 어떤 사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심지어 평소엔 조촐하게 베옷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에도 자주 스캔들이 터지는 여색 문제조차 전혀 시비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의 권력을 생각할 때 놀라우리만치 근검하고 사생활이 깨끗했다. 게다가 이이첨은 권력이 막강했음에도 의외로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는 오르지를 않았고 판서 중에도 권력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이조판서, 병조판서 자리에도 오르지 않았고 돈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자리에도 오르지를 않았으며, 사법권을 쥐고 있는 형조판서 자리에도 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이첨은 요직이 아닌 자리에 올라서 권력을 휘두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끈이었던 정인홍이 조식의 강건한 기풍을 계승해 꼬장꼬장하단 평까지 들을 만큼 굉장히 강직한 선비였는지라 그의 학풍을 계승하려고 근검절약을 추구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공식 기록 뿐만 아니라 야사에서도 다른 권력자들과 다르게 사리사욕은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 연구에서는 서인 집권 이후 지나치게 하향평가된 것을 보정하기 위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대북파 시절에 이이첨이 보여준 행적은 하극상과 팀킬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가 주이다.
대북의 영수 기자헌을 유배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허균을 팀킬한 사례만 봐도 주군을 망친 냉혹한 권신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이이첨은 역모에 게거품을 무는 광해군에게 영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취해왔다. 유교적 사고관에서 진실된 충신이란 오히려 군주가 옳지 않은 일을 하면 자기 목숨을 내걸고 반대하는 것이고 현대에도 뉘앙스가 어느 정도 비슷함을 감안하면 이이첨은 결코 좋은 평가나 하다못해 광해군의 충신이라는 평가조차도 받을 수가 없다. 이이첨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면모인 청렴함도 사실 역사를 보면 사적으로는 청렴하고 올곧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명예욕과 권력욕이 심각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다가 파멸한 사람들이 많기에 이이첨이 특별한 건 아니다.
4. 가족 관계
이이첨의 할아버지는 '이범', 아버지는 '이우선', 외할아버지는 류우일, 어머니는 '진주 류씨'이다.
이이첨의 아내는 이응록의 딸 이씨이고 아내 이씨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얻었다. 아들로는 이원엽, 이대엽, 이홍엽, 이익엽이 있고 며느리로는 신립의 딸 평산 신씨와 소릉 이상의의 손녀이자 이지완의 딸 여주 이씨가 있으며 사위로는 이창후의 아들 이상항과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이 있다. 박자흥은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의 아내 폐빈 박씨의 아버지로 즉, 이이첨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이다.
이정립과 남인 계열로 간 이덕형은 이이첨의 10촌아우였다. 며느리 여주 이씨는 이지완의 딸로, 성호 이익의 당고모이자, 반계 류형원의 이모가 된다.
5. 여담
민담집 공사견문록에 관련된 일화가 실려 있다. 이이첨이 공무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맹인점쟁이가 옷이 다 찢어진채 피를 흘리고 우는 모습을 보고는 이이첨이 불러세워서 연유를 물어보았다. 맹인점쟁이가 말하길“공(公)의 여러 자제가 나를 불러서 공(公)의 앞날에 좋고 나쁜 것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 3월이 반드시 흉할 것이다.’ 했더니, 여러 자제가 화를 내어 나를 곤욕스럽게 한 것이 이 모양입니다.”라고 하니 이이첨은 공손히 사과하고 집까지 친히 바래다준 다음 복비까지 후하게 쳐주고는 집에와서 아들들을 크게 책망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출처도 적어놓았는데, 늙은 맹인 윤명세가 이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상술한 대로 다른 간신배나 권신과는 달리 재물축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체통을 유지하며 살아간 그의 행적에 대한 조선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물욕이 적은 것과는 별개로 학맥없이 자수성가한 배경이 컴플렉스로 남았는지 명예욕은 상당했던 정황은 보인다. <선조실록>에 적힌 자화자찬을 비롯하여 마지막에 충신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점 등 본인은 자신의 이름이 후대까지 영예로운 이름으로 남기를 매우 간절히 원했던 모양이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이첨이 함경 감사로 부임하던 날 수레를 타고 만세교(萬歲橋)를 건넜는데 그는 서안(書案)에 놓인 책만 보며 바깥 풍경에 눈길 1번 주지 않았다. 감영의 기생들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단정한 거동을 보고는 신선 같다며 난리가 났는데 늙은 기생 하나가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는데 사람의 정리란 거기서 거기다. 이곳 만세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기이한 볼거리다. 누구든 처음 보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정리가 아니다. 그는 성인이 아니면 소인일 것이다.''
이이첨은 인물이 관옥(冠玉)처럼 훤했다. 대화할 때 시선이 상대의 얼굴 위로 올라오는 법이 없었고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視不上於面, 言若不出口). 그를 본 이항복이 말했다. "한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재앙을 가져올 자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류몽인이 남긴 <어우야담>에는 이이첨에 관한 괴담이 하나 실려있다. 승정원 자리가 터가 안 좋은 흉지였는지 귀신 소동이 자주 있었고 숙직한 승지들이 가위에 자주 눌리거나 헛것을 보고는 했다. 어느 여름날 숙직하던 한 승지가 오밤중에 더워서 열어둔 창문 밖에서 키가 8척이 넘는 귀신을 포함해 여러 귀신들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놀라 기절하거나 도망쳤을 텐데 이 승지는 되레 미동도 없이 그들이 어떻게 하나 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귀신들이 제 풀에 못 이겨 달아났는데, 이 승지가 이이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첨은 동부승지를 지낸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된다. 귀신을 보고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빤히 쳐다보았다니 어지간히 간이 컸던 모양. 상술한 <송천필담>에서 늙은 기생이 한 말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간신들은 인간으로서 기본 감정이 결여되거나 메마른 사람들이라 초인적인 담력과 자제심을 가졌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악행도 기계처럼 서슴없이 한다고 여겨졌다.
혼정편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에 의견은 다르더라도 위기에 처한 이이첨을 자신이 구해주었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간신이라는 이미지는 구한말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 이어졌는데, 일례로 삼성당에서 나온 아동용 전집인 이야기 한국사에 보면 구들장을 뜨겁게 데워 살해당한 영창대군의 최후를 그리며 "이 또한 이이첨이 시킨 짓이었습니다"라고 서술된다. 그나마 이이첨의 평가가 "권신이되 탐욕적이진 않았다" 정도로 수정된 것은 21세기 들어서 광해군 관련 사료(특히 실록의 번역)가 폭넓게 연구되고 재평가된 이후다.
사돈 박승종이 그에게 폐모론의 의중을 떠본 일화가 공사견문록에 전한다. 둘이 면대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우는 것을 보고 박승종이 "저것이 날짐승이지만 반포(자식이 커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 할 줄 아니 천하게 볼 수 없다"(까마귀는 효의 상징임) 라고 말하니 이이첨이 아무 말이 없다가 벌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미미한 벌레지만 군신의 의리를 알고 있으니 가볍게 볼 수 없다."(벌은 여왕벌을 중심으로 뭉치니 군신의 상징으로 봤음) 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이첨의 의중을 확실히 알게 된 박승종은 그때부터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한다.
이이첨의 아들 이대엽이 데리고 살던 기생 진이가 나이 80에 말하기를 "이이첨이 선비를 뽑는 일을 하면서 과거준비하는 이들을 만나주고 조정에 채웠으니 하늘이 벌을 내릴 줄 알았다. 인조반정 이후 어느집 연회에 가봤더니 다들 거품물고 이이첨을 욕하였는데 그들 상당수는 하룻밤이 멀다하고 이이첨의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이었다" 면서 당대 거짓선비들의 위선을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