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었으나 잇다른 호란을 겪었고,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2. 생애
2.1. 초기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도당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가 복위되어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던 심달원(沈達源)의 현손자로 선조 20년(1587)에 태어났다. 선조 시기 학자이자 작가였던 권필(權韠)의 문하생이기도 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벼슬 하나 없던 유생의 신분이었다.
2.2. 인조반정
광해군이 명-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고, 재위 5년(1613) 계축옥사로 조정 안팎이 뒤숭숭해졌다. 궁궐 증축 및 토목 공사가 잦고 매관매직 등 혼란이 발생하자 신경진,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등은 광해군의 패륜을 이유로 들며 반정을 일으켰는데, 당시 유생이었던 심기원 역시 동참하였다.
반정군은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내응해 궁궐 문을 열어준 덕에 궁궐 안으로 진입했다. 광해군은 반정군이 궁문을 부술 때 사다리로 담을 넘어 달아나 의관(醫官)이었던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가 결국 붙잡혔고 반정은 성공하였다.
직접 뛰어들어 반정군을 이끈 보상인지 몰라도 심기원은 정육품 형조좌랑(刑曹佐郞)에서 정오품 사헌부 지평(地坪), 정삼품 동부승지(同副承旨) 순으로 연달아 승진하다가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2.3. 이괄의 난 시기
인조 2년(1624)에 종이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괄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소천(昭川)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한교와 소천 현감 안사함(安士誠)에게 붙들려 압송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이 신경진 등과 짜고 흥안군을 국문하지도 않은 채 창덕궁 돈화문에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악수를 두었다. 원래 조선은 사형도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집행한다. 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왕족을 죽임은 심각한 월권행위였기에 인조의 눈 밖에 나서 돌아오자마자 하옥되었다. 다만 흥안군이 반역에 동참하려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던지라 사형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차기 국왕으로 옹립한 왕족을 임금의 허락 없이 멋대로 죽인 점은 전대 고려 시대에서 삼별초의 난 당시 승화후 왕온을 죽였던 홍다구와 같다.
2.4. 정묘호란 시기
이괄의 난의 여파가 대외적인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고 결국 인조 5년(1627) 후금의 군대가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감찰사(都檢察使)로 임명된 후 소현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을 간 뒤 분조를 도왔다. 이후 소를 보내 풍정연(豊呈宴) 및 왕이 정전(正殿)에 머무르는 것을 즉각 중단하고 분위사(奔慰使)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분조를 한 공을 인정받았는지 이듬해 인조 6년(1628)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윤을 거쳐, 인조 12년(1634)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2.5. 병자호란 시기
후금의 군대는 홍타이지의 지휘 하에 산해관 이북의 명나라 영토와 몽골 고원 일대를 장악하고는 마침내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인조 14년(1636) 음력 12월에 청의 군대가 침공하자 인조는 심기원을 수도를 방어하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한편, 도원수로서 서북쪽의 방어를 담당했던 김자점이 이끄는 군대는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해 청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청군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는 달리 수도 한양을 노렸기에 김자점의 군대를 우회해 진격했다. 인조는 본디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군이 신속하게 한양 외곽까지 진격해오자 하릴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김자점은 부랴부랴 남한산성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도르곤 등이 이끄는 청군과 마주쳐서 토산에서 전투를 벌여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난전으로 타격을 심하게 받아 양평(楊平)의 미원(迷原)에 주둔한 이후 호란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질 않았다. 그 사이 한양은 8일 만에 함락되었다. 김자점이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자 인조는 심기원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로 삼고 남쪽의 근왕군을 지휘하도록 했으나, 심기원은 직위가 무색하게도 남쪽 근왕군을 만나지도 못한 채 김자점이 군대를 주둔한 미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강원도에서 패배한 근왕군이 합류했으나, 인조가 김자점을 삭탈한 뒤 심기원을 임명한 게 아니라 그냥 도원수에 임명하였기에 한 군대에 도원수가 둘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는 김자점과 아직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반대하는 심기원의 의견이 충돌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군대는 이도 저도 못한 채 도원수들이 방침을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남한산성은 원래 피난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이 조정을 이끌고 장기간 버틸 만한 식량 등이 없었고 겨울의 혹한은 매서웠다. 그런 열약한 상황에서 각 지역의 근왕군들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청군의 포위를 뚫지 못했고, 정예군은 지휘관이 2명인 채로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강화도까지 손쉽게 함락되자 결국 인조와 대신들은 견디지 못하고 성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니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인조 15년(1637) 음력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고작 한 달 20여 일 만이었다.
심기원은 수도를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양을 지키지 못했고, 제도도원수로 임명했으나 지휘권 혼란으로 아무것도 못했기에 불신을 받았는지 한동안 중용되지 못하였다.
2.6. 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끝나고 3년이 지나 인조 18년(1640) 호위대장으로서 다시금 기용되었다가 남한산성의 수어사(守禦使)가 되었고 정2품 병조판서와 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인조 20년(1642)에 우의정, 21년(1643)에 좌의정이 되었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좌의정이 된 해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인조 22년(1644)에는 그간의 경력 덕분인지 심기원이 좌의정을 유지하면서 남한산성의 수어사를 겸임하는 파격적인 인사조치가 단행되었다. 조정의 높은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남한산성의 군사력까지 쥐자 슬슬 딴 마음을 먹었는지 장사들을 차출해 호위대를 결성했고 예전 지사(知事)였던 이일원(李一元), 남한산성의 행정권을 쥔 광주부윤 권억(權澺) 등과 모의했다.
이들은 인조의 측근인 장수 및 대신들을 초청해 술에 취하게 한 뒤 모두 죽여 인조의 정치적인 팔과 다리를 끊어내어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본래는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계획을 수정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 했는데, 수하 중에 황헌(黃瀗),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이었던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하여 탄로가 나버렸다.
그 즉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죄를 자복한 뒤 참수되었다. 반역죄로 처형된 만큼 심기원의 시신은 팔방에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지만 심기원의 가족들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인조는 심기원을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심기원에게 크게 실망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이 역모 사건에는 임경업도 얽혀서 심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인조가 의도적으로 죽인 건 아니고, '심기원이 먼저 일을 일으킨 뒤에 따로 임경업을 포섭하려 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임경업의 혐의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던 도중 임경업이 고신(拷訊)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심기원의 처형 명령이 떨어지자 김자점이 직접 감형도사(監刑都事)를 부른 다음 "역적은 목을 먼저 벤다음 사지를 베는 것이 전례이나, 이 자는 매우 흉참한자이므로 팔다리를 벤다음 목을 베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다. 이를 들은 이시백은 “역적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차례는 저절로 조상의 옛법이 있는데, 새로 시작하여 이렇게 하고도 그가 세상을 잘 마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더니 과연 흉하게 죽었다고 전한다. 아래 야사는 이러한 이시백의 이야기가 와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의 야사집인 《청성잡기》에는 김자점이 능지형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여 산 채로 사지가 토막난 후 죽었으며, 심기원은 "김자점도 나와 똑같이 죽을 것"이라며 저주했고 결국 김자점 역시 김자점의 난으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 후 능지형이 폐지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김자점이 따로 집행담당관을 불러 개인적으로 지시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심기원의 사형 방식에 대해 논쟁이 오가느라 사형이 지연되긴 했는데, 공신이자 대신의 체통을 지켜 비공개로 사약을 내릴지, 아니면 공개처형할지 조율 중이었기 때문에 능지형이나 거열형 같은 형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김자점 역시 능지형이나 거열형을 받은 적이 없다. 심기원은 결국 공개처형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어느새 능지형으로 둔갑되어 세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업보나 인과응보에 대한 내용이 많으며, 이 이야기도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와 유사한 종류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심기원의 동생 수원부사 심기주(沈器周)는 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역모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등창에 걸려 죽었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심기원에게 연좌된 무리들은 모두 절도(絶島)로 귀양보냈으나 평소 심기주의 행실을 잘 알고 있던 인조는 반역에 참가하지 않은 심기주를 기특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심기주의 아들만은 섬이 아닌 육지에 유배 보냈다고 한다.