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의 문신이다. 김상헌의 형이며, 장유의 장인. 인선왕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1561년 종2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김극효(金克孝)와 어머니 동래 정씨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위로 입격하여 참봉(종9품)을 지내다가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적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인조실록 재위 5년(1627) 2월 11일 6번째 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올랐다. 1635년 눈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정1품)에 올랐다가 이듬해(1636)에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종1품)로 직임이 옮겨졌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노구를 이끌고 강화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강화성 전투 중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손자와 종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전쟁 후 인조는 그가 실은 순절한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다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했다는 소문을 믿으며 치제를 거부했으나, 그는 흡연자가 아니었다는 증언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증언에 결국 순절로 인정했다.
3. 순절이 아니다?
주장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김상용이 순절하지 않았는데 문중에서 왜곡한 거라고 주장한다.
사망 당일 장계(狀啓)에는 “김모(金某)가 불이 나 죽었다”는 기사와 함께 여러 사망자와 나란히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가족과 측근들을 중심으로 그가 순절했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인조는 "착한 것을 칭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칭찬하는 말이 참되고서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다.", “절의를 지켜 죽은 일은 속이거나 숨길 일이 아니며 나라의 법이란 사사로운 정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내가 거짓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유독 김상용에게 박해서가 아니다.”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1년여의 공방 끝에 결국 인조가 굴복하고 만다.
정말로 적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고자 했다면, 성이 함락된 후 적군이 몰려들 때 최대한 많은 적군을 길동무 삼아 자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폭발 시점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경)이고, 정작 강화성은 날이 저문 후에야 함락되었다. 적군은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고 강화성에 쌓여 있던 화약만 전부 날려먹은 셈이다.
게다가 그 시점에 강화성에는 봉림대군과 원손, 비빈을 비롯한 왕족들이 있었다. 신하가 함께 있는 왕족들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먼저 죽는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순절이라고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사고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애당초 강화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순절할 양반이면, 정묘호란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3.1. 반론
그러나, 김상용은 혼자 죽은 게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순절했고 당대 관료들의 증언과 강화성에 있던 이들의 증언으로도 그가 담배를 피려다 죽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인조는 김상용만 의심한 게 아니라 김상용과 같은 방식으로 사망한 이완과 남이흥의 죽음도 의심했다. 애초에 지휘관들의 죽음에는 헛소문이 도는 일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분전하다 전사한 송상현과 정발의 경우에도 일본에 항복해 장군으로 활동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조정에서 정발의 전사를 확인한 것도 임진년 말이 되어서였다.
순절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도 참견에 가깝다. 이완과 남이흥 같은 경험이 풍부한 무관들도 적을 끌어들인 후에 자폭하는 게 아니라 성이 함락되기 전에 자폭했다. 무엇이 합리적인 순절이고 이치란 말인가? 김상용이 자폭하던 시점의 강화성은 이미 성문이 뚫리고 물자가 바닥나 대세가 기운 뒤였다. 강화성의 함락은 날이 저문 뒤에 이루어졌더라도 대세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강화를 지키지 못했다고 순절할 양반이 왜 정묘호란 때 도망쳤냐고 비난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미 임진왜란 때 이런 식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복귀해 활약하거나 순절하는 행보를 보인 이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 김시민도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가 복귀했고, 진주성 앞에서 전사한 유숭인도 몸을 숨겼다가 복귀한 인사였다. 경상 좌수사 박홍, 좌병사 이각, 감사 김수, 순변사 이일, 김명원과 한응인 등도 패주했다가 다시 복귀했던 자들이다. 별다른 근거 없이 단순한 추측만으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무엇보다 김상용의 죽음이 실화라고 단정하는 제1근거는 강화유수가 올린 장계인데 당시 강화유수야말로 강화도 방어전의 최대 트롤러였던 장신이다. 전투에 제대로 참가도 하지 않고 적전도주했던 사람의 보고를 믿을 수 있을까?
또 김상용의 순절이 문중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한 이숙인의 경력은 이러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가족과 여성 중심의 연구 시각으로 조선시대 사상사를 기획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유교경전의 여성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를 지냈고, 여러 대학에서 동양철학 및 한국철학을 강의해왔다.
경력을 보다시피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다. 가족과 여성을 중심으로 연구했다고 하지만 아무튼 역사를 전공한 적이 없다. 그가 부실한 근거로 김상용이 순절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사관보다 사료 비판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중앙일보라는 영향력이 큰 레거시 미디어에서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이 검증없이 낚이기 좋다는 것이다.
4. 여담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오래 산 편인데(76세), 동생인 김상헌 또한 80을 넘어 장수하였다. 폭사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동생 김상헌의 묘도 같이 있다.
그의 직계 자손이 김호연재,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이교(金履喬),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 김두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