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세종의 국구이다. 태종의 외척 숙청 작업으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세종의 외삼촌이자 태종에게 사사된 민무휼의 사돈이며, 문종과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의 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버지 심덕부는 중흥공신으로 고려 말 최무선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창왕을 폐위하는데 참여한 흥국사 9 공신 중 한 사람이다. 또한 한양의 궁궐과 종묘 건설 총책임자였다.
정종 대에 종3품 군사 직책인 보공장군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서 태종 말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1418년 8월 23일, 태종은 명나라에 보낼 사은사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 사은사는 반드시 친척을 보내야 한다면서 심온이 황엄과 친하니 적격의 인물이라고 그를 추천하여 원래 가기로 한 사은사 한장수 대신에 심온이 명나라로 가게 된다, 이어 태종은 9월 2일,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좌차(座次)는 두 정승과 상의하도록 하라."라고 하명하여 다음날인 9월 3일, 영의정부사에 정식으로 제수된다. 이때 심온의 채 50이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심온이 명나라로 가는 날 태종, 세종, 소헌왕후가 모두 환관을 보내 전송했고, 심온에게 아부하기 위해 전송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헌데, 외척 경계하면 둘째가라면 서려울 태종이 갑자기 심온을 사은사로 정하고, 영의정까지 제수한 것은 역시 심온을 숙청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심온이 조선을 떠나자마자 태종은 강상인의 옥에 연루시키기 위해 강상인을 도로 붙잡아와서 심온 형제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해서 심온을 연루시켰다. 이어 박습도 잡아와서 압슬형으로 고문하니 박습도 처음엔 저항하다가 굴복한다. 심온의 가산을 몰수한 후 판전의감사 이욱을 의금부 진무에 임명하여 의주에 파견, 만약 심온이 사신과 같이 귀국하거든 심온을 의주에 붙잡아두어 사신과 떨어뜨린 후에 명나라가 모르게 비밀리에 잡아들이라고 지시하였다. 그 사이에 11월 26일, 태종은 짐짓 강상인을 심온과 대질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운을 띄우지만 박은이 심온의 죄는 증거가 명백하니 강상인을 죽여야 한다고 청하여 박습, 이관, 심정은 참해지고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진다, 그 아버지와 아들들은 교수형을 감형하여 노비로 삼았다. 심온의 서자 심장수도 이때 사천으로 귀양간다. 하지만 속도조절도 있어 이미 심씨가 국모가 되었으니 그 집안을 천인으로 만들 수 없다고 명하여 심온의 형 심인봉은 천민이 되는 걸 면하고 유배에 그쳤다. 또한 심온의 아내와 네 딸을 노비로 만드는 것도 세종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고 하였다. 12월 4일의 논의에서 태종은 심온의 처자식들은 심인봉처럼 양민으로 유지하라고 했으나, 의금부에서 심인봉을 천민으로 삼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이었다고 반박하자 천민으로 만들되, 천민처럼 부려먹지 말라고 명하는 한편 그 가산도 적몰하지 않았다. 세종 8년 5월 19일 기사에 따르면 그나마 박은은 중궁의 어머니니 다른 연좌의 예와 다르다고 은전론을 주장했으나 의금부 제조 유정현이 강력히 주창하여 천인이 된다.
11월 29일, 태종이 유정현, 박은, 이원, 조말생, 허조, 하연을 불러서 세종에게 이미 아들이 셋이 있으나 아들은 다다익선이니 세종에게 빈과 잉첩을 더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로 후궁까지 들이라 하니 박은 등은 태종의 뜻이 소헌왕후의 폐비에 있다고 여겼는지 의금부가 중궁을 폐할 것을 청하고 조말생, 원숙, 장윤화도 마땅히 은정을 끊어 법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하였고, 박은이 폐비론을 주장하자 다시 유정현, 허조, 허지 등을 불러 자신이 빈과 잉첩을 들이라고 것에 딴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자 폐비론은 없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심온이 천거한 관료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되었으며 만반의 준비 끝에 12월 22일, 이욱이 심온에게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여 심온을 잡아오는 데 성공한다.
시 심온을 심문한 실록 기사엔 관련 내용이 없으나 나중에 세종 11년 3월 17일, 이조참판 정초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심온은 하루 만에 곤장을 세 번, 압슬을 두 번 받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진짜 억울했는지 고문은 다 견뎠지만 수사책임자역할을 맡은 류정현이 "공의 지위와 권세로 〈미루어〉 오늘 이 국문하는 정세를 본다면 가히 알 것이니, 끝내 승복하지 아니하고 배기겠는가." 라고 상황을 일깨워주자 충격을 받고 침묵하다가 이게 억울하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강상인과의 연루를 실토, 다음날 바로 처형된다. 하지만 그나마도 소헌왕후가 아들을 많이 생산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려 자진케했다. 이후 심온이 죽었단 보고가 올라오자 나름 후하게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이때 태종의 뜻을 받들어 심온 숙청 작업을 맡았던 사람이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은이었다. 이 때문에 심온이 빡쳐서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
3. 사후
세종 11년부터 심온 복권론이 나왔으나, 세종은 절충론을 택해 심온에게 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역적으로 보긴 어렵지만, 태종께서 하신 일을 자신이 뒤집기 어렵다고 하였다.
외손자인 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겨우 복권된다. 황보인과 김종서가 심온은 그저 세종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었다고 강력하게 복권론을 주장했다. 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건 알았지만 자기 대에 심온이 결백했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죄없는 심온을 억울하게 죽였다는 것이고, 솔직하게 자기 아버지 태종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부담과 왕실의 위엄, 세종의 효심 때문에 어렵고 훗날 기묘사화의 책임을 중종을 대신해 남곤과 심정이 뒤집어쓴 것처럼, 간신 박은과 유정현이 충신 심온을 모함했다고 규정하는 방법도 있긴 하나 이건 대규모 정치 보복으로 이어지게 되니 이 역시 세종의 정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문종도 직접적으로 심온이 억울하다고 말한 게 아니고 내가 굳이 관직을 주려는 게 아니라 세종의 영릉 비문에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의 이름도 올라야 하는데 한번 새기면 고치지도 못하니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면서 운을 띄웠다. 물론 이때쯤 되면 왕이 외할아버지 복권한다는데 반대할 신하는 없어서 문제없이 처리되었다. 그나마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죽지 않고 변방의 관노로 전락했거나 관로가 막혔다가 태종이 죽은 후 이직과 황희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세종의 명령으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심온의 딸들 또한 별 탈 없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변방의 노비로 있던 시기에도 물리적으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종 대의 중신 노사신과 세조, 성종 대 <사시찬요>, <금양잡록>, <고사관수도> 등을 남긴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심온의 외손자이며 또 다른 심온의 외손자인 박중선의 딸들은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부인, 중종비 장경왕후의 생모이다.
태종이 죽은 이후 세종은 심온의 죽음에 대해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심온 사건을 주도한 류정현을 따로 불러 좌의정으로 임명한 후 중대사마다 그의 의견을 참고했다. 소헌왕후는 그런 세종의 태도에 아무런 언급이 없기는 하나 이후에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 심온의 가족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세종이 직접 방면해 주었으나 자식들의 벼슬길은 열리지 않았고, 심온 본인의 복권이나 직계 가족의 등용 문제는 그 다음 대인 문종이 왕에 오르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심준은 문종 즉위 전에 죽었으나 그 아들 심미가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심회, 심결은 문종 때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세조에게 각별히 대우받아 심회는 영의정, 심결은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다. 다만 심회는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여담으로 성종 ~ 연산군 시기의 대신인 노사신은 그의 외손자이다.
4. 평가
태종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인식이 있고 외척이라면 온갖 구실을 붙여 숙청해온 태종의 이미지 때문에 사극에서도 주로 온건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행동파이자 야심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심온은 마냥 억울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 실제로 심온은 사위인 충녕대군의 출세를 위해 세력을 포섭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 정황이 있다. 말이 사위의 출세이지 달리 말하면 태종이 그토록 경계하던 '외척의 배경을 믿고 왕권을 위협하는 가문'으로의 득세를 꿈꿨다는 뜻이다.
명목상 심온의 역모죄는 사건 전개나 사후 처리 등을 볼 때 사실이 아니며 단순히 숙청의 명분에 불과하다. 다만 심온이 숙청을 피하기 위해 처신을 잘 했냐 하면 전혀 사실이 아니며, 숙청 당할만 했다는 점에선 심온 역시 억울할 것 하나 없다. 당시 청송 심씨는 생전에 이성계와 이방원도 견제해야 했던 가문이었다.
태종이 킬방원 이미지 때문에 외척이라면 닥치는 대로 숙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원래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는 사위를 위해 거의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처신을 조심했다. 그렇기에 양녕대군이 14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장인인 김한로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이라고 해서 닥치는 대로 숙청을 한 것이 아닌, 숙청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숙청을 했다는 뜻. 오히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와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은 태종 자신의 문과 급제 동기이기 때문에 믿고 사돈댁으로 정했으며, 당시 꽤나 민감하게 여겼던 군부 수장까지 역임시켰다. 허나 심온은 몸조심을 하지 않았기에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지 반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즉, 여흥 민씨와 청송 심씨는 단순히 외척이라서가 아니라 태종이 통제할 수 없다고 볼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져 숙청된 것이다.
심온의 졸기에 따르면, 심온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자의 장인이 됐다고 아첨하는 것이 두려워 손님을 거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를 듣고 태종이 매우 기뻐했으나 정작 세종이 즉위한 후에는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자 "심온이 전일에 손을 사절하고 조용하게 지내겠다는 뜻을 내가 심히 옳게 여겼더니, 지금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라고 불만스럽게 여겼다.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는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실제로는 여말선초의 단연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이성계에게 황산대첩이 있다면 심덕부는 나세, 최무선과 함께 진포 대첩을 지휘한 전쟁영웅이다. 위화도 회군 때 조민수, 이성계 바로 뒤의 3인자였으며 고려 군부 전체로 보면 최영과 이성계 다음가는 존재감을 지녔다. 여기에 동생 심원부가 이제현의 제자, 심원부의 삼남 심천식이 정몽주의 제자라서 군부와 정계, 권문세족과 신흥 유신, 온건파와 급진파에 폭넓게 영향력이 닿아 있었다. 폐가입진에 참여한 흥국사 9공신의 1명으로 그의 7남 심정이 이방번의 장인이기도 한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기에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그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실제로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 전후로 심덕부는 공양왕과 이성계 사이에서 대놓고 간을 봤다. 윤소종이 이성계의 정적 처리가 지체된다 우려하자 이 사실을 공양왕에게 전해 윤소종을 유배보냈고 정몽주 쪽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1390년 이성계 측은 윤이·이초의 옥사와 여기에 묶어넣은 김종연 사건에 정지, 지용기, 박위, 심덕부를 전부 옭아넣는데 이들이 모두 군부의 유력 인사들로 이성계 측이 군권을 독차지하기 위한 술수였다. 하지만 변안열처럼 제거하지 못하고 겨우 3개월 유배에 그쳤다. 공양왕 측에서는 그를 문하시중에 임명하며 끌어들이려 애썼고, 1391년 세자 왕석의 명나라 입조에 동행시킬 만큼 신뢰했다.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에게 가장 믿을만한 카드였다는 뜻인데 정몽주의 목을 잘라버린 이성계 측도 심덕부는 못 건드려서 조선 개국 후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심덕부의 6남 심종을 혼인시켜 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아들 심인봉이 군부 1인자인 의흥삼군부 도총제 직을 역임했고 5남 심온도 좌군도총제 등 군부 요직을 거쳤으며. 6남이자 이성계의 부마 심종은 장인 이성계를 배신하고 1차 왕자의 난 때 왕자들 편에 섰다. 그는 2차 왕자의 난으로 귀양간 회안대군과 대놓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통교했는데도 죽이지 못하고 귀양가는 선에서 덮어줬다.
정양군 왕우의 사위인 7남 심정은 무(武) 쪽으로 가르침을 주라고 양녕대군 옆에 붙여놓았더니 매와 여자를 바치는 등 그의 비행을 대놓고 부추겨 태종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이런 심정의 행동은 탄핵 상소에 적힌 기록으로, 태종이 이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직시켰다. 양녕대군이 심정에게 받은 것은 꿩이고, 매는 주인인 심종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럼에도 태종은 일단 참았고 심정은 10년 이상 군부에 몸담으며 중앙군 요직인 중군 동지총제까지 올라갔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은 소헌왕후의 아버지, 세종의 장인이었다. 게다가 심온 역시 민제의 아들이자 원경왕후의 외척인 민무휼과 사돈을 맺었고 민무휼의 장인이 이직으로 이직과도 민무휼을 통해서 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직의 사촌동서가 하륜으로 심온은 하륜과도 어느 정도 인척을 형성했다. 이미 아우인 심종이 군부에 지나친 영향력 등으로 태종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아들들을 자중시키려고 했던 민제와 달리 심온은 아우들을 전혀 자제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심온은 적극적으로 권세를 휘두르고 심지어 세자 자리를 바라보고 인심을 모으던 충녕대군 옆에서 그의 인맥을 관리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가령 양녕의 파행으로 세자 교체가 유력해진 태종 17년 10월. 박은이 심온을 통해 세종에게 줄을 대려 한 적이 있었다.
...좌정승(左政丞) 박은(朴訔)이 심온(沈溫)과 더불어 말하기를,
"충녕 대군(忠寧大君)이 어질어서 중외(中外)에서 마음이 쏠리니, 마땅히 여쭈어서 처신할 바를 스스로 알게 하시오."
하였으나, 심온이 듣고 여쭙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편히 기거하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와서 영(楹) 밖에 흩어져 앉았다.
박은이 대군과 더불어 말하고자 하니, 심온이 대군에게 눈짓하여 일어나 피하게 하였다.
세자를 넘보는 세종과 심온은 서로의 뜻을 드러내고 공조하고 있었으며 세종 주변에 접근하는 이들은 일단 심온을 거쳐야만 했다. 계속 나뒀으면 미숙한 세종을 쥐고 흔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것은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의 이미지를 재고해 볼 필요성을 전해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상식적으로 남편과 아버지가 면밀해 공조해서 세자위를 노리고 있는데 딸 혼자 초연하게 가만히 있었을까? 양측의 징검다리가 되어 물밑에서 움직였다고 봐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오늘날 연약한, 현숙한 이미지보다는 시어머니 원경왕후에 훨씬 가까웠으나 시아버지 태종이 먼저 손을 쓰면서 강제로 온화해진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세종 즉위년에 찾아오는 객을 물리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겠다며 일견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정계 최고서열이던 좌의정 박은은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알아서 심온 일가 전원의 벼슬을 높이려다 세종에게 저지당했다. 심지어 심온에게 좌정승 자리를 넘기려들며 바짝 숙이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게 전부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까? 심온은 태종 시절부터 정쟁에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상당히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태종 13년 12월 대사헌을 역임하며 태종의 최측근이자 간접적으로 인척인 하륜을 탄핵하기도 했고 태종에게 개인적으로 넌지시 알리려다 세종이 말려서 관두기도 했고, 태종 18년 1월에는 명에 파견할 사신의 인사에 관련해 의정부가 절차 문제를 제기하며 관여하자 발끈해 항의하며 좌의정 박은을 정면으로 저격한 적도 있었다. 결국 심온은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이 온순한 선비 유형이 아니었다. 문무 각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며 매우 자신만만하고 괄괄한 성품에 가까웠다.
태종은 후계자가 될 세자, 이미 아들 셋을 잃은 상황에서 유사시 첫째 대신이 될 효령대군까지는 자신의 과거 동기인 문신 관료를 택했고 왕위와 거리가 먼 충녕대군의 처가로는 문무에 영향력이 깊은 권세가를 지명했는데, 처음 고를 때야 힘없는 셋째 아들에 대한 배려였을지 모르나 셋째가 후계자가 되는 돌발상황이 벌어지자 외척으로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집안으로 비춰지게 된다. 그리고 강상인의 옥이 터진다. 군권을 절대 신하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었던 태종은 종친과 자신의 문과 합격 동기들을 군부 요직에 임명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했는데 수십 년간 태종을 모셨던 참판 강상인이 태종의 뜻을 대놓고 무시했다. 군을 부리고, 대신들을 호출하는데 사용하는 상아패와 오매패를 태종의 재가 없이 군무에 무지한 세종을 속여 강상인이 맘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결국 태종은 심온이 명에 가고 없는 틈에 재빨리 심정과 그에게 얽혀있는 군맥을 제거하고 심온까지 날려버려 세를 꺾었다. 태종의 심온 제거는 단순히 외척에 대한 경계가 아니라 너무나 강력한 청송 심씨와 그들을 따르는 군맥에 대한 견제로 꼭 필요한 조치였다.
5. 여담
상술했듯 심온이 숙청당할 때 역적의 딸이라 하며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태종은 세종의 항의와 소헌왕후가 이미 아들을 3명이나 둔 것 때문에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이미 존재하는 3명의 대군을 거론하나 가장 큰 원인은 세종과 소헌왕후 본인의 태도였다. 세종이 (오늘날 사극의 묘사와 달리)심온을 절대 변호하지 않고 죄상을 캐내라 지시하며 부친의 권위를 거스르려는 시도를 일절하지 않고, 소헌왕후가 지아비에게 아비를 살려달라 울며 매달리는 대신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기에 그냥 넘어간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심온을 구명하려 했다면 대군들이 있던 말던 무조건 폐비였다.
심온의 묘는 산의곡(山儀谷), 즉 말 그대로 "산골짜기 마을"에 조성되었다. 산의 추후 심온이 복권되고 문종과 세조가 심온의 묘를 참배하자, 청송 심씨 가문이 심온의 묘 아래 모여들어 산의실(山儀室)이라는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지금 광교역사문화공원이 있는 자리가 옛 산의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