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 ~ 인조 시기의 정치인이자 서인 내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병자호란 시기 주화파를 대표하던 최명길에 대비되어, 척화파를 대변하던 인물이었다.
2. 생애
김극효(金克孝)의 4남으로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김대효(金大孝)가 후사 없이 별세하자 양자로 입적되었고, 생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왕실과 관계가 있었는데, 그의 할머니 이연환은 성종의 왕자 경명군의 딸로 김상헌은 성종의 진외현손자이다.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 류씨 및 류희분 남매와는 이종사촌이다. 어머니 동래 정씨가 좌의정까지 지냈던 정유길의 딸 정말정(鄭末貞)으로, 김상헌의 이모가 광해군의 장모인 봉원부부인 정양정이기 때문이다. 큰 형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민회빈 강씨와 봉림대군을 따라 종군했으나 청나라군이 들이닥치자 화약으로 자폭해 순절하였다. 김상용의 외손녀가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이므로, 김상헌은 효종의 처외종조부가 된다. 인조는 김상용의 순절에 회의적이라, 실수인 거 아니냐고 했지만 김상용의 자제들과 당시 근처에 있던 이들의 증언까지 나오자 마지못해 순절 사실을 인정하고 조제를 허가했다. 김상헌은 어린 시절 외조부 정유길과 큰 형 김상용, 친척형인 김상준에게 배웠고, 16세에 이황의 문인인 윤근수에게 배웠다.
1596년(선조 29년) 임진왜란 중 문과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 동부승지일 때, 정인홍이 회퇴변척소를 올리며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비판하자 정인홍을 규탄하고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링크 이후 광주목사, 연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기를 반복하였다. 1613년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사사될 때 그와 사돈이었기 때문에 파직되어 안동에 머물렀다.
1623년 인조반정 이듬해에 대사간으로 발탁되어 정계에 복귀한다. 링크 이후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치며 청서의 영수로 활약한다. 도승지, 부제학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진주사로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했고, 귀국하여 후금과의 화의를 끊고 강홍립의 관작 복구를 반대하였다. 인조가 부친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할 때도 반대하여 이귀와 대립하였다. 복귀 후 공조, 형조, 예조, 이조판서를 역임 후 1633년 대사헌이 된다. 대사헌 역임 시기에도 명분과 원칙으로 공서와 충돌하며 출사, 사퇴를 반복하며 2년간 5차례나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재임 중 병을 치료하러 고향인 안동에 잠시 내려가 있었는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말을 타고 한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청군이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다. 이후 김상헌은 청군의 감시를 피해 12월 18일 밤중에 남한산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조정에 합류한 김상헌은 청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의 수장이 되었다.
김상헌은 전쟁 이전부터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였으며 화친파인 최명길과는 공적으로는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가 내린 글에 대해서 김상헌은 "이걸 병사들에게 보여줘서 사기를 격양시킵시다."라고 하자 최명길이 "와신상담도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반박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출성 항복을 하면 나라가 보존된 예가 없다."고 하면서 최후까지 반대했다.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 출성 항복이란 바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넘겨주겠음!!!"이라는 의미와 같아서 생사를 건 도박과 같았다. 다만 당시 국제 정세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항복할 것이 결정되자 목을 매 자살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으며 청나라에서 항복 조건으로 척화신 세 사람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조참판 정온과 함께 오랑캐 진영에 보내 죽게 해달라는 청을 올렸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출성하는 인조를 따르지 않고 바로 고향인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소산마을에 내려가 은거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에게 두고두고 씹혔다. 김상헌은 이에 대해서 "신하는 군주의 뜻에 충성하는 거지, 군주에게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건 내시나 아녀자들의 충성이지, 사대부의 충성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를두고 김상헌이 굴욕의 순간은 함께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은 김상헌을 옹호했으며 심지어 인조 말년 김상헌이 탄핵당할 때 침묵을 유지한 것도 바로 이들이다. 다만 당시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 대다수의 입장이 주화가 아니라 척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들과 입장이 같은 김상헌을 두둔하고 주화파인 최명길을 비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즉, 당시 대신들의 입장은 김상헌을 변호할 거리가 되지 못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최명길을 필두로 "자살 시도도 정치적 쇼가 아니냐?"는 비난도 많았지만 이것 역시도 자신이 대들보에 목을 매 숨이 끊어진다면 시신을 거두기 위해 친족들을 밖에 대기시켰던 것이였다. 실제로 그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람은 그의 가족이 아닌 군량미를 관리하던 나만갑이었다고 하며 김상헌은 자살 시도 직전에 6일간을 굶으며 지냈다고 하니 거짓으로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인조는 척화를 주도한 김상헌에게 패전의 책임을 씌웠다. 임금을 버리고 홀로 결신(潔身)한다는 죄목과 임금에게 순국(殉國)을 강요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1640년 청나라를 도와 명나라를 공격하는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고향에서 압송되어 1640년 겨울, 70세가 넘었음에도 심양으로 압송되어 최명길과 함께 심문을 받는다. 이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에 청나라 관리들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평가했고 나중에 최명길과 같이 풀려날 때 청나라 황제가 죄를 사해 주었으니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해 절을 하라고 해서 최명길은 절을 했지만 김상헌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최명길과 김상헌이 심양의 감옥에서 정반대의 시야를 가지고 있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별반 기록은 없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찬하는 시를 지은 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에서 구금돼 있는 기간에 남한산성의 항복을 한 고조가 흉노에게 겪은 평성의 치욕에 비유하였고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한 시를 지으며 청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절의를 내비쳤다.
이후 1645년에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고 80세가 넘게 장수했는데 인조 치세 내내 미움을 받았다. 효종이 즉위한 이후 찾아와 효종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했고 김자점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청나라의 조선통인 정명수에게 청해 지원을 요청하던 즈음 청나라의 섭정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김상헌이 조정의 반청파를 움직여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를 숙청하고 반청 정책을 주도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지만 조선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벌인 뻘짓이었고 조선에서 미녀를 보내자 금방 태도를 풀고 김자점을 버리는데 이후 정명수도 청나라에서 숙청당한다.
이미 80대라 조정에 여러 번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효종은 그의 사직을 허가치 않았고, 1652년 6월 25일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옛사람이 "문천상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를 거두었다."고 하였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남았을 뿐이다." 하였다.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6월 25일 김상헌의 졸기-
3. 의리만을 고집한 수구 꼴통?
과거 신채호 이래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유학(성리학) vs 국학(실학, 양명학)의 대립이라는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원론적 관계로 파악했으며, 성리학은 청나라의 침략을 불러오고 조선의 진보를 막아 끝내 근대화에 실패하게 만든 원흉으로, 소위 실학을 위시로 한 국학에 대해서는 시대를 앞서나간 근대적 사고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위대한 민족사상으로 평가했다. 그러한 관점에 입각해 국내 학계는 조선 후기 내내 명분론과 절의의 대표자로 칭송받은 김상헌을 현실 인식을 못하고 화이론적 세계관만을 고집하는 꼴통 사대부의 대표격으로 몰아세우며 온갖 비난을 가했다. 거기에 김상헌의 집안이 후일 세도 정치를 행할 안동 김씨였다는 점도 크게 한몫했다.
반면 이에 반대해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에 대해서는 매우 높게 평가하며 일방적으로 칭송했다. 이러한 관점은 김상헌을 춘추대의의 화신으로 칭송하던 풍조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으로, 신채호 이래 국내 학계는 민족사상의 '도통'에서 송시열 등의 주자학을 제거하고 실학-개화파로 이어지는 경로를 새로 설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심지어 최명길을 실학과 연관짓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관점은 정작 성리학 vs 실학이라는 대결 구도와 자본주의 맹아론에만 입각해 김상헌이라는 사람에 대한 고찰과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내려진 평가였다. 실제로 1990년대 오항녕 교수가 김상헌 개인과 17세기 서인들에 대한 연구를 행하기 이전까지 김상헌 개인에 대한 연구는 일절 행해지지 않았다. 이후 김상헌 개인과 최명길 등 당대 서인 인사들의 사고나 세계관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며 김상헌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는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반면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고전적인 이분법이 통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김상헌은 놀랍게도 선악필보, 천도의 보편성 등 핵심적인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척화란 국난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세계관이었을 뿐 당대 다른 대다수 사림들과 달리 척화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상헌은 명목상으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며 척화를 내세웠지만, 사실 그가 척화를 주장한 이유는 과거 흉노에게 시달리던 전한의 모습을 후금과 조선의 관계에 겹쳐보았기 때문이다. 즉 전한이 흉노와 싸우길 피해 평화를 선택했으나 그 대신 매우 무거운 대가를 져야 했고, 결국 무제 대에 와서 군사적 충돌을 통해 이를 해결했듯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고 무릎을 꿇는 것은 자존심상으로나 현실적인 면에서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생각했기 때문에 척화를 주장한 것이다. 또 화친이나 조건부 항복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김상헌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출생 배경이나 관직에 든 이후의 경력 등으로 보아 '강경하고 원리주의적인 유림'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의 집안 자체가 학문보다는 문장을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간 전형적인 관리형 사대부 집안이었으며, 그 또한 이러한 집안 배경, 그리고 그를 가르쳤던 형 김상용이 시문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 사서삼경이나 주자학적 도학에는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김상헌 본인 또한 주자학과 같은 학문적 이론에는 별 관심이 없었거나, 그다지 배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이 김상헌의 생애를 정리할 때 33세에 함경도로 좌천되었을 때 기초 유교 경전인 '소학'을 읽었다는 기록을 남긴 것 역시 그가 유교 경전 공부와 같은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33세에 소학을 읽었다는 기록이 특별히 남을 정도이니.
김상헌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윤근수 밑에서 오랫동안 수학하며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는데, 윤근수 역시 학문보다는 문장과 글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었으며 당대 문인들에게 있어서 중국으로부터 최신 트렌드를 소개하여 매우 큰 인기를 얻었던 인물이었다. 윤근수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도학이나 주자학보다는 문장과 그 문장을 바탕으로 관료적 능력을 기르는 것에 더 집중했으며, 그간 유림들 사이에서 경시되었던 경세론에는 더 관심을 기울였다. 또 그는 학문을 대함에 있어 주자학적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았으며, 친구들을 칭찬할 때 '제가(제자백가)의 책들을 고루 섭렵했다'는 단어를 쓰는 등 당대 유림들에 비해 열린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서인으로서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당대 기호학파의 주자학적 도통을 따랐으나, 딱히 본인이 주자학자라거나 주자학적 도를 따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김상헌은 착한 이는 보답을 받는 등 천도가 항상 보편적이고 항상적이라는 주자학의 믿음과는 배치되게 백이와 숙제 형제가 산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탄하는 등 당대 주자학적 천도론과도 유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물을 '주자학에 매몰된 수구 꼴통 사대부'로 몰아세우는 과거의 평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런 사고를 가진 인물을 그저 청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주자학적 대명의리에 사로잡힌 비현실적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김상헌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말이 안 되는 게, 김상헌은 평생 관료로서 명과 후금, 심지어 대마도까지 숱하게 들락날락거리며 외교 업무를 맡아온 사람이다. 인조의 책봉 조서를 명으로부터 받아낼 때 왜 광해군 쫒아냈냐고 비아냥거리며 온갖 행패를 부리는 명 사신단을 상대로 매우 훌륭히 대처해 그 공으로 병조참판으로 승진했으며, 정묘호란 직전 모문룡이 명 조정에 조선과 청이 합심해 명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자 인조의 명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런 무고를 해명하는 한편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후금 공격과 조선 구원을 주장한다. 이때 김상헌은 오래동안 명에 머물며 당시 중원의 현실을 자각했는데, 당대 명나라가 위충현 등의 전횡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과 주변 조공국들이 제대로 사신도 보내지 않을 정도로 천명이 기울었다는 것, 민심이 이반하고 군사력도 약해졌다는 사실 등을 조선에 복귀해 상세히 고했다. 또 정묘호란의 결과로 조선과 후금이 형제국가가 된 현실에 대해 분개하기는커녕 안타깝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반응했다. 만약 김상헌이 주자학적 화이론에 매몰된 수구 꼴통이라면 이때도 오랑캐들과 형제가 되었다며 분개했어야 맞다.
한편으로 김상헌은 후금과의 물자 교역이 모문룡에게 약탈 등의 활동을 할 구실을 주고 저번처럼 명나라의 의심을 살까 걱정했으며, 청나라 사신 중남이 조선에 방문했을 때 의자에 앉게 해달라는 무례한 요구에 대해 '청은 예의를 모르는 오랑캐이니 들어주시죠'라고 반응한 비변사에 반해 '청의 말과 행동이 모두 천명과 예를 노리고 있으니 저들은 더 이상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고,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하니 여기서 의자에 앉혀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이 역시 김상헌의 현실 인식을 볼 수 있는 부분으로, 고전적 관점과는 달리 김상헌이 청을 단순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는 청이 중화적 천명질서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 천자가 되고자 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어, 조선이 자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일본, 중국보다 강해져야 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임무이니 중화적 천명질서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데, 후금에 굴복해 그들을 상위로 인정하면 이는 조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길을 버리는 것이고 곧 오랑캐의 힘에 굴복해 '자강'을 내다 버리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김상헌이 청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곧 자강의 길을 버리고 청에 종속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홍타이지가 조선에 자신의 천자 즉위를 추대하라는 교서를 보내오고 이에 대해 조선이 교서 접수 거부 및 척화 교서 하달로 대응해 양국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르자, 김상헌은 의외로 이에 대해 청의 교서를 접수하지 않은 것 자체가 문제라며 답변 자체를 거부한 것은 전례에 어긋나는 일이도 예의에도 어긋난다며 전쟁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국경인 평안도와 황해도 경비 강화를 주장하면서 승리는 불가능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으리라고 주장했다. 이어 전쟁이 벌어져 남한산성에 들어갈 처지가 되자, 그는 청에 대한 화친을 거부하며 화친을 하더라도 청과 싸운 이후에 해야지 우리가 먼저 화친을 청하고 나서면 이는 스스로 비굴하게 종속되는 길이나 다름없다며, 싸우기라도 해야 그나마 조선이 청에 완전히 종속해 자강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계책이라 주장했다. 의외라면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주장한 이들 중 명에 대한 의리나 오랑캐에 대한 수치 따위를 언급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먼저 화친을 청하면 청이 오히려 조선이 싸울 여력이 없다 생각해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고전적인 관점과는 달리 그가 화친을 거부한 이유는 '명에 대한 의리'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김상헌은 '당대의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야 미래 입장에서 보니 명나라가 중원을 잃고 재기에도 실패해 허망하게 망한다는 걸 알지만, 당대 입장에선 명나라가 중원을 잃을지도 불확실하며 설령 그렇더라도 남송처럼 강남(중국)에서 세력을 유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명에 대한 친교를 저버리지 말고 청나라의 중원 파병 요구에 응하지 말라는 주장은 '주자학에 집착한 수구꼴통의 잘못된 현실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내다본 현실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청이 파병요청을 했을 때 이를 거부하며 올린 상소에도 명에 대한 사대나 재조지은 따위가 아니라 명이 중원을 회복하거나 강남에서 재기에 성공했을 경우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외교적 파탄에 이르게 되리라는 판단에 의거한 주장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그는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교묘하게 중립을 유지한 고려의 사례를 당대 조선의 상황에 빗대어 인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마냥 무식한 판단이라거나 생각없는 판단이 아닌게 만약 숭정제가 스스로 천도하거나 혹은 태자인 주자랑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미리 남경으로 보내 후일을 제대로 대비하게 해서 남명이 강남(중국)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하거나 원숭환을 처형시키지 않고 신하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거나 이자성의 난이 진압되기도전에 청이 쳐들어와 이자성군과 청군 양쪽을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이 닥치지 않았더라면 김상헌의 판단은 들어맞았을 것이고. 먼 훗날에라도 삼번의 난이 터지거나 청나라가 러시아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했을때를 노려 다시 대륙을 되찾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그 예측이 기가 막힐 정도의 억까가 겹쳐서 틀린 바람에 그의 현실적 판단이 '비현실적인 판단'으로 비난받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애초에 명에 대한 사대보다는 자국을 우선시한 사람이었다. 성종의 기일과 명 숭정제의 생일이 겹쳐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느냐는 주장에 대해 대다수의 유림들은 재조지은을 내세워 숭정제의 생일을 지낼 것을 주장한 반면, 김상헌은 성종의 기일이 더 중요하다며 성종의 기일을 지낼 것을 주장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서 나오며 청나라에 화친을 청하는 과정에서도 칭신, 즉 군신관계를 청하느냐 칭제, 즉 청이 천자임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로 논쟁을 벌였을 뿐 화친 자체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만약 대중들의 비난 대로 김상헌이 사대주의자라면, 이런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헌의 행동이 '춘추대의의 수호'이니 하는 식으로 크게 미화되고 칭송받으며 사대주의의 대표격이 되어버린 것은 송시열의 탓이 크다. 송시열은 김상헌의 생애를 정리하는 등 그에 대해 알고 있었고, 아마 그의 행동이 주자학적 사대주의의 발로로서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주자학적 화이론 강조와 반청의식 고양의 측면에서 '일부러' 김상헌의 행동을 화이론적 춘추대의의 화신으로 치켜올리는 등 그의 행동을 왜곡했다. 이렇게 김상헌은 본인이 원하지도 않게 졸지에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해 현실을 거부한 수구꼴통이 되어버렸다.
출처: 우경섭, 청음 김상헌의 현실 인식과 척화론, 한국사상사학, 2019
4. 여담
김상헌은 서인 노론의 집권 이후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남아 조선 말기까지 존경받았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에서도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찢지는 못할 망정..."이라고 나올 정도. 다만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갔는데, 양손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가 되었고,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 소론의 영수가 된지라 대를 건너 두 집안의 대립구도가 다시 나타났다. 어쨌든 이렇게 들인 양자로부터 이어진 김상헌의 종가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존경받으며 번창하여 순조 시절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독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김상헌의 후손들이 바로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상징인 신 안동 김씨들이다. 정확히는 서울 출신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그중에서도 장동 김씨의 일파이다.
김상헌의 봉사손 중 김건순은 노론 최고의 명문가 자손임에도 천주학에 심취하고 영세를 받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노론 명문가의 엄한 가풍 때문에 남인 천주교인들을 만나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했지만,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면서 영세를 받고 초기 조선 천주교계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호방하고 학식이 깊었으며 원래는 주문모 신부에게 서양의 기술을 배워 장차 병자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 할 정도로 평판도 좋고 성리학에 충실한 인물이었으나, 천주교에 입교하여 생가 부친과 형제들에게 큰 염려를 샀다. 이런 내력은 정조 때부터 알게 모르게 알려져 있었지만 정조가 사화를 크게 일으키기 부담스러워하여 덮어주곤 했는데, 결국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의 처형과 엮여 순교하고 종손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여기에는 김상헌의 묘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큰형 김상용을 비롯한 김상헌 집안의 조상들도 함께 묻혀 있다.
그가 한성에 거주하던 시절 집터의 위치가 묘한데, 바로 10.26 사건이 일어났던 궁정동 안 가다.
1601년(선조 34년) 제주안무어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오현을 기리기 위한 제단인 오현단의 오현 중 1명이 바로 김상헌이다.
큰 형 김상용을 통해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인척 관계로 엮인다.
최명길과는 병자호란 당시 대립했으나, 청나라 옥중에서 화해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최명길과의 필담 중 일부.
양대의 교분을 다시 찾고
백년의 의심을 몽땅 푼다.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렸으니
의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겠네.
아침과 저녁이 바뀐다 해도
웃옷과 아래옷을 바꿔 입으랴.
권도는 현인도 잘못 쓸 수 있으나
정도는 뭇사람들 어기지 못하리.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급할수록 저울질은 신중히 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